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졸업생 김성색 님
35회 장선운 님이 경상일보에 기고한 글 중에서
김성색(金成色) 님은 요즘도 연양, 두서, 두동 등 울주군 서부 5개면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야당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913년 범서읍 지지마을에서 태어났던 그는 두동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1923년 건립된 두동초등학교의 경우 김씨가 입학할 때만 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전체 학생수가 48명에 불과했을 당시에, 초등학교 졸업 후 일본 야마나시(山利)현으로 가서
야마나시 현립중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2학년 때 학업을 그만 두고 수정주식회사에 들어가
보석 기술을 배우게 된다. 3년 뒤 이 회사를 나온 그는 혼자 한국과 일본을 드나들면서
금과 은 등 보석 장사를 했지만 큰 재미를 못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는 농촌계몽의 일환으로 야학을 열고 마을 청년들을 상대로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연극(신파연극)과 풍물을 가르쳐
부락민의 일체감 조성과 정서 함양에 이바지 했다.
특히 농악대가 중심이 된 풍물은 나중에 울산군 경연대회에서 입상까지 해
당시만 해도 작은 산골이었던 지지마을을 대외 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좌익의 표적이 돼 잠시 부산에서 살아야 했다.
해방 후 울산은 한동안 좌우익 대립으로 혼란이 심했는데
이 때 좌익들은 김씨 같은 지식인들을 사상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많이 괴롭혔다.
부산에 살 때는 서면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 했는데
두동 출신 최영근 의원(모교 7회 졸업생)과 친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라고 하는데
당시 최의원 역시 경남도의원으로 부산 서면에 살았다.
혼란이 가라앉은 뒤 다시 고향으로 왔던 그는 이런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1952년에는 초대 두동면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때 그의 먼 인척인 유말수씨도 함께 당선됐는데, 이후 둘은 4·19 후 두동면장 선거에서 경쟁을 벌이게 된다.
유말수씨는 성남동에서 유태일 약국을 경영하다가 나중에 울산 중구의회 의장을 지냈던
유태일(모교 37회, 모교 총동창회장 역임)의 부친이다.
4.19 무렵 추자마을로 이사 온 그는 이곳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민선 면장에 출마 했으나 낙선하였다.
유말수씨와는 한 마을에 살았고 친척 간이었는데도 그가 출마한 것은 정치적 소신이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마을 사람들은 보고 있다.
최영근 의원이 도의원 출마를 했을 때부터 야당 인사로 최 의원을 도왔던 그가
3·15 부정선 거에 항거한 것은 당연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4대 대선에서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데
이런 부정선거는 산골인 지지마을에서도 이뤄졌다.
자유당은 이 때 농촌 지서장과 이장들에게 지령을 내려 야당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연탄과 기름등 대체 연료가 없었기 때문에
농촌 사람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반 가정에서는 야산에서 나무를 한 두 짐 해 집에 쌓아놓고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선거철만 되면 정부의 지령을 받은 군청 직원과 순경들이 야당 인사들이 쌓아둔 땔감을 문제삼아
산림법 위반으로 몰았다. 그리고는 선거기간 내내 그들을 지서로 불러들여 선거운 동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농주도 트집을 잡았다. 당시 농촌에는 농주를 만들어 마시는 집이 적지 않았는데
야당 인사들의 경우 이 역시 집중 단속의 대상이 됐다.
그 역시 야당 인사로 지목되어 선거 때마다 이런 탄압을 받아 군청과 지서를 자주 드나들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야당 활동을 했다.
그가 외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야당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올곧은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정치인으로 그는 고집이 세었지만 평소에는 유머가 많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유머가 있었나 하는 것은 최형우 전 국회의원의 자서전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위해>에서도
소개되어 있다.
6대 총선에서 지구당 부위원장으로 최영근 의원 당선에 앞장 섰던 그는
8대 총선에서는 최형우 선거대책부위원장으로 최의원을 도왔는데,
신민당 중앙대의원 자격으로 서울 낙원동 낙원여관에 기거할 당시
울산에서 올라온 대의원들과의 잦은 회동자리에서 술판이 벌어질 때에도
평소 소탈한 성격에 농담을 잘했던 그는 항상 좌중을 이끌어갔다고 한다.
지지마을에서 멀지 않은 삼정 출신의 유학선 여사 사이에
진헌, 규헌 등 2남 외에도 딸 3명을 더 두었던 그는 1985년 92세로 영면했다.
※ 이 글은 경상일보 제 7888호(2016년 5월 16일 자 11면 )에 게재된 내용으로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이자 울주문화원 이사로서
울산 인물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신 장선운(두동초 35회, 4학년 경 타지로 전학감) 님께서
‘울주군 서부 5개면 지역에서 전설적인 야당 인물로 기억’ 이라는 타이틀로
김성색 님에 대해 기고하신 글 중 필요한 부분을 발췌• 편집한 내용이다.
첫댓글 자제 두분중 규헌 님은 26 회 김규헌 선배님이신듯 합니다.
26회 선배님은 아는 분이 많아요...
김경용,임기순,최무식,박병호,박상호,김규헌,이상계,
김대호,최정식,김영오,이을우,황봉춘 교장등
모두가 얼굴이 선 합니다.
저의 백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