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 면 장군 재조명5회
>> . 경상우도의 중요성
6.21. 고령신문 5회 도착 (24일자)



글 싣는 순서
1회. 김면의 생애와 의병활동을 하게 된 동기
2회. 김면 장군의 의병활동 지역을 되짚어보다
3회. 김면은 성리학자로서 문무를 겸비하다.
4회. 김면 장군이 의병활동으로 승화시킨 최후의 1년
5회. 경상우도의 중요성
6회. 김면 장군의 유적지로 찾아가다
>> 경상우도의 중요성
전쟁에서 요충지의 점령은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였다.
임진왜란의 승패를 좌우한 요충은 경상우도와 남해안지역이었다.
남해안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지켰으며, 경상우도는 주요 의병장들과 일부의 관군이 지역을 사수하는데 진력하였다.
전쟁사적으로 경상우도는 임진왜란 전 기간을 통하여 일본군의 최초 침입자이자 후방의 보급기지로서 일본군에게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경상우도는 일본군의 연락과 보급망을 차단하고 회복의 근거지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경상우도가 중요했던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우도의 요충에서 전개되었던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지연·방어시킨 점이다.
이에 왕조에서는 경상우도는 초유사(招諭使)를 파견하여 의병을 창의시키고 관군과 의병의 상충된 입장을 조정하게 했다.
>>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있을 수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그만이다”
김성일(金誠一)은 진주는 경상우도의 방어거점이며, 곡창 호남을 지키기 위한 요충으로 파악했으며, 나아가 김성일은 “진주는 호남의 보장(保障)이므로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있을 수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는 그만”이라는 적극적인 인식을 보였다.
또 의병장들도 전략적인 측면에서 경상우도를 중시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고령 출신의 의병장 김면이 임진년 7월에 우척현 전투를 할 때, 김면은 지례의 일본군이 우척현을 넘으려하자 “거창을 보전하지 못하면 곧 열두엇 고을이 보전하기 어렵다”하고 드디어 장수를 정하여 고령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거창의 군사를 데리고 지례의 적을 방어하겠다고 했다.
둘째 경상우도는 낙동강의 운송로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것은 전쟁 지역이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때문에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활동은 주로 낙동강 유역을 사수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경상우도 의병운동의 진정한 의의였다.
>>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전리품을 되찾다.
병역을 나누어 우현(牛峴) 마령(馬嶺)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고령(高靈)에 나가 진을 쳤다. 적이 강을 따라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맞아 공격하여 드디어 배 두 척을 잡고 적 800여명을 베었는데 적의 선박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내창고(內帑庫)의 보물이었다.

2013년 12월 1일 대구 MBC에서 방영된 김면장군의 다큐멘트리 장면
이 기사는 김면이 낙동강에서 일본군의 전리품을 되찾은 사실이지만, 의병들의 활약이 일본군의 낙동강 왕래를 막음으로써 그들의 왕래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박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내창고(內帑庫)의 보물이었다.
한편 곽재우는 낙동강에 목장(木杖)을 설치하여 일본 선박의 왕래를 막은 것은 곽재우가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이었다.
목장의 설치는 단순한 전술로서의 의미에 그치지 않고 낙동강 수로를 장악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김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은 상당하였다.
당시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은 대부분 보통 100~300여 명의 가노(家奴)를 거느리고 있었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었다.
고령에서 의병장 김면이 직접 가동 700여 명을 이끌고 나왔으며, 의병 400명을 모아 개산진을 지키다 뒤에 합군한 박정완(朴廷琬)이 가동을 직접 이끌고 나왔으며 식량을 지원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령군 덕곡면 인곡리의 박대복(朴大福)씨의 경우 적출미(迹出米) 2,000석을 의병에 지원하였다.
김면 가문의 경우 경제적 기반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김면의 증조 김장생이 소유했던 재산을 자손에게 상속한 분재기가 남아 있다. 이를 분석하면 전체 노비가 약 90여 가구, 토지가 300여 두락에 이른다.
임진왜란 발생 초기에 김면이 가족을 안음으로 제종(諸從)과 서제(庶弟) 등을 피난시킬 때 노비(奴婢), 초노(樵奴) 15명을 딸려 보냈다는 기록에서 보면 김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은 상당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자료출처-고령김씨 대종회 카페지기 남재 김재호 제공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밥습니다
/기획공동취재·
첫댓글 어디김씨입니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