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전설 속에 떠돌던 [화산고]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냈다.
대개 소문이 요란하면
본질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화산고]는 다르다.
청소년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무협지를 독파했었다.
사실 지금의 빠른 속독 훈련은
중학교 시절 내가 읽었던 천권이 넘는 무협지 덕분이다.
실제로 내 친구 중에는
무림비급을 얻겠다고 산 속으로 떠난 경우도 있었다.
비록 가출 사흘만에 부모님에 의해 집과 학교로 되돌아왔지만,
나는 밤마다 촛불을 켜 놓고 장풍으로 촛불을 꺼보려고 시도를 했었다. 내공이 부족했는지 나는 단 한개의 촛불도 꺼트리지 못했지만
무협지 속의 활달한 상상력의 세계는 내 발걸음을 가뿐하게 했었다.
이제 그 상상 속의 풍경이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화산고]의 모험에 가득찬 도전은 의미가 있다.
6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쓰면서
스타부재의 비상업적 시스템을 고집했다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장혁 신민아 같은 신인이 남녀주인공을 맡고,
김수로 허준호 같은 배우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다른 배우들은 대부분 관객들 눈에 낯설다.
낯익은 스타가 존재하지 않는 영화가,
주류 상업영화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상업적 안전판이 될 수 있는 스타를 내세우지 않는데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를 엿볼 수 있는데,
[화산고]는 공력을 배우에 낭비하는 대신
와이어 액션이나 컴퓨터 그래픽 같은 특수효과에 쏟으면서
새로운 볼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고등학교로 설정할 경우,
많은 제약이 뒤따른다.
우선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인 관객들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엽기적인 그녀]나 [신라의 달밤]처럼
자신들이 현재 처해 있는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손쉽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화산고]는 고등학교를 주공간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학원무협을 표방하면서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는다. 시간적 배경을
비일상적으로 돌려 놓음으로써 제작진들은 훨씬 자유스럽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비천무]같은 무협멜로보다
훨씬 진일보한 상상력과 영화적 테크닉을 우리는 맛볼 수 있다.
어린시절 번개를 맞아 자신도 모르게
초인적 내공을 지니게 된 경수(장혁 분)가, 여덟 번이나
퇴학을 맞은 뒤 화산고에 전학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구성의 전개방식은 평범하다. 교장과 교감의 갈등은
어느 조직 내에서나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학온 신입생을 둘러싼 삼각관계나 산생과의 갈등 역시 그러하다.
[화산고]의 장점은 평범한 서사적 구성을
화려하게 전이시켜 놓는 상상력이다.
내공의 기가 서로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액션씬은,
발달된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기를
가시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인상적인 연출력을 선보였던
김태균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 [키스할까요]에서는
주류 상업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주어
실망을 샀었다. 그러나 [화산고]에서는 다르다.
그는 무모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실험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
이런 무지막지한 용기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갖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완성된
한국적 와이어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의 수준 높은 기술로 무장된
[화산고]는, 그런 주목할만한 성과 이외에도
참신한 실험의식이 번뜩이고 있다.
상식의 허를 찌르는 서사적 전개,
유머를 통해 긴장을 풀어주면서 한편으로는
서사적 힘을 비축해서 파워풀하게 밀어붙이는 김태균 감독의 내공은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화산고]의 뛰어난 장점 중의 하나가
화려한 시각적 볼거리뿐만이 아니라,
엑셀레이터를 밟고 전력질주하는 현대적 삶의 속도를
화면으로 재창출하면서도 긴장과 이완의
호흡조절을 능숙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무장된 이야기는
각각 다른 개성을 지닌 상이한 인물군들의 부딪침에 의해
다채롭게 펼쳐진다. 김태균 감독은
극단적인 근접촬영에 의한 독특한 미장센,
화면의 과감한 분할,
서사극의 해설자 같은 나레이션의 등장 등으로
모험적인 시각적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인들의 연기는 아직 미완성이다.
장혁은 비장한 표정 연기와 함께
순수한 희극적 캐릭터를 소화함으로써 명랑만화의 주인공 같은 미워할 수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신민아는 대사의 불안정성이 눈에 띄고
감정의 다채로운 조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 있는 힘있는 연기를 보여주어서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폭을 열어두고 있다.
낯선 시공간적 배경으로
연기의 설정 자체가 혼란스러워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대부분의 배우들 사이에서 허준호나 김수로의 자신있는 연기는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단조롭다는 흠은 있지만, 허준호의 힘 있고 안정감 있는 대사는 영화의 균형을 잡아주는 큰 역할을 했다.
[화산고]가 올 겨울 최후의 승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버티고 있고,
그 뒤로는 [몬스터 주식회사]나 [반지의 제왕] 같은
막강한 무공을 가진 고수들이
올 겨울 영화전쟁의 무림지존이 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산고]를 지지한다. 그 속에는
잃어버린 내 청소년기의 꿈의
한 조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