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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제목: 하나님나라의 대 반전
본문: 마태복음 21:28~32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런데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작은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는 가지 않았다.
31 그런데 이 둘 가운데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으며, 그를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종종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로 비유하신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사셨기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의 정당성은 아버지의 아버지다움에서 나온다. 물론 현실에서 아버지다운 아버지는 없다. 소위 실재의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처음 해보거나 자식이 여럿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적 아버지상을 실천하는 데 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는 데 한계를 느끼면서도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들이 드물지만 있다. 다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고 해서 자식들이 반드시 가부장제 사회가 바라는 품성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아버지의 책임은커녕 그 자신의 삶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개차반에게서도 반듯한 자식들이 자랄 수 있다.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나 자식의 상징적 위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어떤 실질적 성과도 없이 우연의 조작에만 휘둘리는 것은 아니다. 보통은 아버지다우려고 노력하는 사람 밑에서 가부장제 사회에 반듯한 자식들이 자라고 반대로 개차반 밑에서 사회에 부담을 주는 문제아들이 자란다. 다시 한번 그럼에도 반듯하게 자란 인간이 반드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변변치 못해 사회에 부담을 주는 인간이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사회에 잘 적응하는 긍정형 인간은 자신의 존재 조건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부정성이다. 이를 회피하려는 사회에서 부정성은 파괴적이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사회에서 부정성은 그것이 가져오는 여러 고통에도 불구하고 좀 더 적절한 사회 형태를 찾아낼 것이다. 즉 문제아는 사회에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사회는 이 고통을 통해 성숙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아버지와 자식들의 관계로 비유하시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역사적 우연성, 즉 예수께서 가부장제가 철저한 사회에서 사셨다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지, 예수께서 가부장제 사회를 지지했기 때문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비유하는 아버지는 이상적인 아버지며, 실재의 아버지는 바로 이 아버지됨에 있어서 불가능성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과 실재의 아버지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가부장제 사회에 한계 지워질 것이다. 가부장제를 극복한 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잃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두 차원에서 분열된다고 전제하신다. 즉 말의 차원과 실천의 차원. 맏아들은 아버지의 지시를 말의 차원에서는 거부했지만 행위의 차원에서는 순종했다. 반면 둘째 아들은 말의 차원에서는 순종했지만 행위의 차원에서는 배신했다. 그래서 이런 차이만 보면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이라도 실천이 중요하다는, 그 나름의 진리는 있지만 매우 상식적이고 단순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단순한 결론은 오늘 본문 말씀의 끝에서 실천과 비실천, 순종과 배역 사이의 대립이 당시 사람들로서는 거의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과 결합된다는 사실과 만나 혼란에 빠진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대립은 ‘너희들’과 ‘세리와 창녀들’의 대립과 조응한다. ‘너희’는 다름 아닌 예수의 폭력적인 성전 정화 행위에 화가 잔뜩 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다.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인 상식, 즉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이라는 통념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율법 준수의 모범이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대로 제의를 집전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백성의 장로들은 율법에 의거해서 공동체의 질서를 규율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세리는 이민족에 부역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재산을 거둬가는 사람들, 게다가 금송아지에 버금가는 우상인 주화를 취급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세리들은 이방인과 접촉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습에 맞춰 일해야 했기 때문에 안식일 지키는 것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민족 배신자요 불경건한 우상숭배자이며, 동족을 등쳐 먹는 모리배였다.
창녀들은 말해 뭐하랴! 당시에는 세리보다도 더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남성중심주의 사회의 비인간인 여성들인데다 가부장적 혈통 밖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의의는 부계 혈통을 잇는 성행위와 출산 그리고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일에 있다. 그렇다면 창녀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의까지 상실한, 즉 가축만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법무법인 김앤장처럼 먹튀자본 론스타를 변호해서 치부하는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으로 인식되는 오늘날 배금주의 사회에서 세리는 더 이상 경멸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녀는 오늘날에도 멸시받는다. 꼭 그런 것만도 아닐까? 세상 물정 모르는 얘길까? 강남의 텐프로 룸살롱에서 하룻밤에도 노동자 몇 개월 치의 화대를 받는 콜걸들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혼란스럽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명확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로 인정받아 존경받는 사람들이었고, 세리와 창녀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즉 인간 이하의 존재들로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인정될 수 없는 비인간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비인간들이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들보다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이것이 ‘싫습니다’ 하고는 행동으로는 아버지께 복종한 맏아들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는 아버지의 지시를 뭉개버린 둘째 아들과 어떻게 관계되는 것일까? 예수는 세례 요한이 보여 준 옳은 길을 보고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은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뉘우쳤다고 하시는데, 예수는 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판단하시는 것일까?
여기에서 맏아들의 말의 ‘아니오’와 행동의 순종, 그리고 둘째 아들의 말의 ‘예’와 행동의 불순종이라는 대립이 어떻게 이후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세리와 창녀들 사이의 대립을 준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대해 “예”라는 대답과 “싫습니다”는 대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두 아들이 자신의 의지를 아버지께 드러내는 방식에 관한 것일까? 그래서 “예”하고 대답했다가 실제로는 하지 않는 행위는 겉으로는 순종을 꾸미지만 내면에서는, 혹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는 전혀 순종할 생각이 없는 위선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이 만약 위선이라면 반대의 경우 아버지 혹은 사람들 앞에서 싫다고 하고 결국 뉘우치고 지시를 따르는 것은 위악이라는 걸까?
이 “싫습니다”를 의지의 대답이 아니라 방어, 생물학적이자 심리학적인 개체의 전체성과 항구성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모든 변화를 축소시키고 제거하고자 하는 자아의 반응으로 보는 것이 관건이다. 단연히 포도원에서 노동할 것을 지시하는 아버지는 자아라는 환영에서 벗어나는 고통스러운 노동을 지시하는, 그리하여 다른 존재 다른, 세계를 창조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이다.
프로이트의 ‘지형학(topography)’은 초기의 후기의 내용이 좀 다르다. 지형학은 마음의 지도를 그린다. 마음을 하나의 영역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프로이트 초기에 무의식, 전의식, 의식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 전체가 무의식이라고 보았으며 무의식과 전의식 사이에 그리고 전의식과 의식 사이에 칸막이가 있어, 무의식을 전의식으로 다시 전의식을 무의식으로 분화시킨다고 보았다. 이 칸막이의 이름이 ‘검열’이다.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기 때문에 검열을 거쳐야만 전의식이나 의식으로 진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기에는 이드(Id), 자아, 초자아로 마음의 지도를 그렸다. 이드는 라틴어로 영어의 It, 독일어의 Es이며 우리말로 ‘그거’ 또는 ‘거시기’로 번역되기도 한다. 저기 있기는 있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이드다. 이드는 단순히 무의식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에너지, 리비도 혹은 충동의 동력이다. 이 지형학에 따르면 이드에서 자아와 초자아가 분화된다. 이러한 분화는 검열이 아니라 동일시에 따른다. 자아는 타자에게서 빌려온 이미지(ideal ego)와 동일시를 통해 형성되며, 초자아는 아버지를 비롯해 존경할만한 인물의 이미지(Ego Ideal)와의 동일시를 통해 발생한다. 이 동일시 과정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로 오인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드가 리비도, 즉 충동의 동력이라면, 자아는 이 에너지를 통제하는 행위자(agent)다. 따라서 이드가 방어막을 뚫고 자아에 침입할 때, 자아는 외상을 입게 된다. 이 외상은 방어막의 손상일 수도 있고 자아에 과부하가 걸린 상태일 수도 있다. 자아는 이드를 견딜 수 없다.
자아는 이상적 자아 혹은 대타자의 이미지와 더불어 이 대타자가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타인의 이미지의 편린들이 섞여 있는 구성물이다. 우리가 ‘자기’라고 믿고 있는 이 환영적 이미지는 대타자의 승인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어진 사회체제에 순응적이다. 자아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자기 이미지를 고수하려 한다. 그것이 방어다. 그러나 이 자아를 고수하려는 완고한 태도에서 새로운 것, 하나님나라의 다른 표현인 “새 하늘과 새 땅”은 발생할 수 없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로 인정받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자아를 넘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기울일 리 만무하다. 그들은 자아를 고수하면서 불의한 체제를 완강하게 지탱한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의 자아 방어벽은 이미 파괴되고 박탈된 상태다. 그들은 이미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아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자아는 자기 부정과 변혁의 의지로 넘쳐난다. 물론 세리와 창녀들의 변혁 의지가 주어진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는 열망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주어진 사회에서 부정당한 그들의 자아는 다른 길을 모색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당연히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은 가깝게 열려있다.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은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뉘우쳤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뉘우침’은 자아와 기존의 세계를 고수하려는 방어를 극복했다는 뜻, 자아의 환영을 깨뜨렸다는 의미, 자기뿐만 아니라 이 자기를 틀 지우는 세계를 해체하고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말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세리와 창녀들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방어 행동으로 자기와 이 세계를 고수하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다른 세계를 향해서 몸부림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