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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Scene 20. The Tears /눈물/ 그저 말뿐인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이리스의 손에는 이미 연검의 손잡이가 쥐어져 있었다. 살짝 드러낸 연검의 검신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사과하겠소." 사락 연검이 자리를 찾아 돌아가고 아이리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돌 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르나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 치 조각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아이리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불편하실 테지만 조금 참아주시오. 곧 엘마이러님께 어울리는 궁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불편한 것 따윈 없어요. 단지……." 카르나스가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아이리스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 다. "당신의 부하들이 제 곁에 가까이 올 때는 어김없이 제 검이 춤을 추 게 될 거예요. 호위든 감시든 상관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아이리스의 입에서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 다. "난 아바마마와 동생의 피를 절대 잊지 못하니까." "각별히 주의하도록 일러놓겠소. 그러나 그들은 그저 명령에 따를 뿐 이니 부디 검에 자비를 두시길." 카르나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황궁 예식에 따라 인사를 했다. 그 러나 아이리스로부터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눈빛뿐이었다. "그리고 내 언니의 피도 아직 잊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요." 살기 띤 아이리스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카르나스는 미소 지었다. "나 또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것도 기억해 주시길 바라오. 그러나 언젠가 그 모든 핏값을 받게 되리란 걸 약속하겠소. 진짜 핏값을 받아 야 할 대상에게 말이오." 아이리스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진짜 대상?" 카르나스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두개의 두루마리가 쥐어 져 있었다. 하나는 평범한 양피지였지만 또 하나는 금박이 입혀진 고 급스런 두루마리였다. 카르나스는 금박이 입혀진 두루마리를 다른 손 으로 옮겨 쥐었다. "이 두루마리의 주인공, 그리고 당신의 가족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자 모든 비극의 주모자인 이 제국의 황제요." 파라락 카르나스의 손에서 두루마리가 아래로 펼쳐지며 화려한 장식들이 불빛 을 받아 반짝거렸다. "황제의…… 친서(親書)인가요?" 카르나스는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기록된 것은 분명히 황제의 친서였다. 영광스러운 제국의 황제가 이에 친히 적는다는 말로 시작되고 커다란 직인이 찍혀 있는 그것은 분명히 황제의 친서였다. 앙피시아의 엘마이러조차 언니가 황비로 갈 때에 단 한 번 보았던 바로 그것. 순간 카르나스는 두루마리를 잡았던 손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툭 지고 지상(至高 至上)의 존재, 황제의 친서가 마치 쓰레기처럼 바닥에 굴렀다. 그러나 아이리스도 카르나스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르나스를 쏘아보았다. "제국의 황제라는 명분을 가지게 된 건가요?" 카르나스는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비웃음이 걸렸다. "황제 따위가? 훗! 그는 그저 내 천명(天命)을 확인하는 것뿐이오. 그 보다는……." 카르나스는 쥐고 있던 평범한 양피지 두루마리를 살짝 흔들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 되었소. 아주 오래된 친구지. 아, 당신의 그 지호가 당신을 만나주려 할지는 잘 모르겠소만……." 카르나스는 아이리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가 쥐고 있는 양피지 두 루마리는 일레인의 바로 그것이었다. 탁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카르나스는 짧은 금발의 한 사내가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카르나스는 못 본 척 그대로 금발의 사내를 지나쳐 갔다. "어때? 그녀가 렌을 대신할 수 있겠던가?" 카르나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쩐 일인가, 지크힐트?" 벽에 기대서 있던 사내, 금발의 지크힐트는 '피식' 하고 웃었다. "나중에 그녀를 폐기(廢棄)할 때는 내게 꼭 말해주게. 그녀의 아버지 앙피시아의 공왕하고 약속한 게 있거든." 지크힐트가 팔짱을 풀고 벽에서 등을 뗐다. "하긴, 아직은 새 장난감이니 좀 더 갖고 노는 것도 좋을 테지." 지크힐트는 카르나스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며 한 손을 들었다. 멀어져 가는 지크힐트를 쳐다보던 카르나스가 소리쳤다. "지크힐트!" 지크힐트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카르나스가 짧게 말했다. "일이다. 따라오도록." 카르나스는 그 말만을 하고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쳐 다보던 지크힐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뭐야, 고작 그 정도에 삐진 건가? 사람이 속이 좁군. 홀아비가 되더 니 신경질만 늘었다니까." 지크힐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긁고는 카르나스가 사라져 간 쪽으로 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지호 님!" 여사제 에반제린이 대신전 회랑에서 지호를 발견하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사제…… 아니 견습…… 사제…… 님." 호칭을 헷갈려하던 지호가 견습사제라고 부른 것인지, 사제라고 부른 것인지 애매모호한 말투로 말을 끊었다. 지호 앞에 나타난 여사제 에 반제린은 한눈에 보기에도 멋들어진 정식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사제 들이 여행할 때 입는 약식 사제복이 아닌 고색창연한 문양이 수놓아진 정식 사제복이었다. 발치까지 길게 은발을 늘어뜨린 채 약간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사제는 그 사제복과 너무나 잘 어울려 보였다. "축하합니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지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에반제린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나 회랑 가득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은 금방 알아차렸다. 사실은 조금 깨닫는 것이 늦은 편이기는 했 지만. 더구나 얼굴에 큰 흉터를 가진 지호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그다 지 호의에 찬 것은 아니었다. "저,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잠시 안으로……." 여사제 에반제린이 지호를 신전 안으로 안내했고, 지호는 자신의 뒤통 수에 와 박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정식 사제님이 되신 거군요. 다시 한 번 축하 드려야겠는걸요?" 여사제 에반제린은 살짝 미소 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값싸고 흔한 차가 놓여 있었지만 그 향기만은 어느 차 못지않았다. "지호 님 덕분이에요. 그때 지호 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렇지 않아요. 제가 없었어도 컨웨이의 기적은 일어났을 거예요. 사 실 전 별로 한 일도 없었잖아요." 그러나 에반제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의 용이 저를 덮치려던 바로 그때, 저는 지호 님이 주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 어깨를 잡고 있던 지호 님의 손을 통해 지호 님 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죠. 그리고 지호 님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을 때에는 '역시 또 그렇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같 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따위는 없다고, 신도 외면한 나 같은 사람에게……." 에반제린의 얼굴에 살짝 쓸쓸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지호 님은 다시 저를 꽉 잡았죠.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 는데 말이에요. 그때 제겐 신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때서야 전 깨달을 수 있었죠. 난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사람들로부터도, 그리고 신으로부터도." 지호는 쑥스러움 때문에 그녀의 환한 미소를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지호 님" 여사제는 지호를 부르며 갑자기 그의 두 손을 잡았다. "네, 넷." 당황한 지호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에반제린이 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발 그 마음을 잊지 말아 주세요.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그리고 지호 님이 바로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말아주세요." 에반제린의 눈빛이 너무나 간곡해서 지호는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내 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그녀의 말은 지호 에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네, 네……." 지호가 대답하고 나서도 에반제린은 한동안 지호를 잡은 손을 놓지 않 았다. "저, 이거……." 지호가 난처한 표정으로 에반제린이 잡은 손을 쳐다보자 그제야 그녀 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손을 놓았다. 그녀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에반제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지호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해요." 지호도 조금 당황했지만 곧 자신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상기해냈다. "저…… 곧 제국을 떠날 계획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에반제린이 지호의 말에 놀란 표 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렌님 때문에……. 죄송해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여사제 에반제린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절대 사제님의 잘못이 아닌걸요. 그저……." 지호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며 말을 흐렸고 그가 하려던 말은 이어지는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에반 제린이 말을 꺼냈다. "엘마이러님은…… 아직 소식이 없나요?"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아이리스를 만나게 되시면 제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전해주세 요." 지호의 말이 의외였던 듯 에반제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씀은……." 지호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갔다. 그러나 그 미소는 조금 쓸 쓸했다. "아이리스를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었어요. 제가 잘못해서 그녀 의 마음을 상하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그녀에게 한 약속을 지키 고 싶어요." 지호의 시선이 에반제린의 어깨를 넘어 먼 곳을 향했다. "조금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에반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엔 물기가 맺혀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네. 반드시……." 지호의 시선이 찻잔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지호는 찻잔을 쥐고 아무 말이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엔 부드러운 차 향기만이 떠돌고 있었다. * * * 만셀가의 저택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병(衛兵)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 다. 분명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느 낌을 받은 것이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빼고 이러 저리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맞은편을 보니 함께 문을 지키던 다른 위병도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주위를 둘러보고 있 었다. "헉!" 순간 위병은 숨이 막힐 듯 놀랐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맞은편 위병 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마치 수면위로 떠오르듯 천천히 그 모습을 드 러냈기 때문이다. 조심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순간 세상이 캄 캄해지며 무언가 싸늘한 것이 목을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땡땡땡땡땡땡 귀를 찢는 종소리가 날카롭게 울리며 저택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깥을 향해 고개를 내밀거나 뛰쳐나오며 조용하던 만셀가의 저택은 순식간에 시끄러운 시 장처럼 되어 버렸다. "무슨 일이야!" 수습에 나선 건 휘슬이었다. 평소에는 구석에서 농땡이를 피우거나 하 녀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일쑤인 그였지만 일단 비상시가 되자 제일 먼저 사태 파악에 나선 것이다. "누가 비상종을……." "꺄아아악!" 휘슬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하녀의 귀를 찢는 듯한 비명소리였다. 휘 슬이 고개를 돌리자 하녀 하나가 저택 정문을 향해 손짓하며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몇 개의 비명소리가 더 터져 나왔다. 휘슬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인상을 썼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에 찬 두 자루의 숏 소드에 닿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았다. 정문에는 아직도 피를 내뿜고 있는 시체 두 구와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지키는 사람이 없어진 정문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짧은 금발을 휘날리는 푸른 눈의 남자, 지크 힐트였다.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