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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티무르 제국(페르시아어: تیموریان (Tīmūriyān), 우즈베크어 : Temuriylar)은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중앙부)에 발흥했던 몽골 제국의 계승 정권 중 하나로서, 중앙아시아부터 이란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1370년~1507년)이다. 전성기의 판도로 북동쪽은 동투르키스탄, 남동쪽은 인더스 강, 북서쪽은 볼가 강, 남서쪽으로는 역사적 시리아・아나톨리아 방면까지 이르러, 과거 몽골제국의 서남부 지역을 제패했다. 창시자인 티무르 재위 중에 티무르 제국이라 불렸다.
왕조의 시조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을 섬기는 발라스부의 출신으로 언어적으로 투르크화하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화했던, 몽골군인(차가타이인)의 일원이었다. 티무르의 정복으로, 앞서 말한 대판도를 구가하지만, 그의 사후에 자손들에 의하여 제국은 분할되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분열하고 축소되어, 15세기 후반에는 사마르칸트와 헤라트의 두 정권이 남았다.
결국 16세기 초에 우즈베크의 샤이반 왕조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빼앗겨 멸망했다.큰 영토를 가진 티무르 제국을 보고 구소련을 지배했던 스탈린이 이를 부러워해 티무르 유해를 찾아오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티무르 관을 열면 전쟁이 벌어진다'는 예언이 있었지만, 스탈린은 티무르 관을 열었다고 한다. 이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예언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다시 관을 덮은 뒤 다시는 관을 공개하지 않았다.
차가타이 칸국 출신이며 동시에 어머니가 칭기즈 칸의 후예인 티무르가 몽골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동시 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세운 국가로, 잘나가던 시절에는 현재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캅카스 산맥 지역을 아우르던 대국이었다.
그 당시 면적이 비슷한 나라는 명나라말고는 없었다. 티무르가 정복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약무기의 사용과 중앙아시아 여타 세력들의 쇠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가 티무르 본인의 군사적 재능도 한 몫했다.
티무르 제국은 1369년 티무르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1370년부터 1405년까지 계속된 티무르의 원정에 의해 영토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모굴 칸국, 서부의 호레즘, 북부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모굴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스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칸을 참칭하였고 이를 빌미로 티무르는 1370년 모굴 원정을 감행하여 성공리에 마무리했다.
이어 1372년부터 1373년까지는 호레즘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때 주치 울루스 좌익의 군주 우루스 칸에 반발하던 톡타미쉬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레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었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 미란샤를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어 서부 이란으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라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 귀환했다.
그 사이에 자신의 후원으로 주치 울루스의 군주가 된 톡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등지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고, 1395년 사라이를 파괴했다. 그리고 인도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92년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부(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맘루크를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드 1세를 생포했고, 1404년 사마르칸드로 귀환했다.
이렇듯 티무르 시절 몽골-튀르크계통의 차가다이 울루스(차가타이 칸국)과 훌레구 울루스(일 칸국),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잔재를 갈아버렸으며, 중동-인도지역의 여러 이슬람 세력도 줄줄히 갈려나갔다. 게다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 잘나가던 오스만 제국마저도 앙카라 지역에서 시원하게 갈렸다.
이를 통해 중동지역의 패자로 군림하였으며, 이후 명조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도중에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티무르가 병사하는 바람에 명나라 원정은 아쉽게도 무산되었다.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티무르 사후에 왕위상속을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티무르는 생전에 손자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피르 무함마드는 티무르가 사망할 때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에서 멀리 떨어진 발흐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피살되고, 뒤이어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가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영역은 서투르키스탄에 국한되었고, 중부 이란의 이스파한과 쉬라즈 등지는 티무르의 둘째아들 우마르 셰이흐의 자식들이 지배했다. 그런가 하면 제국의 가장 서북부에 해당되는 서부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코만 계통의 유목부족들, 즉 잘라이르 왕조와 백양부(악크 코윤루), 흑양부(카라 코윤루) 등이 독립해 있었다.
이 내분으로 나라 자체가 막장이 될 뻔 했으나, 이후 샤 루흐가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샤 루흐는 자신의 근거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제국의 재건을 꾀했고, 중부 이란의 티무르 일족들도 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흑양부의 카라 유수프가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하자, 샤 루흐는 1421~34년 세 차례 원정을 통해 그를 패배시켰다.
샤 루흐는 동쪽의 모굴 칸국에도 군사적 압력을 가해 1425년에는 아들 울룩 벡을 보내 원정을 감행했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달리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하여 몇 차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고 맞이하고 했다. 1413년 샤 루흐의 사절단은 북경을 방문하였고 이들이 귀환할 때 영락제는 진성과 이달을 헤라트로 파견했고, 이들은 1415년 귀환하여 『서역행정기(西域行程記)』와 『서역번국지(西域蕃國志)』라는 글을 남겼다.
1419~1421년에도 샤 루흐와 그의 아들 바이숭쿠르가 보낸 사신단이 명에 다녀갔는데, 이때 사신이었던 기야쓰 앗 딘 나까쉬는 당시 영락제와 화재를 입은 자금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했다.[5] 역사가들도 샤 루흐의 시기를 진정한 전성기로 쳐주고 있으며, 유럽과 동방의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들 사이의 교역을 중계하면서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다만 샤 루흐 시대에도 티무르 사후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당장 문서상 티무르 제국의 영토인데도 흑양 왕조, 백양 왕조가 흥기하여 서부 이란에서 쫓겨나는 등 샤 루흐의 명령이 서지 않는 지방도 적게나마 있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순회공연을 다녀야 했던 것. 하지만 다행히도 샤 루흐는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 제국의 분열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1447년에 손자 무함마드가 페르시아 서부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샤 루흐의 장자인 울룩 벡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울룩 벡은 아버지 샤 루흐의 치세 때 사마르칸트를 분봉받아 40년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다스렸으며, 과학이나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천문대를 짓고 여러 학자나 예술가를 초빙하여 그들의 활동을 장려했고 울룩 벡 본인도 빼어난 천문학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문화적인 경향은 그대로 물려받고 나라도 잘 다스리긴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군사적인 재능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고, 즉위 2년만인 1449년에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것을 명분으로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 아들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참수시킨 아들 압달 라티프는 제위한지 고작 6달만에 똑같이 반란을 당해 겨우 나이 서른에 아버지처럼 참수되고 만다. 그리고 그후 여러 지방세력가들이 티무르 제국의 패권을 놓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하면서, 제국은 사분오열되었다. 제국의 서부는 이 혼란기를 틈탄 흑양 왕조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백양 왕조에게 차례차례 뜯겨나갔다.
1451년에 즉위한 아부 사이드는 1457년 호라산을 평정하고 헤라트에 입성하여 중앙아시아와 동부 이란을 석권했다. 그는 황금씨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문율을 깨고 스스로 칸을 칭했다. 그러나 그는 백양부의 우준 하산을 정벌하러 갔다가 1496년 오히려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아부 사이드 사후 그의 영역은 여러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이 가운데 안디잔과 페르가나를 차지한 우마르 셰이흐가 1494년 사망하자 12살밖에 안 된 그의 아들 바부르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북방의 신흥세력 우즈벡의 샤이바니 칸이 1500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점령했다. 1503년 여름 바부르는 모굴 칸국의 마흐무드와 아흐마드 두 칸과 연합하여 샤이바니와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를 당하고 두 칸은 포로가 되었다. 1504년 바부르는 남쪽으로 도주하여 아프간의 쿤두즈와 카불을 점령하고 자신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샤이바니는 1504년 호레즘까지 장악하여 서투르키스탄을 완전히 정복했고 이어 티무르 왕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헤라트와 발흐까지 점령했다. 우즈베크인들은 당시 문화적으로 꽃피어있던 티무르 제국의 학술적, 문화적 자원을 그대로 흡수해서 티무르의 후손들을 쫓아냈으면서 현재는 티무르를 국부 취급하고 있는 판이다. 병주고 약주기
Uzbekistan-Tashkent-Amir Timur Square
우즈베크인들의 침입기에 속된말로 개털린(...) 티무르 제국의 왕족들 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바부르인데, 그가 이후 중앙아시아를 떠나 인도지역을 털고 그 자리에 무굴 제국을 건국함으로써 티무르의 후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떠나 아프간과 인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무굴조를 티무르조랑 동일시하는 역사적 시선도 있다. 시즌 2 이후 바부르와 그 후손들은 옛 영토에 다시 복귀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고, 가끔은 사마르칸트도 점령하는 등 중앙아시아로 돌아오나 했지만...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우즈벡의 샤이바니 칸이 이란의 신흥 세력인 시아파 사파비 왕조의 군주 샤 이스마일과 벌인 메르브 전투에서 패사하자, 바부르는 샤 이스마일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 지배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사마르칸트 등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는데, 바부르가 시아파 군인들을 데려와 큰 반발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고향을 떠난 바부르는 1525년 라호르를 점령하고 이듬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북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 제국의 토대를 놓았다. 이렇게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오스만, 사파비, 무굴, 우즈벡이 흥기하여 중앙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몽골 후예로 마지막 유목제국 건설
티무르, 중앙아시아 석권하고 실크로드 활성화시켜
티무르(1336~1405)는 몽골 세력이 쇠퇴하던 14세기 후반 중앙아시아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불패의 군주로, 당대(재위 1370~1405)에 서쪽의 콘스탄티노플 근방에서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석권한 정복자다. 당시 소아시아를 근거지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제국의 바예지드 1세와 전쟁을 벌여 황제를 포로로 삼는 승리를 거둬 일시적으로 오스만제국을 붕괴시키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긴 비잔틴제국의 수명이 연장되고 오스만의 서유럽 공략이 제한됐던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간 정복자였지만 문화와 예술을 장려해 수도 사마르칸트를 이슬람 문물의 중심으로 발전시켰고 동서양 간의 실크로드 무역이 활성화됐다. 20대 시절 치른 전투에서 다리에 화살을 맞아 평생 다리가 불편했던 티무르는 몽골의 후예답게 말 위에서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초원의 마지막 유목제국을 수립했다.
‘불패 신화’ ‘잔혹한 살인자’ 상반된 평가
오늘날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란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1258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군대에게 패망했다. 훌라구가 이란을 중심으로 수립한 일한국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으로 이민족에 의한 약체 정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100년 후인 1353년 해체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 투르크 출신 오스만이 1299년 오스만제국을 수립하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면서 비잔틴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고, 서유럽도 오스만의 위협권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인 1336년 티무르는 이슬람화된 몽골 씨족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과거에 명문이었지만 몰락해 평범한 유목민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청년 시절 초원에서 가축을 약탈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수백 명을 이끄는 무력집단의 우두머리로 성장한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들어선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티무르는 21세가 되던 1357년 투르크 계열 지배층의 분열로 촉발된 혼란의 와중에 정치적 권력을 확보해 1363년 이 지역의 지배자로 부상했다. 당시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중개무역으로 번영하고 있던 비옥한 지역을 확보한 티무르는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칭기즈칸의 후손을 아내로 맞이하고, 칭기즈칸과 차가타이칸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1370년 티무르 왕조를 수립하고 군주로 즉위한다.
티무르는 이후 1405년 중국 원정길에 병사할 때까지 35년간 정복자로서 불패의 신화와 잔혹한 살인자의 상반된 평가를 얻었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은 인도, 동쪽은 중국 국경, 서쪽은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무적의 장군이었다. 티무르 군대는 몽골의 전통을 계승해 기병이 강했고, 가축과 함께 이동해 병참보급이 필요 없는 기동군단이었다.
또한 이슬람의 강력한 교리로 무장해 정신무장이 높은 수준이었다. 젊은 시절 약탈로 출세의 기반을 마련했던 티무르는 승리한 군사들에게 약탈과 파괴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크도록 배려했다. 높은 기동성, 강한 정신력에 높은 기대수익률로 무장한 티무르 군대는 연전연승 신화를 쌓았다. 또한 티무르는 잔혹한 파괴자로서도 악명을 떨쳤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정복지 주민들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도시를 파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387년 이란 지역의 이스파한을 점령했을 때는 피정복지의 7만 명을 몰살시키고 성벽 밖에 사람 머리로 만든 피라미드 120기를 쌓았다. 1401년에 이라크 바그다드에 입성하고 나선 저항하는 현지인 9만 명을 단숨에 죽여버렸다고 전해진다.
티무르가 벌인 전쟁의 백미는 오스만제국 바예지드 1세와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고 적국 황제를 포로로 잡은 순간이다. 바예지드 1세는 1389년 즉위하고 적극적인 서방 원정을 실시해 세르비아·보스니아 등 발칸반도 전역을 정복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보스포루스 해협에 성채를 구축했다. 비잔틴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7차 십자군이 1396년 오스만 군대에게 격퇴되면서 비잔틴은 마지막 희망도 상실한 상태였다. 서방의 동유럽을 정복한 바예지드 1세는 근거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계 제후국에 대한 정복과 병합을 본격화했다. 투르크 제후국들이 티무르와 제휴해 오스만에 대항하면서 두 나라의 전쟁 국면이 조성됐다.
1402년 앙카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 대패하고 포로가 됐다. 티무르는 적국의 군주를 정중하게 대했으나 바예지드 1세는 포로의 신분으로 이듬해 병사했다. 티무르가 오스만제국을 분할해 왕자들에게 나눠주면서 오스만제국은 일시적으로 붕괴됐다.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면서 시작된 정치적 공백기에 1413년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메흐메트 1세가 오스만을 재통일하고 발칸반도를 다시 확보하게 된다.
‘마지막 원정’ 명나라 정복 나섰으나 병사
중앙아시아 패권을 확립한 티무르는 1405년 중국 명나라에 대한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 티무르가 이끄는 무적의 군대가 명나라까지 정복했으면 세계사가 바뀌었겠지만, 69세의 티무르가 병사하면서 상황은 종료된다. 몽골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서 피정복민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강요한 잔혹한 정복군주 티무르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우대하는 교양 있는 문화군주로서의 면모도 있었다. 정복 활동을 통해 각지에서 데려온 최고의 장인, 예술가들을 투입해 수도 사마르칸트를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로 뒤덮었고, 이슬람 학자들을 집결시켜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으로 만들었다.
중앙아시아 패권과 실크로드 확보에 집념을 쏟았지만 서유럽 정복과 십자군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던 티무르는 본의 아니게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러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몽골 계통 킵차크는 티무르와 전쟁을 벌이면서 약화돼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러시아 세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서방으로 급팽창하던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일시적으로 붕괴시키면서 멸망을 목전에 두었던 비잔틴제국은 고비를 넘기고 50년을 더 존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