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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22. 사순대재 수일. 재의 수요일. 유낙준주교.
2-2. 요셉, 하갈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 내려갔다. 그를 끌고 내려 온 이스마엘 사람에게서 파라오의 한 신하인 경호대장 이집트 사람 보디발이 그를 샀다(창세 39:1). 그러나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이집트 사람 주인집의 한 식구처럼 되었다(창세 39:2).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알앗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되게 해 주셨던 것이다(창세 39:3).”
아브라함은 종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먼저 낳고 14년 후에 본처인 사라가 이사악을 낳았습니다. 이사악은 리브가에서 에사오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은 12아들을 낳았고 여기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됩니다. 야곱은 시력이 약한 레아에서 르우벤, 시몬, 레위, 유다(4), 이싸갈, 즈불룬, 딸 디나를 낳고, 라헬의 종 빌하에서 단과 납달리, 레아의 종 질바에서 가드과 아셀을 낳고, 사랑하는 레아에게서 요셉과 베냐민을 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창세기 전체가 50장인데 그중 29장에서 50장의 21개의 장에서 요셉이야기를 다룹니다.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요셉을 통해 형제들을 살리는 역할을 요셉이 행하게 됩니다.
요셉의 삶은 첫째, 스스로 이동한 삶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동기간인 이스마엘으로 인해 강제로 이동한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런 비참하고 실패한 인생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형들에 의해서 돈 주고 팔린 비참한 요셉이 된 것입니다. 돈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비참한 우리 사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은 비참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평생 웅크리고 산다면 하느님이 왜 계시겠습니까? 요셉같은 버림받은 사람을 돌보시고자 하느님이 계신 것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은 가족들에게서 버림을 받았더라도 오히려 가족들을 살리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요셉은 둘째, 하느님이 돌보아 주셨기에 앞길이 열린 사람입니다. 지금 앞길이 막혔다고 생각한다면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 하느님께 울부짖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게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느님이 돌봐주셔서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요셉은 셋째, 자신이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는다는 것을 상사가 자동적으로 알게 만드시는 하느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면 서운하잖습니까? 상사는 자신이 부하들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도록 만드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의 손이 하는 일들은 하느님이 잘 되게 해 주시니까요. 우리집에서 엄마가 손을 대면 뭔가 잘 되는 것처럼요. 하느님의 사람의 손이 대는 일마다 잘 되게 하시거든요. 우리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게 하려고 대전교구를 세우신 것입니다.
요셉은 넷째, 상사가 요셉을 보면 기뻤습니다. 부하가 하는 일이 기쁘고 부하와 함께 있는 것이 기쁜 상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하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이 리더들은 늘 합니다. 리더는 많은 일들이 밀려오니까요. 경호대장은 왕의 신변을 책임지기에 왕 자신이 전부를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경호대장도 자신의 전부를 요셉에게 맡기게 됩니다. 사람에게 내맡김이 뭔지 아는 사람이 자신을 내맡기게 됩니다. 사랑을 경험한 이가 사랑을 충만하게 하는 것처럼요. 저는 사랑하면서 사랑을 확대해가는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에토스 Ethos는 습관이란 뜻으로 후천적으로 배우는 반복적인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배우게 하여 저 너머의 삶이 자신에게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다섯째, 자신이 머무는 집에 하느님이 복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손이 닿으면 하느님의 돌보심을 받는 사람은 하는 일에 복을 넘치게 하고 그에게 호감을 갖는 사람에게 복을 주고 그가 머무는 집과 밭과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은 복을 부어 주십니다.
시력조차 좋지 못한 레아는 비교우위에 있는 라헬로 인하여 야곱의 사랑을 간절히 갈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아신 하느님은 6명의 아들과 딸까지 주셨습니다. 정작 본처인 자신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으니 야곱 남편까지 하느님이 태를 닫았다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창세30:2). 그리하여 여종을 남편의 잠자리에 들게 하는 라헬입니다. 결국 라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태를 열어 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셨다(창세30:23). God has taken away my disgrace by giving me a son.”면서 라헬은 요셉이라 불렀습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끄러움과 불명예와 수치스러움과 망신당할 일을 치워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남들이 보는 외모나 자격이 출충하면 늘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이 잘 났다는 탁월함으로 자신을 높이며 산 우리의 경험을 보게 합니다. 대개 그런 시간에는 하느님을 간절하게 부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네 여성 중에 가장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가장 늦게 자녀를 지니게 됩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을 때까지 태를 열어 주시지 않는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을 뵈오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망신당할 일을 치워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름을 요셉이라 짖게 됩니다. 요셉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느님을 찾은 간절함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바닥이라 떨어질 수 없는 처절한 상황일 때, 사방이 막혀서 앞길이 열리지 않을 때가 인생길에서는 종종 나타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더 높아지고 싶은 욕구, 사랑을 더 받고 싶은 욕구로 인하여 남들을 무시하고 홀대하고 하대하고 경어로 예절을 갖추지 않는 지잘났다고 하여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간에는 하느님을 뵐 수 없는데도요. 우리의 간절함이 없는 나대는 모습에 하느님은 얼마나 답답해하실까요? 하느님을 간절히 부를 때만이 요셉을 낳게 한 라헬의 경험에서 우리의 간절함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기를 빕니다.
사라가 임신하지 못하자 이집트 여종 하갈을 남편 아브라함에게 소실로 하여 임신하게 하자 소실이 안주인 사라를 업신여기게 됩니다. 사라는 주인의 허락하에 하갈을 박대하자 도망하여 수르광야의 샘터(나를 보신 살아계신 분의 우물; 라하이 로이)에서 천사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래의 종 하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창세 16:8) Hargar, slave of Sarai, Where have you come from and where are you going?” “주인 곁으로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창세 16:9). Go back to her and be her slave.” 아브라함의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습니다(BC1932). 아브람과 함께 이스마엘이 13세때 할례를 받고(창세 17:26) 이스마엘이 14세때(아브라함 100세) 사라가 이사악을 낳았습니다(창세 21:5). 이사악이 젖을 뗄 때가 5세이니 이스마엘이 18세 될 때에 상속권으로 학대하니 아브라함이 하갈을 나가게 해 브엘세바 빈들을 헤매게 되었습니다(창세 21:14. BC 1913).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 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창세 15:13).” 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아브라함입니다. 결국 BC 1513년에 이집트로부터 탈출하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미술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의 제목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였습니다. 비참한 상황일수록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정확하게 질문하고 이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폴 고갱(프랑스화가. 1848-1903)은 이 제목으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따는 여성을 그렸습니다.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나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내 백성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 2023년 세계성공회 USPG의 선교표어입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출애 3:7).” 이에 근거하여 식민지배시에 있었던 비인간적인 차별과 그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최근에 카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원주민에 대한 강제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저스틴 웰비대주교이셨습니다. 과거에 억압해서 죄송하다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원주민을 양육하지 못하게 하여 기숙학교에서 억압적으로 교육한 것에 대해서도 용서를 청했습니다. 성공회는 그렇게 인간의 질을 한층 높여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 것입니다. 이어서 인신매매를 반대하는 교회의 소명을 제시하였습니다(2023.1.30.- 2.2. 탄자니아에서 USP총회). 이집트의 여종 하갈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노동의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어서 아이를 안아 일으켜 주어라.’고 하십니다(창세 21:17).” 예수께서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성령을 허락하신 하느님은 우리가 인신매매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유년기 파괴, 기후변화로 인한 고통과 정치경제적 위협으로부터의 비인간적인 삶을 멈추게 하라는 활동에 참여하여 안전한 교회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가 어디에 머무를지도 알게 해 줍니다. 이를테면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서 습관적으로 외면한 그 사람들을 드러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숙련공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비숙련공의 일로 우리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무시돼 왔던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무진장 좋아하는 시몬느베이유(1909-1943.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며,” “철학강의” 저자)는 “자기를 낮추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중력을 거스르는 것으로 사랑은 밑으로 내려가게 한다.”고 하고 “가장 인간적인 가치는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사는 문명이다.”고 하면서 철학교사가 공장에 2년간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는 한 여성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평화주의자 도로시 데이(1897-1980)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그렇게 사랑과 희생을 바친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피터모린수사가 그의 영적지도자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리고 장영희는 1952년 생으로 소아마비로 하반신 마비가 된 장애인이라 하여 대학입학이 허용이 안 되었을 때 서강대학만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 대전교구가 새로움을 허락해 주는 교회이기를 빕니다.
네덜란드의 톤 텔레헨의 “나의 바람”이라는 책에 “나는 용기가 더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겐 아주 조금밖에 업거든요. 용기를 살 수 있다면 가진 돈 전부를 쓸 수도 있어요. 내게 가장 소중한 재산이 될 거예요. 평범한 용기. 영웅적이거나 무모하지 않은 용기. 그럼 나는 덤으로 행복도 얻게 될 거예요.”
“자신이 해야 한다면 세상을 구하고 싶어요. 하지만 세상을 구하는게 너무 어려워요.” “잘 모르는 인생이지만 인생이 뭔지는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또한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에 들어가 살고 싶어집니다. “유 세이 You Say”는 로렌 다이글 가수가 부르는 노래인데 “스스로 불완전하고 평균값도 안되게 사는 나가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자신에게 사랑받고 있고, 약한데 강하다고 하고, 소속감이 없는데 자신에게 기대라고 하시는 하느님을 이제 믿는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작은 폭동 Tiny Riot와 More(Sam Ryder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으로 외치는 소리로 위로를 줍니다. 그렇게 남에게 힘을 부여하는 노래를 많이 들려주는 우리의 삶이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지금을 산다면 그러한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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