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renc Puskas

Full name: Ferenc Puskas Biro Date of birth: April 02, 1927 Birthplace: Budapest, Hungary Nationality: Hungarian EU passport: No Height: 0 cm
Position: Forward [L] Number: 7 Previous clubs: 1943-1948 Kispest 1948-1956 Honved 1957-1967 Real Madrid
International debut: August 1945, v Austria Caps: 84 Goals: 83 World cups: Switzerland 1954 (2nd), Chile 1962 (w/Spain)
[선수경력]
-국제경기 경력
헝가리 선수 시절
- 국제 대회에 84회 출전, 83골 기록
- 1954년 FIFA 월드컵 스위스™ 준우승
- 1952년 올림픽 금메달
스페인 선수 시절
- 국제 대회에 4회 출전(1962년 FIFA 월드컵 칠레)
-클럽 경력
- 1943년 - 1956년 키스페스트-혼베드 부다페스트
- 1958년 - 1966년 레알 마드리드
-클럽경기 경력
- 1950년, 1952년, 1954년, 1955년 헝가리 챔피언
- 1959년, 1960년, 1966년 유러피언컵 우승
- 1960년 월드컵 우승
- 1961년 - 1965년 스페인 챔피언
- 1962년 스페인 컵 우승
- 레알 마드리스 선수로 372 경기 출장, 324골 기록
- 스페인 리그에서 득점 1위 4회
[감독경력]
-클럽 경력
- 1970년 - 1971년 판나티나이코스 아테네
- 1975년 -1976년 AEK 아테네
- 1976년 - 1978년 콜로 콜로(칠레)
-클럽경기 경력

헝가리의 영웅 푸스카스
50년대 헝거리 축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페렌크 푸스카스(1927년 4월2일생)는 축구 선수로서 약간은 과다한 체구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확한 슛을 바탕으로 높은 골결정력을 과시했던 선수였다.
푸스카스는 50년대 올림픽과 월드컵을 오가며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일궈냈고, 이에 힘입은 헝가리 축구대표팀은 당시 '무적함대'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푸스카스의 강력한 슛은 수비수들은 물론 상대팀 골키퍼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푸스카스는 헝가리의 키스페스(현 부다페스트 혼베드 SE의 전신) 클럽에서 본격적인 축구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푸스카스의 나이는 17세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빠른 기간에 실력을 인정받아 같은 해에 헝가리 대표팀에까지 발탁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당시 축구가 현대축구와는 여러모로 전술적인 차이가 있었지만 푸스카스는 대표팀에서 이른바 공격을 풀어나가는 선봉장 역할을 맡으며 헝가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53년에는 잉글랜드 웸블리 구장에서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6-3으로 격파하며 유럽 전역에 그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적어도 홈에서는 무패기록을 이어가고 있던 팀. 헝가리는 잉글랜드를 제물삼아 32경기 연속 무패 기록을 세우며 세계 최강의 팀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헝가리는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무패행진의 종지부를 찍었는데, 아쉽게도 그 경기는 대회 결승전이었다. 헝가리는 독일과의 조별예선에서 8-3으로 대승했지만, 안타깝게도 재대결이 펼쳐진 결승전에서는 2-3으로 석패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푸스카스는 1956년까지 84번의 A매치 경기에 출장해 총 83골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을 과시한 바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헝가리 축구의 강세는 자국 내에서 벌어진 민중 운동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많은 선수들이 불안한 국내를 탈출해 외국으로 터전을 옮겼고, 푸스카스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날아간 푸스카스는 '호화군단' 레알 마드리드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고, 1년간의 출전정지 기간이 해금된 뒤 1958~59시즌부터 레알의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푸스카스는 39세가 되던 65-66시즌까지 레알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전성기를 조금 넘긴 나이에 레알에서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한 푸스카스는 비록 레알의 전설로 통하는 알프레도 데 스테파노의 그림자에 가려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5번이나 리그 정상에 올랐음은 물론 개인적으로 4차례 득점왕에 오르는 등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이라이트는 1960년 챔피언스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 결승전이었다. 당시 레알은 분데스리가 전통의 명문 프랑크푸르트와 결승전을 벌였는데 레알이 푸스카스의 4골에 힘입어 7-3으로 완승,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또 196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 리스본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팀의 3-5 패배로 아쉽게 준우승에 만족해야만 했다.
푸스카스는 이후 현역 은퇴와 함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선수로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그는 지도자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1971년에는 파나티나이코스 아테네를 이끌고 챔피언스컵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푸스카스........?
최고 기록 그는 1950년대 초반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잉글랜드를 두 번이나 대파하고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하며 전성기를 구가한 헝가리 대표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경기에서 84골을 기록했고 50년대 후반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으며, 개인 소장품이 경매에서 고가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새로운 전기 그러나 그것은 '질주하는 종마'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헝가리의 언론인 지외르지 쇨로시는 모든 것을 공개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최근에 출간된 "푸스카스"에서, 쇨로시는 그가 선수로서 이룬 성공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다루고자 했다. 구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한 1956년부터 푸스카스는 25년간의 방랑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오랜 방랑 쇨로시는 "푸스카스는 고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왜 1981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푸스카스는 탈영병에 대한 '보상'이었던 종신형이 두려웠던 것이다."
헝가리에서 명예 회복 알츠하이머 병으로 24시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지금에서야, 푸스카스는 마침내 헝가리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다. 그는 10명의 '국가 체육인' 중 한 명으로서 연금으로 1개월에 약 2천2백유로(275만원)를 받고 있다. 그의 가족 역시 최근 부다페스트를 방문해 기념 경기를 열었던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있다.

'좋은 사람'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느 곳을 가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푸스카스가 그들이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를 처음부터 좋은 선수로만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정말 놀랐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함께 공격수로 뛰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말했듯이 '그는 선수로서나 사람으로서나 10점 만점'이었다."
인터뷰 푸스카스가 태어난 지 정확히 50년 뒤인 1977년에 태어난 작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헝가리 축구 전성기의 숨겨진 부분을 추적하고 다녔다. 이 책을 위해서 그는 100회 이상의 인터뷰를 했고, 마드리드의 회장과 푸스카스의 팀 동료들, 그리고 1971년 유럽 챔피언 클럽스 컵 결승에 진출하며 그리스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파나티나이코스 감독 시절 그의 통역관도 만나봤다.
역할 모델 쇨로시에 따르면 푸스카스는 모든 헝가리 축구선수들의 우상이다. "축구를 시작하는 젊은 선수들은 모두 가장 기량이 뛰어났던 푸스카스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가장 유머 감각이 뛰어난 감독이 되고 싶어한다. 모범을 보여준 푸스카스가 여전히 헝가리인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유머 감각 이 책에는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많이 담겨 있다. 그가 13세의 나이에 키스페스트 혼베드에서 뛸 때 팬들은 집 근처의 훈련장 펜스에 작은 계단을 만들어 푸스카스가 정문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가 베르나베우에서 쓴 첫 번째 엽서의 제목은 "새로운 작업장에서 보내는 인사"였다.
불행한 시기 하지만 푸스카스의 삶의 다른 면은 헝가리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혼베드 소속으로 스페인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팀 동료 몇 명과 함께 망명을 선택한 푸스카스는 2년간 방황한 끝에 1958년 마드리드로 이적했으며, 그 곳에서 유럽 컵 3회 우승을 차지했고 스페인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흑색 선전 그러나 고국에서는 관영 언론이 옛 영웅을 뚱뚱한 주정뱅이 밀수업자로 묘사했고, 헝가리 사람들 대부분은 그 '탈영병'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선전에 대응하지 않았다. 쇨로시는 "그는 헝가리에 남아있던 친척들이 대신 벌을 받을까봐 걱정했기 때문에 그런 선전에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새옹지마 오히려 그는 망명 덕분에 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헝가리에서 1956년 이전에는 경기장 안팎에서 1인자였기 때문에 도박을 하거나 폭음을 하고 농담을 즐겼다. 고국을 떠난 후 그는 진정한 프로가 돼야 했다. 어떤 면에서는, 헝가리 역사에서 매우 슬픈 사건이었던 1956년 피의 혁명이 축구 선수 푸스카스에게는 행운이었던 것이다."
진짜 이야기 하지만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에야 그가 명예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었다. 쇨로시는 "정권이 바뀌고 나서 우리는 '마지야르스의 마법'이 부활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혁명의 희생양이었던 진정한 영웅을 이 책으로써 고국에 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에르제베트(푸스카스의 아내)가 이렇게 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내 남편은 지외르지가 푸스카스의 진정한 삶에 대한 책을 써주길 원했다."
-그의 책 이야기中-



그리고 오늘....
헝가리 축구 영웅 페렌츠 푸스카스가 17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푸스카스의 가족 대변인인 기오르지 스톨로시는 푸스카스가 이날 아침 7시(현지시간) 호흡기와 순환기 장애로 입원 중이던 부다페스트의 쿠트볼그이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지난 6년간 투병해온 푸스카스는 지난 9월 상태가 악화, 중환자실로 옮겨진 데 이어 최근 수일간은 열병과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를 보였다.
푸스카스는 헝가리 축구의 전성시대인 1950년대 주장으로서 골든팀으로 불리던 헝가리 축구대표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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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의 축구영웅이 떠났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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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사망이예요? 쩝...알리 다에이가 깨긴 했지만...그 이전까지 펠레도 못 넘었던 A매치 최다골 기록 보유자였죠...
말도안된다...372경기 324골이 말이되나.. 말이 되니까 했겟지만..``;;
84경기 83골...어떤선수도 푸스카스의 A매치 경기당 득점력을 뛰어넘지는 못할듯..
뮐러 A매치 한경기당 평균 골이 1할이 넘었다고 함
1할은 10%. 10경기당 1골이죠... 푸스카스의 골은 10할에 가까움
진짜 멋잇네여 딴 여러분들 간단히좀 올리지좀 말고 이분처럼 쫌 멋있게 올려주세여 자기가 보기에 멋없다고 생각하면 자삭 부탁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베스트일레븐에서 읽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베일인가 포포투였던가 푸스카스가 프리킥찬스에서 슛을 찼는데 그 골이 들어갔지만 심판이 휘슬을 아직 안불었다고 다시 찼다고 합니다. 근데 다시 찬슛이 들어간 슛과 똑같은 궤적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ㅡㅡ; 골키퍼는 또한번 손도 못대고..왼발의 달인이였다죠. 오른발은 아예 사용도 못하는-_- 보비 찰튼경이 한말씀중에 요즘 선수들이 양발을 사용안하는것에대해 뭐라고 하였는데 하지만 , 푸스카스만큼 왼발을 잘사용하면 오른발은 안써도 됀다고 했답니다..
헝가리가 어찌이렇게 되었는지... 란 말을 하게만드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