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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밤이 깊으면 별빛은 더욱 선명해 집니다/대상 13:9-14
성경본문 역대상 13:9-14
9.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12.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 메어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14.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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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새마을 이장을 하시던 농부가 정부로부터 모범 이장으로 선발되어 포상으로 부부가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답니다. 생전 처음으로 호텔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더워서 몸을 씻는다고 욕실에 들어갔답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아내가 나오지 않아 갑자기 너무 좋은 곳에 오니 고혈압으로 쓰러졌는가 하여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답니다.
문을 열어 보니 아내가 수세식 변기에 버튼을 눌러 바가지로 변기통 안에 있는 물을 퍼 올리고 있었답니다.
수세식 화장실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이장 부인이 물을 찾다 보니 변기에 물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퍼 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유 뭔 놈의 호텔이 물이 안나와유!!!” “눌러서 받으려 하면 기어 들어가고 눌러서 받으려 하면 기어들어 가유 !! ”
이 때 새마을 이장이 말했습니다.
“어메 무식한 애팬네, 여기는 호텔이여 그렇게 하는 거 아녀!! 나하는 거 잘 봐 ”하면서 아침마다 새마을 방송하듯이 욕조에 달린 샤워기를 입에 갔다대더니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아! 아!” 큰소리로 “물 좀 줘유~~~!!! 물 좀 줘유~~~~!!!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핸들에 나와 있는 스위치를 입 가까이에 대고 꽉 누르며 ”물 좀 줘유!!!“라고 했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처음해보면 방법을 잘 몰라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외국 여행하면서 낯선 곳에서 말도 통하지 않고 각종 도구들의 사용방법을 몰라 어려움을 겪은 성도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파키스탄에 갔을 때 많은 음식이 있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아 같은 음식만 반복해서 시켜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은 그래도 괜찮은 데 중요한 것인데도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하면 큰 낭패를 봅니다. 기계를 돌리는데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잘 못 연결하면 비싼 기계 한 순간에 타버려 망가집니다.
산전 수전을 다 겪은 다윗왕이었지만 중요한 일에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여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나라가 든든해지자 70년 동안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 준비를 하였습니다. 다윗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해 보는 일입니다. 그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을 하였습니다(1).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백성들을 소집하고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2-3).
백성들을 좋아했습니다. 백성들의 의견만 물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허락해 주신다면(2)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4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면서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습니다(3). 그래서 자신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법궤를 모셔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 광야 생활할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었던 법궤, 요단강을 건널 때 맨 앞에 메고 갈 때 요단강을 갈랐던 법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들에 메고 걸어던 법궤, 아론의 삯난 지팡이와 십계명, 맛나가 들어 있는 법궤가 다윗성으로 돌아온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감격적이고 기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분단 60년이 되었는데 내일부터 남북이 통일되어 자유롭게 북한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자신의 아들 딸을 결혼시키는 것보다 더 기뻤을 것입니다. 아마 밤잠을 자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성대하게 모셔 오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 중에 “법궤 운반 위원회” 위원 3만 명을 백성 중에 뽑아 구성하였습니다(삼하6:1).
국가적인 대사이기 때문에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대대적으로 환영하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당시 전국을 일컷는 상용어)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 있는 법궤를 메어 오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반드시 레위 지파 중에 고핫 자손이 메어 운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를 메는 사람과 법궤를 옮기는 방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 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어기는 것은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로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면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법궤를 메어 올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다윗은 막상 법궤를 운반할 때는 처음 계획한 대로하지 않았습니다. 소 두 마리가 끄는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던 방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것을 망각하고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마 수레를 최고급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최고급 캐딜락을 준비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초라한 목동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니는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한 손에 쥔 최고의 통치자이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부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멋지고 호화로운 법궤 운반식을 거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법궤를 통하여 정치적 통치권 뿐 아니라 종교적 통치권도 확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평사원으로 일하다가 어느날 사장이 되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엑셀을 버려 버리고 BMW을 타야 자신에게 걸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심리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집을 바꾸어 주고 자식들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 줄 수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출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신분이 높으면 초라한 개척교회가 아니라 화려한 교회, 자신의 신분에 맞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생각과 같을 것입니다.
어느새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에서 사고가 자기 중심,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잘 못되면 속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잠깐 잊은 것입니다.
잘못된 열심은 차라리 열심을 내지 않은 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을 깨닫기에는 주변환경이 너무 화려해져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연약한 인간의 진실을 보는 것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는 사람도 없었고 다윗은 처음부터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이견을 참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위치에 오르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실을 보는 눈이, 자기 정직을 지키는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새수레를 휘황찬란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한다는 미명 하에 왕으로서 품위를 자랑할 만하게 값진 재료로 호화롭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헌신을 빙자하여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방법이 잘 못되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대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그 수레를 끌고 가서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7).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의 주악이 울려 퍼졌습니다. 국가 최고의 행사로 팡파르가 울려 퍼졌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며 노래하였습니다. 잘못된 방법이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심각한 질병의 뿌리가 몸에서 자라고 있는데 겉모습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승진하였고 집안도 잘되고 먹고 자는 것이 문제없이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황홀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빨리 잘못된 방법을 바꾸고 화가 임하기 전에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데 절별을 행해 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폭약을 메고 불 속에 뛰어 드는 것입니다. 불나비처럼 화려한 불을 보며 질주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불을 보고 질주합니다. 명예라는 불을 보고 질주합니다. 권력이라는 불을 보고 질주합니다.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잘 못된 방법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니 일을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찬란한 관현악에 놀랬는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9).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이 갑자기 쓰러진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니 불치의 병이라고 선고하는 것입니다. 잘되던 회사가 갑자기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합니다. 잘 되리라고 기대했는데 갑자가 폭우가 내리는 것입니다. 법궤가 떨어지려고 한 것입니다. 법궤가 떨어지면 이 축제의 날 얼마나 큰 낭패이겠습니까?
소를 몰던 다급해진 웃사가 손을 펴서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축제의 날 찬물을 퍼붓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비나답의 아들(손자나 증손자의 가능성 있음) 웃사가 즉사해 버렸습니다.
70년 만에 법궤를 옮기는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이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돌려 보낼 때(삼상6:21)부터 약 70년 간 자신의 집에 모셔 있었습니다. 에벤에셀의 승리 때까지 20년, 사울 통치하에 40년, 다윗 통치하의 1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오랫동안 법궤가 모셔져 있었다는 이유로 웃사와 야효는 법궤를 옮기는 주인공으로 뽑혔을 것입니다.
수많은 백성 앞에 법궤를 모시는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 날 법궤를 옮기는 책임자로 뽑혔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날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웃사는 민수기 4:15절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는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범하는 불경건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11절에 보십시오. 성경은 이 사건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웃사와 충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사는 마지막 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거룩성을 해치는 선을 넘어 하나님께 돌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여 남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충돌하면 인간의 축제는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충돌하면 말 못하는 짐승도 뜁니다.
하나님과 충돌하면 헤롯도 충이 먹어 죽습니다.
하나님과 충돌하면 바로의 군대도 홍해에서 수장됩니다.
하나님이 충돌하면 바벨탑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이 충돌하면 곡간에 재물을 쌓고 먹고 즐기자던 어리석은 부자가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충돌하면 영원할 것 같은 이 세상도 끝이 납니다.
하나님과 충돌하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래 동안 익숙하니까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존귀한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의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하나님의 보호자로 하나님을 책임지는 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을(민4:15)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연약하고 무능한 분이 아닙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잘못된 시작은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며칠 전 8명의 사망자와 12명의 부상자를 낸 고시원 방화 사건을 보십시오. 내연녀를 두고 변심했다고
술먹고 불질러 결국 그런 참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계속적으로 술을 마시면 결국 위험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호하고 내가 교회를 이루구 내가 가족을 책임지고 내가 무엇을 이룬다는 교만한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참변을 당하였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여기서 분했다는 것은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라는 뜻으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킵니다.
자신의 예배를 받아 주지 않은 가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내가 멋지게 법궤를 모셔 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왜 하나님 웃사를 충돌하여 사망시켰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레스웃사”라 하였습니다. '웃사를 치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그럴 수 있냐는 것입니다.
서운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 했는데 대접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정치적 성공이 모든 영역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교회에서도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는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께 물어 보지도 않고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도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군사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만 의견을 물었습니다.
인본주의적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법궤를 운반하지도 않았습니다.
군사 정치적 지배를 가진 후 종교적 행사를 통해 자신의 지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그릇된 동기가 있는 것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시골 목동이었던 그를 들어 골리앗을 치게 하고 왕을 시켜 주신 분이 하나님인데도 왕이 되자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하는데 대접을 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를 내가 세워가는데 왜 교회에서 대접을 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내가 하는데 왜 나를 서운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의 중직인데 왜 나하고 상의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갖은 자가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받은 자가, 맡은 자가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세우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목동이었던 다윗, 도망자였던 다윗 하나님이 보호해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주어 왕으로 세워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 없는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작아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커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면 갈수록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세우고 내가 기업을 일으키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대단한 것을 하고 있다는 영적 교만은 결국 대접을 받고자 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면 서운함과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부자되고 출세하고 명예를 얻겠다는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늘 서운해하고 분노하고 진정한 기쁨과 신앙의 순수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입니다.
법궤를 이용하여 무엇인가 해 보겠다는 미신적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법궤를 이용해 전쟁에 승리하겠다고 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2:12).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면 복을 받을 줄 알았던 블레셋 족속은 독종의 재앙을 만났습니다(삼상 6:3~4).
법궤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방편으로 오해해 법궤만 있으면 승리할 것이라(삼상4:3)는 잘못된 신앙은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맙니다.
다윗은 그의 잘못된 방법으로 이런 징계를 당한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무조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원인을 규명하여 처방하면 됩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궤 모셔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존심 상한다고 교회일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고 않고 결국 오는 것은 상처뿐인데 교회 생활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포기합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을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왜 지느냐는 것입니다. 진정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끌고 다니며 달고 다니며 뭔가 해 보려했는데 잘 되지 않으니 그만 두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메어갔습니다. 에돔의 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핫의 후손들인 고라 족속에 속한 레위인입니다(출6:16).
그들의 선조 고라가 어떤 사람입니까?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되는 특권과 그들만이 존경을 받는 절대적 위치에 있는 것에 대해 질투와 시기로 가득차 반역했다가 염병으로 일만 사천칠백 명이나 죽었던 자들입니다(민 16:49) 반역을 한 후손들입니다.
가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출생지가 가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드가 어디입니까?
불레셋 5대 성읍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마 이름이 에돔의 종이라는 뜻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소외되고 냉대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법궤로 인하여 사람이 즉사한 마당에 누가 법궤를 모시려고 하겠습니까?
벧에돔은 기쁨으로 법궤를 영접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시각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했지만 그는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 것입니다.
즉사의 현장에서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적 용어로 하면 십자가를 지고자하는 고귀한 신앙이 생긴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남들이 다 하기 싫은 일을 자신이 한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오벧에돔 한 사람입니다.
편하고 이익되는 일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지만 어렵고 가치있는 일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 중에 12명이었고 그 중에 한 명은 배신하고 십자가를 질 때는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진정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길이 복받는 길입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알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밤이 깊을수록 더욱 반짝이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사건을 보고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메고 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도꼭지를 열면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뜻한 물도 나오고 차가운 물도 나옵니다.
변기 통에 있는 물을 퍼 올릴 필요없습니다.
그것 퍼 올리면 불평할 필요없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궤가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아무도 모시지 않는 법궤를 모시는 동안 그 가정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아무도 하기 싫은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14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통상적이 복이 아니라 특별한 복입니다. 법궤가 머문 이후부터 갑자기 받은 축복입니다. 우연한 복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 복이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 12절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소문난 복이었습니다. 그 복이 성경에 보면 세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소유의 복입니다. 물질과 재산의 복입니다.
여기서 '소유'란 가축이나 논밭의 소산을 말합니다. 농사도 잘되고 가축도 잘되어 번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출 25:22).
광야 생활에서 법궤를 통해서 인도를 받았으며(민 10:33), 법궤를 통해서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민 10:35).
요단 강이 갈라졌습니다(수 3:6).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수 6:12~13).
법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에 축복이 임합니다. 개인, 가정, 국가가 축복을 누립니다.
둘째가 고귀한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오벧에돔과 그 형제 육십팔 인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로 문지기를 삼았고"(대상 16:37~38)
다윗 왕은 오벧에돔을 법궤를 지키는 사람으로 임명하고 문지기 직분을 주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직무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당시 아주 귀한 직분입니다. 상류층 사람들만이 이 직책을 소유하고 성전을 경호하고 수비했습니다. 특히 오벧에돔은 남방 문을 수비했습니다. 이 남방 문은 왕만이 출입하는 문입니다. 좋은 직분을 맡은 것은 축복입니다.
셋째는 자손이 복을 받았습니다.
오벧에돔의 아들은 8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보십시오.
"오벧에돔의 아들들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셋째 요아와 넷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며 그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저희의 족속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 스마야의 아들들은 오드니와 르바엘과 오벳과 엘사밧이며 엘사밧의 형제 엘리후와 스마갸는 능력이 있는 자니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저희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대상 26:4~8)
그 아들 중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오고, 큰 용사가 나왔습니다.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 아들, 손자, 그 후손들이 6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번성하되 다 능력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시편 112편 1~2절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가정을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궤의 은혜가 그 가정에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1)”
사람들이 집을 세우려고 노력만 한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집을 세우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습니다(창 11 : 1-9).
성을 지키는 것도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셔야 밤새워 지키는 파수군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된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에 파수군이 없어 망한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지켜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업하는 일, 돈버는 일, 자식 키우는 일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을 깨닫은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없이는 살 수 없다고 밤을 새워가며 은혜에 대하여 갈망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 자기 힘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니까 그 돌맹이가 총알의 효과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임하는 순간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 집니다.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이 민족이 여기까지 온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기업이, 나의 가족이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쁨이 없고 순수함이 없습니까?
왜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것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까?
은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 사실을 깨닫고 법궤를 모셔옵니다.
그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체가 다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순수해집니다.
기쁨을 어쩔 줄 모릅니다.
법궤 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가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하나님의 특별 양식을 먹고 가나안으로 행군했다는 구원 은총을 기억나게 하는 기념물이었습니다(히 9:4).
둘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히 9:4).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세와 아론을 친히 세워 주셨다는 입증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입니다.(히 9:4)
이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기념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이 법궤를 따라 움직임으로 가나안을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신약시대에 나타나실 영원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생명의 만나요, 예수는 우리 부활이요, 예수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이란 말씀입니다.
오늘의 법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입니다.
시대가 어둡습니다.
전쟁의 소식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미사일 문제로 우리 나라의 미래가 예측 불허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수해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벧에돔처럼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웃사가 즉사하는 것을 보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본 것처럼 오늘의 암담한 현실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모시는 3개월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삶이 최고의 인생 가장 복받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앞세우고 갈 때 하나님께서 지키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 강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 때 철옹성같던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나사로의 가정이 복을 받았습니다.(요12:1-5)
죽은 자가 살아 납니다. 죽은 사업이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빌립보 간수 가정이 구원의 감격을 누렸습니다(행16:31-34)
초상집이 변하여 기쁨을 증거하는 집이 됩니다.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이 교회를 세우는 복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아도 가치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디모데의 가정이 신앙을 계승의 복을 받았습니다(딤후1:5). 그리스도를 모신 고넬료의 가정이 이방인으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행10:2)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복받은 사람으로 더욱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