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 과정 진학과 자격증 취득은 자기 계발의 단골 아이템이다. 소위 ‘가방끈 늘리기’와 “쯩 따기”다. 자기 계발에 소홀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 작업을 놓친 이들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그 대열에 들어서있다. 젊은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라 대표성은 떨어지지만 MBA 과정 진학을 위해 치르는 GMAT시험 응시자는 99-2000년 시즌에 4천3백명에 달했다. 최종 합격까지 3년이 걸리는 CFA(국제공인재무분석사) 시험의 경우는 올해 3천2백명 가까이 응시했다. 98년에 비하면 30배 이상 늘어난 숫자다. 외환위기 이후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한 미국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딴 사람도 벌써 1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숫자만 놓고 보면 이 대열 밖에 있는 직장인들의 마음은 무거울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최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질문도 이와 연관된 것들이다. 더 늦기 전에 전문가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럴려면 직장을 그만두고서라도 학위나 자격증을 따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랬다가 혹 막차를 타는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물음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이런 고민들이 신규 투자를 앞두고 기회와 위험 요인을 저울질하고 있는 기업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새 기술, 새 설비를 들여 놓느냐 마느냐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중으로 미루자니 갑자기 경기가 좋아졌을 때 경쟁기업에 선수를 뺐기는 것은 물론 기술 낙후로 도태될 위험이 감지된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투자하자니 수년간의 자금사정 악화를 감수할 용기가 안난다. 게다가 새 기술이 시장에서 먹힌다는 보장도 없다.
이럴 때 기업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타당성 조사를 벌인다. 팀을 만들어 조사 분석하고 임원회의에서 난상토론을 벌이고 최고 경영자가 결정을 내린다.그렇게 해도 오(誤)투자, 중복투자가 비일비재하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돈을 들여 새로운 일을 벌일 때는 무작정 시작하기보다 많은 시간을 타당성 분석에 써야 한다. 조바심 낼 일이 전혀 아니다. 오투자, 중복투자는 투자를 않은 것 보다도 못하기 때문이다. 학위나 자격증 등이 내게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찾지 못하면 손을 떼는 것도 전략이다.
많은 이들이 취득 시점에서의 수요와 공급 상황 등 시장을 예측해 도전 여부를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이건 말이 쉽다. 일단 예측 자료가 없다. 예를 들어 2005년께 국내 CFA 합격자수와 기업에서 필요한 인원수를 분석하고 있는 기관은 없다. 있다고 해도 대부분 관련 학원들이어서 장미빛 전망만 내놓는다. 믿을만한 기관이 혹 내놓는다고 해도 그 전망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경우 양상은 달라지고 만다.
미래를 이렇게 ‘아직 오지 않은 세월’로 놓고 보면 예측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필요한 방법이 ‘설계하는 시간’으로서의 미래 개념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의사 결정에 영향받는 종속 변수로 보는 시각이다.예를 들어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 사람에게 증권분석사의 미래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전역키로 하고 CFA준비를 하기 시작한다면 증권분석사로서의 미래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미래는 지금 갖고 있는 내 계획이 미래에 투사하고 있는 부채꼴을 좀체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어떤 학위나 자격증이 내게 필요한가의 기준도 결국 필자의 지난 칼럼 ‘무엇이 될꼬하니’의 문제로 돌아간다. 중장기 직업 계획 혹은 비전에 비추어 결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전자회사 재무팀 차장인 K씨가 있다고 하자. 그의 목표는 10년 후 자기 회사 CFO(재무담당인원)가 되는 것이다. 임원 승진 이전에 회사를 나가야 할 경우가 생기면 IPO(기업공개) 등을 앞두고 있는 벤처회사를 상대로 한 재무컨설팅업체를 창업키로 최악의 시나리오도 세워 두었다. 중장기 과제는 이 두가지 목표 달성에 꼭 필요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부족한 것들을 찾아 리스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리스트를 중심으로 10년간의 액션 플랜도 짰다고 하자.
K씨가 인문학 전공자라면 그는 야간대학원에 진학해 재무를 전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회사 규모에 따라 CFA자격증을 따야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에게 부동산공인중계사 자격증이 필요할까. 마이크로소프트 공인 제품 전문가(MCPS)자격증은 어떤가. 혹 변호사 자격증은 도움이 될까. 옆에 서있는 우리들도 그에게 필요한 학위, 자격증을 골라 낼 수 있다. 그의 비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경영학 석사학위와 CFA자격증은 ‘보석’이 될 수 있지만 공인중계사, MCPS자격증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액세서리는 전당포에서도 받지 않는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에 투자하는 건 경험이 아니라 낭비다.
중장기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나면 우리는 보석이 될 학위 혹은 자격증과 액세서리에 불과할 것들을 가려낼 수 있다. 액세서리라고 판단이 되면 아무리 좋아 보여도 투자 대상에서 과감히 빼놓을 수 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이라서, 해두면 어쨋든 좋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시작하고 보는 사람은 아직 20대 이거나 직장이 없거나 혹은 중장기 계획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30대에 들어선 직장인이라면 지금까지 해보지 않을 일을 하는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가지 않을 길’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가는 길 앞에 놓여있는 여러 갈래 길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중장기 비전에 비춰볼 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남은 것은 용맹 정진 뿐이다. 반대로 필요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미련을 버리는 게 상책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중에 취득한 대학원 학위 보다 학부를 더 따지고 관련 없는 자격증에는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게 대다수 기업의 현실 아닌가.
정말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도 실행에 들어가기 전에 넘어야 할 벽이 또 있다. 바로 투자가치 분석이다. 아무리 좋은 신규 설비라도 장부를 수년간 빨갛게(적자로) 물들일 투자규모면 기업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시간과 돈, 능력이라는 자원에 비추어 감당 할 수 없는 규모라면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예의 A씨가 재무 관련 석사 과정을 다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자. 그런데 지금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되고 빚을 낼 수도 없는 형편이라고 하자. 이럴 경우는 계획 자체를 몇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다. 돈은 있지만 부서 특성상 도저히 야간 대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돼도 마찬가지다.
돈이나 시간 때문에 해야 할 것을 못하게 되면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당신을 속박하고 있는 현실적 조건들이 그렇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것은 ‘포기’가 아니라 ‘유예’하라는 것이다. 재원을 마련할 때 까지, 일찍 끝나는 부서로 옮길 때까지 잠시 미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예기간을 줄이기 위해 눈에 띄는 노력을 해야 한다. 2년뒤 대학원에 가기 위해 적금을 드는 등 재원마련 계획을 가동해야 한다. 저녁시간을 낼 수 있는 부서로 옮겨 가기 위해 상사를 졸라야 한다. 이것 또한 중장기 비전에 입각한 적극적인 경력 관리 경험이 될 것이다.
끝으로 학위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 계발은 위험 대비요, 미래 준비이지 모험 투자일 수 없다. 우선 비용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몇년간의 경력 공백이 생긴다. 실무 경력은 학위나 자격증 못지 않게 중요한 자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