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외국인묘역에 대한매일신보 사장 토마스 베델(Enerest Thomas Bethell)의 무덤이 있다.
오석(烏石) 비신(碑身)에 화강암으로 된 흰 비개(碑蓋)가 얹혀 있는 <大韓每日申報社長 大英國人裵說之墓>라고
새긴 비(碑)가 서 있다. 그 비 뒷면에 음기(陰記)가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깎아 없애버렸다. <韋菴文庫>는 이렇게 전한다.
슬프다! 이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토마스 베델(Enerest Thomas Bethell)의 무덤이다. 끓는 피와 두 주먹으로 떨치고
일어나서 2,000만 국민의 의기를 북돋았다. 타고난 생명으로써 싸우기를 무릇 6년하다가 마침내 한을 머금고 이 세상을
뜨니 이는 公이 公을 위한 소위라 뜻있는 선비 이에 그대를 위하여 비를 세우는 바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집안이 가난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고 17세 때 日本에 가서 몇만금을 벌었으나 실패하니
마음이 매우 우울한 중에 뜻을 얻지 못하였다. 日露戰爭이 일어남에 漢城에 와서 申報社를 창립하니 바로 광무 8년(1904)
7월이었다. 개인재산으로 비용을 쓰며 용맹스럽게 나아가니 그 言論 꺼릴 것이 없었기로 널리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남의 모략을 입어 上海 감옥에 갇혔다가 數旬만에 나왔으나 그 한이 병이 되어 그 이듬해에 죽으니
곧 1909년 5월 1일이다. 나이 겨우 37세로 楊花津에 묻히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나는 죽지만 원컨데 申報는 길이
永生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소서"하고 유언하였다. 오호라 그대를 슬퍼하노라. 외아들이 있어 8세다. 내 지난 날에
상해에서 만나 새벽이 되도록 술마시며 悲憤慷慨하여 뜻이 자뭇 격렬하였더니 지금 공을 묘에 묻음에 남다른 감회를
이길 길 없다. 이에 이렇게 새겨 둔다.
그 기개 뛰어나도다. 그 성갈 남다르도다. 슬프다. 한 조각 돌이여, 달치 말고 긴 세상 빛내소서.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외에 영자신문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발간하면서 일본의 만행을 거리낌 없이 폭로함으로써
일본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고 따라서 나라 안에서 독자가 가장 많았다. 일본의 對韓政策을 통렬하게 비난하자
일본은 상해주재 영국의 淸韓高等裁判所에 고발하여 그를 잡아가두게 하였던 것이다. 이즈음 나라안의 排日思想과
신문계 경향에 관해서 <梅泉野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와이에 사는 교민이 장차 倭國이 우리나라를 병합하려 함에 倭皇과 宋秉畯 李完用에게 그 죄를 묻는 전문을 보냈는데
매일신보가 그 내용을 신문에 보도하자 일본 사람들이 治安妨害라는 구실로 우리나라 內部 곧 內務部로 하여금 압수수색하게
하였다. 이 즈음에 신문이 십 수종이나 있었으나 모두 결단치 못하고 아첨할 뿐 오직 매일신보 만이 왕왕 격분하고 통탄하는 글을
실었고 또 하와이 교민신문인 新韓報와 海參威 교민신문인 海朝新聞이 특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역시 外勢를 배척하는 논설을
보도함에 왜인들은 그때마다 치안방해라고 꾀어 그 발매를 금지하게 하는지라 뜻 있는 선비들은 입을 모아 <치안방해 넉자야 말로
나라 망한다는 신호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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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1985년 서울시가 펴낸 <漢江史>에서 추려낸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