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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의 한 마을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그런 청년을 눈 여겨 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일에 성실히 감당하는 이 청년이 머슴살이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주인은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로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 곳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청년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습니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나중에 오산학교 교장선생님이 된 그 분은
1919년 3.1운동을 위해 교장 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분이 바로 조만식 선생이십니다.
22살에 기독교에 입문한 조만식선생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훗날 38선으로 남북으로 갈리자 북한에 남아 공산주의와 싸우다가
1946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을 당했습니다.
제자들이 인생 성공 비결을 물으면 언제나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열심히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
작은 일에도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릇이 그것 밖에 안돼”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문뜩 내뱉는 말입니다.
기회나 지위가 주어줘도 그릇이 작아 감당하질 못합니다.
작은 비난이나 사소한 일에도 노심초사합니다.
아무리 근사한 외모와 학력과 출신성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의 그릇은 간장종지보다도 작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도 고만큼만 받아냅니다.
청년 조만식은 가장 낮고 더러운 그릇을 닦았지만, 누구보다 크고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노예나 머슴은 존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간 이집트의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하나님의 존귀한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그릇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하나님의 존귀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 확신이 서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
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합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합시다.
그렇다고 하여도 그저 예수님을 닮아가겠다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만 살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누구보다도 훌륭한 인생을 삽니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바로 인도의 간디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입니다.
‘마하트마’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간디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하고도 심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생애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물리친 ‘무저항 비폭력’의 방법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가 늘 들고 다녔던 낡은 가죽 가방 안에는 늘 성경 책 한 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는 신부’라고 부르십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신부다.
그런 내가 이렇게 시시하게 살아서는 되겠는가? 나는 이제 리더가 되리라.”
는 자각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자각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위대한 인생의 출발점에 서게 합니다.
제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얄팍한 지식과 앞뒤 맞지 않는 논리로
이리 재고 저리 부딪히느라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입니다.
이상 골짜기는 어디인가?
영어로 The Valley of Vision 비전의 골짜기, 언뜻 들으면 대단히 멋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혀 멋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비전, 꿈이라도 골짜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 골짜기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시온 산 위에 있습니다.
다윗이 시온산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암 1:2)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시 14:7)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28:5)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시온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하시고, 구원과 복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The mountain of Vision & Blessing, 하나님의 꿈과 복의 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과 복이 묻혀버린 골짜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이사야서 1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0-11)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저 복을 받겠다고 뻔질나게 하나님의 성전을 드나들며 제사나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은 사라지고
예루살렘은 그저 눈앞에 이익에 희희낙락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6절 말씀에 기록된 엘람과 기르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당시 탱크인 병거에 엄청난 병기와 화살과 방패로 무장하고
앗수르와 함께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학자에 따라 앗수르의 침공 시기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사건을 통상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침공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사신을 보내어 산헤립과 협상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예루살렘 성을 견고히 합니다.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중략)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케도 하며,
너희가 옛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사 22:8-11)
무기와 병기들을 정비 확보하고, 성벽을 튼튼히 하고,
산 위에 있어 물이 부족한 예루살렘에 지하 비밀 수로를 파서 물까지 확보하였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외교와 국방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요?
히스기야의 책략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습니다.
비록 앗수르에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
(나라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1 달란트는 약 30 킬로그램으로 20년 간의 일당에 해당되는 금액)
를 내게 되었지만 앗수르는 물러났습니다.
“히스가야 왕 만세!”
백성들은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킨 히스기야 왕의
탁월한 외교술과 철저한 방비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문뜩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아마도 철수하는 앗수르 군대를 보기 위해서 올랐는지 모릅니다.
이사야의 물음에 지붕에 올라간 백성들이 이사야 선지자를 내려다봅니다.
눈길이 마주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그러자 백성들이 말합니다.
“아니요, 위로하려고 쳐다본 것이 아니구요.
선지자님은 저 퇴각하는 앗수르 군대가 안보여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구요.
우리 탁월한 영도자 덕분에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잖아요.
그런데요. 질문이 있어요.”
“선지자님은 왜 울고불고 난리에요?”
앗수르 군대가 포위를 풀고 다 물러가자 예루살렘 성에서는 큰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소를 잡고 양을 잡아 고기 안주를 만들어 포도주를 마시며 소리칩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여러분 이 말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선지자 양반이 우리 모두가 곧 멸망당한단다.
그러니까 오늘 진탕 먹고 내일 모두 죽자”라는 말입니다.
이사야의 경고를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그 이후 히스기야 왕은 나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치를 폈습니다.
죽을병에 걸리자 하나님께 매달려 울며 불며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십오 년 연장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신생국 바벨론이 북왕국 자신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멸망시켰습니다.
유다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히스기야 왕의 진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이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사 39 1:2)
신이 난 히스기야 왕은 장차 유다를 파멸시킬 적국 바벨론에게
속옷까지 벗어서 다 보여준 꼴입니다.
어쩌면, “봐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나았다. 내 신앙 좋지?”,
“바벨론에서까지 사신을 보내왔잖니” 그랬을 것입니다.
히뜩 거린다고 해서 히스기야일까요?
히스기야의 경박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을 급히 찾아온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을 책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39:6)
이에 대해서 히스기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무슨 말씀하십니까? 선지자님.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보지 못했습니까?
앗수르를 외교술로 막았지요. 예루살렘을 튼튼히 했지요. 기도해서 죽을 병도 나았지요.
그런 나를 칭송하기 위해 그 엄청난 나라 바벨론에서 친서와 선물을 보내왔는데....
걱정도 팔자십니다. 제가 있는 한 유다는 걱정 없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그 이후 유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가 BC 586년에 모든 것을 다 보여준 바벨론에게
패망당하고 맙니다.
지붕에는 고만 올라갑시다.
골짜기에 살면서 지붕에 올라봤자 보이는 것은 주변을 둘러 싼 절벽뿐입니다.
그저 집안에서 생기는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합니다.
조금 나아지면 문제가 다 해결된 양 환호성을 지르다가,
사태가 조금 나빠지면 죽는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진지 2년이 되었습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사이가 영 틀어지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아 봤자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우리들이 진정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앗수르를 퇴각하신 사람은 히스기야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눈앞의 일에 죽네 사네하면서
정작 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잘못은 간단치 않습니다.
가장 큰 잘못입니다.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22:14)
당연합니다.
시온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과 남을 원망하며
이상 골짜기에서 지지고 볶다가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존경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십니다.
고난도 역경도 또한 문제 해결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고난이 닥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참고 이깁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부르심을 들은 사람은 지붕 위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왜요?
이미 높은 시온 산 위에 올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가 당한 고난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에 걸립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이 말씀을 정말 믿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가장 높은 시온 산 위에 올라 죽음너머의 영원한 집을 봅니다.
울고불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기쁜 마음으로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여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노라”(고후 4:7-8)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