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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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의 <물방울의 밑그림>에서.
휘파람
골목에서 신사가 내려온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에 울퉁불퉁한 바람이 불고
칼주름이 잡힌 바지,
목때가 적은 와이셔츠,
촌스럽지만 여전히 빛이 나는 넥타이,
구멍 하나 없는 도톰한 양말,
소매가 얇게 낡은 코트,
자신의 옷 중에서 가장 새 옷을 입은
신사의 환한 주름살이,
골목을 내려간다.
코트 주머니엔 장식 없는 집열쇠 두 개
나머지 한쪽엔 마지막 코트를 입었을 적에 태운
담배꽁초 하나, 손에 만져지는 순간
담배를 피울 때마다 말리던 연상 애인의
즐거운 웃음이 메어오고
조금 부패된 헤어왁스를 바른 머리카락이
초겨울 쓸쓸한 골목 바람에 어색하게 날린다.
골목길 아래 펼쳐진 다닥다닥 알록달록 그만그만하게
서로 이마를 맞부비고 있는, 넘치는 지붕의 풍광 같은
누군가 초대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깨진 보도블록을 피해 떨어지는 햇살에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올려 메고 중년의 애착이 담긴 곡조가 없는 휘파람을 부른다.
남자의 눈썹엔 희미한 음표들이 내려앉고
코트 안주머니 수첩엔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헤어진 애인의 사진이 바래어가고
음식점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얇은 코트 속으로 배어들어오는
저 불빛들 밑 간판 사이로 걸음을 재촉한다.
오늘도 맨밥에 목이 메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초대한 백반의 저녁 식사.
독음獨吟
목련꽃이 피어 있는
담장 밑에서
엎어질 듯 앉아서
한 남자가 취해서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튕기고 있다
엽맥까지 이슬을 머금은
봄밤의 핫핫한 단내를 뒤지다
쓰레기통을 가로질러
담장을 넘어
잽싸게 목련꽃 속으로 사라지는
잿빛 고양이
달 아래서
줄 떨어진 기타를
뜯듯 튕겨내며
술의 첫 이슬로 거슬러가는
한 남자의 음音
집 안의 창문들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새벽
쓸쓸한 손이 땅에
독음獨淫처럼 고독하게
곯아떨어져 있다
벙그는 목련꽃 송이 몇
쓰레기통 옆에 떨어져 있다
몽고반점
세상의 가장 부드러운 엉덩이
깊다란 슬픔을 더듬어
내려온 저 빛은.
창의 거기에
목숨이 짧은
푸른 눈의 잠자리가 떨고 있다.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가장 낮은 굴에 내려와
비밀 한 자락을
슬쩍 내비치고 사라지는
정의 빛은.
추운 대양을 건너와
사막에서 여름을 나는 마젤란펭귄처럼
짧은 날개를 겨드랑이에 붙이고
그는 지금 관목숲에 번지는,
해를 바라보는 중이다.
하루에 한 번 빛이 드는 창
빛을 기다리며 그는 순결해진다.
실핏줄이 가시지 않은
어린 꽃잎처럼
잠시만 투명한 빛이 머무는
정오의 지하방
모든 자연의 의식 속에서
가장 무죄한 저 멍자국,
하느님이 가난한 자의 창에
하루에 단 한 번 불어넣는 숨결이다.
푸른 눈의 잠자리가 거기,
아직 눈부시게 떨고 있다.
밤 시장
텅 빈 시장을 밝히는 불빛들 속에서
한 여자가 물건을 사들고 집으로 간다.
집에 불빛이 켜 있지 않다면
삶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밤 시장,
얼마나 뜨거운 단어인가!
빈 의자들은 불빛을 받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빈 의자들은 깜빡거리며 꿈을 꾼다.
밤 시장을 걷다 보면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가장 쓸쓸한, 뜨거운 빈 의자들과 만난다.
텅 빈 상점 안을 혼자 밝히고 있는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집을 향해 오는 이를 위해
불꽃이고 싶다.
삭힐 수만 있다면 인생의 식탁을
풀처럼 연한
그런 불꽃으로 차리련다.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읽는 저녁
목소리를 받은 한,
나머지는 모두 빼앗겨야만 하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와
시인인 우리는 최하류 난민이라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와
몽상의 짐을 날라주고 날라주는
짐 싣는 노새! 책상에 앉아 창가의
나뭇잎 하나가, 잊혀진 채,
아직 저 꼭대기에 남아 있다고 노래하는
마리나 츠베타예바와
저녁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책을 덮고
겨울, 창가에 쌓인 눈발에
서리가 빛나는 것을 보고
골목에 나와
그녀가 보았던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온 고양이를 팔뚝에 앉히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
하나 남은 빛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 2009년 제2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2009.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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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시인의 대상 수상작 14편 중 6편을 옮겼습니다.
(이재무, 송재학, 장석남, 권혁웅, 김선우 시인이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