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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떨기나무가 관심을 끌고 있는가(1) 김동문 선교사
"혹시 김승학 씨가 쓴 <떨기나무> 읽어보셨어요? <떨기나무>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라 성지순례 여정이 재조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메신저에 접속한 한 후배가 던져온 질문이다. "사실은 제가 이번 주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출애굽 여정을 가지고 특강을 몇 주에 걸쳐 하려고 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포기상태입니다"는 후배 사역자의 빠른 답변을 부탁하는 이메일도 있었다. 최근에는 <떨기나무>를 관심 있게 읽어보았기에 내가 아직 접해보지 못하셨다면 한 권 보내고 싶다는 후배 사역자의 친절한 이메일도 있었다.
잠시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지난 6월 책 <떨기나무>에 대해 전해 들었다. 출애굽에 관심이 많던 나는 '무슨 책일까?' 궁금하고 궁금하여 서점을 찾았다. 새 책 코너에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넘쳐나는 실망감을 맞이하여야 했다. 이미 인터넷상이나 서구에서 센세이셔널리즘에 입각하여 보도되고 방송 전파를 탄, 책으로 소개되었던 주장을 모은 한글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몇 개의 서평을 접했다. <뉴스엔조이>에 실린 이국헌 목사와 <빛과 소금> 7월호에 실린 북칼럼리스트로 소개된 나관호 목사의 서평이었다. 그 중 이국헌 목사의 글이 서평(바로보기)의 성격을 잘 살려주고 있었다.
이 글을 쓰는 것에 오랫동안 주저함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것이 혹시나 한국에서 일고 있는 <떨기나무> 열풍에 일조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있다. 다빈치 코드 뒤집어 읽기나 바로 읽기 같은 글은 나름대로 시사성도 있고, 독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는 글이겠지만 '떨기나무 바로 보기' 같은 류의 글은 큰 의미나 가치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도 한몫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후배 사역자들의 답답함이나 충격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 글은 <떨기나무>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비판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무엇보다도 <떨기나무>의 저자 김승학 씨가 신학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기에 그 주장의 정당성을 평가하기 위하여 신학적 근거로 논쟁을 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저자가 성경본문을 활용하고 있기에 저자의 성경 인용과 해석이 적절한지를 본문의 맥락과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먼저는 이국헌 목사의 서평과 <교회와 신앙>(2007년 6월 25일자) 인터뷰 기사에 나오는 저자의 주장에 드러나는 논점과 관심사를 평가하고자 한다. 다음으로 저자의 라우즈 산 시내산 설의 몇 가지 주요 논점에 대한 평가를 할 것이다. 고고학적, 역사적 비평은 다음 기회에 하고자 한다.
또 한 가지, 이 글을 쓰는 것이 기존의 시내산(자발 무사)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다. 지금의 상품화된 성지순례 프로그램 모두가 성서지리학이나 성서고고학을 참고해 만든 것은 아니다. 관광객들이 단체로 가기 힘든 장소가 많기 때문에 성경 사건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왜 떨기나무가 관심을 끌고 있는가?
<떨기나무> 같은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최소한 몇 가지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동안 한국교회는 출애굽 사건의 사실여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비역사화된 (논리나 주장에서가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해석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출애굽 강해서를 쓰시는 분들이나 모세 5경을 다루는 전문가에 속하는 분들조차 그런 인상을 주었다. 책이나 논문 등의 문서 자료를 바탕으로 이론을 세우고 입장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그것이, 그 주장들이 사실인지 하여 현장을 밟고 현지의 자료나 정황들을 연구하고 하는 일들을 많지 않았다. 자료 평가를 통해 다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론과 주장들을 여과 없이 선택했던 것이 일부 사실이다.
두 번째로 그동안 성지순례가 그저 '순례'였던 것이다. 신학대학원의 성지답사팀들은 물론 다수의 목회자들의 성지 방문은 차별성 없이 제공되는 성지 프로그램을 따라 이뤄진 일정이었다. 거기에는 역사 탐구에 대한 열정이나 진지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반 지중해 여행 상품이나 목회자들이나 교회 성지순례 프로그램이 거의 차별성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성지순례를 위한 성지순례를 진행해온 측면도 적지 않았다. '성지 여행을 하면서 종종 느꼈던 것처럼 그곳이 정말 역사적 장소가 맞는지 진지하게 검토해보면서 성경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상고해보는 노력'이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장성이 부족했고, 현장의 역사적 근거를 제시받고 논증하는 것에 무기력했다.
이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탐사보도나 역사 추리물이 안겨주는 흥미와 뒤집어보기에 익숙한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힘을 받은 것 같다. 이 책은 곳곳에서 긴장감을 안겨주는 '위험을 무릅 쓰고' 이 탐사가 진행되었다는 식의 표현들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떨기나무>는 읽음직하고, 생각해봄직하며, 새로운 확신을 가져봄직하게 잘 짜여 지고 편집된 책이다. 출판사의 정교한 편집 손길이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출판사의 편집 기획력의 탁월함과 대형 교회의 자체 서점을 중심으로 배본에 마음을 쓴 것으로 보이는 등의 책 소개 활동도 책을 보급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출애굽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나 설교의 부재, 현장 답사나 현장 검증을 위한 성지순례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떨기나무> 같은 책에 떨고 있는 사연일 수 있다.
<떨기나무>의 저자인 김승학 씨는 책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전제 위에서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의 중요한 문제제기의 근거는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이 진짜 시내산이 아닌 9가지 이유'(398~402쪽)와 '진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8가지 이유'(402~406쪽)에서 엿볼 수 있다. 그 근거 본문으로 '시내산이 미디안에 있다는 성경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이 진짜 시내산이 아닌 9가지 이유
1. 시나이 반도의 당시에 애굽의 땅이었다.
2.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3.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를 지나기 3000여 년 전부터 ‘신(=시나)’라 불렸다.
4.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기원후 527년 순례객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급조된 성지일 뿐이다.
5. 출애굽해서 십계명을 받기가지 11개월 5일 동안 애굽 땅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6. 애굽 왕자로서 애굽 땅을 잘 아는 모세가 애굽 군인들이 많은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갔을 리는 없다.
7. 시나이 반도는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다 48km나 덜어져 있어 성경과 다르다.
8. 시나이 반도의 무사산 앞에는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 앉을만한 광야가 없다.
진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8가지 이유
1.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땅은 예로부터 미디안 땅이라고 불렀다.
2. 하나님은 구약 시대부터 이미 아라비아와 미디안에 관해서 명명백백하게 구분해 말씀하신다.
3. 애굽 왕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한 곳이 성경에 시나이가 아닌 미디안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4.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가 살고 있는 미디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5. 홍해를 건너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다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마시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6.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분명히 아라비아 사람이요 미디안 땅에 산다고 했지, 시나이에 산다고 한 적이 없다.
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투를 벌였다고 했는데, 아말렉족은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던 아라비아인이다.
8. 사도 바울은 시내산의 위치를 아라비아에 있는 산으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떨기나무 바로 보기를 위한 의견을 조심스럽게 펼쳐보고자 한다.(계속)
수르 광야 해석은 억측(2)
책 <떨기나무>로 인해 '충격과 공포'로 떨고 계신 이들에게
▲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다는 홍해, 양 편으로 솔로론 기둥이 서 있고 이곳이 유일하게 수면의 깊이가 120m다. 하나님은 이곳을 가르시고 그의 백성을 건너게 하셨다. 론 와이어트 탐험가는 이곳을 뒤져 애굽의 말굽과 병거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수르 광야(이집트 지명으로는 에담 광야)의 위치는 이집트 역사 기록에 엄연히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저자는 그 자리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집트 역사 기록을 통해보면 에담은 바닷가를 뜻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바닷가는 홍해변에 자리하고 있다. 본토 이집트 본토와 시나이 반도 사이에 있는 홍해변은 '바닷가'로 불렀을 것이다.
저자나 이국헌 목사(기사보기)는 "민수기 25장 15절에서 수르는 미디안 백성 한 종족의 두령으로 나타나고 있어 수르 광야는 미디안 땅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그 아말렉족은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던 아라비아 인들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 북서쪽에 있던 미디안 땅에서 광야생활을 지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렇기 때문에 시내산은 그곳에 있는 라오즈산이 틀림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보자. 민수기 25장 15절에는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 한 종족의 두령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물론이고 이국헌 목사조차 '수르 광야가 수르 종족이 살고 있던 땅'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미디안 족장들이나 왕들, 미디안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출애굽 여정 후반부에도 등장한다. 바알브올 사건에도 미디안 사람들은 여지없이 등장한다. 미디안 사람들이 있는 곳이 미디안 땅일까? 미디안 땅에 살던 사람들을 미디안 사람들이라고 말했을까? 모압 평지에서 라오즈 산 주변 지역까지 가려면 통상 3주 안팎의 시간이 필요하다.
먼저 민수기 31장 8절 본문을 보자.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모세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디안 땅에 가서 그 왕들을 죽이고 그 땅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요르단의 역사는 물론이고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시새산은 라오즈산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사람들을 빼면)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민수기 31장 1~12절을 옮겨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싸움에 나갈 준비를 시키고 미디안을 치러 보내어서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대하여 각 지파에서 일천인씩을 싸움에 보낼지니라. 하매 매 지파에서 일천인씩 이스라엘 천만인 중에서 일만 이천인을 택하여 무장을 시킨지라. 모세가 매 지파에 일천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그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 아이들을 사로잡고 그 가축과 양떼와 재물을 다 탈취하고 그 거처하는 성읍들과 촌락을 다 불사르고, 탈취한 것, 노략한 것, 사람과 짐승을 다 취하니라. 그들이 사로잡은 자와 노략한 것과 탈취한 것을 가지고 여리고 맞은편 요단가 모압 평지의 진에 이르러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로 나아오니라."
또 다른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창세기 25장 18절이다. "그(이스마엘)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이 본문에 나오는 '술'은 수르이다. 한글 개역 성경 번역에 '술'로 표기했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떨기나무>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한글 개역 성경의 표기를 그대로 따르면서 살펴본 것이다.
그런데 더 근본적이고 분명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저자가 수르 광야의 위치 설정을 위해 사용한 본문에 나오는 '수르'라는 단어와 광야 지명 '수르'가 전혀 다른 단어라는 점이다. 이를 위하여 히브리어 성경 원문을 인용하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민수기 25장 15절에 등장하는 수르는 영어 표기로 'Zur',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쭈르'에 해당한다. 영어 표기 'Shur', 히브리어 발음 '슈르'와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저자의 완전한 오해와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 히브리어로 쓰인 민수기 25장 15절. 여기에 등장하는 수르는 영어 표기로 'Zur',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쭈르'에 해당한다. 영어 표기 'Shur', 히브리어 발음 '슈르'와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 본문에 대한 저자의 완전한 오해와 상상력이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길게 수르 광야의 위치에 얽힌 저자의 주장을 짚어본 것은 이 책 곳곳에서 이 같은 식의 억측이나 무리한 해석과 적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디안 땅 다시 정의하기(3)
①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뉴스앤조이>에 실린 이국헌 목사(기사보기)의 서평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를 열어가고자 한다. 이 목사가 지적했듯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고자 나름대로 성경상의 여러 기록들을 애써서 대조하고 있다. 그 노력의 중심에는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에 있는 모세산이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땅에 있는 라오즈산'이라는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가 탐사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북서부 땅은 미디안 땅으로 불려왔다. 그 주장에 별달리 이견이 없다.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미디안은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을 도망쳐 피난해서 40년 동안 살았던 곳이며, 따라서 그의 장인 이드로가 살았던 곳이다. 라오즈산 근처에 바드-필자 주: 지명 이름을 보면 알바드라고 적혀있다-라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그 바드 옆에 이드로-필자 주: 현지 지명에 따르면 '무가이야르 슈아이브', 즉 슈아이브의 작은 동굴이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슈아이브는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를 지칭한다-라는 지명이 있으며 그곳에는 실제로 이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고고학적 지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저자는 직접 방문하여 확인-필자 주: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이드로는 요르단 암만 북서쪽 쌀트 지방의 한 골짜기인 슈아이브 골짜기에서 죽었다. 그의 무덤이 있다는 곳에 슈아이브 이슬람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하였다.
특별히 모세는 이곳에서 이드로를 도와 양 무리를 치다가 호렙산에 이르러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출애굽기에서 호렙산은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과 동일한 산이기 때문에 이 산은 시나이 반도가 아닌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시내산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발 알라우즈에 있다는 주장은 여러 면에서 무리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은 시내산에 얽힌 성경의 다양한 언급들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무리한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미디안 땅(사우디아라비아)의 시내산 설, 특히 <떨기나무>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에는 몇 가지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1) 갈라디아서 4장 25절을 바탕으로 '시내산은 아라비아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출애굽기 2장15절, 2장 19절, 3장 8절, 3장 10절, 3장 12절을 바탕으로 '시내산은 이집트 밖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전제부터 잘못된 부분이다.
2) 출애굽기 4장 19~25절을 근거로 '시내산은 미디안 땅에 위치해야 한다'.
3) 출애굽기 3장 1~2절를 근거로 '시내산은 모세와 이드로가 살고 있던 땅 근처에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시내산은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 전제 아래서 상충되는 성경 본문을 적절하게 필요에 따라 재해석하지만 또 다른 해석상의 문제를 발생시키곤 한다. 그리고 출애굽 관련 성경 기록을 지나칠 정도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라우즈산 시내산 설을 주장하면서 이슬람 전승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슬람 전승이라고 하여 애써서 무시할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 전승을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데 신중해야 할 이유가 많다. 이 글은 짧게 <떨기나무>가 갖고 있는 중요한 관점 몇 가지를 성경과 이집트 역사, 지정학적인 해석을 통해 평가해보고자 한다.
출발점은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었다는 전제에 대한 평가다. 미디안 땅에 얽힌 해석을 시도해본다.
1.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떨기나무> 이 책은 말하기를 시내산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부분이었던 미디안 땅에 있었다고 한다. 미디안 땅이 이슈가 되고 있는 사우디 판 시내산 자발 알라우즈가 포함된 지역을 일컫는 것은 사실이다. 즉 사우디아라비아의 서부 해안 지역 주변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한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자발 알라우즈는 사우디아라비아 서부(미디안 땅)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시나이 반도에 있는 어떤 산보다도 높은 산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내산이 자발 알라우즈일 수는 없다. 성경에서 시내산이 가장 높은 산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높은 산, 그것도 그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셨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우리의 관행일 뿐이다.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다고 주장하는 주장의 근거 본문은 출애굽기 3장 1절이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매"(출 3:1)
그러나 이 성경 본문은 미디안이라는 장소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사람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40년간 양무리를 쳤다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다. 호렙산이나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이 본문을 활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시내산은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땅 경계 밖에 있었다. 그런 판단은 지리적인 거리감 평가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집트의 동부 델타 지역에 자리한 고센 땅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발 알라우즈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직선거리 개념은 이 평가를 하는데 별 의미가 없다. 당시의 도로와 이동 수단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당시의 여행 방식을 고려하면 낙타를 이용한다고 하여도 한 달 안팎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낙타는 흔한 것도 아니었고 싸구려도 아니었다.
사진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미디안 땅에 살던 이드로를 찾는다. 그의 허락을 받아 이집트로 갈 것을 결정한다. 모세는 그의 형 아론을 하나님의 산에서 재회(출 4:27)한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아론은 이집트 본토 고센 땅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미디안 땅까지 그 먼 거리를 여행했어야 했다. 그 당시 여행 거리로 치면 최소한 한 달 안팎이나 걸릴 거리이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머물 때의 일을 보자. 출애굽기 18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왔다. 27절을 보자. "모세가 그 장인을 보내니 그가 (시내산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 가니라"고 적고 있다. 이드로는 시내산을 떠나 미디안 땅으로 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민수기 10장에서 또 다른 본문을 만날 수 있다. 29절에서 32절 사이에 등장한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미디안 땅에 시내산이 있다면 이 본문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사우디아라비아 미디안 광야에 살았다는 모세가 어떻게 하여 이집트 왕이 죽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은 골짜기나 강 하나를 건너지 못하고 살다가 이 땅을 떠난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런 궁금함에 대하여 저자가 어떤 입장을 보일지는 큰 이슈가 될 것 같지 않다.(계속)
미디안 땅 다시 정의하기(4)
②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땅에 속해 있지 않았다
▲ 고대 이집트는 오늘날의 수에즈 운하가 지나가는 지역을 벗어나면 이집트 땅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시나이반도 지역과 이집트 본토 그 사이에 전방부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국경관리요원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땅의 경계를 남북으로는 (북부) 믹돌에서 (남부) 수에네라고 일컬었다. 동서 개념은 별도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나일강 좌우편이 동서의 경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내산이라고 부를 만한 산을 찾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노력이 없었다"는 <떨기나무> 저자의 주장은 사실과 거리감이 있다. 그런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시내산의 위치를 둘러싸고 6~7가지 장소가 경합(?)을 벌이고 있다. 전통적인 시내산도 그 많은 후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시나이반도는 1967년 이스라엘에 의해 침공 당하기 전까지는 외부인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점령을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애굽 땅"이거나 "상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면 지금 시내산은 예전에 애굽 땅이었다"는 저자의 시각은 역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시나이반도가 이집트 영토 안에 있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적이거나 역사적 근거가 없다. 물론 오늘날의 시나이반도나 시내산이 이집트 영토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500여 년 전 출애굽 당시 시내산이나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땅에 속하지 않았다.
출애굽 여정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곳을 떠날 때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로 언급한다. 이미 이집트 땅을 벗어났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출 13:18~20).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로 몰려 살던 고센 땅은 이집트 본토의 동쪽 경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전방 부대 믹돌들은 이집트의 동쪽 경계와 시나이반도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집트 제국에서 종종 사용하던 구리광산이나 터키석 광산은 이집트 영토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집트 경계 밖 광야에 있었다고 이집트 문헌들은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에서의 구리광산이나 터키석 채광이 연중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장소가 세라비트 엘카뎀이다. 이곳에서의 채광작업은 주기적이었고, 대개의 경우 1월부터 4월 사이에 진행되었다. 출애굽 시점이 4월 초에 일어난 것과 출애굽 여정을 고려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당시의 시나이반도는 진공상태였다. 이집트의 무력이나 통제력이 미치지 않았던 시기였던 셈이다. 이집트 제국은 광산 지역에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대신에 거나 원정부대를 파견했을 뿐이다. 메렌프타 왕 시대에 단지 한번 주둔군을 파견한 것이 전부였다.
▲ 세라비트 엘카뎀은 시나이반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구리와 터키석 광산 지역이었다.
시나이반도에 요새에 수비대를 주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비대는 시나이반도 북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그것을 이집트 기록에 따르면 믹돌로 불렀다. 믹돌은 이집트 제국이 원정에 나설 때 전진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고, 외부 적의 침입이나 유입되는 난민들을 통재하는 통제선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요새들은 주로 시나이반도 북부의 호루스의 길로 불리는 도로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요새성들의 존재 파악을 통해 이집트 본토와 가나안 땅 사이의 중개 도시들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성경(출 13:17)은 이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묘사하고 있다.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본문 역시 시나이반도는 애굽 땅 경계 밖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미디안 땅에 있는 호렙산에서 다시 모세를 만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엘림과 신 광야를 지나 시내광야에 가서 십계명을 받고 떠날 때까지 기간은 정확히 11개월 5일이다. 애굽 군사들이 뒤쫓아 오는 상황에서 11개월 동안 애굽 땅인 시나이반도를 떠돌아 다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명히 애굽을 떠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곳은 지금의 시내산이 아닌 다른 곳에 시내산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이집트 군대와의 충돌이 없었던 것을 두고 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집트의 영토는 시나이반도를 포함하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이집트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볼 때 이집트 땅의 경계가 최대로 확장된 경우에도 이집트 남서부의 광산 지역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 이때가 메렌프타 시대였을 것이다. 이 같은 역사 정보를 바탕으로 한다면 동쪽 홍해인 아카바만을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라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홍해가 수에즈만 쪽이 아니라 아카바만이라는 주장도 너무 근거가 부족하다. 아울러 고센을 떠나 이어지는 출애굽 여정의 일반적인 맥락을 도외시하는 인상이 짙다. 이것은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미디안 땅 다시 정의하기(5)
③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땅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시내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근거로서 갈라디아 4장 25절은 적절하지 않다. 이 본문을 가지고 시내산이 아라비아 그것도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다는 주장을 펼 수는 없다. 출애굽 당시 아라비아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랍이라는 종족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 용어는 그보다 나중인 왕조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뿐이다(왕상 10:15; 대하 9:14, 17:11, 21:16, 22:1, 26:7; 느 2:19, 4:7, 6:1; 사 13:20, 21:13; 렘 3:2, 25:24; 겔 27:21).
1. 바울 시대의 아라비아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모세 당시의 지명을 연상하고 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 당시의 지명을 토대로 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바울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떠올리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울 시대 전후하여 아라비아란 지명이 어디를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대의 유명한 여행자인 스트라보(주전 64~기원후 25)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그는 그리스에서 본도(Pontus)까지 여행을 했다. 그는 아라비아의 동쪽 경계를 페르시아만(걸프만)으로 서쪽 경계는 나일강 동편 지역으로 적고 있다. 스트라보는 아라비아 지역을 나일강 동편에서 시작한다. 시나이반도는 물론 아라비아 반도 전체 지역으로 이해했다.
이보다 앞선 헤로도투스는 주전 5세기 중엽에 기록한 그의 책에서 나일강 동편 지역과 지중해부터 홍해까지의 지역을 아라비아로 묘사했다. 그의 페르시아 전쟁기에서 '이집트에서 멀지 않은 아라비아'를 언급하고 있다.
2. 70인역
아울러 70인역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70인역에서 아라비아라는 단어가 나온다. 고센땅을 묘사하면서 그 땅을 아라비아의 고센(창 45:10, 46:34)으로 변역했다.
이것은 당시의 지명 쓰임새를 반영한 것이었다. 고센 땅이 분명히 이집트 영토(창 37:6, 27, 출 9:28)였음을 언급하면서도 이같이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땅은 고센땅의 또 다른 별명으로도 불린 것이다. 바울은 1세기의 지명 이해를 바탕으로 그의 서신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시대에 시나이 반도도 아라비아의 일부였기에 시내산은 시내이 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 결국 바울의 언급을 바탕으로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이다.
'홍해 건너기' 다시 정의하기(6)
▲ 홍해의 전체 길이는 1900킬로미터이고, 평균 수심은 490미터 정도다.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다. 고센에서 시내산까지의 여정에는 결코 홍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거짓말이 된다. 여기서부터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홍해는 수심이 1200미터나 된다. 대륙이 이동하면서 생긴 깊숙한 절벽의 바다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설령 하나님이 그곳을 갈랐다고 해도 건널 수 없다. 1200미터나 되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다시 그 건너편 절벽을 기어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처음 홍해 기사를 읽고 그 현장을 갔을 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남께서는 홍해의 한 곳에 바닷길을 내셨다. 그 바닷길은 솔로몬이 자신의 조상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을 기념해서 양편에 기념기둥을 세웠다. 그곳에는 유일하게 삼각주처럼 모래해변이 12킬로미터로 펼쳐져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흘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하도록 했다. 이곳의 바다 수심은 120미터로 경사 6도의 완만한 유일한 바닷길이다. 하나님은 이곳의 바다를 가르시고 건너가게 하셨다.”
그러나 <떨기나무> 저자 김승학 씨의 주장과 확신과 달리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따른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다. 고센에서 전통적인 시내산까지의 여정에도 분명하게 홍해는 존재한다. 오늘날 수에즈만이라고 부르는 홍해가 그것이다. 동족에 아카바만이 있다면 서족에는 수에즈만이 있다. 저자가 ‘홍해도 없었’기에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저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아울러 홍해는 ‘수심이 1200미터’나 되고, ‘대륙이 이동하면서 생긴 깊숙한 절벽의 바다가 생겼다’는 저자의 주장은 이상스럽다. 홍해의 평균 수심이 490미터 정도이고, 최대 수심이 2850미터에 이를 뿐이다. 물론 이 수심은 홍해 본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수에즈만이나 아카바만의 홍해 수심은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수에즈만은 전체 길이가 314킬로미터이고 이 중 수에즈운하의 길이는 162.5킬로미터 정도이다. 운하를 제외하고서도 151.5킬로미터 정도는 순수한 홍해다. 수에즈만의 경우 깊은 곳의 평균 수심이 200미터에 불과하다. 그것도 내륙에 가까운 곳은 평균 수심 50미터 안팎에 불과하다.
▲ 1856년에 제작된 수에즈만 주변을 보여주는 지도. 오늘날 수에즈시가 자리한 홍해의 수면은 고작 10여 미터 정도밖에 되지를 않는다.
▲ 와디 와티르 등의 골짜기에서 우기철에 벌어지는 빈번한 범람으로 인해 누웨이바 삼각주 지역으로 토사가 유입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이 주변 지역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과 제방을 만들었기에 이전과 같은 토사의 누웨이바 유입은 줄어들었다.
누웨이바에 형성된 삼각주는 누웨이바로 이어지는 골짜기 ‘와디 와티르’를 통해 빗물이 실어온 모래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누웨이바 삼각주 형성의 지리학적인 연대 측정을 통해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다.
▲ 누웨이바 외에도 아카바만에는 골짜기를 따라 홍해변으로 토사가 유입되어 삼각주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맨 왼쪽 삼각주가 누웨이바 지역이다.
거리와 이동 시간 고려하여 성경 다시 읽기(7)
▲ 하얀색 선이 고센을 출발하여 누웨이바까지 이동하였다고 하는 루트를 따라 표시된 것이다.
<떨기나무> 저자 김승학 씨는 지나칠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디안 땅을 중심으로 출애굽 여정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 거리 개념이나 계절, 이동 시간에 무관심해 보인다. 사실 성지 순례를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무관심하게 특정 장소를 순례하는 것도 현실이다. 성지순례자들에게서 성경의 땅의 시공간 속에 들어서보는 그런 진지한 사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출애굽 당시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것도 아주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걸어서 이동하였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낙타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걸어서 가든 낙타를 타고 가든 일반적인 경우 하루 이동 거리를 20킬로미터나 많아야 30킬로미터로 계산했다. 게다가 날씨와 기후, 지리적 환경에 따라 달라졌다.
고센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 누웨이바까지 '사흘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다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억지스런 추론일 뿐이다. 고센 땅 라암셋을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웨이바 홍해까지 400킬로미터를 걸어서 사흘 만에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길은 4~5일은 족히 걸렸을 거리다. 물론 그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을 탔을 가능성은 없다. 그것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이나 나귀·낙타를 타고 이동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루 길(신 1:2)이어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발 알라우즈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한 달은 족히 잡아야 할 멀고 험한 길이다.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접경 지역 가까운 쪽, 오늘날의 이집트 영토 안에 있는 에인 께데스 지역이나 그곳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에인 꾸데이라트를 지목하는데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같이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펴가면서 자연스럽게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를 페트라 인접한 곳으로 언급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왕국 시대의 이스라엘 경계 설명과 배치된다. 민수기 34장을 보라. 특별히 남쪽 경계를 묘사하면서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돌아서서 아그랍빔 언덕 남편에 이르고 산을 지나 가데스 납방에 이르고 또 하살에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있다(민 34:3~4)고 적고 있다.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 인근 지역에 위치한다면 에돔 왕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이스라엘 땅에 포함시키는 성경해석의 오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47장 19절에서 이스라엘의 남쪽경계가 가데스라는 언급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역사상 이스라엘 남쪽 경계가 사우디의 미디안지역까지 내려간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저자는 이스라엘 영토가 요르단의 남부 에돔 지역은 물론 사우디 북서 해안 지역을 포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민수기 20장 16절에는 가데스가 에돔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가데스가 만약에 저자의 주장대로 알라우즈산 아래에 있었다면 에돔의 영역이 미디안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 되는 것도 허점이다. 민수기 13장 22절에 보면 점탐꾼이 가데스에서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는데 40일(25절)이 걸렸다고 하는데 알라오즈산 옆의 가데스에서 정탐했다면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성경상의 다메섹) 북쪽 하맛 근처까지 가는 데만도 족히 40일은 걸렸을 것이다.
'시내산'을 다시 생각해 본다
김승학의 <떨기나무>를 읽고 이국헌/ 목사·Hope21선교센터 소장·기독교회사(Ph.D.)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종종 경험하게 되는 질문이 한 가지 있다. 도대체 역사적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부딪히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면 결국엔 역사적 진실이란 게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묻는 역사적 회의주의에 빠지곤 한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실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사실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역사가 등장하게 된다. 역사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나 할까?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에서 발견했던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역사라는 걸 또 알게 되면 결국 우리는 과학과 역사라는 이 두 영역에서 절대성을 포기하고 모든 사실들을 상대화시켜버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되고 만다.
<떨기나무>를 읽고 그 역사적 회의주의를 또다시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에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남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서점을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가볍게 서점순례나 할 요량으로 시내 중심에 위치한 대형서점을 돌아보다가 이 책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간증 서적 정도로 보였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부제로 붙은 작은 타이틀에서 '미디안 땅의 시내산을 찾아…'라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미디안 땅의 시내산이라. 미디안의 땅에도 시내산이 있다는 말인가. 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이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책의 내용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그 질문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시내산이 미디안 땅에 있다(?)
시내산은 시나이 반도에 위치해 있다. 동서남북이 각각 아카바만과 수에즈만과 홍해와 지중해로 둘러싸인 약 6만 2000km2의 면적을 가진 삼각형 모양의 반도인 그 시나이 반도에서도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해 거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그곳에 모세의 산으로 불리는 무사산이 바로 시내산 또는 호렙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서기 527년에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황후 헬레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 무사산의 북서쪽 언덕배기에 카톨릭 성당을 세운 후부터 그곳은 공식적으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으로 성지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매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산(출 18:5)에 올라 하나님의 임재와 장엄한 일출을 경험하기 위해 성지순례 길에서 그곳을 방문한다. 그런데 거의 1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산으로 알고 순례했던 이곳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에 등장하는 실질적인 시내산(호렙산)이 아니라 그 산은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사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의문이 제기된 예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런 의혹을 제기한다면 귀담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근대주의적 사고가 기독교 신학계에 편만했던 20세기에 들어서도 시내산의 역사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적은 없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하나님의 산은 무사산으로서 오늘날 시나이 반도에 위치해 있다. 이 확신만으로 우리는 시내산을 성지로 여기고 그곳을 향한 영적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미디안 땅의 시내산을 찾아, 그 7년의 기록
그런데, 서점에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 책은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가 아닌 미디안 땅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500년 기독교 역사의 정설에 대담하게 도전하는 이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책을 구입해 서둘러 읽어보면서 나는 그 도전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떨기나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16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이자 메카의 주지사였던 마지드 왕자의 주치의로 근무했던 신실한 기독교인인 김승학 씨가 하나님의 산을 찾아서 7년 동안이나 모험을 감행하여 얻은 결과를 기록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한 세기가 바뀌던 지난 2000년, 약제를 구입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가던 길에 잠깐 한국에 들른 저자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친으로부터 탐험가 론 와트(Ron Watt)의 비디오(디스커버리라는 제목의 비디오였음)를 통해 출애굽기에 나타난 시내산이 아라비아 북서부에 위치한 라오즈산이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된다. 그 후 그는 왕자의 주치의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고 이 비디오에 나타난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대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시내산 탐험에 나섰다.
1년 동안 여행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 저자는 드디어 2001년 3월 식구들과 더불어 라오즈산을 향한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시작된 모험은 왕자가 죽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되는 2006년 8월까지 12차례나 계속되었다. 그의 대장정은 여행이나 답사도 아니고 탐사도 아닌 대모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폐쇄된 아랍 국가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고고학 지역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 증거 자료들을 확인하고 촬영했기 때문이다. 이 여행 도중에 저자와 그 가족들은 실질적인 죽음의 위기도 경험하였을 만큼 정말 위험한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산이 시나이반도가 아닌 아라바아 북부인 미디안 땅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자 한 열망으로 그는 목숨을 걸고 출애굽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미디안 땅에서 발견한 출애굽의 흔적들
저자의 최종 목적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 요르단과 홍해 근처에 있는 라오즈산이었다. 그에게 충격을 주었던 비디오의 제작자인 론 와트는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출 33:6)는 단 하나의 성경 구절을 읽고 그 숨겨진 보물을 찾기 위해 요르단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로 밀입국하였다가 라오즈산을 탐사하면서 그곳이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시내산(호렙산)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탐사에 의해 라오즈 산이 알려지게 되자 미국 특수부대(SWAT) 요원이었던 로버트 코루눅(Robert Cornike) 박사와 아폴로 15호의 탑승자였던 짐 래리(Jim Larry) 등이 그 이후에 라오즈산을 정탐하여 이 사실을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1년간의 탐사 계획을 진행하면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라오즈산에 갈 수만 있다면 출애굽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가족들과 함께 라오즈산을 향해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속에 그 산에 도달하여 성경에 나타난 출애굽의 기록들과 그곳 미디안 땅의 정황들이 일치한다는 많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의 탐험은 주로 이드로의 집 유적지가 있는 바드와 라오즈산이 있는 타북 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들 지역을 탐사하면서 저자는 모세의 돌제단과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수많은 끈 풀린 샌들 암각화들과 금송아지 제단, 모세가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했다는 므리바 반석과 12지파의 12돌과 만나를 찧었던 맷돌과 모세의 성막에서 쓰던 일곱 가지의 촛대가 그려진 메노라의 바위그림 등 출애굽의 역사를 생생하게 조명해주는 많은 자료들을 촬영하여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들을 확보하였다.
특별히 저자는 라오즈산 일대의 와디 무사 등을 돌아보면서 홍해를 건너면서 쓴물을 경험해야 했던 마라와 열두 샘물과 70주의 종려나무가 있던 엘림, 므리바, 가데스 바네아 등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들과 그 지역들의 특색에 일치하는 장소들을 일일이 확인함으로써 라오즈산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시내산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별히 시나이 반도의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누웨이바와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가인 하골에 각각 솔로몬이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홍해 횡단 기념 기둥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곳이 홍해를 건넌 지점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존 와트가 제시한 것이었는데 그도 확인한 것이다. 존 와트의 보고에 따르면 그 두 항구를 잊는 바다길이 완만한 바닷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항공 해저촬영을 통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바다 속에서 수많은 이집트인들의 병거 바퀴들이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들을 통해서 볼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 바다는 시나이 반도와 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있는 홍해이며, 저들은 그 홍해를 건너 미디안 땅의 라오즈산, 즉 시내산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라오즈산이 시내산인가
자신의 경험과 성경상의 여러 기록들을 대조함으로써 저자는 시내산이 시나이 반도에 있는 무사산이 아니라 미디안 땅에 있는 라오즈산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그는 자신이 탐사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북서부의 땅이 예로부터 미디안 땅이라고 불려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성경에서 미디안은 원래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 미디안 형제 중 한 명인 욕산의 아들이 드단인데, 드단은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에 위치한 알 울라라는 고대 도시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이쪽 지역이 미디안의 땅임을 성경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미디안은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을 도망쳐 피난해서 40년 동안 살았던 곳이며, 따라서 그의 장인 이드로가 살았던 곳이다. 라오즈산 근처에 바드라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그 바드 옆에 이드로라는 지명이 있으며 그곳에는 실제로 이드로의 집으로 알려진 고고학적 지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저자는 직접 방문하여 확인하였다. 특별히 모세는 이곳에서 이드로를 도와 양 무리를 치다가 호렙산에 이르러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출애굽기에서 호렙산은 하나님의 산, 즉 시내산과 동일한 산이기 때문에 이 산은 시나이 반도가 아닌 미디안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 외에도 출애굽기의 여러 기록들은 이스라엘의 여정이 시나이 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디안 땅을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예를 들어 홍해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물을 찾아 헤맨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 수르광야는 지금까지 알려진 블레셋 지역(지중해 연안) 근처가 아니라 아라비아 홍해 변에 위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민수기 25장 15절에서 수르는 미디안 백성 한 종족의 두령으로 나타나고 있어 수르 광야는 미디안 땅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벌였는데, 그 아말렉 족은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던 아라비아 인들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 북서쪽에 있던 미디안 땅에서 광야생활을 지냈음이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시내산은 그곳에 있는 라오즈산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시내산'을 다시 생각해아야 한다.
저자의 목숨을 건 탐험과 그 결과물들, 그리고 그 모든 경험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 책 <떨기나무>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시내산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만일에 그의 이러한 노력과 결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 여행 중에 무사산에 올라 그곳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신 산이었다고 감격하며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지 여행을 하면서 종종 느꼈던 것처럼 그곳이 정말 역사적 장소가 맞는지 진지하게 검토해보면서 성경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상고해보았던 역사가 이제 무사산에서도 일어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김승학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영적인 사유의 주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내용들을 성경과 대조하면서 적어도 무사산은 출애굽기에 나타난 호렙산, 혹은 시내산이 아님은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고학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볼 때 미디안 땅의 라오즈산이 성경상의 시내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었다. 책을 덮고 난 후 이에 대한 더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인터넷을 샅샅이 검색해보았지만 별 성과는 얻지 못했다. 그만큼 라오즈산에 대한 정보는 매우 희귀한 정보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2000년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가 3500년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산에 대한 정확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적 전통을 너무 쉽게 믿고 사는 것 같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그것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2000년을 지내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무사산을 시내산 성지로 규정한 이래로 1500년 동안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역사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굳건한 신뢰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시나이 반도에서 200만 명도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유목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지배하는 땅에서 저들로부터 도망쳐 나온 민족으로서 단 한 번도 이집트의 공격을 받지 않은 채 그렇게 오랜 세월을 떠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지정학적으로 많은 의문이 있을 수 있음이 명백하지 않은가?
지금의 시점에서 시내산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재정립할 때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성경의 진리들을 역사적 문맥과 상관없이 어떻게 구현할 수 있겠는가?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진리에 더 가깝게 이를 수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계에서는 출애굽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많은 논쟁을 벌여왔다. 특별히 15세기 출애굽의 시기를 두고 15세기설과 13세기설이 대립했다. 이 두 진영은 저마다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고고학적 연구들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만일에 시내산이 무사산이 아니라 라오즈산이었다면 저들의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라오즈산이 시내산으로 확정되고 그에 따른 출애굽 경로가 다시 형성된다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더욱 더 정확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때 기독교가 얻게 될 축복인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폐쇄된 정책으로 인해 라오즈산이 시내산임을 입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의 헌신으로 얻어낸 결과를 통해 그 진실의 베일을 조금이나마 벗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저자는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큰 선물을 안겨주었다. 시내산의 진실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선물 말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 진실의 축복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루 속히 국제적 여건이 개선되어 라오즈산에 대한 본격적인 고고학적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그 연구를 통해 성경의 진실들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현대인들의 인식 속에 드러나게 됨으로써 기독교의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바란다.
3500년 전, 떨기나무 아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 얼마나 두렵고 떨리면서도 감동적이었을까?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그 떨림과 감동은 라오즈산 아래 서있던 김승학에게 전달되었고, 그 후 7년 만에 나온 그의 책 <떨기나무>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전달되었다. 그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떨기나무>를 손에 쥐고 하나님을 만나는 떨림과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