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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차의 오글오글한 이야기 87
한결같이 선한 얼굴로, 아무 것도 모르 고 그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웃으며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중국인들에게, 막상 결정적인 일에서 뒤통수 맞는 한국 인들, 오늘날에도 많습니다.그토록 자국에 유리한 조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징 조약에 점점 불만을 느낀것은 오히려 영국이었습니다.
항구를 다섯 개나 개항했으나 웬일인지 교역량은 늘지 않았고, 중국 내륙으로의 진출은 철통같은 완전 봉쇄 상태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영국의 속셈은 중요한 항구 다섯 개를 강제 개항하면, 그 항구 기점으로 내륙으로 파고 들기는 쉽다라 는 것이었으나 중국인을 전혀 모르는 짓이었지요. 영국은 아편외에도 골칫 거리가 있었는데, 산업의 발달로 면제품 이 과잉 생산되어 영국의 항구마다 그 물량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습니다. 그 물량을 풀 곳은 중국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5개의 항구외엔 그 어떤 교역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국을 침범한 외국세력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은 거세어져서 크고 작은 충돌은 빈번히 일어났고 차의 수입도 원활하지 못 했습니다. 조약을 했음에도 중국은 여전히 흠차대신이 차의 교역을 주관했습니다.
문서에도 동등할 것을 조약은 명시하고 있었으나 중국은 한결같이 황제의 칙서라는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점점 다급해졌으나 다시 무력을 내세울 어떤 빌미도 없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타국을 강제로 침범하 는 이들은 항상 핑계를 찾아내고, 그런 기회를 찾던 영국에게 마침내 빌미가 생겼습니다. 역사에서 에로호 사건이 라고 불리우는 사건이 바로 제2차 아편 전쟁의 단초가 되고 맙니다.
에로호 사건을 분석해 보면 영국의 의도가 분명하게 짚어 집니다.
그래스턴은 아편 전쟁을,영국 역사상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말했습니 다. 지식인들은 스스로의 수치를 알았 으나 관료들과 상인들은 그야말로 중국 을 차지한 듯한 오만불손이 하늘을 뚫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 은 중국을 전혀 몰랐습니다. 침략해서 깃발만 꽂으면 되는 줄 알았고 중국을 인도 비스므리하게 보았습니다.
5개 항을 개항했으나 골칫거리인 면직 물의 수출은 전혀 늘지가 않았는데, 실은 중국의 수공업으로 생산되는 면의 질이 얼마나 좋은지 그들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수공업으로 생산하는데, 전혀 일손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죠.
중국의 인구는 그야말로 억!소리나게 많으니까요. 급기야 잘못된 개항을 했 다고 들고 일어나서 소주,항주의 개항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 니다. 영국이 더 열불 난 것은 난징 조 약에 분명히 동등한 국가의 외교라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영국을 오랑캐라고 표시하며 모든 문서를 중국 황제의 칙 서라고 건네 주니,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게 된 겁니다.
아편 무역도 합법화하기를 원했으나 그것 또한 노! 영국의 불만은 풍선 불듯이 커져 갔는데 때마침 에로호 사건이 터진 겁니다. 영국으로선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 되었으나, 사실을 자세히 알아보면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1856년 10월 8일에 발생한 에로호 사건을 차근차근 짚어 보겠습니다.
먼저 이 작은 배는 주인이 자그마치 셋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유권은 중국인 에게 있었고 선적은 홍콩, 선장은 영국 인 이었습니다. 에로호는 광주 앞의 주강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중국 관헌들 이 들이닥쳐 중국인 선원 12명을 해적 혐의로 체포한 겁니다. 영국은 조약을 위배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으나, 따져 봅시다. 배가 중국인 소유이고 중국인 선원들만 데려 갔기에 중국은 조약을 위반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영국 영사 는 승무원을 즉각 송환하고 배에 걸려 있던 영국 국기를 훼손한 것에 대한 공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에로호엔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소유주가 중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영국은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중국 관헌들이 영국 국기를 훼손 했음을 알리기에 급급합니다.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고 싶은 꼼수를 감추고 마구 억지 를 부린 겁니다. 중국은 일단 선원들을 영사관으로 모두 보냈는데 영국이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중국이 더 강경하게 나가기를 바랐으나 중국은 너무나 빠르게 선원들을 돌려 보냈고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되게 생겼으니 어쩝니까? 다음날 영국은 안면몰수! 불문곡직 광주를 공격하고 총독 관저를 접수한 뒤, 광주 총독 섭명침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는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 하고 인도 켈커타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무리수를 둔, 가장 큰 이유는 서양 열강 중에서도 반영 감정이 날로 높아 지는 것에서 기인한 것도 있습니다.
조약에 의해 홍콩은 영국령이 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신사의 나라 영국은 참으로 비신사적인 짓들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습니다. 영국인 한 사람 이 중국인들에게 잡혀 목이 잘린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은 그 마을을 그대로 불 질러 버렸습니다. 원주민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타서 재가 될 때까지 그들은 지켜 보았습니다. 홍콩의 어느 빵 가게에서, 중국인이 판매하는 빵에서 비소가 검출된 일이 있었는데 영국은 약 칠 만여명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홍콩에 서 그들을 쫒아 내었습니다.
참으로 신사적이지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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