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가 4일 발족됐다. 이들은 “지금까지 군사주의와 특정종교에 대한 선입견으로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이 고려되지 않았다”며 “감옥 대신 사회봉사와 같은 대체복무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양심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따라 병역의무를 거부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는 병역기피현상을 부추길 것이고, 국민정서상 받아들이기도 힘들다”는 반대론이 많이 나오고 있다.
▲찬성…감옥대신 봉사 기회를/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현재 투옥중인 사람은 약 1,600명이다. 현재 그들의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다.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결코 특정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씨가 작년 말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바 있고, 현재 복역중인 사람은 없지만 제칠안식일예수재림교 역시 오랜 기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전통을 이어왔다.
일부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인정된다면 누가 군대에 가겠느냐고 말한다. 사실 ‘신성한 병역의무’라는 말과는 달리 우리 사병들의 복무여건은 참담하다. 아무리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하지만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에 26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아무런 보상없이 보내야 하는 현역복무자들은 엄청난 박탈감을 안고 있다.
한국 사병이 26개월을 복무하고 받는 ‘급여’를 모두 합쳐도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고,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대만 병사들의 한달치 급여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현재의 군복무제도는 현역으로 복무하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현재 14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익근무요원, 상근예비역,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등으로 대체복무를 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본인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만일 대체복무제도가 개선되어 젊은이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군복무기간의 단축과 복무 여건의 획기적인 개선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을 위해서는 국가주의, 군사주의를 견제하는 개인의 시민적 권리의 신장이 불가결하다. 분단에 따른 군사주의와 특정종교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인권이 고려되지 않았다.
지난 수십년간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철저히 외면되어 왔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문제가 뒤늦게나마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재의 병역법에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심판요청이 법원에 의해 헌법재판소에 제기된 것은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대다수의 기독교도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보고 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여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이단에 대한 특혜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삼는 근대국가에서 이단 문제는 종교 내부에서 풀어야 할 것이지, 국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똑같은 죄목으로 징역을 살아야 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현대전에서 군대의 강함은 병력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과 첨단무기가 고도로 발전한 현대에 60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강력한 국방을 위한 효율적인 자원관리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는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하지만, 매년 600여명의 젊은이들이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는 현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다.
▲반대…남북분단 현실선 위험/조남현·자유시민연대 대변인
양심적 병역거부 옹호론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 일체의 군사적 훈련과 집총 등 병역을 이행할 수 없다고 선언한 한 젊은이의 선택을 존중’하며, ‘양심의 자유란 어떠한 현실이나 실정법상의 이유로도 재단될 수 없는 절대적 기본권’이라는 것, ‘종교적·정치적 신념과 여타의 양심을 이유로 한 거부와 반대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오늘날 민주국가의 기본덕목이며 열린 법치국가의 징표’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면서 징병제도가 있는 국가 중 25개국에서 대체복무제도를 통해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양심과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누구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방의 의무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부과된 책무를 거부해도 좋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 ‘양심의 명령에 따라’ 병역을 거부할 수 있다면 누가 ‘최악의 경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군대에 가려고 할 것인가.
‘양심’이라는 것은 ‘자의적’이다. 자의적 판단은 자칫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구성원 각자가 나름대로의 잣대를 고집한다면 공동체는 더 이상 그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럴 경우 공동체의 구성원, 곧 각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무참히 짓밟힐 수도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유지에는 자의적 개념인 ‘정의’나 ‘양심’이 아니라 ‘법’이라는 ‘합의된 룰’이 요구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것에 속한 개인의 총합이다. 따라서 공동체를 지키는 것은 곧 각 개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바로 양심적 병역거부 옹호론이 주장하는 그 ‘개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개인의 양심이 소중하다면 그럴수록 공동체는 유지되어야 하고 공동체의 안전은 지켜져야 한다.
이른바 대체복무제 주장은 병역이 아닌 다른 일로 사회에 기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대체복무는 물론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필요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그 판단도 공동체가 할 때로 한한다. 방위산업체 근무로 병역의무를 대체하는 게 한 예다. 원하는 사람 모두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공동체가 요구하는 요건과 자격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원하는 누구나 대체복무가 가능해 너나없이 대체복무를 택하겠다고 나선다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특히 남과 북이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럴 우려가 높다. 그런 점에서 외국의 사례를 들며 대체복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로서 대만이 대체복무를 시행하고 있다고 반박하지만, 대만의 경우 남아도는 병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대체복무제를 도입했다. 즉, 대체복무제가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도입되었다는 얘기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민정서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 논의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참여연대 인터넷 홈페이지 쟁점토론방에 올라온 글의 90% 이상이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경향신문 2002/02/07)
■ [부일시론] '양심적 병역 거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군 복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군에 입대하면 얼굴 맞대고 부대끼며 살던 사람들로부터의 단절,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익숙한 공간으로부터의 격리, 엄격한 규율과 통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군 복무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군 복무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느낌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유달리 특별한 것 같다.
때로 우리나라 남자들은 어떻게 군 복무를 하는지에 따라 누구는 '사람의 아들',누구는 '장군의 아들',또 누구는 '어둠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는 아주 오래 된 농담에 따라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군 복무를 마친 남자들끼리의 대화에서도 공수부대나 해병대에서의 고된 훈련담이나 무용담 앞에선 도시락을 들고 출퇴근했던 남자들은 아예 군대에 갔다 온 축에 들기조차 어렵다.
이렇듯 군 복무와 관련한 경험이 사람들을 구분짓는 한 기준이 될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군대에 가고 안 가고의 문제에 있어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사람들의 이같은 정서는 선거철이 되면 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후보자 본인은 물론이요 그 자녀들, 친인척들 중에서 병역기피의 의혹이 불거지기라도 하면 유권자들은 절대 이를 눈감아 주는 법이 없다. 솔직히 군대에 안 갈 수만 있다면 안 가겠다는 것이 인지상정일 터인데 그런 만큼 사람들이 군 복무와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 예민하고 엄격해 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군 복무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완고한 시각들이 조금씩 바뀌어 가는 조짐들을 볼 수 있는데 '양심적 병역거부'문제와 관련한 것이다.
지난 2월 서울지방법원은 이 문제로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신청을 하기도 했고 대전 부산 등의 법원에서도 종교적 이유로 입영을 거부한 사람에 대해 영장기각, 보석허가 등의 결정이 잇달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1만여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어김없이 구속재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법원의 요즘 태도는 무척 주목할 만하다. 선고 형량에 있어서도 정찰제마냥 일률적으로 징역 3년이었던 과거에 비해 요즘은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최소한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것은 이제 우리 사회가 국민이 누려야 할 양심의 자유와 국민이 부담하는 국방의 의무 사이의 충돌을 조화롭게 조절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할 단계에 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수의 위력으로 생각이 다른 소수를 무조건 처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젠 그들의 종교적 신념도 존중하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도 다 할 수 있게 하는 균형있고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사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적이라서 군대가나 하는 반응에서부터 북한이 저렇게 버티고 있는데 무슨 철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집총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국가를 마귀로 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양심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종교계의 입장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국방의 의무를 통해 애써 지키고자 하는 것은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 자유민주적 질서를 기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다른 생각, 다른 신앙, 다른 신념을 가질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군대 가는 사람과 안 가는 사람 사이의 형평성이 문제된다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복무기간을 무장복무의 경우보다 훨씬 길게 하거나 인력이 부족한 분야에서 사회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군 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과의 형평을 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역 입영자에게는 급여나 복무기간 등에 있어서 그 처우를 대폭 개선하고 인권 유린 없는 복무환경을 조성해 줌으로써 병역기피의 분위기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은 징병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독일 덴마크 프랑스 등 25개국이 이미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나 군에서의 비무장 복무를 허용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나라와 안보 상황이나 경제 수준, 민주화의 정도 면에서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타이완도 2000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사례에서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김외숙/법무법인 '부산'변호사, 부산일보 2002/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