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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 스가랴 3-4강 (2009년 여름 수련회)
3 강
(2009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사건이 나올 때 분화구(일종의 화산) 에서 사건이 나옵니다. 분화구에서 사건이 나오게 되면 이 사건은 능력을 발생시키고 이 능력은 새로운 자아(몸)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지난시간 끝부분에서 말씀드렸듯이 분화구에서 사건이 나오게 되면 이 사건은 분화구에서 나온 사건이고 이 사건이 능력이 되어서 여기서 몸이 만들어집니다.
이 분화구에서 나온 본래의도가 우리 몸에 능력을 가하게 되면 그 몸에서 자아가 나오는데 그 자아는 분화구 밑에 숨어 있었던 속성이 자연스럽게 발산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 하는 것은 전혀 우리 본래 의도했던 것과는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공부 좀 잘 해서 좋은 학교 졸업하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결혼해서 애 잘 낳고 잘 살면 되는 그것 뿐이에요.
그것은 누구의 증인이냐 하면 나의 증인되기를 원했던 겁니다. 나의 증인되기를 원했는데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뭔가 내가 의도하지 않는 변화가 어느 구석에서 출발이 되어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무→유으 창조한다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제가 두 가지를 이야기했지요.
하나는 유→유이 나오는 방법인데 여기서 나온 것이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시간관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관은 과거 → 현재 → 미래으 나아가는데 그 방법은 여기에 있는 과거의 원인이 내가 되어서 현재를 이루고 그 현재는 원인이 되었던 그 기대한 것을 미래에 달성한다라는 쪽으로 이미 있는 우리 몸을 유→유으 몰고 간다는 말입니다.
만일 내가 고 3이라 합시다. 그러면 공부 안하고 가야산까지 수련회에 왜 참석했어요? 고 3이면 공부를 해야 좋은 대학 가잖아요. 이것이 유→유으 나오는 것이니까 이런 결과로 나온 미래의 유은 새로울 것이 없어요. 내가 예상한 것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자기증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에 반해서 무→유으 증거가 되려면 첫째 이 유이 무엇으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有(유)→無(무) 로 바뀌는 경험을 해야 됩니다.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아, 지금까지 내가 有라고 여겼던 이것은 착각이었구나. 하나의 이미지, 내 자아에서 올라온 상상에 불과했구나.
이렇게 유를 무로 돌리고 무가 된 이 상태에서 다시 유가 되어 버리면 무에서 유가 되는 이 몫, 이 공로의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무를 유로 돌렸던 다른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고전 15:10) 라는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일을 했지만 내가 잘나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나를 몰고 가는 것은 다른 세계가 와서 그렇고 다른 분이 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되면 여기서는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無로서 有로 나를 있게 하신 그 주님을 증거 하는 거죠.
사도바울은 有에서 有, 이것을 肉(육)이라고 했고, 자기 증거가 아니라 無에서 有 이것을 가지고 육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해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요 3:3) 유에서 유로 가는 것이 좋기는 좋아요.
나는 예수고 귀찮고 하늘나라도 귀찮고 나는 나만 있으면 돼. 문제는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배짱 센 사람들은 그까짓 거 하늘나라 안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아주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 안보면 그만이지 뭐. 지옥도 구경 좀 하자. 지옥도 한 번 들여다보고. 본인이 지옥 가겠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의 증인으로만 살겠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났고 내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뽐내는 것으로 평생을 보내겠다는 거예요. 나는 너를 꺾었어. 나는 너보다 더 뛰어나. 너보다 목회 더 잘해. 너보다 아는 것이 다 많아. 그런 식으로 평생을 가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소리할 때 그 소리에 동질성을 이룰 때 그 사람은 그런 교회에 다니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교회 자랑하러 왔다. 그래? 자랑해라 그리 되려면 우리교회의 역사가 있어야죠. 왜? 역사라는 것은 유→유 로 할 때 이 유와 유 사이의 연속성을 끄집어 낼 때 그 연속성을 역사라고 합니다. 이 역사를 묵사발 내는 것을 가지고 묵시 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가 80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말은 우리 교회는 육이거든 그 소리입니다.
뽐내겠다는 소리지요. 어떻게 80동안 그런 성과를 얻었는가? 행함이 작용했다는 겁니다. 어떤 행함? 철야하고 성경쓰기 하고 새벽기도 하고 교인들을 프로그램으로 돌리고, 행함이 작용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 받는다 하는 그것은 뭐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이렇게 넓은 면이 보이는 카드처럼 서 있으면 안되고 옆으로 얇은 막처럼 서게 되면 우리자신의 면적은 사라지고 여기서 책에 기록된 것만 구원된다는 무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반면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세력, 다시 말해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너는 의인이 될 수 있어. 너는 선 쪽에 설수 있다이 하는 강력한 선악과 쪽에서 밀어붙이는 강력한 세력이 하나의 얇은 판막이 같은 우리의 몸으로 두고 서로 경쟁하는 그런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습니까? 영적전쟁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내부에서는 행함으로 나를 의인 만들고 싶고, 악을 사라지게 하고 나로 하여금 의인으로 우뚝 서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나로 하여금 그것을 오호라 나는 곤고하다 라는 식으로 피곤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다른 것에 눈돌리게 하는데 그것이 뭐냐? 나는 주 여호와로 인하여 찬송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행함과 관계없이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내가 감당해야 할 이 행함의 피곤한 면을 주께서 예수님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우리에게 주어질 모든 죄를 그에게 담당시킴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여기에 선악적요소로서의 법을 따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법을 따라서 구원받는다, 하는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생명의 법은 우리의 몫이 거기에 포함이 안 됩니다. 어떻게 행하느냐 가 생명의 법에 다시 개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저는 분화구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설명이 필요하고 어렵습니다. 사건, 낯선 사건, 내가 예상 못한 사건, 왜냐하면 과거 - 현재 - 미래가 되어 버리면 여기서 미래라고 하는 이것은 항상 내가 예상한 것 가지고 미래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통 하나님께 선택권을 넘길 때 항목을 서너가지로 정해서 줍니다. 불교 중에서도 유식불교 같은데 보면 꼭 네 가지를 정해서 줘요.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있다.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없다. 나는 저 빵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나는 저 빵을 먹을수 있는지 없는 다 알수 있다.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를 설명해요.
불교가운데 제 1기불교, 초기불교는 소승불교이고 제 2기불교는 중간불교이고 세 번째가 유식불교인데 유식이란 똑똑하다 할 때의 유식이라는 말이 아니고 의식만이 유일하다는 의미에서 유식 이라고 한 겁니다. 의식은 남고 색은 다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유식불교에 있어서 인간의 자아는 없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자아는 없으면서 윤회는 해야 되기 때문에 난처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자아는 없으면서 윤회는 해야 되기 때문에 윤회하는 그 자아는 뭐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유식불교, 식, 의식만 유일하다는 쪽에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두가지 층을 나눕니다. 하나는 외부의 층인 표층층이 있고 또 하나는 심층층이 있어요. 표층에서 심층으로 다시 심층에서 표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뭔가의 요소가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종자(씨앗)라고 합니다. 인간의 씨앗이 있는데 과거의 모든 선악적인 행함이 업(카르마)이 되어서 그 업이 종자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종자가 계속해서 괜찮은 종자가 되려면 41단계의 성화론적 수양을 해야 돼요. 다른 말로 하면 절에 돈내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신은 부처 됩니다 라고 하면 절에 안오잖아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교회를 왜 옵니까? 집구석에 있어도 믿음으로 구원되는데. 사람들을 교회에 불러낼때는 꼭 돈이 되는 쪽으로 불러내요.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학원수강료 내듯이 훈련비 내라는 그 말입니다. 구원받는 데는 교회가 필요 없지만 훈련받는 데는 교회가 필요하니까 교회 나올 때마다 식사비 천 원씩 내라는 그 말 아닙니까? 식사비 천 원씩.
식사비로 제하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겠지만.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불교입니다. 불교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인지 절간인지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런 거예요. 불교를 공부해 보면 이게 교회네 이렇게 됩니다. 교회를 공부해 보면 불교네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We are the world, 하면서 다같이 손을 잡는 거예요.
그래서 똑같은 거예요. 공이나 신이나, 성령이나 법칙이나 다 똑같은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을 가지고, 그것은 불교의 종자설과 관계있다고 하고 또 불교의 자비는 기독교의 아가페의 사랑과 관계되어 있다고 하고, 이렇게 다 연결해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예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건은 어디서 사건이 터지는 줄 몰라요.
모르는데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그 언저리에 흔적이 남아요. 마치 한라산의 백록담처럼 터져버리면 터진 구멍에 언저리로 흔적이 생기지요. 그 언저리 생긴 그것을 보고 아하, 사건이 터졌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언저리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유에서 유 로 잘 나가다가 총맞은 것처럼 뻥, 하고 뚫립니다.
총 맞은 것처럼~ 총 맞은 것처럼 뻥, 하고 구멍이 뚫려 버릴 때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잘 나가다가 뭔가 뻥, 하고 구멍이 뚫려버립니다. 그게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에 총맞은 것처럼~, 이런게 나오던가? 하시는 분, 보세요. 여기 나옵니다. 총 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없어요. 그것쯤은 예상 하셨지요? 다니엘 8장입니다.
다니엘 8:27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여기 보면 이에 다 다니엘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혼절하여 왜 갑자기 혼절합니까? 왜 혼절하지요? 그냥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꼬박꼬박 주일날 예배 잘 참석하고 오후예배는 예식장 가고, 한주간 잘 살다가 그 다음 주에 주일날 또 오고, 그러면 될것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봉사 하나도 안하고, 성가대도 안하고 주일학교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예배는 이벤트참여 해서 구경하듯이 하고 가면 되잖아요. 문제 될 것이 뭐가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교회의 예를 들은 겁니다. 아침 안 드시고 오셨다면 오전 예배 마치고 점심 드시고 가면 되고 아침 드시고 오셨다면 일찍 가시면 되고. 신앙생활 참 쉽죠 잉! 신앙생활 뭐가 어려워요. 오전 11시 예배 같으면 11시 15에 와요. 와서 설교만 딱 듣고 가면 돼요. 뭐가 어려워요. 그런데 여기에는 외부가 간섭을 한다니까요. 그래서 혼절해요.
혼절한다는 말은, 이것 참 하나하나가 다 어려운데, 아직 다니엘 1장도 안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이 정리 안 되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어제 밤늦게 의사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선생님이 자아를 이야기해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자아란 이미지이기 때문에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이란 몸이 있는 거예요.
몸에서 일어나는 이미지가 그때 그때마다 자아라는 개념으로 힝상 급수정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금 다니엘에게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혼이란 없는 거예요. 영혼은 몸이 가지고 있는 체험의 덩어리를 영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만든 것이 아니고 몸을 만들었어요. 이것을 가지고 히브리적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이란 몸+영혼 이라 해서 이 영혼을 영혼불멸설로 당겨서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는다고 해서 이 영혼을 자아의 대체물로 삼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종자설입니다. 이것이 헬라철학의 플라톤에게서 나왔다고 이야기들 하는데 이것은 플라톤 뿐만이 아니고 그 당시 부처도 마찬가지고 공자든 뭐든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몸을 만들어놨어요. 이 몸이 투과성을 가지고 있지요. 제가 아까 말한대로 이렇게(정면으로) 서지 말고 모로(옆으로) 서라 이 말이죠. 여기에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 몸이 무슨 몸이냐 하면 혼절하는 몸이 되었어요. 혼절하는 몸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혼절했다 고 생각하는 거예요.
꼭 여기에 누구를 집어넣어요. 나을 집어넣어서 자아 중심적으로, 이것을 주체라고 하는데, 자아 중심적으로 삼는 겁니다. 미셸 푸코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바람피운다는 이야기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말이다. 그전에는 바람피운다는 말이 없었다. 사회가 법 감정을 새롭게 만들어준 거예요.
다윗이 바람피웠습니까? 사람들은 그 자아가 속해있는 사회적인, 문화적인 것들을 여기에 입력을 시켜놓고 이것 가지고 그 자아 중심으로 과거에 있는 선배들 사고방식까지도 다 뜯어 고치려고 해요. 이것은 인간도 아니야 라고 하면서요. 선배가 벌떡 일어나면 완전히 빠따 칩니다. 이게 어디서?
하나님께서는 몸을 만들어 놨어요. 이 몸은 외부로부터 반응될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서 외부의 반응에 따라서 몸의 운명이 결정 나는 그런 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몸은 어떤 원인이 있으면 쇠퇴하게 되어 있고 어떤 원인이 있으면 이 몸은 천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흙에 속한 형상인 장막집이 없어지면 새로운 장막집이 있는데 그것이 하늘에 속한 형상이다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해와 같이 빛나리라이 합니다. 빛난대요. 성형수술, 쌍커플, 필요 없어요. 태양이 쌍커플 수술 하는 것 봤습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화장발로 변화산에서 그렇게 빛이 났습니까? 보톡스를 집어넣어서 당겨봤자 다른 쪽에서 다시 당겨져서 일그러집니다. 쌍커플 수술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쌍커플수술을 해도 어떤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낯선 사건 때문에 수술했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시켰다고 주님을 증거 하면 되는데 꼭 나는 아름다워야 한다은 자아 때문에, 자기의 과거로 인한 것 때문에 수술하니까 그게 죄라는 그 말입니다. 쌍커플 수술하는 그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왠지 하고 싶네의 그 왠지가 뭐예요.
어떤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 말입니다. 면접은 봐야 되지 눈썹은 뭉개졌지 그러니까 해야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대해서 탓하지 않습니다. 방향성입니다. 수학에서 말하는 벡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하자. 지금 몸에서 나온 사건인 혼절한다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시간론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흔히 하는 대로 과거 - 현재 - 미래가 우리의 심리적인 시간관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시간은 영원히 흐른다이 했는데, 시간이 뭐냐고 물으면 모르지만 질문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시간이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소리를 했어요. 과거 - 현재 - 미래라고 할 때 문제가 이 과거, 현재, 미래를 누가 생산하느냐 하면 지금 우리 몸이 생산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은 무슨 몸이냐 하면 유에서 유, 이것을 보존성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계속 자기를 보존하려고 해요. 자아를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보존하려고 하니까 덩달아서 자아는 이미지이니까 아, 나는 계속 살아남아야 돼라고 자아이미지로 여겨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갑자기 치통이 와보세요. 갑자기 이미지가 달라져요. 고마, 칵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아에 달린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몸에 달렸어요. 모든 것이 영혼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영혼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달라지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은혜 받아서 야, 이제 내가 혼절했다 하다가 옆집 개가 대문에 똥싸놓은 것 보세요. 갑자기 은혜 받은 것 다 놓쳐 버리죠.
오늘 대판 따져야 되겠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인간의 영혼, 자아, 이런 것은 붙잡을 만한 것이 없어요. 몸은 또 우리가 붙잡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외부환경에 의해서 변동되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졸거나 잠자서는 안 된다. 깨어라. 깨어라 해도 나중에 강의시작하고 10분 지나보면 그 때 이미 꿈속에서 깨어라. 깨어라 하고 아이고 잘 잤다 합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못 이겨요. 그래서 정신은 신체적인 장애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신적 장애가 아니고요. 정신이라는 말은 사실은 없는 말이에요. 두뇌에 문제가 있고 몸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할 때 사실은 현재라는 것이 없고 과거와 미래 그 사이를 뭐라고 할까, 에이 현재라 하자 그래서 현재가 된 거예요.
현재 지점에 와 봐야 시지푸스 신화에 나오는 산처럼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꼭대기의 면적이 거의 없어요. 올라가서는 곧장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여기가 정상(현재)이라고 할 때 이게(올라가는 능선) 과거이고 이게(내려가는 능선) 미래라면 어떤 순간도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몸을 자기 몸이라고 하니까 시간 따라 같이 따라 가주는 거에요.
이번에 로마수영대회 보니까 카메라가 선수를 계속 따라가 주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시간이 흘러가니까 몸이 같이 따라가 주면서 저것은 내시간이야, 저것은 내시간이야, 하면서 자꾸 일방적으로 자기시간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왜? 시간이 있어야 원인과 결과를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게 누구에게 최면을 거는 겁니까? 시간은 관계없어요.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거예요. 시험칠 때 동그라미 하면 정신 번쩍 차린다는 거예요. 해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렇게 자기시간으로 잡아당기다가 길에 우연히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것은 부산에서 강의한 내용인데 다시 하겠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생을 보니까 행색이 초라해요. 그때 옥경이가 나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도 밝은 등불이 아닌 희미한 등불아래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고 주름살도 잔뜩 보이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는데 물어보면 아무 말이 없어요. 옥경이가 아무 말이 없다고.
그때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이 세상을 나의 시간으로 독점했다고 여겼다가 같은 나의 친구도 내가 내 시간만 몰두할 그 시간에 카메라처럼 같이 움직인 거예요. 그렇다면 지난 과거의, 예를 들어 전두환이 어떻고 박정희가 어떻고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창생을 만나고부터 이 과거의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고 과거의 전부 속의 하나의 일부가 나의 기억으로 포착이 된 것 아닙니까?
지금 무슨 뜻인지 제가 말하는 취지를 모른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갔다. 바닷가에 가서 아, 옛날에 사법시험 떨어지고 여기 와서 자살하려 했는데 지금 판사가 된 이 마당에 다시 여기와서 그 때 일을 회상하니 그 때 그렇게 했더라면 어쩔번 했는가 하면서 바닷가를 돌아 나오는데 그 옆에 어디서 많이 본듯한 여자가 보이는데 고등학교때 짝사랑했던 여자친구라는 말이죠.
너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하고 물었어요. 나에게는 그 바닷가가 옛날 젊은 시절에 시험에 떨어져서 낙심해서 찾아왔던 그 바닷가인 반면에 거기에 찾아온 옛날 여자친구는 결혼했던 남자와 이혼한 상태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 전세상의 온 움직임이 단지 나를 위한 과거인줄 알았는데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한지 이 나라는 몸이 과거를 잡는 것이 아니고 과거가 생산한 거예요.
누구를? 현재 오늘의 나를 생산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생산한 전부를 모르면서 어떻게 내가 누군지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진짜 무지 몽매하죠. 세상은 같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그 다음 물음은 뭐냐? 그렇다면 목사님, 전체 우주의 과거는 무엇이고 현재는 무엇이고 미래는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다니엘이 혼절하면서 알았던 다니엘의 묵시적 계시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걸 배우러 온거예요. 내가 이것을 알아서 내 몸의 소망을 어떻게 이루냐, 그것이 아니라 나라는 것은 이 전체의 해운대파도의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것을 아는데서 멈추면 안되고 도대체 이 전체가 어떻게 움직였기에 오늘날 나는 이모양 이꼴로 살아가고 있느냐?
땅은 한 15만평 밖에 안 되고 재산은 한 2천만 원쯤 밖에 안 되고, 애는 시험쳤다 하면 1등으로 합격하고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서 이런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 시간관만 가지고 있게 되면,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탓하면서 데모하고 시위하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나 전체를 알면 바로 내가 마치 부모를 탓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내가 누구를 탓할 수 없고 현재 내가 이런 모습이 된 것에 대해서 모든 이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지요. 너이 있음에 오늘날의 나 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지요. 그게 바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그 외곽에 있었던 낯선 시간대가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침범한 겁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침범한 거예요. 성령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을 다 가지고 있거든요. 우리는 성령받기 전에는 육이에요. 육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 시간밖에 몰라요. 교회 개척했다. 성공해야지. 이게 누구교회입니까? 내교회지요. 똑똑한 부교역자가 와서 설교를 잘하면 저게 어디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저 인간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져서 매장을 시킬까 하는 그런 것만 계산 할 수 밖에 없어요.
평소에 그 똑똑한 부교역자가 안 오게 되면 천하의 한 경직 목사고 온유 그 자체고 자비 그 자체이며 (목소리 깔아서) 할렐루야 하고 항상 점잖고 항상 인자한 모습인데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이 오니까 이것은 밤새도록 잠을 못자지요. 저놈을 새벽기도를 빼? 저놈의 입을 본드칠을 해서 붙여버릴까? 심방을 시키지 말어? 어디서 자아의 것, 어디서 내 것을 건드리느냐.
이것은 제가 교회의 예를 들었지만 일반 약국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짜로 박카스도 주고 해서 할머니들한테 약국 인심 좋다고 소문났는데 바로 앞집에 큰 약국이 생겼어요. 그 약국은 담배도 팔고 온갖 것 다 팔아요. 졸지에 매상이 30퍼센트로 확 떨어졌을 때에, 그런 사건이 오기 전까지는 천하의 인자스럽고 성령이 충만하고 진짜 훌륭한 사람인데 갑자기 라이벌이 등장하니까 이것은 마귀도 그런 마귀가 없어요.
이것을 계열이라 합니다. 사건과 사건을 연결시키는 것, 계열이라 하는데 이렇게 해 볼 때 작게 나를 봤던 그 범위가 좁으면 항상 집중이 나에게 되지만 그 범위가 넓어버리면 서서히 자기가 해체되어 갑니다. 그러면 이 전체적인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합니다.
이 무, 여기서 능력이 올라오는데 여기서 능력이 올라올 때 두 가지가 올라와요. 유에서 올라온 것 말고 무에서 올라온 세계는 시작과 끝, 그 내용을 다 함유하고 있는 계시가 올라옵니다. 위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흠집이 나는데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시작과 끝을 예수님의 비밀, 예정하심, 예수님의 복음, 이것은 천국 가는 노선입니다.
이렇게 천국 가는 노선이 올라오는 반면에 하나는 악마의 지옥가야 될 노선도 올라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악마라는 것은 전부 영적인 존재가 되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육적인 여기서는 관심이 없었지요. 이렇게 분화구처럼 사건화 되어서 와버리면 예수님의 천국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야 될 악마도 이렇게 계시하고 있다는 그 내막이 우리에게 사건으로 주어지게 되면 이 유 는 자아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막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주도권이 예수님도 우리보다 세고 악마도 우리보다 세잖아요. 더 센 분 때문에 자기 몸을 자기가 관리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게 뭐냐? 혼절입니다. 혼이 나서 기절할 일이라는 말이죠. 또는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합니다. 또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내가 그 사람의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만 온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를 않아요. 영적인 내막은 악마가 지옥간다는 내용과 함께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이 다가와 줘야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하나의 신화나 전설이 아니고 그것이 지금 실제 벌어지고 있는 상황으로 믿어지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제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다니엘에 두 가지 몸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불타는 몸, 또 다른 하나는 불타지 않는 몸입니다. 그 다음에 사자에게 먹히는 몸, 사자에게 안 먹히는 몸.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몸이 되고 싶어요. 제가 묻는 것이 잘못이죠. 불타지 않는 몸이 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사자에게 안 먹히는 것을 감사히 여길 때 여기서 주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적은 내 몸이 괜찮은 몸이 되는 그것이 기적이 아니고 다니엘이 남이 꾼 꿈을 본인이 알아채는 그 기적이 내 몸이 불에 안타는 그것보다 더 월등한 기적이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불타지 않았다고 해서, 한 번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또 다시 불에 안타고 물위를 걷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 말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사건이 한번 괜찮은 사건이 왔다고 해서 그것을 좋아라 할 것이 없습니다. 사건은 두 번 다시 반복이 안 되는 것이 사건이에요. 홍해사건 두 번 다시 반복 안 되고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적인 기적보다도 영원히 고정화된 그것에 참여하게 되면 그것이 더 월등한 축복이 되겠지요.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자굴에서 사자에게 먹히냐 안먹히냐 하는 것이나, 다니엘의 친구들의 불타냐 안 불타냐 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일뿐이지 그것은 그들에게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를 낳게 한 더 원천적인 능력, 그것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더 감사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봤던 그 계시하고 오늘날 성도들의 십자가를 안 그 계시하고 어느 것이 더 월등한 계시이겠습니까? 그거야 십자가죠.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만날 불에 타는지 안타는지 라이터 켜서 시험해야 되겠습니까? 다니엘이 기껏 알아봤자 세례요한보다 모르고 세례요한이 기껏 안 것은 신약시대에 성령 받은 성도가 아는 것보다 다 작은자고 더 몰라요.
우리는 마지막, 최종적인 것을 다 알아버렸어요. 따라서 아는 이것이 어느 정도로 좋으냐 하면 죽어도 괜찮을 정도로 괜찮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있다!(갈 2:20)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동의하지만 그리스도 없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고린도후서 4장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어려움 속에 집어넣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죽음에 넘기우며, 내안에 생명 있다! 봐라 끄떡없지. 날마다 더 어렵고 육으로서 감당치 못할 시험에 빠지는 것은 그런 어려움가운데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생명이 발산되는 방법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번씩이나 태장으로 맞고 강도의 위협도 당하고.
어제 권사님은 운전하다가 누구를 박으신 모양이에요. 이것은 도로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배가 난파되는 그 위험과. 실제로 사도바울은 로마로 가면서 큰 폭풍을 만났잖아요. 그러한 가운데서도 비로소 그동안 내가 몰랐던, 그런 어려움가운데서도 저 우주의 위대함보다 더 위대한 분이 나와 함께 있음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혜택,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몸은 없어져도 새로운 몸이 온다는 것, 이것은 내 몸이 내 자아를 유지하거나 간직할 그러한 모든 것은 필요치 않아요. 쉽게 말해서 너는 너에게서 손을 떼라 그 말입니다. 너의 시간관은 주님의 시간관에 맡기고 너는 손을 떼버려라. 뗄 때 이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하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수를 부으면서 눈물로서 예수님의 발을 씻길 때 그때는 이 여인에게는 남들의 시선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요. 뭐냐 하면 죄를 알 때 그는 인생의 전부를, 진리를 해탈했습니다. 자기 죄를 알면 부처가 따로 없어요. 자기 죄를 알면 부처입니다. 자기 죄를 알면 모든 것을 통달해 버렸어요.
그런데 이 죄는 놀랍게도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에요.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고 물려받은 유산입니다. 찬란한 유산이죠. 위대한 유산이고.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시 51) 그전까지는 어떤 것 때문에 힘들었는가 하면 내가 죄지었다는 그 문제 때문에 책임감 느끼고 마음 아파했던 그 모든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갔어요.
인생이 뭡니까? 인생은 한방 부르스라고 하잖아요. 한방에 확 간다는 말이죠. 왜 지금까지 죄의 출처를 나로 삼았습니까? 나이 죄의 출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죄인중의 괴수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안되는가 지금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왜 내가 책임지려고 하느냐 말이죠.
왜 그랬어요. 멱살 잡고 따져 묻고 싶어요. 헌금 안했다고 죄의식하고 교회 한번 빠졌다고 죄의식하고 왜 그래요? 어디서 구원받는데 교회 몇 번 왔는지 그것을 묻습니까? 교회 몇 번 빠졌어? 주의 해. 다음 중 교회 몇 번 빠졌습니까? 그런 것을 시험칩니까? 천국갈 때 아주 멋지게 묘사한 대목이 나와요.
<엽기적인 그녀>라는 그 영화에 보면 전지현과 차태현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당당하게 나이트클럽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머닝에서 증(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내밀면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요. 봐라! 봐라! 나를 혼절하게 했던 그 묵시를 가지고 보여주는 겁니다. 내것은 가진 것이 없으나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그리스도안에소속되었습니다라는 그 소속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스가랴에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사탄이 보는 앞에서 새 옷으로 갈아 있습니다.(슥 3:1-5) 한번 봐라. 누가 저 사람을 더럽다고 하느냐 갈라디아에서는 그것을 그리스도로 옷 입는자(갈 3:27)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어른이나 어린애나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다(갈 3:28,29)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걸치고 있는 옷이 이 옷이냐 아니면 누구의 옷이냐 그 말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의 옷을 입었을지라도 그 옷이 더럽혀 진다면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옷은 어디서 나온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간의 힘으로 더럽히려고 더럽히려고 해도 안 더럽혀지는 옷이에요.
더럽히려고 온갖 짓을 다 해도, 사창가에 가고 술을 처먹고 온갖 짓을 해도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옷이에요. 아마 원단이 꽤 괜찮은 원단인 것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영의 옷은 이미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죽음의 세력을 거뜬히 이겼음. 이라는 그 정보가 포함된 옷이거든요.
너를 정죄하고 너를 지옥 보내는 모든 바탕이 이미 삭제되었습니다, 라는 십자가구원을 거쳐서 주어진 옷이기 때문에 그 옷만 걸치면 불속이나 물속이나 어떤 죄속에라도 여러분들은 그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 주신 옷, 기름부음을 감사할 줄 모르고 어떤 목사를 본받아야지, 어떤 집사를 본받아야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본인들이 집사 되고 장로되어 보세요. 그게 본받을만한 집사 장롱인지.
장로 되어 보세요. 진짜 장로라는 것이 본받을만한 것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지. 왜 장로되느냐 하면 구원이 장로 되는 것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장로된 거예요. 그 무관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장로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전체과거지요. 전체과거가 나로 하여금 어느 교회의 장로 되게 한 겁니다. 뭔가 과거가 나를 밀어서 된 거예요.
그것을 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막장 드라마를 해 봅시다. 해변가에서 어떤 남자가 자기 옛날의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여자친구의 남편이 우리교회를 다니는데 정수기 팔려고 왔다는 거예요. 한, 두 번 다니면 정수기 하나 팔아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개척교회 하면서 한 사람이 아쉬운데 정수기 팔아주는 것이 문제인가 한번 뚫어보자. 저가 복음 들으면 오래 있겠지.
여러분, 정수기 팔려고 온 사람이 오래 있는 사람 없습니다. 정수기만 팔면 대충 떠납니다. 다른 교회 가서 장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을 나쁘게 생각했는데 그 나쁘게 생각한 그 사람의 아내가 분명히 옛날 첫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마구 엮이는 사건들이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이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입장에서 엮였다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는 왜 저 사람을 20년만에 왜 만났을까 라는 식으로 저쪽에서도 엮이는 거예요. 이 모두를 엮는 그 시간대, 그 시간대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는 저인간은 나하고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엮이는가? 라고 하지만 모든 엮임은 다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함인가 하면 복음과, 그리고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뭐가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무서운 심판, 지옥이 있다은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배치된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는 이 교재에서 힘의 좌표라고 한 거예요. 마치 울렁울렁하는 물침대가 있다면 한 사람이 이쪽에 서 있으면 갑자기 저 사람이 압력을 받게 되겠지요.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저쪽에 어떤 일이 발생되면, 이것을 버터플라이효과(나비효과)라고 하는데, 상해에서 나비가 날개짓 하면 뉴욕에 태풍이 온다는 것, 초기의 세미한 변화가 예상밖의 엄청난 결과를 난다는 이론인데, 이쪽의 어떤 영향이 나는 몰랐는데 저쪽에서 어떤 일이 발생되어서 이렇게 나에게까지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내가 되고 싶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아니, 말을 다시 합시다. 내가 되고 싶은대로 되겠다는 것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주위 사항이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엄마는 바람나서 집 나가버리고 아빠는 술먹고 난동이나 부릴 때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내 인생 내가 산다 라고 할 때 주위에서는 와, 자존심도 대단하다. 저 젊은 나이에 저렇게 험한 일도 다한다이 하면 당신은 내 비밀을 알아? 내가 어디서 엮였는지 모르지요?
남들 보기에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자기를 엮어놓은 긴 과거가 있는 겁니다. 그 모든 과거는 사실은 한 구멍에서 나왔다. 그게 영과 육을 통한 구멍에서 나오는데 다니엘서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 영적인 그리고 육을 통한 구멍에서 나오는데 그게 바로 어디냐? 다니엘서에서는 성전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전이었는데 다니엘서에 와서는 그 성전을 인격화시켜요. 성전이 인격화되면 뭐가 되겠어요? 인자이 됩니다. 그 인자되기 이전에 먼저 성전 없어도 하나님은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자야 라고 호칭하는 인물이 두 사람 등장해요. 하나는 에스겔이고 하나는 우리가 공부하는 다니엘입니다.
성전 없다고 하나님이 일을 안 하시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형태의 성전이 바로 다니엘이고 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꾼 남의 꿈까지도 다 알아챌 정도로 하늘과 땅이 통하는, 무와 유가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출처가 된다는 것을 다니엘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에서 쏟아내는 그 성전 그것은 기존의 성전과는 달리 물이 흐르는 성전입니다.
물이 흐르는 성전이라는 말은 청계천에 교회 지었다는 말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예수 인자에게서 성전이 나온다는 말이고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그 성전이 누구입니까? 우리 몸이죠. 우리 몸으로 된 성전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니까 이 해석이 뚱딴지 같은 해석들이 나오는 겁니다. 담배피우지 말라는 등. 담배피우면 우리 몸의 구조가 시커멓게 되고 파괴된다는 것이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몸은 성전이니까 네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유교에서 이 신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라 는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10분 쉬고 계속합시다.
4 강
(20090803-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다니엘서 전체가 점차점차 역사세계에서 묵시세계로 당겨져 올라가는데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지은 성전은 이미 날려갔습니다. 날려가서 성전이 없으면 하늘과 땅의 연결통로 자체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성전은 없는데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 인물이 장차 될 성전의 인격화를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 등장해요.
그런 성전이 인격화된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그 인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자 라고 합니다. 김 세윤 교수를 비롯해서 수많은 신학자들이 인자(사람의 아들) 개념을 가지고 논문을 썼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언약을 이루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언약을 이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약이 생산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유지되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성경을 보는 모든 신학자들의 사고가 꼭 반대로 되어 있어요. 인자가 뭐냐? 인자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는 답변을 안하고 인자는 이런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인자인데 병을 고치셨다. 그래? 인자가 뭔데?
여러분, 지금 참외를 드셨잖아요. 김 집사가 참외를 먹었다. 김 집사가 누구신데요? 참외 먹었다. 커피 먹었다. 강의시간에 잤다. 아니, 김 집사가 누구냐니까요? 김 집사가! 인자가 누굽니까? 인자가 누구일까? 성경을 찾아보자. 인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 인자는 병을 고친다. 그거 말고 인자가 누구냐는 말입니다. 인자가!
하여튼 무슨 수련회를 하든 성경공부를 하든 노트필기 적은 것은 가득해요. 노트 가득하면 뭐합니까? 이미 다 되어 있는데. 이 성경에 다 있는 것 그대로 쓰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기 있는 이것이 활자로 더 잘 되어 있지요. 이 성경이 내 몸에 낯선 사건으로 부딪혀서 내가 고백하고 토해낸 그것이 뭐냐? 이렇게 되어야 돼요.
이 성경이 살아서 내 바깥에 있던 성경이, 내가 말씀을 지킨다고 여겼던 것이, 말씀이 나를 생산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 그 열매들이 나올 때 그게 바로 성경공부 아닙니까? 새삼스럽게 성경 귀절 외워서 뭐할 것입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나이 60되어 보세요. 다 잊어버리지. 성경귀절 외우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잘 외우지요.
신천지집단도 그런 것은 잘하지요. 제가 영주에 있을 때인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찾아왔어요. 꼭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 오는데 여호와의 증인들도 남자숫자가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와서 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 제가 조지레드의 신약신학 뒤에 붙어 있는 관주성경귀절 정리한 것만 해도 50여페이지가 되는데 그걸 죽 보여줬어요.
이 책 한권을 쓰는데 동원된 성경귀절을 보라고 죽 보여줬어요. 그들이 그냥 갔습니다. 왜냐? 자기가 외운 것보다 더 많거든요. 성경 귀절을 외워서 뭐할 거예요. 성경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인데. 성경 귀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오면 안돼요. 성경귀절 하나가 성경전체의 내용을 담고 내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성경귀절 하나가 들어오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들어오면 안돼요.
유니버시아드 대회나 올림픽대회 할 때 보면 카메라에 이런 것이 잡히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 소리 안하고 피킷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피킷에 Jhon 3:16' 라고 써있어요. 존이 뭡니까? 요한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이 성경에 있는데 그것을 알아서 뭐할건데요? 그 해석도 엉터리로 해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에서 세상이 누군데? 몰라요. 세상은 세상이죠. 그러면 지옥은 없게요? 하나님이 세상을 다 사랑한다면 지옥은 왜 만들어놓았습니까? 사랑한다면 아무소리를 하지 말아야지요. 엄마가 있고 여기에 자식이 있다면 그 자식을 보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사랑 안한다는 뜻이잖아요. 사랑하면 그저 밥만 해주면 돼요. 주님이 사랑한다는 말은 너 사랑하는 사람 맞아 라고 확인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는 사랑 못받을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 못 받을자가 있는데 너는 사랑받은자가 맞아? 라고 묻는 차원이라니까요.
이걸 제가 다 설명하려고 하니까 참 힘들어요.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다 사랑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한다(요 13:1) 고 되어 있고 또 예수님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에도 보충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나이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 7:7) 이것도 요한일서에 보충설명이 나옵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그의 뜻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뜻을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뭘 해도 우리 뜻이에요.
인자라는 개념이 김집사가 참외를 먹는다 라는 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자 자체가 왜 인자라는 말을 들고 왔는가? 다니엘에 예언된 묵시를 성취차원에서 내가 왔다, 그 말 아닙니까? 에스겔의 인자를 성취하러왔고 시편 8편에 나오는 인자를 성취하는 자가 바로 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자가 뭘 했다가 아니라 먼저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인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그분들에게, 그분이 어떻게 했는가를 찾으면 안돼요, 그 분들에게 'What happen?'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봐야 됩니다. 혼절한다든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외부에서 그분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것을 보셔야 됩니다.
다니엘과 예수님 사이는 외부에서 다니엘을 다루었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본인이 본인을 스스로 다루었다는 거예요. 다니엘 당시에 예수님의 묵시는 성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유지되고 연속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하지 않고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마 15:24) 고 합니다.
전도의 범위가 아예 처음부터 제한적입니다. 아무나 오라. 누구나 오라 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누구야? 다른 말로 하면 탕자 다 나와.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나왔던 탕자가 누구냐 하면 소경, 절뚝발이, 문둥이, 귀머거리, 간음한 여인, 세리와 창기입니다. 세리는 얼굴도 못들고 제가 죄인입니다(눅 18:13)라고 했어요.
막달라 마리아같은 경우에는 눈물로서 예수님 발에 향수를 부었어요. 문둥병자 소경같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한글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 그 대표적인 사람이 자기는 있느나 마나 한 사람이라고 해서 나는 없다 가 아니라 있으나 마나 하다는 것을 더 강조하는 말이 'I AM A DOG'입니다.
나는 있으나 마나 한 개입니다. 왜?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를 개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개입니다. 옳습니다. 개, 잘 하셨습니다. 잘 칭했습니다. 나는 그 언약 통째로 수용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나쁜 짓을 해서 개가 아니에요.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일 오전 설교가 그겁니다. 베드로가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 시간대의 그 원인과 결과, 내가 결심하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은 자기 시간대에 갇혀 있었던 거예요. 거기에 주님께서는 뻥 하고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뭘 가지고? 아니지요. 뭘 가지고? 닭을 가지고. 닭의 소리로 구멍을 뚫었어요.
닭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예언노선입니다. 닭은 예언노선인데 베드로는 자기노선이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가짜였어요. 가짜 베드로. 가짜 나를 가지고 평생토록 살아 온 겁니다. 설교 시간에 이런 예를 들었어요. 베드로가 우는 닭 모가지를 비틀면서 너는 뭐야? 너 왜 우는데 라고 하면 닭은 저는 예언대로 울었는데요.
그러면 닭 모가지를 흔드는 베드로 저는 뭔데요? 그 안에 예언이 없어요. 예언대신 누가 있어요? 내 안에 나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아닙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나는 나 밖에 없는 거예요. 나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노선을 뭐로 바꾼다? 닭 노선으로 바꾸는 거예요.
열두제자를 전부 다 닭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날 교회 점심에 닭고기 나왔어요. 인간이 닭만 못하다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어떤 점에서 닭보다 못한가 하면 닭은 하나님의 예언노선 안에 있는데 베드로는 그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바깥에 있는 베드로를 어떻게 예언노선에 집어넣는가? 그냥은 못들어가요.
예수님이 일단 무덤속에 들어가서 무덤속에 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게 되면 베드로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대속, 대체 대리 대신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이 합류를 가지고 세례라고 하는데 같은 팔자, 같은 운명, 한 덩어리를 만듭니다. 이 팔자가 내 팔자고 내 운명이 네 운명이다. 왜 한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되면 아버지로부터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 왜? 자기 자식이니까. 아버지의 것이 네 것이다. 그것을 유산이라고 하지 않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지요? 기업이라고 하지요. 기업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누가 율법가지고 너희를 폄론하고 비난하겠느냐? 이미 받았는데.
꼭 못 받은 것들이 아직까지도 법 따지고 있어요. 꼭 못 받은 것들이 받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받은 것 끄집어내기만 하면 돼요. 받은 것 끄집어 내면 돼요. 죄는 원래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죄도 물려받았고 죄용서도 물려받았고 뭐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해서 생산된 것이 우리 몸인데.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특별히 율법이 말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나는 나밖에 모른다은 그 죄, 나의 시간관 나의 역사관, 내가 죽기까지 주님 떠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 제가 지난 주일오전설교에 문제 하나 냈잖아요. 다음 중 예수님께 버림받은 사람은? 1) 예수 버리겠다는 사람 2) 교회 받드는 사람 3) 예수님 저주하는 사람 4) 죽기까지 주를 따라가는 사람.
몇 번입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주제 파악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진정 합류가 되었으면 합류되기 이전에 이 작업을 위해서 인자가 무슨 사전작업을 해 줘야 돼요. 그 인자의 사전작업은 다니엘에서 찾아봐야 됩니다. 왜? 인자야 라고 했으니까. 다니엘이 뭘 했다이 아닙니다.
다니엘을 본받자. 뭘 본받아요. 다니엘 본받을 것 뭐가 있습니까? 회개했다고요? 회개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혼절나야 하지요. 다니엘이 자기 맘대로 하는 것 없어요. 남의 꿈을 알아채는 것? 무슨 수로 합니까? 어제 저하고 주무셨지요? 어제 꿈꾼 것 생각해 볼까요? 1) 강의를 잘하는 모습을 봤다. 맞습니까?
그냥 잤지요. 꿈도 안 꾸고. 푹 잤어요. 사람이 가능할 것 같으면 저도 하라이 합니다. 성경말씀 어느 한 구절도 가능한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가능한 구절이 있으면 그것은 여기서 빠져나와서 공자 맹자책에, 윤리책에 집어넣어야 돼요. 성경은 어느 구절도 한 구절도 사람이 지킬만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냥 내 버려둬요. 그렇게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면 혼절이 나든지 뭐가 와요. 제가 말을 잘못했는데 내버려두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와요. 햇빛과 공기를 주시죠. 매일 같이 옵니다. 어제 달 보셨습니까? 시편 138편에 보면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합니다.
달 떠 있는 것만 봐도 신자는 감사함인데 불신자는 어, 달이네 그렇게 합니다. 신자는 달이 그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떠 있는 것을 통해서 뭔가가 와요. 달아, 달아, 누가 만들었느냐? 뭐가 온다고요. 저 달도 뭔가 복음을 위해서 만들었겠지 이렇게 온다고요. 그것도 2초내지 한 3초정도. 너무 길게 잡으면 여러분이 시험 들기 때문에.
이게 인력으로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하는데 그 인자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는 것은 다니엘을 통해서는 모르고 예수님층이 묵시의 원천이기에 다니엘이 먼저고 예수님이 뒤에 오지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아집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길게 있잖아요. 7이레, 62이레, 1이레, 이 중간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계시죠. 그러니까 70이레는 프리즘처럼 묵시층의 원천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래로 쫙 퍼진거죠. 퍼진것이지만 영사기에서 퍼진 그림이 그렇고 필름은 달랑 영사기에 꽂혀 있는 한 장이잖아요. 이 짧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파요 오메가라면 이 역사를 다 모으면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고 끝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 중의 일부가 다니엘의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빛이 영사기처럼 파생되면 여기에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을 선지자라고합니다. 선지자의 모든 고난이, 정 낙원 목사님의 히브리서 설교를 들어보면 죽 나오는데, 예수님의 고난의 실체가 앞당겨서 나옵니다.
노아는 방주, 에녹은 죽지 않고 올라가는 것,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 야곱같으면 지팡이에 의지해서 하는 것, 모세같은 경우는 애굽의 공주 아들됨을 거절하고 노숙자 되기를 원했다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이 전부가 모아지면 예수님의 일대기속에 집중이 된다는 말입니다. 집중이 되니까 군주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야 되거든요. 그렇다면 다니엘에 있어서 모든 고난은 결국 누구의 고난입니까? 원래 원조되시는 예수님께서 악마한테 받을 고난을 인자가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형태로 다니엘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아직까지 묵시까지는 안당겼으니까. 그래서 다니엘 1장에 보면 왕이 먹는 진미(고기)를 먹을래 할 때 다니엘이 뭐라고 합니까? 저는 안 먹겠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트레이너를 보내서 한번 조사해봐라. 체중이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 알아봐라. 맛있는 것 안 먹고 어떻게 체중을 유지하고 건강을 유지하는지 한번 보자. 보니까 고기 안먹고 채소만 먹어도 건강이 유지 되었다는 거죠. 만일에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하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지만, 이것을 우리 몸과 관련시키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웰빙식단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꼭 자기 몸을 위주로 자기 유리한대로 성경을 봐버리면 묵시적존재로 가야 될 해석이 같은 역사의 존재인 나에게로 와버려요. 그 중에 하나의 예가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이 하는데 여러분,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 십일조의 의와 신과 인을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말씀도 못 알아들어요. 십일조도 제대로 못한 우리에게 십일조를 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달빛이고 별빛입니다. 밤에 길을 가면 달빛이 늘 비추지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노사연의 <달그림자> 아닙니까? 저만치 앞서가는 길~. 하나님의 보호 속에 달그림자, 그리고 별빛, 그리고 태양.
여러분 태양 빛나고 있는데 세금 얼마 냈습니까? 공짜지요. 이방인들은 그것 보고도 고마운줄 모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보고 자비를 배워서 우리도 원수를 사랑해야 된다은 것을 안다는 거죠. 이것은 돈 10억을 줘도 그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는 십일조 안 해도 십일조 한 사람만 받는 복을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주신 성령으로 인하여 계속 복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뭘 더 원해요. 복중의 최고의 복은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자식이 애를 먹입니까? 죽으세요. 자식이 눈에 안보일 겁니다. 사실은 자식이 애를 먹여도 그 자식은 복음을 위하여 총괄과거에서 나온 일부가 총괄과거의 일부인 나를 만나서 복음을 위하여 뭔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말썽꾸러기 자식을 만나게 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거기에 집어넣으세요. 말썽꾸러기 자식이 말썽을 부리든지 말든지 오직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깁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가만있으면 여러분 속에 악마가 있고 활동하게 될 것이고 돌아서서 회개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을 인자로 사용하실 겁니다.
다니엘은 먼저 온 인자이고 우리는 나중 온 인자입니다. 먼저 온 인자는 성전을 대치한다면 나중 온 인자는 우리 몸이 주께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인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인자 꼬라지 좋다 하겠지만 하늘나라 가면 육에 속한 것이 다 없어지면 다 같은 천사가 되어서 모든 천사와 같이 영광을 누립니다. 해와 같이 빛날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주께서 여러분을 죽이실 겁니다. 우리 서 장로님같은 경우는 제대날짜가 얼마 안 남았어요. 제가 아주 좋다이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1장에서는 우리 같은 육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들의 생존방법에 다니엘보고 합류하라는 말입니다.그럴 때 다니엘은 우리의 생존방법은 따로 있거든?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고기거든? 하니까 우리는 채소거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좋다. 건강한가 보자 하고 트레이너가 가서 조사해보니까 얼굴이 포동포동 살이 더 쪘어요. 그걸 보고 왕이 아이고 너희들이 믿는 신이 있기는 있구나. 그러니까 몸이라는 개체의 만남을 통해서 한쪽은 자기들의 몸밖에 모르고 한쪽은 뭔가 투과하고 담기는, 하나님의 묵시가 담기는, 장차오실 예수님의 인자하심이 담기는 그러한 몸으로 이미 사용하고 있습니다.
3장에는 다니엘의 세친구가 등장하지요. 나팔을 불거든 금신상에 절하라. 안하거든. 우리는 못하겠거든. 그런데 여기에 무슨 조항을 담는가? 절하지 아니하면 죽인다.(단 3:5,6) 여러분, 죽음이 뭐예요? 『피』라는 책에 나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이란 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없으면? 1) 속시원하다. 2) 무섭다. 몇 번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강도가 죽인다고 하면 1) 속시원하다. 2) 무섭다. 몇 번입니까? 무섭지요. 왜 무서운지 그것을 2천년동안 철학자들이 밝혀내지를 못했어요. 히브리서 2:14이하에 보면 간단하게 답해 놓았습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마귀의 것이기 때문에 마귀가 무서운 거예요.
히브리서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마귀가 무서우니까 우리가 같이 무서워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온 이유가 뭐다? 마귀와 한통속이 되어서 같이 무서워하는 너희들을 죽기 무서워하는 마귀 자체에서 빼내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죽는 것이 안 무서운 사람의 소속으로 옮겼느니라.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교회란 무엇이냐? 교회란 건물이 고딕식이냐 무슨 양식이냐 그런 것이 아니고,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다 그런 것도 아니고 교회란 무조건 음부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교회 올 때는 휴대폰 다 빼놓고 마지막 유언장 쓰고 와도 괜찮다는 그 말입니다. 괜찮다!
십자가가 원래 무덤에만 있어요. 유일하게 자아를 죽이는 무덤입니다. 요새 무덤은 너무 좋게 해놓았어요. 대구우리교회 무덤도 에어컨 네 대나 해 놓았어요. 20명당 한 대꼴로 에어컨이 팡팡 돌아갑니다. 이왕 죽는 것 시원하게 죽자 이 말입니다. 땀 흘리면서 죽을 필요 없으니까 아주 좋은 취지지요. 어느 교회 가도 우리교회만큼 점심식사 잘 안 차립니다.
취지가 뭐냐? 이왕 죽을 것 먹고 죽자 그런 취지에요. 그 가운데서 살려고 교회 왔으면 그것은 왕따 당하지요. 왜 살려고 합니까? 살아서 자기 행위를 보이겠다는 거예요. 죽은 사람은 행위를 포기했는데 혼자 살아서 행위를 보이겠다고 하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신상에 절 안하면 죽인다 그것처럼 마귀한테 절 안하면 죽인다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누구에게 경배하라?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지요. 다니엘의 세친구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모양이죠. 좀 소극적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나는 여호와 섬깁니다. 이렇게 나는 예수 믿는다 고 하면 될 것을 그 소리를 못해서 나는 안섬기겠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지요.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튼튼한 소방관 동원시켜서 용광로에다 그들을 집어넣었어요.
용광로는 포항제철 생각하면 돼요. 그 포항제철 화로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약 200도 내지 300도 되면 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같은 세포를 가지고 있는 몸인데 세친구를 집어 넣은 소방관들은 타죽어 버리고 안에 들어간 사람은 안에 들어가 보니까 네 번째 사람하고 미팅하고 있더라는 말이죠.
강강술래 하고 있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지요. 불속에 들어가면 네 사람이 있어요. 왕이 이들을 불속에 집어넣었는데 이 불이라는 경계선 안에서 바깥을 볼 때 그 바깥이 불타는 세계였습니다. 바깥쪽은 불타는 세계고 도리어 안쪽이 불이 안타는 세계였습니다. 왜? 인자되시는 분이 합세하니까. 이게 바로 성전이잖아요.
주와 함께 있으면 죽어도 살리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신 이 말씀이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닌 것을 다니엘의 세친구가 역사적으로 보여줬어요. 다니엘의 세친구가 보여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런 이벤트를 만들었지요. 물론 이 이벤트를 하고 나서 혼났습니다. 말이 그렇지 깜짝 놀랐을 거예요.
두 번 다시 그런 이벤트는 시키지 마세요 했을 거예요. 자, 다음에는 물속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아니요. 아닙니다. 됐습니다. 저 믿음 있는거 아시잖아요. 왜 이러십니까? 할 거예요. 홍해같은 경우에는 집단 자살로 홍해바다로 들어가지요.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는 저것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저것들 가는데 우리가 못갈것이 뭐가 있는가 하면서 말타고 병거타고 따라갔지요.
물론 그들은 들어갔습니다만 물이 합세하면서 다 죽었습니다. 그 죽은 사람 붙들고 인터뷰 해보면 너 왜 물속에 들어갔는데? 물속에 들어가도 살줄 알았어요. 임마! 물속에는 물고기만 사는 거야. 알았어? 그럼 저 인간들은요? 저사람들은 너희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어. 유월절의 피가 묻어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야. 천사야.
애굽은 뭘 대표합니까? 애굽은 지옥 갈,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집단을 애굽이라고 하고 그 애굽나라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바벨론 애굽 다 거치면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간추린 겁니다. 거기에 금신상의 내용이 죽 나와 있는데 그것은 수직으로 서 있다면 이 금신상이 바벨론 제국입니다.
엎어지면 발 닿는 데, 여기가 바로 세상 역사의 끝입니다. 서 있는 입체적인 금신상을 발로 차서 자빠뜨리면 이 발 닿는 여기가 세상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묵시적인 세계를 보이는데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신상을 만들도록 해서 마귀가 만든 신상이 얼마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좋은 교육자재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성도에게 역사는 어떻게 끝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도 주께서 수많은 마귀와 적그리스도를 동원해서 복음을 위하여 그들을 활동케 하시는 겁니다. 그들의 주특기를 알려줄게요. 그들의 주특기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기. 별로 안놀래시는 것 같습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입니다.
그러면 믿으면 되잖아요. 그 믿음도 행함입니다. 아니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러면 믿으면 되는데 그 믿음도 행함이라고 하고 그러면 진짜 믿음은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은 믿음에서 나와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왜 사도바울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믿으면 된다고 하지 않고 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이 하느냐 하면 믿음의 주체를 우리자신에게 두지 않기 위함입니다.
내가 믿는다은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많이 했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이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예수님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구원받는 믿음의 주체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육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믿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믿는다이 하지 않고 주께서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지요. 그걸 저에게 묻는 어떤 목사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 하면서 막 달려들어요. 주께서 믿게 했습니다. 그것 말고, 그것 말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자신은 자기가 믿어서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주님이 믿게 해서 믿었다고 주님 증거 하는데. 우리는 뭘 소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믿음 아침 다르고 저녁 달라요. 부부싸움 해보세요. 믿음이고 뭐고 없습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이렇게 나오는데 거기서 무슨 믿음입니까? 성화 좋~다! 26년째 성화 했다가 26년 하고 이틀째 되는 날 부부싸움 해보세요. 성화 다 깨집니다.
공든 탑 다 깨져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6장에 보면 다니엘이 법에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 훤히 열어놓고 기도했어요. 쉽게 하면 KBS, SBS, MBC, YTN 카메라 다 찍는데서 공개적으로 기도했어요. 대번에 소문이 났지요. 조·중·동 신문에 톱기사로 났어요. 고급관료 다니엘 금지된 기도를 하다.
청와대에서 아주 난처하게 되었어요. 자기에게 소속된 인물인데 기도하다가 걸렸으니까 아주 종용히 불렀어요. 기도했나? 했습니다. 왜 했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저는 이렇게 할 겁니다. 와,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나? 할 수 없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할 것은 또 뭐가 있습니까? 주께서 일으킨 사건인데. 그래. 그러면 들어가라.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미안하다. 미안할 것 없습니다. 미안하니까 내가 너 지켜보마. 집에 그냥 가셔도 되는데요. 아니야. 지켜보마. 왕이 지켜보고 있지요. 사자는 사흘을 굶어서 어느 놈이든 들어오기만 해봐라, 하고 버티고 있는데 다니엘이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꼭 감옥에 들어간 것 같아요.
베드로는 감옥을 일종의 모텔로 생각한 것 같아요. 잠자러 들어왔어요. 자고 있는데 천사가 흔들어 깨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나왔어요. 하여튼 이 성경의 세계, 묵시의 세계가 희한해요.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사자가 무슨 최면이 걸렸어요. 입은 벌려야 되겠는데 벌려지지를 않아요. 사자가 끝내 가만있는 거예요.
그래서 왕이 그걸 멀찍이서 보고 잘못했다. 내가 미안하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끄집어냈지요. 끄집어 낸 뒤에 나중에 알아보니 이 법을 제정해 놓은 이유가 다니엘을 자리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정적들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어요.
이번에는 그 정적들을 다 사자굴에 집어넣도록 해서 에이, 바보 같은 사자들은 사람고기를 안좋아하더라 해서 안심하고 들어갔는데 사자가 이제 왔나 하면서 그 때 입이 벌어져서 다 잡아 먹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구원은 반드시 짝이 있어요. 심판 없는 구원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 갔습니까? 지옥으로 헤어진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 교회내에 천국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요. 역사적인 교회에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다니엘의 후손들은 다니엘이 은퇴하고 난 뒤에 미래에 이것을 그대로 답습해야 돼요. 답습하면서 역사에서 묵시쪽으로 더 무게를 주게 됩니다.
이 미래의 환란에 안티오쿠스 4세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안 나와 있고 그냥 뿔이라고만 나옵니다. 뿔, 하면 뿔테안경이 생각나는데 이 뿔은 다니엘에 보면 무슨 기능이 있느냐 하면 들이박는 기능이고 무엇을 들이박느냐 하면 성전을 들이받습니다. 본인들은 몰라요. 뿔이 성전을 들이박는 그 환경의 조성이 다니엘 11장에 나옵니다.
성경좀 읽는다 하는 사람도 성경진짜 재미없다 하면서 그냥 넘기고 싶은 구절들이 몇구절 있습니다. 첫째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 두 번째가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측량법, 세 번째가 다니엘에 나오는 11장인데 한번 봅시다. 정말 짜증나는 구절들입니다.
11장 5절부터 보면 남방의 왕은 강할 것이나 그 군들 중에 하나는 그보다 강하여 권세를 떨치리니 그 권세가 심히 클 것이요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휴, 숨 한번 크게 쉬고)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때에 도와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단 11:5-6)
9절에 보니까 북방왕이 남방왕의 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나 자기 본국으로 물러가리라(휴 ~) 11절, 12절에 보니까 남방왕은 크게 노하여 나와서 북방왕과 싸울 것이라 북방 왕이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나 그 무리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리라 그가 큰 무리를 사로잡은 후에 그 마음이 스스로 높아져서 수만명을 엎드러뜨릴 것이나 그 세력을 더하지 못할 것이요.
15절을 봅시다. 이에 북방왕은 와서 토성을 쌓고 견고한 성읍을 취할 것이요 남방 군대는 그를 당할 수 없으며 또 그 택한 군대라도 그를 당할 힘이 없을 것이므로, 17절에 봅시다. 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 나라를 패망케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20절에 봅시다. 그 위를 이을 자가 토색하는 자로 그 나라의 아름다운 곳으로 두루 다니게 할 것이나 그는 분노함이나 싸움이 없이 몇 날이 못 되어 망할 것이요. 그 다음에 계속 넘어가서 29절과 30절에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니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이게 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윗동네 아랫동네 축구시합 하는 것 같잖아요. 어이 윗동네 한판 붙자. 아이고, 게임 안된다. 안되는지 되는지는 붙어봐야 알지. 붙어서 4:0으로 깨졌어요. 그러자 괜찮은 축구선수 박지성을 불러서 다시 한판 붙습니다. 한판 붙자. 이번에는 이긴다. 또 깨져버렸습니다.
박지성이 가지고도 안되겠다. 이번에는 더 나은 선수를 불러서 붙어야 겠다 하고 다시 붙습니다. 한판 붙자. 붙어서 이겼습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이것은 성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게 AD 300-200 사이에 있었던 일인데 그 당시에 유대나라는 나라 자체가 없어요.
하나의 부족, 아니면 흩어진 난민들, 그러면서도 그 흩어진 난민들도 순수한 혈통도 아니고 형식은 유대교이지만 그 혈통은 아주 모호하기 짝이 없는, 그러면서도 성전 하나는 붙들고 있는 식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에스라 느헤미야때 BC 440년 경에 완공된 거예요. 2년만에 지으려고 하다가 방해세력 때문에 못 짓고 기다렸다가 14년동안 기다렸다가 짓는 복잡한 사연들이 있어요.
그런 것은 성경책에 다 나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축구시합 하듯이 그냥 왔다갔다 할 뿐인데 한 번 이길 때마다 기분 좋다고 성전에 와서 금은을 약탈해 갑니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술 한 잔 먹고 와서 약탈해 가고. 본의 아니게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애굽사이의 중간에 끼어 있는 것이 애꿎은 유다나라의 성전입니다.
이놈이 이겼다고 훑고 지나가고 저놈이 졌다고 또 훑고 지나가고 이리 빼앗기고 저리 빼앗기고 완전히 황폐해지고 말았어요. 62이레의 환란이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어릴 때 식구가 13식구가 함께 살았어요. 삼촌들과 함께 잤어요. 삼촌들은 벌써 어른들이었고 우리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이였어요.
삼촌들이 잠버릇이 나빠서 이쪽에 있는 큰 삼촌이 이불을 둘둘 말아서 구르면 이불을 다 가져가 버려요. 그러다가 반대쪽에 있는 삼촌이 춥다고 이불을 끌어다가 둘둘 말아서 가져가버리면 또 저쪽으로 가져가 버립니다. 나중에 새벽되면 어린 조카들은 이불도 하나 없이 휑 허니 쪼그려 자고 있지요. 밤새도록 이쪽으로 훑고 지나가고 저쪽으로 훑고 지나가고.
요새 애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르지요. 각방을 쓰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지요. 같이 자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데 그걸 방목이라고 하지요. 방목을 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지금 남들 보기에 성전존재는 의미 없어요. 이방나라가 보기에는 그냥 성황당 같은 것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 뿐이지요.
그러나 유다니라 입장에서는 아닌데, 이거 성전 있어야 되는데, 에스라 느헤미야가 지은 건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면서 쥐고 있으면 이놈이 와서 빼앗고 저놈이 와서 빼앗고 가만 있다가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게 바로 다니엘이 겪었던, 이방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정말 의미 없는 것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의미 있는 유일한 것이 의미 없이 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부지중에 박살나는 현상,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죽이는지도 몰라요. 그냥 하나의 정치범이 까불다가 얻어맞는 것으로 해석하지 하늘에서 온 구세주가 우리 손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십자가를 누가 아는가? 사람의 지혜로는 모른다. 만약에 그들이 아는 지혜가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안되고 오직 성령이 임한 자라야만 오직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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