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에서 '미친 게이'에 이르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고려 공민왕.
최소한 즉위 초엔 나름 나라를 잘 다르리려고 노력한 듯 하다.
1352년 2월 2일, 즉위한 지 1년 채 안된 공민왕은 전국에 사면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면령의 내용 중엔 토지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약:토지 훔친 놈들 벌줄거다. 캥기면 자수해라.
"..전민(田民)의 송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으니 감찰사(監察司)와 전법사의 도관(都官)은 먼저 전민을 잉집거집(仍執據執-허위 증거로 남의 토지 소유권 뺏음)하는 행위를 적발해 원고로부터 공문을 받은 다음 기일을 정해 공정한 판결을 내리되, 거짓으로 고소한 자는 되레 그를 처벌하라.
또한 권호(權豪-권문세가)으로서 잉집거집(仍執據執)한 자도 또한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고 그 전민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줄 것이며 이를 이행하지 않은 자는 치죄할 것이다.."
고려 말-조선 초 위인들 대부분과 관련있는 이색.
사대부들의 스승답게 학문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노년의 보수적 정치행보와 달리 청년기에는 개혁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공민왕의 사면령이 발표된 뒤, 상중에 있던 29세의 사대부는 공민왕에게 상소했습니다. 그가 고려말 신진사대부의 스승인 목은 이색이었습니다. 그의 상소는 국가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건의였는데, 그 중 토지제도에 관한 건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약:토지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 법을 고쳐서라도 개혁해 보아요. 토지대장으로 토지 조사해서 원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고 토지겸병을 막아보아요. 실행은 의지에 달렸긔. By 이색
"..제가 듣건대, ‘토지의 경계(境界)를 바르게 정하고 정전(井田)을 균등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급선무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폐단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그 가운데 토지 제도가 특히 심각합니다. 토지의 경계가 바르게 획정되지 않아 권세 있는 자들이 겸병하니.. ..제 좁은 소견으로는 법을 고치지 않고서는 폐단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바라옵건대 갑인주안(甲寅柱案-1314년 충숙왕때 토지조사에 활용한 토지 조사의 표준)을 토대로 하고 공문서에 표시된 붉은 표지를 참조하여 탈취한 토지는 바로잡고 새로 개간한 토지는 넓이를 측량한 후, 새로 개간한 농토로부터 조세를 거두고 함부로 하사하는 토지를 줄인다면 나라의 수입이 증가할 것입니다. 탈취한 토지를 바로 잡음으로써 경작하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가 가장 바라는 바는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과 나라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이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부유한 사람의 토지를 갑자기 빼앗기는 어렵고 여러 해 쌓인 폐단은 단숨에 고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무능한 왕이 할 일이지 전하께 바라는 바와는 다릅니다.
시행하는 방법과 원활하게 조정하는 일은 보필하는 대신(大臣) 가운데 계획을 면밀히 수립할 만한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전하의 성의 여하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53년 11월, 공민왕은 전민별감(田民別監)을 양광도(楊廣道)·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에 나누어 파견하여 왕실 소속 토지와 여러 사급전(賜給田)의 공전과 사전을 조사하고, 토지를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줍니다.
이 해, 이색은 장원급제하였고 원나라에 유학갔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의 과거시험에서도 급제하여 벼슬을 제수받습니다. 귀국 후에는 공민왕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 했습니다. 홍건적의 난이 끝난 뒤엔 일등공신에 녹훈되기도 했고요.
이색의 제자이자, 고려의 충신 중 하나인 이숭인
문장에 재주가 있어서 외교문 작성에 관여하기도 했다.
정작 대인 관계에선 적이 많았고, 그로 인해 최후도 영 좋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공민왕이 끔살당하고, 어린 우왕이 즉위한 지도 6년이 지난 1380년 6월, 이색의 제자이자 우사의대부 벼슬에 있던 도은 이숭인이 유공자 문제에 대해 상소합니다.
요약:유공자 선정 신중히해요. 유공자 중 규정 이상 땅 가진 사람들 것 뺏으세요. 쓸모없는 기관 없애요. 공문서 위조 대책 시행해주세요. by 이숭인
"..국가가 토지를 하사하는 것은 본래 유공자를 우대하려는 제도인데, 근래에 사패(賜牌-왕이 하사한 토지 수조 문서)를 함부로 받아 토지를 과도하게 점유한 자가 생겨났습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하게 한 다음.. ..논공행상에서 삼등공신 내에 들지 못한 자는 그 토지를 회수하소서. 그리고 비록 삼등공신 내에 들었더라도 규정을 초과해 점유한 자의 경우, 그 초과분을 회수해 군수(軍輸)에 충당하소서.
공신의 호를 하사하는 일도 유공자를 제외하고는 매우 신중히 해야 합니다. 요사이 왜적이 여러 도에 침구해 왔기 때문에 공물과 세금이 태반이나 납부되지 않아 백관의 녹봉이 해마다 감소되고 있습니다. 숭경부(崇敬府)·상서시(尙瑞寺) 및 흥복(興福)·숭복(崇福)·전보(典寶)의 세 도감(都監)은 아무 직분도 없이 녹봉만 허비하니 모두 혁파하소서.
근래 관작에 있어서 진관(眞官)과 첨관(添官)이 마구 뒤섞여 그 사첩(謝牒-임명서)을 받아도 당후관(堂後官)의 서명만 있고 도장이 없습니다. 장차 위조 사첩이 마구 남발될 우려가 있으니 동반(東班)은 전리사(典理司)가, 서반(西班)은 군부사(軍簿司)가 도장을 찍고 서명하여 발급하게 하소서.”
이후 이숭인은 밀직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정몽주와 함께 실록편찬작업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이숭인이 상소한 이 달에 우왕은 처음으로(!) 직접 정무를 처리하고, 재상들에게 매달 2번씩 보고할 것을 지시합니다.
사극 [정도전]에 등장하는 양촌 권근(김철기 분)
한국 성리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리고 온건적인 전제개선론인 일전일주제를 언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몇년 뒤인 1383년 2월, 이색의 제자 중 하나인 좌의사대부 권근이 왕의 처신에 관하여 상소합니다. 그 중에는 토지 문제를 다룬 상소도 있었습니다.
요약:일전일주제 원칙이 지켜지게끔 지방 공무원들 굴려주세요. by 권근
“..옛말에 ‘민들은 나라의 근본이며 재물은 민들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그 마음을 잃으면 민들이 이산하고, 그 근본을 잃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근래에 정벌이 그치지 않고 홍수와 가뭄이 잇닿는 바람에 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게다가 토지 하나에 주인이 2~3명이나 되어 저마다 조를 거두어 감으로써 민들의 마음을 도려내고 있습니다. 소재지의 관청과 안렴사나 찰방사가 그런 행위를 꾸짖어 금지시키지 못하니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저희들은 이를 생각할 때마다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금후로는 일체 본국의 토지 법제에 따라 중앙에는 판도사(版圖司)가, 지방에는 안렴사가 관련 분쟁을 판결해 승소한 자가 조를 거두게 하며, 토지 하나에 주인 한 명의 원칙을 지켜 백성들이 소생할 수 있도록 하며,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법률로 다스리십시오."
우왕은 권근의 상소를 물리쳤고, 그럼에도 권근이 계속 상소하면서 충언을 하자 나중에는 활로 쏘려고 합니다.
물론 권근이 상소한 왕의 처신과 정반대의 처신(궁궐에서 대장장이 놀음하기, 거리에서 사냥하기, 연회 열기 등..)을 계속하면서요.
이렇게 신진사대부의 전제개혁은 훗날 고려의 충신들로 기억될 이색,이숭인 등이 먼저 주장을 했습니다. 내용은 제 각각 다르지만 핵심은 국가의 토지 관리 강화와 거대 농장 억제입니다.
그리고 토지조사를 통해 국가의 토지 관리 능력 확보, 토지겸병(사적 토지 확대)억제, 무분별한 공신녹권 및 수조권 지급 억제를 통한 재정 건전화,위조 토지문서나 임명장 방지 등을 정책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작농을 보호하고 국가 수입을 보존하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1350년부터 계속 제기되었고, 결국 조준과 정도전 등의 과격한 전제 개혁이 주장된 것은 신진사대부들의 초기 건의가 그동안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그들의 주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들의 주장은 시행되지 않았으며 이 주장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계속)
참고 자료:고려사(세가-공민왕,우왕)
(열전-이색,이숭인,권근 열전)
(식화지-경리,조세)
첫댓글 오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감사합니당~
이색.. 뭐랄까.. 고려의 플레하노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플레하노프가 러시아의 이색이라 해야 하나...
이색의 말년 행보도 딱히 '보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게 정도전의 행동이 급진적인 것이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비춰질뿐 이색의 주장도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진보적인 것은 틀림이 없었긴 한데..........
오오 감사합니다. 빨리 다음편을 기다리겠습니다.
첫댓글 오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재밌네요~^^ 감사합니당~
이색.. 뭐랄까.. 고려의 플레하노프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플레하노프가 러시아의 이색이라 해야 하나...
이색의 말년 행보도 딱히 '보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게 정도전의 행동이 급진적인 것이었던 것이기에 그렇게 비춰질뿐 이색의 주장도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진보적인 것은 틀림이 없었긴 한데..........
오오 감사합니다. 빨리 다음편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