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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과 한음….조선 선조 – 광해군 시절의 두 명신(名臣)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이 덕형(李德馨, 1561-1613)의 어릴 적 일화들은 수많은 버전으로 가공되어 읽히고 있는 유명한 이야깁니다. 주로 이 두 악동이 쏘다니면서 어른들 골탕 먹이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역사적 팩트로만 본다면 이항복과 이덕형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합니다. 이항복은 경기도 포천 출신이고 이덕형은 서울 강남 출신입니다. 서울 강남하면 8학군이 연상되지만 당시 지금의 강남구 송파구 등은 경기도 광주 관할이었으니 둘 다 맨 같은 촌놈입니다. 남태령에 호랑이가 우글거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또한 이항복이 1556년생, 이덕형이 1561년생이므로 다섯 살 나이 차가 있었으니 이항복이 중학교 2학년 때 이덕형이 국민학교 3학년이었다는 얘기고 보면 두 사람이 어릴 때 불알 친구였다는 말은 무리가 있습니다.
한음은 이덕형의 호(號)가 맞습니다. 이덕형의 출생지, 요즘 강남지역을 한강 이남에 있다고 해서 한음(漢陰)으로 불렀거든요. (반면 지금의 강북지역, 4대문 안을 한강 이북에 있다고 해서 한양(漢陽)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남으로 강을 끼고 북으로 산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따뜻한 곳을 양(陽)으로 쓰고 그 반대인 곳을 음으로 쓰는 게 많지요.
그런데 오성은 이항복의 호가 아닙니다. 이항복의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등으로 많이 불렸습니다. 그를 오성대감으로 부르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을 인정받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성과 한음이라는 표현자체로 보더라도 그들의 어릴적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항복과 이덕형의 평생 우정이 시작된 것은 그들이 성균관에 입학하고 난 이후의 일로 보입니다. 죽이 잘 맞는 대학 동기였단 얘기죠. 따라서 그들의 청년기 이후의 이야기들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사람은 평생을 통해 우정을 나눈 단짝이자 동지였지만 퍼스낼리티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덕형은 어릴때부터 점잖은 성격에 잘 생긴 외모를 한 귀공자 풍이고 비상한 두뇌를 가져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항복은 타고난 재주는 비상했지만 서울로 이사와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공부는 안하고 맨날 장난에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일진 패거리였습니다. 서울에서 이항복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고뭉치였습니다.
어머니가 울면서 호소해서 겨우 맘 다잡고 고3이 다 되어서 책을 보기 시작하지만 빈약한 내신성적에 수능 점수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요. 결국 대학 떨어지고 성균관에도 청강생 자격으로 다녔습니다.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성격이 금방 드러 납니다. 이덕형은 잘 생긴 선비타입의 풍채좋은 신사지만 이항복은 노인이 되어서도 눈가에 장난끼가 가득합니다. 아마 오성과 한음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도 이항복의 이러한 해학과 장난기에 기반해서 만들어졌을 겁니다. 이항복의 해학은 청년기 뿐 아니라 판서, 정승이 되고 나서도 여전했습니다.
어쨌든 이항복도 성균관 입학 후에는 이덕형의 영향을 받아 공부에 매진했고, 이덕형도 이항복 따라 다니면서 술집출입도 하도 세상물정에 눈을 떠 꽉 막힌 책상물림의 한계를 벗어 난 셈이니 둘은 서로에게 도움이 된 친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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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은 훗날 행주대첩으로 유명해진 도원수 권율 장군의 사위이다. 아직 학생이라 월급도 없어 와이프 벌어 먹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지금의 배화여고 근처 필운동 장인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는데… ( 조선 중기 이전까지 사위가 처가살이 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음)
장인이 보니… 항복이 녀석이 어릴 때부터 봐 온 바로는 크게 될 녀석이라 마음 먹고 사위로 찍었는데…. 이놈이 신혼재미에 빠져 염천더위 벌건 대낮에도 문 걸어 잠그고, 시도때도 없이 와이프랑 2층 집 건설(建設)하며 직신작신…. 아이 생산(生産)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위가 건설적(建設的)이고 생산적(生産的)이며 딸내미랑 금슬 좋은 거야 장인 입장에선 말릴 바는 못되지만…. 이 놈이 출세를 해야 딸내미 장래도 보장되는데, 장가 오더니 통 공부를 안 하는 게 문제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어이, 사위 너 오늘 밤부터 사랑채에서 공부하다 나랑 같이 자자.
네? 그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멘트라요? 제 엉덩이 큰 실인(室人)은 우짜라고…
시끄럽다. 당장 베개랑 이불 가져 와.
그리하야… 생이별을 당한 아내의 눈물을 뒤로 한 채 (생이별 좋아하네), 장인과 사랑채에서 머쓱하게 앉아 책을 읽는 척 하지만 자리가 영 버성긴다. 이윽고 취침시간이 되자 사위녀석이 자꾸 지 와이프 방이 있는 안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조용한 방안에 항복이 눈깔 돌아가는 소리가 세멘바닥에 도끼다시 돌리는 소리 같다.
야, 눈깔 그만 돌리고 자자. 불끄고 눕자 권장군은 금방 코를 골기 시작한다. 항복이 누웠지만 와이프가 보고 싶어 잠이 안 온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묘안이 떠 올랐다. 끄으응….몸부림치는 척 하면서 누워 옆차기로 장인의 갈비뼈에 회심의 일격을 질러 버렸다. 퍽! 아이구….
권장군이 잠을 깨고 불을 켜 보니 옆에 사위가 드르릉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아, 그새끼 그거 잠버릇 지랄같네…. 아픈 옆구리를 끌어 안고 투덜거리며 다시 불 끄고 누워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갑자기 사위녀석이 또 끄응… 하더니 이번엔 발 들어 내려찍기가 어깨죽지에 정통으로 한 방 꽂힌다. 퍽! 에고고…. 야 임마! 하지만 사위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사위놈을 멀찌감치 저 쪽 웃목으로, 요때기 채 끌어다 옮겨 놓고 다시 잠을 청하는데….사위녀석.. 이번엔 음냐… 하면서 좌로 굴러를 한 번 하면서 순식간에 접근하더니 갑자기 장인을 끌어 안고 길로틴 쵸크를 걸어 온다. 그러더니 자세를 바꿔 코브라 트위스트가 연속으로 들어 온다. 웁! 웁! 너 못 떨어져? 으아악!….. 너…..걍 네 방으로 가라, 응?
옛 썰! 사위는 쾌재를 부르며 베개를 안고, 행여 장인 맘 변할세라 토토토토토토….. 맨발로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와이프 이불 속으로 슬라이딩 홈인 하는 동작이 결승점 홈스틸하는 이종범을 보는 듯 하다. 와이프가 잠에서 깨어나 걱정스럽게 묻는다.
아빠가 뭐라 안해요?
장인? 응… 내가 반쯤 보내 버리고 오는 길이야.
짝짝짝… 참 잘 했어요. 벗을까요?
이항복과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년)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 관료생활을 함께 시작하는데… 이덕형은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을(乙)과로, 이항복은 알성문과(謁聖文科)의 병(丙)과로 합격합니다. 별시문과, 알성문과는 3년에 한 번 있는 정규과거인 식년시외에 수시로 시행하는 과거인데 같은 해에 부정기 과거가 두 번 있었나 봅니다.
두사람은 같은 해 관직에 진출하지만 이덕형이 을(乙)과, 이항복은 병(丙)과로 초임 직급이 이덕형이 높았습니다. 갑, 을, 병은 시험 석차를 뜻하는데 33명의 합격자 중 1,2,3 등의 3명은 갑과(甲科), 4등부터 10등까지 7명은 을과(乙科), 11등 이하를 병과(丙科)라 했습니다.
시험 석차는 석차로 그치지 않고 초임(初任) 품계가 성적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령 갑(甲)과 3명의 경우 종 6품의 참상관(參上官)으로 바로 임용되었고 을(乙)과 7명은 정 8품, 병(丙)과 합격자는 정 9품을 제수 받습니다. 이를 근속연수로 보면 수석과 꼴찌는 최대 7년의 계차(階差)를 의미합니다.
이덕형은 을과(乙科)라는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여 바로 보직을 받습니다. 반면 이항복은 정9품 수습직에 보임 되었으니 성적이 시원찮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 때 이덕형이 20세였는데 이항복은 25세였으니 벼슬길은 이덕형이 월등히 빨랐던 셈입니다.
하지만 성균관 전체 쪽수에서 50% 이상을 차지하는 청강생이 과거 합격자는 10%가 채 안되는 것을 보면 장안 제일의 사고뭉치 이항복이 대학 들어와서는 엄청 쪼았음을 알 수 있지요. 사실 조선전체에서 불과 몇십 명 뽑는 거니 꼴찌라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이항복이 고시성적은 별 볼일 없지만 순탄한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명문 경주 이씨이고, 장인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이 영의정이었다는 후광도 어느정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실력이 없고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는 매사 실사구시를 좋아했고 책상물림들의 탁상공론을 경멸했습니다. 아마 이는 그가 10대 불량소년 시절에 고생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빨리 깨우친 게 있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치우침 없는 원칙으로 일했지만 때로는 유연하게 융통성을 발휘했고 두둑한 배짱으로 일관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로(官路)를 보면 이덕형이 높은 학식과 인품으로 주로 대제학 같은 교육직, 외교관계, 대외 협상 등에 투입된 반면 이항복은 실무를 장악하고 매사를 잡도리하는 현업에 많이 투입 되어 전란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정쟁과 당리 당략에 물든 그 시절, 당쟁에 가담하지 않고 오직 소신과 원칙에 따라 일했습니다. 이덕형은 대북파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의 사위였지만 그 장인이 옳지 않을 일을 할 때는 단호히 가담을 거절했습니다. 대북파가 폐모론(인목대비 폐위론)을 들먹일 때 그는 이항복과 같이 이를 반대했습니다.
두사람은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의기투합하여 행동을 함께 했고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학통이나 후손들의 경향으로 대개 이덕형은 남인, 이항복은 서인에 가까운 쪽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이덕형은 이산해의 사위지만 유성룡과의 친분으로 남인으로 비쳐지고 이항복은 후에 그가 아꼈던 제자 최명길과 장유 등이 인조반정에 가담하는 서인에 섰기 때문에 그렇게 비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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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장군은 장군으로 부르지만 사실은 문신(文臣)이다. 우리나라에서 문반(文班) 우대주의의 경향으로 군대의 고급장교도 서반(西班=武班)이 아닌 동반(東班)이 보직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권율은 임난 초기 바다의 이순신, 진주의 김시민, 의병장 곽재우와 더불어 전라도를 훌륭히 지켜냈다. 덕분에 조선의 곡창 전라도는 전란의 화를 피할 수 있었고 왜군은 군량미 조달에 부심하게 된다.
권율은 1537년생이니 당시의 재상이던 유성룡(1542년생), 명장 이순신(1545년 생)보다 한 연배가 높고 윤두수(1533년 생), 정철(1536년 생) 등과 비스한 연배이다. 하지만 정작 관직에 나간 것은 사위인 이항복보다 2년 늦은 1582년이 되어서였다. 나이 46세에 식년시에 병과(丙科)로 합격한 것이다.
늦게 관직에 나온 관계로 한 참 아래 나이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란 중 이치(梨峙) 전투에서 대승한 후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하고 이어 행주에서 불과 수천명의 병력으로 3만의 왜군을 맞아 그 중 2만 4천명을 사상케하는 대승을 거둠으로서 후에 도원수(지금의 합참의장쯤 되는 임시직책)로 승진하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이다.
임진왜란 전, 아직 말단일 무렵 필운동 집에 사위랑 같이 살면서 아침이면 나란히 출근을 한다. 사위녀석, 계급이 좀 높다고 지놈 장모 앞에서 가끔 엉길 때도 있다. 어허… 계차(階差)가 유별(有別) 하거늘…. 장인 킬러 이항복, 오늘은 이 녀석이 뭘로 날 골탕 먹일까… 사위만 보면 불안하다.
권율이 한 가지 안 좋은 버릇이 있다. 발을 안 씻는 것이다. 월드컵 열릴 때마다 기념으로한 번 씻으니까 항상 발이 새까맣다. 저녁에 잘 때도 버선을 벗은 후 벗은 버선으로 발을 두 세번 싹싹 문지르고 탈탈 터는 게 고작이다. 마누라 잔소리가 심하지만 끄떡도 않는다.
참다 못한 장모가 장인 킬러인 사위한테 일러 바쳤다. 자네 장인의 그 발 안 씻는 버릇 좀 고쳐 주소. 걱정 마시라요. 한 번 뜨거운 맛을 보시면 담 부턴 잘 씻을 겁니다요. 사위가 큰 소리다.
오늘은 무지 덥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서 한참을 걸어 광화문 육조거리에 도달하니 벌써 이마에 땀이 맺힌다. 광화문을 지나 입궐해서 …그럼 이따 퇴청(退廳) 길에 보세… 하고 사위와 헤어져 각자 자기 사무실로 향한다.
낮것상을 먹고 해가 중천에 오르니 푹푹 찐다. 아… 이놈의 조복(朝服)은 왜 이렇게 더우냐. 첩첩이 껴 입은 조복 안으로 땀이 흐른다. 더워서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데 임금이 부른댄다. 아, 씨… 더운데 무슨 또 회의 오라는 거야?
가 보니 시원한 경회루에 임금이 앉아 있고 몇몇 신하들이 보인다. 임금 옆에 사위녀석과 사위 친구인 이덕형이도 보였다. 근데 두 놈이 귓속말로 속닥 플레이를 하면서 자기를 힐 끗 힐끗 보며 실실 쪼개고 있는 게 수상하다. 새끼들이… 또 무슨 작당을 하는 거여?
삘짓 같은 회의를 건성으로 하고 있는데 대전상궁이 오더니 얼음 넣은 시원한 미숫가루를 임금한테 바친다. 임금, 시원하게 미숫가루를 들이키는 소리가 수채 구멍에 장마비 내려가는 소리 같다….. 꿀꺽, 벌컥, 꼴깍, 깔꼭….
어…. 시원하다…. 시원하시겠습니다, 전하…… (의리없이 지 혼자만 처 먹고… 씨… 좀 먹어 보라는 말도 없어, 꼴깍…) 어, 과인만 먹어서 안됐소이다. 경들, 덥지 않소? 이 때 찬스를 놓치지 않고 이항복이 아뢴다.
이항복 - 전하, 날이 너무 더워 업무 효율이 도저히 안 오르니까 좀 벗읍시다요.
권율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체통이 있지.. 어찌 덥다 하여 조복을 벗는단 말인가?
이항복 – 조복을 벗자는 게 아니라 의관과 버선은 벗어도 무방할 것이옵니다, 전하.
이덕형 – 버선을 벗고 조의를 논한 전례가 있으니 군신간의 허물이 아니올시다, 전하.
임금 - 흠, 그렇지 버선 정도를 벗는 거야 상관 없겠지. 그럼 모두 버선을 벗읍시다.
권율 - 아니, 그럼 벗을 사람은 벗고… 걍 신고 있을 사람은 신고 있지 뭐…
이항복 – 에이…원래 복장이 전문용어로 유니폼인데 통일해야지, 안 그래요, 전하?
이덕형 – 누구는 벗고 누구는 신고 있으면 벗은 사람 맘이 편하겠어요, 전하?
임금 - 항복이, 덕형이 말이 맞다. 그럼 모두들 버선과 의관을 벗으라. 짐도 벗으리라.
이항복/이덕형 – 성은이 망극 하여이다아아…..
이항복 – (잠시 후) 근데 권 전적(典籍)은 아까부터 안 벗고 있대요. 전하.
임금 - 경은 왜 안 벗고 있소?
권율 - 아니 뭐, 좀 있다가… 벗을게요.
이덕형 – (잠시 후) 권 전적은 버선 안 벗고 계속 개긴대요, 전하.
임금 - 거, 경은 벗으라는 짐의 말을 못 들었소? 의관은 벗고선 버선은 왜 신고 있능겨?
권율 - 아, 예 곧 벗겠습니다. (큰일이네…)
이항복 – (잠시 후) 전하, 권 전적 버선 벗었는지 체크해 보세요. 아직도 안 벗었대요.
임금 - 아, 씨바… 거 임금 말 존나 안 듣네…
권율 - 아, 조또… 마떼 구다사이… 지금 벗습니다요. 저…항복이, 덕형이… 이 놈들…
결국 권율이 버선을 벗었는데… 얼마나 안 씻었었던지 새까만 발이 뺀질뺀질 윤이 난다.
차라리 벗으랄 때 벗었으면 시선을 끌 일은 없었지만 한 참 버티다 벗으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권율 쪽으로 집중된다. 모두들 권율의 발을 보고 박장대소, 웃는다. 와하하하하………임금이 위로의 말을 해 온다. 허허…미안하오. 왜 안 벗으시나 했더니……권율이 한숨을 쉰다. 오늘은 그냥 넘어 가나 했는데…. 사위놈, 그예 골탕을 먹이네….
1980년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도 했던 김성한(金聲翰)이 쓴 임진왜란을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소개됩니다. 역사적 팩트는 둘째 치고 사람들이 두사람을 보는 시각이 드러납니다. 임진년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부산, 동래가 일거에 함락되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몰려 옵니다.
그런데 당시의 조정은 적군의 성격, 침략 목적, 병력의 규모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었습니다. 이게 전면전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고 그냥 왜구 일당이 내습한 정도로 여긴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부산 동래가 연달아 무너지자 점점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지요.상주를 점령한 왜군은 조선 조정에 전갈을 보내 강화하고 싶으면 몇 년 전에 자기들과 안면이 있던 이덕형을 보내 교섭하자고 합니다.
이덕형의 학식과 인물됨은 국내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10년 전 명나라에서 온 사신 왕경민(王敬民)은 그의 명성을 듣고 만나고 싶어했지만 사적인 만남은 도리가 아님을 들어 거절하자 그의 인품을 칭찬하는 글을 보냈습니다. 또한 왜란 4년 전에는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접반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왜군이 이덕형을 보내 얘기하자고 하자 조정은 약간 한시름 놓습니다. <왜놈들이 공맹(孔孟)의 도(道)를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모양인데… 이덕형을 보내, 돌아 가라고 잘 타일러 보자. 천하에 유학으로 이덕형을 덮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그가 잘 타이르면 돌아갈 것이다….>
전쟁의 성격이 뭔지도 캄캄한… 조선 조정의 상황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미 명나라까지 침공할 계획으로 온 놈들인데 <타일러서 돌려 보내자>는 상황인식….
그러는 한편 신립에게 3천 기병을 편성해서 대응하기로 하고, 신립은 내려 가면서 병력을 마구잡이로 긁어 모아 충주 탄금대에서 8천 병력으로 고니시 유키나카(少西行長)의 1만 8천 선발대와 맞 붙게 됩니다. 말이 기병이지 당나귀나 노새를 탄 놈도 있었고 낫이나 쇠스랑을 든 병사도 많았습니다.
탄금대 전투는 아시는 대로이고 이덕형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충주가 함락되어 있었고 그는 서울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신립이 전사한 게 아니라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조정에 아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이 전사한 게 아니고 자결했다면 그것은 전멸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그제서야 도망갈 계획을 세웁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게 4월 13일이고, 신립의 충주 패배가 4월 28일이며, 선조가 서울을 떠난 게 4월 30일이며, 왜군의 서울 입성이 5월 3일이니 까딱했으면 뒷 덜미를 잡혔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일기예보나 좀 보고 떠나지… 무정한 건 하늘이라 궁궐을 버리고 도망가는 밤에 비까지 내립니다. 쫄쫄 굶고 흠씬 비맞으며 밤길을 걸어 도망가는데 모두들 제 살자고 가 버리고… 따라 오는 신하도 몇 명 보이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앞장서 어가(御架)를 이끈 것이 이항복이었습니다. 임진강에 이르니 불어난 강물에 길이 막힙니다.
칠흑 같은 밤에 어디로 가야 할지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이항복이 어릴 때 싸돌아 다니면서봐 왔던 정자(亭子)에 불을 질러 대낮같이 밝힙니다. 이항복…이상한 사람들이야. 어두우면 불 피우면 되지 우물쭈물 하긴. 선조 …춥고, 배고프고, 젖었고, 어두었는데 … 아, 그나마 밝은 게 좋아.
일설에 이 정자는 10만 양병을 주창했던 이율곡이 장차 있을지 모르는 전란에 임금이 밤중에 도망가는 상황을 예측하고 불타기 좋게 나무에 들기름을 먹여 지은 거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율곡의 대단한 선견지명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로 평양까지, 그리고 나중에 의주까지 임금을 호종하면서 이항복은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지혜와 아이디어로 해결사 노릇을 하게 됩니다. 평양에서 함경도로 갈 것인가, 의주로 갈 것인가를 대신들이 갑론을박 끝에 함경도로 결정되지만, 이항복은 다른 신하들이 자는 동안 선조 임금을 고집스럽게 설득해 의주로 번복합니다. 나중에 함경도로 간 두 왕자가 일본군의 포로가 된 것을 생각하면 참 아찔한 대목이지요.
도됴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조선국왕의 목을 가져 오라는 것이었는데 만일 함경도로 가서 임금과 그 가족이 왜군에게 잡혔더라면 조선 역사, 나아가 동북 아시아의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르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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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피난 길.. 몇 날 며칠을 식은 밥에 거친 음식만 먹다 보니… 선조 임금과 그 가족, 어백미(禦白米)로 지은 찰진 쌀밥만 처먹던 족속들이 죽을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쌀이 좀 생겼는데 … 우리 이걸로 떡 좀 해 먹읍시다요.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하야.. 대장금 같은 수랏간 상궁이 맛있게 인절미를 만들어 백설표 설탕까지 쳐서 임금한테 먼저 올리고 신하들에게도 돌린다. 선조 임금이 한 입 베어 물면서 아… 맛 있네 하며 꼴깍 삼키려 하는데…
그 순간, 저쪽에서 웬 분기탱천한 노친네가 길길이 뛰면서 달려 와 임금 앞에 팍 엎어진다. 보니까 꼬장 꼬장하기로 이름난 정철(鄭撤)이다. 임금…. 아, 그 영감 그거, 결정적일 때 나타나 분위기 조지네… 웅으이오오어옹? 떡을 입 안에 가득 문 채 임금이 묻는다.
전하! 대체 이게 무슨 망발이란 말쌈이시옵니까! 전란으로 삼천리가 초토화 되고 백성들이 굶어죽고 있으며 군량미 한 톨이 아쉬운 작금, 조정에서 떡을 해 먹다니요? 떡을! 네 이놈 항복아, 네 이놈 덕형아, 네 놈들이…. 승지란 놈이 전하를 잘못 보필해서 전하께서 이지경이 되셨구나! 네 이놈들, 떡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냐? 콜록 콜록…
에이, 영감님 일단 잡숴보고 말해… 맛있다니까. 그렇지, 한음?
웅, 이에 하 앙아 웅에 (= 응, 입에 착 달라 붙네)
떡 좀 해 먹은 걸 갖고 노친네가 쪼잔하기는… 대감, 좀 드셔보시라니깐?
정말 안 드실라요?
네 놈들이나 실컷 처먹어라…. 온 몸을 부들 부들 떨면서 나가 버린다.
씨…. 안 먹으면 지만 손해지 뭐… 거, 보소. 박상궁, 송강 대감 몫으로 내온 거 이리 줘 봐요. 꼬불쳐 놨다 나중에 먹게.
밤에 항복이 그 떡을 송강 대감께 슬그머니 갖다 드리니… 못 이기는 척 먹더란다.
배 고픈데 장사 없거든. 해 놓은 떡을 먹지.. 그럼 버릴거야, 어쩔거야?
의주에 도착했을 때 선조임금은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항복은 끝까지 이를 반대합니다. 임금이 나라를 버리면 이나라는 영영 끝장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조임금도 생각을 바꿔 국토 사수의지를 천명하게 되고 이는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활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실의에 빠진 임금을 호종하면서 특유의 입담과 해학으로 가능한 임금을 웃기려 했습니다. 덕분에 피난가는 일행들도 웃으면서 지나친 패배의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낙담하는 것 대신 활로를 모색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전란 중 30대 후반의 이항복과 30대 초반의 이덕형은 명재상 유성룡과 머리를 맞대고 밤새워 일했습니다. 경륜의 유성룡이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면 패기의 두 친구는 그것을 실행에 옳기는 추진력을 지닌, 썩 괜찮은 팀이었지요.
이항복이 어가를 호종하고 있을 때 이덕형은 중국으로 가 파병을 끈질기게 요청, 결국 이 여송의 4만 3천 군대가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 전에 요동 국경 수비대 병력 5천 명이 조승훈의 인솔하에 1차로 파병되어 조(朝), 명(明) 연합군을 편성해 그 해 7월 평양성을 공격하지만 탈환은커녕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이여송의 군대는 제대로 편성된 중앙군이었지요.
결국 이듬해 1월에 조, 명 연합군은 2차 평양성 공격을 감행, 네덜란드제 화포인 불랑기를 투입, 밤 새도록 포격을 가해 일본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남으로 도주했습니다. 이여송은 무거운 중화기를 남겨놓고 경기병 만으로 추격하지만 벽제관에서 왜군의 매서운 반격을 받아 패퇴하고 전쟁은 지구전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대포가 없는 명군을 일본군은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론적인 얘기같지만 명나라의 참전이 조, 명 양국의 역사에 잘된 일인가, 잘못된 일인가 생각해 봅니다. 개전 초 둑이 무너지듯 의주까지 내리 밀렸지만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는 그해 겨울까지 꺼질 듯, 꺼질 듯 하면서도 조선은 무려 9개월을 자력으로 버텨냈습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며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의주의 조정과 뱃길로 연락이 되어 명령계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해권을 내 주었더라면 경기, 황해, 평안도까지 점령당해 국토가 동강난 상황에서 고립된 전라도의 상황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명령체계를 상실한 군은 이미 패잔병이며 적의 입장에선 소탕전이 남았을 뿐입니다.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분투하며 육로로 서진(西進)하는 왜군을 잘 막았고 권율, 곽재우가 이치에서 충청도로 우회하며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섬멸했습니다.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고 길어진 왜군의 보급로를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는 의병활동으로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카와 가토 키요마사의 활동도 위축되고 있었습니다.
개전초기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왜군이 평양에서 주춤한 것은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허송한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기세 그대로 의주까지 쓸어버렸다면 조선의 운명은 참으로 깝깝한 상항이 되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일본의 입장에선 땅을 칠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전한 명군은 초기 평양성 탈환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벽제관에서 작살나게 얻어 맞고 싸울 의지를 상실합니다. 지들만 안 싸운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아예 조선군조차 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조선군의 발을 묶어두고 심유경을 앞세워 이상한 강화를 하려 했고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이 되어갔고 무려 7년을 끌게 됩니다.
차라리 명나라에 도움을 청하지 말고 조선 백성의 저력을 믿고 자력으로 국난을 극복하려 했다면 전쟁이 좀더 빨리 끝나지 않았을 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명나라 역시 전란 중 연인원 50만의 대군을 파병하여 재정이 악화되었고 국력이 소진되어 멸망을 앞당기는 한 원인이 됩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돌아와서…..이후 이항복과 이덕형은 임진, 정유재란의 7년 전쟁동안 선조 임금을 보필하고 전란이 끝나고 그 수습에 힘썼습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모두 영의정의 반열에 오릅니다. 아쉽게도 이덕형은 1613년 이항복보다 5년 먼저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뜹니다.
이항복은 조선의 4대 명재상으로 꼽히지만 이덕형은 그렇게까지 평가받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10년을 더 살았더라면 친구와 더불어 조선의 5대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의 이른 죽음이 아쉽습니다. (끝)
이항복의 후손들
이항복의 후손들은 이후 조선왕조에서 수많은 정승 판서를 배출한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가를 구성하게 된다. 이항복 자신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출신이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를 받들어 중시조로 모시고 백사문충공파(白沙文忠公派)라는 지파를 형성하였다.
이항복과 대조적으로 이덕형의 후손들은 이항복의 후손만큼 눈에 띄는 바가 없다. 아마도 이덕형이 속한 남인(南人) 정파가 소수집단으로 영, 정시대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항복은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 부인이 권율장군의 딸인 안동 권씨이고 두번쨰 부인은 오(吳)씨이다. 사실 오씨는 천한 신분 출신인데 처음에는 점잖은 이덕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근데 이항복이 오씨에게 마음을 두고 … 쉽게 말하면 삼각관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발 빠르기로 소문난 이항복이 잽싸게 오씨를 나꿔 채, 파파팍! 어찌어찌 해 버리고 입 쓱 닦아 버렸다. 이덕형이 투덜거리자 <자고로 여자문제는 부자간에도 안면몰수>라는 논지로 삼각관계를 끝내 버린다.
어쨌든 오씨는 이항복이 소실(小室)이 되었다. 처가살이 하는 놈이 첩(妾)까지 두고… 하지만 오씨는 일생동안 헌신적인 내조로 본부인인 권씨가 죽은 후 정실부인이 되었다. 극히 예외적이지만 임금이 그 내조의 공을 참작하여 외명부(外命婦) 정 1품 정경부인의 봉작을 내린 것이다.
이항복의 집안은 이후 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급을 배출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그의 후손 이시영을 영의정 급으로 본다면 모두 11명의 재상을 배출한 셈이다. 광해군 이후 조선 왕통은 12대(代)가 더 이어지는데 12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린 기간동안 10명의 정승급을 배출한 것이다.
조선 중기, 후기를 통틀어 경반(京班), 향반(鄕班)을 모두 망라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 약 300년 세월동안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백사의 후손이 단지 높은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는 사실로 명문가라고 하기는 어렵다. 백사의 후손은 대대로 높은 관직에 진출하였고 존경 받는 노블리제였다. 그러나 구한말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의 후손들이 보여 준 행동, 존경받는 귀족 집안은 마땅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오블리제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우당 이회영은 6형제 중 4남이다. 그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형제들을 설득해서 전 가산을 정리하여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간다. 나라가 망한 판국에 조상이 어딨느냐며 조상의 제사를 위한 선산까지 팔아 치웠다. 떠나기 전 노비문서를 불 태우고 따라 갈 사람은 급료을 지급하였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이전부터 노비들에게도 반말하지 않고 <하오>를 했다고 한다.
6형제가 일가 60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마차 12대에 나누어 타고 엄동설한의 겨울에 만주로 갔다. 만주에 도착한 이회영 형제는 전 재산을 털어 넣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한다. 이 회영 형제가 대대로 내려오는 전 재산을 판 돈은 그때 돈으로 40만원, 쌀 13만 섬 값이었다고 한다.
한말의 의병운동은 군대해산이 그 기폭제가 되었다. 해산된 병력 총 수는 모두 8,800명, 그들이 산발적 저항을 계속했지만 빈약한 무기에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터이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청산리 전투는 광복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한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며 이 전투의 실무작전을 담당한 젊은 장교들은 신학문으로 교육되고, 근대식 편제로 편성되고, 근대식 교리로 훈련되고, 근대식 무기로 무장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 장군을 도운 철기 이범석, 후에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한 김산 등이다.
6형제가 만주로 건너 가 모두 비참하게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고 해방조국에 오직 다섯 째 이시영만 살아 돌아와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이회영 형제를 빼고도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 밀사였던 이상설(李相卨)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이시영에 의해 신흥학교로 계승되고 현재 경희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현재 이항복의 후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삼성의 이건희씨가 아닐까 한다. 선대 이병철 회장은 백사공지파의 종친회장을 지냈다.
이건희씨나 삼성이 과연 백사의 후손답게 노블리제 오블리제를 다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기업의 존립목적이 이윤의 창출이라고 본다면 이익 많이 내고, 데리고 있는 종업원 월급 많이 주고, 고용 창출하고, 국가에 세금 많이 내는 것을 두고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편법상속, 증여세 포탈, 지배구조 왜곡, 노조원 감시, 제왕적 통치 등을 들어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전자는 <해야 할 일>이고 후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노블리제 오블리제는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하는 것이다. 알았나?
첫댓글 우와 ! 언제 이렇게 어려운 역사공부 마스터하셨어? 요즘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자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