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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Scene 20. The Tears /눈물/
"어서 오게. 고대의 봉인이 있던 곳은 어땠나?"
애쉴리의 안내에 따라 지호가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재상은 대뜸 고
대 유적에 대한 말부터 꺼냈다. 하지만 정작 지호를 안내해 온 애쉴리
는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이리 앉으시지요."
지호가 자리에 앉고 애쉴리가 그 옆에 뒷짐을 지고 서자 재상은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네.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예의도 잊어버릴 정도군. 양해하
게."
"괜찮습니다, 후작님."
재상은 그때까지도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지호의 맞은편에 와 앉
았다.
"애쉴리, 차라도 좀 내주겠나?"
애쉴리가 집무실을 나가고 재상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급한 일들은 항상 몰아서 온다니까. 게다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뿐이니…… 참, 레이디 렌은 요즘 어떤가
? 많이 좋아졌나?"
"덕분에……."
지호는 재상의 이런 개인적인 관심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
려 자신을 사무적으로 대했다면 조금 편했을지도 몰랐지만 그의 이런
관심은 지호로 하여금 무언가 경계심을 갖게 했다. 게다가 아이리스가
아니라 구태여 렌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달칵
애쉴리가 차를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향긋한 차 향기가 재상의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흐으음…… 이거야말로 망중한(忙中閑)이로군."
재상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자네가 보기엔 어땠나?"
"유적은……."
지호는 찻잔을 손에 든 채로 말을 시작했다.
"아직 닫혀 있는 상태입니다. 흔적을 볼 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 것 같긴 하지만……."
"그런가?"
재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일전에 파견한 조사대의 보
고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럼 다시 그곳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가 되겠군. 허참……."
재상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몸을 깊이 파묻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
는 척하며 지호의 안색을 흘깃 살폈다. 앞뒤 정황에 대해 물어올 것을
기대했지만 지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재상이 먼
저 입을 열었다.
"유적 입구를 지키던 기사단으로부터는 계속 정기적인 보고가 있었
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보고가 끊어졌더군. 물론 당장 다른 기사
단을 파견했지. 그들이 발견한 건 이미 처리된 지 오래된 흔적들뿐이
었네. 보고 자체가 거짓이었어. 그걸로 볼 때 지키던 기사단의 일부는
아마도……."
재상은 슬쩍 말을 흘리며 지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지호는 여전
히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그저 손에 든
차에만 신경을 쓰는 듯했다. 지호가 여전히 반응이 없자 재상은 찻잔
을 들었다.
"엘마이러님께서는 돌아오셨나?"
무심코 던지는 듯한 재상의 말에 지호가 움찔했다. 재상의 입가에 살
짝 미소가 돌았다.
"보고받지 못하셨습니까?"
지호의 대답은 그다지 예의바르거나 호의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재상
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는 받았네만…… 혹시 자네라면
따로 연락이라도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재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지호는
재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가 이렇게 갑자기 아이리스에 대한 이
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단순한 관심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
을 꺼낸 이상 분명히 본론이 나올 것이다.
"실은 조금 이상한 정보가 들어와서 말이네. 아, 물론 소문이긴 하지
만……."
지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말을 돌리는 재상이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아니
었지만 아무래도 그와 좋은 관계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나스의 진영에 엘마이러님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말이네…
…."
재상은 별로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슬쩍 말을 흐렸다. 그러나 지호의
반응은 재상의 그런 제스처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눈동자를 빛내며 재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체 어떤 소문이 아이리스가 모습을 감춘 지 겨우 며칠
만에 재상의 귀에까지 들어간단 말인가? 게다가 카르나스가 어디 있는
지도 알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 그의 진영에 누가 있는지까지 소문이
돈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였다.
"게다가 정말 카르나스가 그곳을 나왔는지의 여부조차……."
"그건 이미 기정사실이네. 게다가 그의 소재까지 대강은 알고 있지.
"
재상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러나 그의 눈빛은 담담하지 않았다.
"본가의 정보망, 섀도우 밸런스를 가볍게 보지 말게. 신분을 감추고
몇백 년이나 숨어 지내던 사람들을 찾아내는 그들일세. 마음만 먹는다
면 돌아가신 자네 할아버지가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지까지 조사해 낼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럼……."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나스가 역습을 시작했다는 것은 예측이나 추측 같은 게 아냐.
게다가 자넨 모르겠지만 이미 제국의 대귀족들에게 카르나스의 편지가
전달되었다네. 황제로부터 인준받지 못한 대 귀족회의는 황제에 대한
반역이며 제국 총기사단장의 철저한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아주 간
단하면서도 명백한 협박이지. 게다가……."
"엘마이러님에 대한 정보는 어떤 것입니까?"
지호는 재상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재상은 이야기를 카르나스에
대한 주제로 끌어나가려다 대뜸 지호가 말허리를 자르자 기분이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아까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확인할 수 없는 소문에 가까운 얘기
네."
재상의 대답에 지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재상은 지호에게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물었
다.
"자네는 어쩔 작정인가?"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재상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정치에 관한 문제라면 제가 후작님께 협조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
을 겁니다. 그쪽은 후작님의 영역이니까요. 단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카르나스와 무력충돌을 하시게 될 때는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것이라
는 겁니다. 그는 아마도 재상님의 예상보다 훨씬 강할 테니까요."
빠르게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문 지호에게서는 더 이상 재상과의 대화를
계속할 뜻이 없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재상은 지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호를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이다.
"고맙네. 그럼 자네도 이만 가보도록 하게. 시간을 내줘서 감사하네.
"
"아닙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 지호에게 재상이 부드
럽게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나?"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제 이 제국을 떠날 생각이니까요."
몸을 돌리려던 지호가 문득 생각난 듯이 재상에게 말했다.
"아 참. 그리고 혹시 섀도우 밸런스라는 그 정보조직이 제 뒤를 따르
거나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실 일도 없으시겠지만, 저는 의외로 감각이 예민한 편이라서
말입니다."
지호는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휙 몸을 돌려 거침없이
재상의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탁
집무실 문이 닫히며 지호의 모습이 사라지자 재상은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허허, 이거 참. 카르나스만 협박을 하는 줄 알았더니 저 지호라는
청년도 만만하지는 않군."
"어쨌든 그가 우리 쪽으로 합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재상의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애쉴리가 조용하게 말했다. 재상은 아쉬
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를 끌어들일 카드가 너무 없었어. 정치
문제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재상은 애쉴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제는 아직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나?"
애쉴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일인 듯합니다. 황제는 별궁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함께 있던 여자들은 전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본
가의 섀도우 밸런스조차 아직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
재상이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쓸데없는 명분이라도 가져가겠다는 건가, 카르나스!"
"단순히 명분이라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황제의 실종이 대외
적으로 공표된다면 귀족들에게, 특히 하급 귀족들에게 미칠 영향은 무
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재상은 '끄응'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깍지를 끼었다. 애쉴리의 지
적은 옳았다. 광황 이후 오백년간 지고 지상의 존재요, 지상에 있는
존재중 지극히 신성에 가까운 존재. 그것이 황제였다. 황제를 직접 만
날 기회가 많은 고급 귀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하급귀족들에게 황
제라는 이름이 미칠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대 귀족회의를 위한 준비만도 정신이 없을 정도인데 여기서 카르나
스까지 상대해야 한다니 이거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군."
애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상도 이미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
은 엎친 데 덮친 정도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카르나스의 의도대로
아예 대 귀족회의가 무산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만일 카르나스가 압도
적인 무력을 앞세워 몇몇 귀족들의 영지에 보복성 공격을 가한다면 그
렇지 않아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기에 바쁜 귀족들이 일시에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 최악의 가능성에 대한 확인
을 바로 방금 전 지호가 해 주지 않았던가?
"엘마이러에 관한 그 소문은……."
애쉴리가 조심스런 말투로 재상에게 물었다. 섀도우 밸런스를 통한 본
가의 정보는 재상에게 직접 전달되기 때문에 애쉴리로서는 그가 한 말
의 신뢰성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거? 그녀가 엘마이러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네. 그저 지호
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볼까 해서 충격요법으로 던져본 거지. 반응은
좋았지만 어차피 목적에는 실패했으니……."
재상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카르나스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이 다행
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재상은 굳은 얼굴로 마치 누군가를 노려보듯 아무도 없는 전방을 주시
했다.
"애쉴리, 지금 각 기사단장들에게 연락해주게. 곧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그것도 제국령 내에서 말이네."
제국 재상에 대한 70인회의 견제와는 상관없이 제국 재상은 각 기사단
의 기사단장들과 공통적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제국을
지키는 것은 본가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다. 이 확신을 함께 나
누는 한 제국을 움직여가는 귀족들은 절대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비
록 황제가 카르나스의 편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그러나 제국 재상도 그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평민과 농노들, 특히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는 '해
방' 에 관한 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늘의 뜻을 받아 평민들을 억
압하는 귀족들을 물리치는 한 '영웅' 에 대한 소문이기도 했다.
* * *
오래 버려졌던 저택 특유의 냄새가 코끝으로 흘러 들어왔다. 보이기에
는 그래도 깔끔하게 치워 놓았지만 버려졌던 저택이라는 것을 숨기지
는 못했다. 조금은 낡은 듯 보이는 조잡한 장식은 오히려 방을 더 황
량한 느낌이 나게 했다. 그러나 아이리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는 않
았다.
그녀는 창틀에 기대어 창밖으로 보이는 막사들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
었다. 밤바람이 조금 싸늘하게 느껴졌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
다. 그보다는 오히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
다. 그 불빛들이 의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파괴와 죽음이었으니까.
지호……
불빛 속에 지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쯤은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르나스의 말 따위를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호의 마음을 자기
에게 돌려줄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자
신에게 지호의 마음이 돌아온다면 그녀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카르나스가 자신의 조국 앙피시아를 독립시켜줄 것이라고 바란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지만 카르나스가 아니라도 자신이
도움을 청할 곳은 많았다. 오히려 셀러다인의 도움조차 거절했던 아이
리스였다.
앙피시아의 독립을 끝까지 쥐고 내놓지 않으려던 재상을 보았을 때에
는 얼마나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카르나스와 손을
잡은 것은 단 하나, 그가 지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다.
이젠 나를 생각하게 될 거야. 매일 내 이름을 되뇌며 나를 떠올리겠
지. 이제 다시는…….
그의 옆에 설 수 없다면 그의 맞은편에라도 서야 한다. 그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 될 바에는 차라리 그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다. 어느 쪽이든 그는 결코 자신을 과거의 빛바랜 추억으로 돌리지
못할 테니까. 자신은 결코 그의 뒤에 남아있는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니
까.
이제 지호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카르나스가 아니라 바로 나야
!
치졸한 감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아이리스에게 지호는 누구와
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아
이리스라고 부를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녀가 가장 죽
음과 가까웠을 때에 옆에 있어 주었던 단 한 사람이었다. 지호는, 그
녀가 엘마이러로서가 아니라 아이리스로서 존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요?"
문득 뒤에서 들린 소리에 아이리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는 카르나스를 향해 그녀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경고하지만……."
아이리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함부로 내 뒤에 서지 말아요."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