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다. 오월 비치고 참으로 거세다는 생각을 하며 밤을 보냈다. 비가 그친다면 아침은 맑게 개인 오월의 하루가 될거라 기대하며 일어나 거실의 창을 젖혔다. 놀랍다. 너무 놀랍다. 창밖은 여느 날의 아침 시간 답지 않게 어둡고 칙칙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고 비도 여전히 거칠게 퍼붓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고, 나는 식탁을 정리하고 결혼식 갈 준비를 서둘렀다. '역삼동 사거리에 있으니까, 잘 찾아가,' 어제 그가 전화기로 한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거친 바람과 봄비를 맞으며 그곳에 갔다.
결혼식이 열리는 건물을 찾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환한 불빛이 날 맞는다. '그래, 이거야. 밖은 어둡고, 비바람쳐도, 오월 신부에게 어울리는 빛과 분위기는 이런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신부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간밤에 남편을 여의고 그 곁을 지키지 못하고 딸의 결혼을 위해 잠시 결혼식장에 외출 나온 여자! 눈물이 눈에 와락 고였으나, 여인의 허름한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선 안된다고 다짐다짐을 하고서야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
'미수는 아직 몰라,'
'예,' 라고, 미수를 위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말하지 않을게요라는 마음을 전달하고 나는 신부를 찾았다. 서른중반의 신부는 짙은 화장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곁엔 앳된 신랑이 웃는 얼굴로 신부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축하해요,' 라며 대기실에 들어서자 그녀가 한 눈에 날 알아보고 아는체를 한다.
'어머, 언니. 와줘서 고마워요? 오빠는요? 오빤 안왔어요?'
그녀가 말하는 오빠는 그녀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키고있는 그 남자다.
'오빤 오늘 출장 때문에 못와요. 나보고 많이많이 축하해주라던데.'
'언니, 아이들은 학교 잘 다니죠?'
'그냥 억지로다녀요. 재미없나봐.'
'그런데, 미수씨 오늘, 너무 예쁘다.'
'주름살 가리려고 화장을 많이 했어요.' 하며 그녀는 조금 멋적은 듯이 웃는다.
'신랑이 잘생겼다.' 나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내게 목례를 했다. 신부의 친구 둘이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대기실로 들어서고 그들은 나와 그녀가 나눈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대기실을 나왔다. 식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신부의 큰 올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티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갈아입을 한복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아침에 집에 가서 아이들 씻겨 학교 보내고 왔어요.'
그녀의 말끝이 숨차다. 그녀는 거센 비바람 치던 지난 밤을 장례식장에서 지내고 부시시한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시누의 결혼식에 온 것이다.
'얼른 옷갈아 입어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고 나는 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몇 사람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사회석에 서있는 남자, 주례석 주위의 촛불, 그리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더 돌려 결혼식장을 감상하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쳤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옷을 갈아입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던 여자가 한복을 갈아입고, 머리는 여전히 부시시한 채 서있었다.
'언니, 큰 일 났어요.'
그녀는 식장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인데요?'
'후우.....'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요?'
'시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했어요.'
'왜?'
'나이도 그렇고...... 근데, 어제 아버님 돌아가셨다는 소릴 듣고, 시어머니가 신랑쪽 손님들한테 모조리 전화해서 결혼식 취소됐다고 했대요. 신랑 친구들한테까지 모조리. 지금 주례도 없고, 신랑쪽 손님 아무도 안와요.'
나는 식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예식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식장안은 흥행에 실패한 영화의 상영관처럼 보였다. 소식을 들은 신부의 어머니는 로비를 초조하게 오갔다.
'어머니는 뭐라셔요?' 나는 물었다.
'신랑이 안온것도 아닌데, 하시네요.'
'그래요. 얼른 수습해봐.'
그때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누군가를 보고 달려가 맞았다. 그리곤 심각하게 몇마디 나누곤 다시 내게와 말했다.
'식은 계속할 수 있게되었어요. 하객으로 오신 분인데, 목사님이세요. 주례를 서주실수 있냐니까, 해주시겠다네요.'
'그럼 됐네. 다행이다. 들어가요.'
식이 진행되니 하객여러분께서는 식장안으로 들어가 달라는 안내인사가 나오고 신부측 손님들은 영문을 모른 채 안으로 들어가 듬성듬성 자리에 앉았다. 결혼식은 시작되고,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하자 지난 밤에 신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 신부쪽 손님들은 여기저기서 훌쩍 훌쩍 콧물넘기는 소리를 냈다. 하객으로 왔다 갑작스럽게 주례를 보게된 목사는 성경책을 넘기며 덕담이 가득 담긴 축사를 하기 시작했다.
'생명이 나는 아름다운 계절 오월입니다. 결혼은 봄처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탄생시키고......그리고 또 한쪽에선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않게 생명을 거두기도 합니다.'
주례사가 이어지는 동안 신부의 어머니는 간혹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고개를 떨구었다. 주례사가 끝나고, 결혼식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서 사람들은 식장을 떠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다들 장례식장으로 가겠네.'
오후 장례식장에 그 사람들 다시 다 모였다. 장례식장을 지키던 그를 만나 슬픈 결혼식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문득 신부의 아버지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수 고등학교때였는데, 고2땐가 3학년땐가. 어느 날 저녁 늦게 집에 와서는 학교를 안가겠다는 거야......그래서 왜 그러냐고 달래가며 물었지. 그랬더니 담임 선생님한테 매를 맞았다고 하대...... 다 큰 애를.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어찌해야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있으면 안될것 같아서, 담임선생님한테 전화를 했어. 그리고 당신의 어머니와 통화하고 싶소, 했지. 흐흐흐. 술이 취했으니까 그런 전화를 했지, 아마 정신이 멀쩡했으면 못했을거야......담임이 자기 엄마를 바꿔주대. 그래서 말했어, 우리 딸이 당신 아들한테 매를 맞았습니다. 당신 아들이 학교 선생님한테 매를 맞고 왔다면 당신 마음이 어떨것같습니까? ......그 어머니가 미안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교양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지. 다음 날 미수 달래 학교 보내고. 미수가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학교 안다니겠다는 말은 안하는 거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