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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지 못할 우중(雨中) metal공연
92년 8월초 광주 패밀리타운에서 있었던 KBs락페스티벌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백두산 등 전국의 락,메틀밴드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 나는 지난 7월에 조직한 그룹
웨이브와 함께 참가했었다. 우리팀은 맨 마지막으로 차례가 잡혀 있었고, 나는 무대
뒤에서 앞사람들의 노래를 들으며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러면서 다시 그룹과 함께 라이브무대에 오르는 초조감과 계속되는 팬들의 사인공세에
조금씩 지쳐갔다. 공연 중간에는 억수 같은 소낙비가 내려 무대는 흠뻑 젖었고, 그래도
패밀리타운을 메운 수천 명의 음악팬들은 꼼짝하지 않았다.
공연은 한참이나 중단됐고, 마침내 그룹들은 다시 무대에 오르고,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오르니 흠뻑 젖은 무대는 복잡하게 연결된 전선들 때문인지 찌릿찌릿
바닥에서 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웨이브의 연주가 시작되고 나는 노래를 시작했다. 블랙 사바스라는 미국의 유명한
헤비메틀밴드가 불렀던 "She Is Gone"이라는 곡이었다. 앞에 모인 관객들이
눈앞에서 아득해지면서 서서히 나는 옛날 그룹시절로 되돌아갔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미친 듯이 불렀던 시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노래 잘한다는
사실로 즐거웠던 시절, 그러면서도 헤비메틀이라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을
붙들고 울부짖던 시절,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한가지>라는 발라드 풍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어느 날 스타가 됐다.
그러나 가슴 한쪽은 늘 메탈음악에 대한 그리움이 만들어내는 답답함이 있었다. 어느새
나는 옷을 풀어 던지고 있었다. 입에서는 괴성에 가까운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상체는
완전히 알몸이었다. 그 위로 땀인지,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인지 흠뻑 젖었다.
진짜 음악은 무엇인가'노래 부르며 나는 자주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했었다. 노래가 끝나고 터져 나오는 박수 속에서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나를 옆 사람이 부축했고, 어느 팬이 커다란 목욕수건으로
내 윗몸을 덮어 주었다. 그 공연 뒤로도 나는 계속 방송에서 노래를 불렀고, 더욱더
많은 팬들이 나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日刊스포츠에 스타스토리를 쓰게
되었다.
나의 요즘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이 있다. 또 나의 과거 메탈그룹 시절의 모습을 좋아하는
팬들도 있다. 어느 쪽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그 둘의 융화가 앞으로의
나에게 남은 숙제다. 그 숙제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내 지나간 삶들을 점검해
보겠다. 日刊스포츠를 통해서. 나의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울음소리가 커 그때부터
가수가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선 나의 출생부터 얘기를 꺼내야겠다.
67년 10월22일이 내가 태어난 날이고,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이 내가 세상의 공기를
처음으로 호흡한 곳이다. 우리 집안은 원래 대구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존함은
이준호씨. 올해 54세이시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아버지께서 삼중당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해왔다. 아버지께서는 고교 때 이미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셨고, 지금도
늘 시를 쓰신다.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서재에서 글을 쓰시는 아버지를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내 위로는 2살 위 누나가 있었다. 나는 우리 집안의 첫번째 아들이었다. 그러니 경상도
집안에서 장자가 갖는 어마어마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린시절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을 귀여움의 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시절 나에 대해 2가지 강한 기억을 갖고 계시다. 하나는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우렁찼다는 것이다. 그 소리때문에 집안 어른들은 "녀석이 커서
가수가 되려고 하나 울음소리가 크기도 하곤"하며 농담을 던지곤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두번째는 도통 잠을 자지 않아 부모님들을 애를 깨나 먹였다는 얘기이다. 날이 훤히
새도록 자지 않다가 어머니가 한두시간 안고 있으면 못이기는 채 잠을 자기도 했고,
그러다가 안되면 심지어 수면주사까지 맞았다고 한다. 지금은 워낙 바쁜 스케줄에
쫓겨서 그런지 뒤통수만 베개에 붙이면 그대로 잠드니, 세월과 환경은 사람을 참
많이도 변화시키는가 보다.
나는 서서히 산동네의 골목대장이 되어갔다. 아버님은 말씀도 좀처럼 없고, 완고하고,
엄하셔서 나에게는 무척 어려웠다. 물론 그건 아버지들이 속 깊은 곳에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도 어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는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기든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면서 개구쟁이, 골목대장으로 한참을 보냈다. 지금도 연희동 주변의 언덕길 등이
눈에 선하다. 가끔 우연히 그 주변을 지날 때면 난 어린시절 생각에 코가 시큰해진다.
그 언덕들에서 친구와 귀를 붙잡고 싸우던 일, 그러다 부모님께 야단맞던 일, 그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지금 만나도 알아볼 자신이 없다.
드디어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창천국민학교 1학년 몇반. 반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교 1학년에 나는 거의 학교에 나가지 못했으니까. 홍역을 심하게
앓았다. 학교엔 거의 이름만 올려놓은 격이었다. 한 1달이나 출석했는지 모르겠다.
홍역을 앓으면서 여러가지를 보았다. 열에 들떠 내 눈앞에서 수없이 지나가는 별도
보았고, 아득하게 비치는 햇빛, 사납게 몰아치는 강물 같은 것도 보았다.
용케도 2학년에 진급을 했다. 성적이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도, 원체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어린 마음에도 남들보다 1년 뒤처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덕인지 국교 내내 줄곧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외톨이였다. 동급생들과 1년을 덜 지냈다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나는 점차 내성적인 소년이 돼갔다. 그즈음부터 나는 틈만 나면 책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방에서 부모님들이 사다준 동화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아버지 서재에
가서 어른들이 읽는 책도 몰래 읽었다. 그러면서 내성적이고 또래들보다는 조숙한
소년이 되어갔다.
상급학년이 되니까 체육시간에 구기를 했다. 별로 어울리지 않다가 수업이기 때문에
몇번 팀에 끼여 하면서 내가 의외로 운동을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도 놀라는 눈빛들이었다. 그 뒤로 학교 축구부에 낄 수 있었다. 포지션은 지금
생각해보면 링커쯤 되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말은 안 하셨지만 부모님들이
성적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서서히 노래에 관심이 갖기 시작했다. 그 시절 최고의 대중가요는 남진, 나훈아씨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특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노래는
나의 애창곡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나는 남진씨의 춤까지 흉내며 열심히 연습했었다.
지금같이 노래방이 있었다면 아마 일찍부터 들락거렸으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동진이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그 친구는 그 시절 거의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우리는
방과후면 동네 골목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투포수 놀이를 했다. 서로 20회씩 번갈아
가며 투수와 포수 역할을 교대로 하는 놀이였다. 점차 공 던지는 공에 자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날 나는 그 친구에게 그동안 비밀리에 연습한 커브를 보여줄
계획을 세웠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고, 조금 옆으로 빗나가는 커브였다. 친구가 포수차례가
되어 앉았고, 나는 팔을 한껏 비틀며 커브를 던졌다. 그러나 공은 중간에 떨어지고.
아뿔싸, 나는 그만 어깨를 다치고 말았다. 그때 다친 어깨로 나는 그후 중, 고등학교에서
체력장 시험을 볼때마다 던지기만은 반에서 최하위를 면치 못하게 됐다.
5학년때 나는 다른 국민학교로 전학을 했다. 아버지가 집을 옮기셨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태어나서 처음 맞는 이별이었다.
그 이별인사를 하려고 나는 앞에 나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울었다. 같은반 친구들도,
그리고 담임선생님까지도 같이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픈 이별도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바뀐 환경에 썩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갔고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양정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 생각해보면 그 졸업과 입학사이에서 키가
부쩍 컸던 것 같다. 국민학교 시절에 나는 스스로 무척 작다고 생각했고 또 실제로도
작아서 늘 앞줄에 앉았었다. 중학 입학식 때 키가 큰 순서로 앞에서부터 줄을 세웠는데
나는 역시 내가 작은 줄 알고 뒤에 섰었다.
그런데 줄을 세우던 한 선생님이 다가와서는 "임마, 이렇게 큰 녀석이 왜 뒤에
있는 거야"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나를 앞에서 세번째 줄에 배치했다.
가만히 보니 정말 같은 줄에 있는 친구들과 내 키는 엇비슷했다. 중학교 1학년 중간쯤에
키를 재보니 1백67cm나 돼서 거의 반에서 제일 컸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어느 주말저녁 나는 무심히 TV를 켰다. 집에서 TV를 잘 보지않는
나에게 그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쇼프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화면에는
어떤 그룹이 나와 있었고, 사회자는 '벗님들'이라고 소개를 했다. 노래를 기막히게
잘했다. 연주도 일품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는 거의 담쌓고 있었던 음악이란 것을 다시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행위가 있을 수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어머니를 졸라서
나는 당장 기타를 샀다. 그리고 기타교본에 나와 있던 코드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소질이 있었던지 일주일만에 전 코드를 마스터했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대견해서 '나는 역시 대단한 인간이야'하고 흡족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맹연습이 계속됐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너> <오솔길>등
누구나 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면 처음에 넘어야 하는 70년대 포크송들이었다.
음악을 행한 고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학교시절 나는 우리 학급에서 유일한 기타맨이었다. 소풍, 오락회 등이면 당연히
연주자로 모두 나를 지목했고 나는 속으로 '작은 그룹이라도 스타가 되는건 즐거운
일이구나'라고도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말에 테니스를 시작했다. 키가 크고 뼈대가 좋아 보인다고 체육선생님이
권유를 해서 시작했다. 방과후면 학교 테니스장에서 고등학교 선배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연습했다. 운동이라는 것도 열심히 해보면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테니스부에는
중학교 1학년 후배부터 고교3학년 선배까지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후배들은 음료수
심부름 등을 해야했다.
하루는 한 고등학교선배가 연습이 끝난 뒤 또 뭘 사오라고 시켰다. 나는 고까운 마음에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대답했고, 선배는 새까만 후배가 감히 선배에게 반항한다고
훈계를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자 갑자기 뺨을 때렸다. 너무 아프고 창피한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라켓을 던지고 체육선생님을 찾아가 이런 분위기로는 운동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곤 그날로 운동을 그만두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심한섭 이라는 친구와 둘도 없이 친하게 지냈다. 서로 성적이 엇비슷한
우등생이었고, 나는 동네도 같아 우리는 매일 어울려 다녔다. 지금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해 어느 회사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때 그렇게 단짝이었던 친구도 서로
가는 길이 달라서 그런지 자주 볼 기회는 없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이 지났다. 나는 연합고사를 쳤고, 무난히 경성고교에 진학했다.
고교에 진학하면서 교복과 두발자율화가 되었다. 원래부터도 새까만 교복과 짧은
머리를 갑갑해하던 나는 정말 '완전자율'로 착각하고 머리를 길게 길렀다. 아마 앞머리를
늘려보면 윗입술까지는 닿았나보다.
물론 옷도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는 눈에 띄게 입었다. 선명한 색깔을 골라서 단색으로
아래위를 입었으니 더구나 키까지 훌쩍 컸으니 어디를 가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보니까 같은 반 친구들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이상한 것 같았다.
대단히 불량한 사람을 보는 눈길이었고, 한편으로는 '왜 저런 녀석과 같은 반이 됐을까'하는
좀 겁내는 눈빛들이었다. 내 모습을 보고 이미 학교에 있던 몇몇 불량서클에서 입단
제의도 해왔다. 물론 나는 내 스스로를 모범학생이라고 생각해서 거절했지만.
그러기를 2주일여,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가만히 한 말씀
하셨다. "괜한 폼 그만 잡고 이제 머리를 짧게 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날로 나는 머리를 깎았고, 양순한 학생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내 성격을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손해를 많이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시도한 것은
다양한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학교 중창단, 문예부, 한별단, 학교 그룹사운드
야생마 등 나는 6개의 서클에 한꺼번에 가입해서 여기 저기를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다.
선후배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의 여러 대화를 통해서 나는 내 성격을 좀더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때까지 잠재해 있었던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도 적극적으로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고교 1학년때 선배의 주선으로 처음으로 미팅에 나갔다. 같은 모임에 있던 선배였는데
아무래도 내 옷차림을 보고는 잘 놀겠다 싶어서 주선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와 마주 앉은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듬거리고 앉아 있다가 그냥 헤어지곤 했다. 그런식으로
3~4번의 미팅을 계속 퇴짜맞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왜 나같이 착하고
얌전한 남자를 여자들은 싫어할까."
그 다음부터는 방법을 바꾸었다. 미팅 자리에 나가서 착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좀더 짓궂게 굴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친구들을 보니까 좀
짓궂게 구는 친구들이 오히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것도 같았다. 또한 그것은
나같이 착하고, 얌전한 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던 여학생들에게 돌아가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 진짜 짓궂게 구는 작전이 시작됐다. 미팅자리에서 파트너가 될 여학생을
만나면 대뜸 상대의 외모 중 안 좋은 부분에 대한 얘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키가
작아서 좋겠습니다" "얼굴 위 아래의 거리가 꽤 먼 편이군요"등.
신기한 일은 그러니 처음보다는 훨씬 성공률이 높았다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도 잠시, 1학년 중반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교내 그룹사운드 야생마에
빠져 들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연습하고 기회가 되면 발표하고 하는 일이 너무나
신났다. 우리는 성실하게 연습했고, 또 당시 인근 학교에서 축제때면 초청해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어느 정도 우리들의 활동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나는 리드싱어를 맡았었고, 우리가 '당대의 기타리스트'라 불렀던 이완철이라는 친구가
기타를 치면서 리드했다.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기타를 치는 그 친구를 보면서 매일
감탄했었는데, 지금은 음악을 그만두고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다고 한다. 드럼주자는
김종태라는 친구였다. 붙임성이 좋은 친구였다. 그 친구도 지금은 음악을 중단하고
무슨 회사에 다닌다고 하니 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고교 2학년이 되었다. 나는 야생마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지냈고, 그런 만큼
학교 성적은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에게도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학교에까지 찾아오는 여학생도 있었지만 나는 음악 이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다른 친구들에게는 콧대높은 걸로 비쳤던 모양이다. 우리 그룹의
사진을 찍어주던 친구가 어느 날 굉장한 여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럼으로써
나의 높은 콧대를 꺽어 놓겠다는 얘기였다.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나를 재촉이라도
하듯 그 주 토요일 그 친구는 약속을 정해 버렸다.
4]
'사랑은 필연코 아픈것이다'
파트너는 그 친구의 여자친구가 주선해서 인근학교에서 그 미모로 꽤 명성이 높던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을 처음 보았을 때 첫 느낌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것 같았고, 얘기 마디마디가 그런 생각들 속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나 역시 다른때와는 다르게 긴장해서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우리는 5시간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8살의 어린애들이 무슨 할 얘기가
그렇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학교생활, 집 얘기, 그 맘 나이쯤에 느끼는 세상의 쓸쓸함 등을 얘기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그녀를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뭔가 하지 못한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만나서 기뻤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거의 매일 우리는 만났다. 그녀가 먼저 학교를 마치면 내 학교앞에서
기다리고, 내가 먼저 마치면 그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하는 식이었다. 나는 원래
그즈음 학교가 끝나고도 교문으로 잘 나가지 못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여학생들을
만나기 싫어서, 학교 뒷문이나 담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후부터는 매일 교문으로 학교를 나갔다. 그녀가 와서 기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서는 매일 이곳저곳을 둘이 돌아다녔다. 차츰 우리의
관계가 주변에서 얘기되게 되었다. 두 사람 다 또래의 친구들에게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랬나보다. 그녀의 남동생이 인근 고교에 1학년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그 남동생이 어느 날 나와 그녀가 만나는 모습을 보고 그녀 집에 얘기해 버렸다.
그때 내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 남동생은 천사 같은 자신의
누나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훨씬 과장했었나보다. 누나가 웬 옷차림도 이상하고,
머리도 길고, 공부는 안하고 노래만 하는 불량학생과 만나고 있다고 얘기했다는 걸
후에 들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좀처럼 그녀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학교가 끝나고 교문으로 나가도 그녀는 없었고, 그녀 학교 앞으로 가도 역시 그녀는
만날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녀 부모님들이 그녀와 내가 만나는걸 극구 말리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괴로웠지만 하는 수 없었다. 마침 두 달 후로 잡힌 야생마 정기공연에
몰두하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애썼다.
어느날 그녀의 친구 한명이 연습실로 찾아왔다. 가만히 나를 불러내더니 그녀가 아프다고
문병을 가자고 했다. 나는 그녀 부모님들이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어떻게 문병을
갈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고 친구를 돌려보냈다.
그리곤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연습에 몰두되지 않았다. 얼마나 아플까, 마른
몸이 더 여위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들로 머릿속은 자꾸 복잡해지기만 했다. 나는
만지던 기타를 팽개치고 그녀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대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2층에 있는 그녀 방 창문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니면 거짓말처럼 창문을 열고 그녀의 얼굴이 나왔다. 바람을 쐬고
싶었나보다.
그녀가 길 한가운데 서있는 나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은 이내 반가운
눈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설사 할말이 있었더라도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다가 그녀가 문을 따 줄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내가 부모님들 때문에... 라는 의미의 몸짓을 했더니,
그녀는 이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무도 안 계시니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서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를 만났다. 의외로 그녀는 내게 별로 아프지 않은 듯한
모습을 지었다. 우리는 오랜만인 만큼 짧은 시간에 많은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얘기하다가 옆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 보니 그녀 어머니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서 계신 것 아닌가. 나는 기다시피 그 집을 나왔고, 곧 겨울방학이
되었다. 물론 그뒤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2학년의 야생마 정기공연은 파고다예술회관에서 있었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딥 퍼플(Deep Purple)등의 노래들이 우리의 곡목이었다. 성공적이었다. 공연장에
온 많은 친구들이 작년보다 밴드가 훨씬 좋아진 것 같다며 축하해 주었다. 그날 공연에
그녀가 왔다 갔다고 나중에 그녀 친구가 말해주었다. 공연이 시작된 후 와서 다 끝나기
전에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쓸쓸한 겨울이었다. 그녀는 아무데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나 역시 그녀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어느날 용기를 내서 그녀집 담을 넘다가 동네 방범대원에게 현장범으로 걸린 적도
있었다.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괴로운 겨울이 계속됐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서 음악만 들었다.
어느날 저녁 음악을 듣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무심히 나가봤더니 그녀 어머님께서
서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내가 또 무얼 잘못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 어머님 표정은 호의적인 것이었다. 나의 들어오시라는 말씀에도
가만히 서 계시더니 느닷없이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프고, 나를 보고싶어 하는 것 같으니 집에 같이 가서 얘기도 하고 놀라는
것 이였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지나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그녀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집에서 우리가 사귀는걸 드디어 허락해주시는
것 같아 기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었다. 허락을 해주시는 건 좋은데
이렇게 새벽에 집에까지 찾아와서 나를 데려가는 건 아무래도...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그녀 집에 도착해 그녀 방에 들어가면서 씻은듯이 없어졌다.
좀 창백하고 여윈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기쁘고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우리는
오래 만났던 만큼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얘기꽃을 피웠다. 공연얘기, 음악얘기, 이제
코앞으로 닥쳐온 대학진학얘기 등등...아침이 돼서 나는 다음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그녀 집을 나왔다.
그리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던 만큼 달고, 기쁘게 잤다. 다음날 아침 그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울고 있었다. 그리곤 흐느낌 사이로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내가 어제 만났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왠지 이상한
느낌 속에서도 그렇게 억지로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 친구 말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말했다. 내가 만나고 간 바로 그날 낮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고.
나는 그녀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 집에서도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죽음이었다.
모든 식구들이 흐느끼고 있어서 아무에게도 무슨 말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병명을 확실히 모른다.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런 것들을 구태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긴 충격의 나날을 보냈다. 고등학생 나이로는 분명 잘못된 일인 술도
마셔 보았다. 그러면서 한가지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사랑은 필연코 아픈 것이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어느 여자도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면서 3학년이 개학됐다.
다른 친구들이 다들 입시공부에 열심이었으나, 나는 더욱더 음악에만 몰두했다.
[5]metal band시절
대학교 입시가 다가왔다. 성적도 나빴지만 대중음악을 좀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었던 나는 마땅히 지원할 과가 없었다.
아직 떠나간 그녀에 대한 마음들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원서를 쓸 날이 내일 모레인 데도 내 마음속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어버지께서 부르시더니 어느과에 가고 싶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국내에는 대중음악을 좀더 깊이 공부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차라리 대학에 가지
않고 혼자서 음악을 공부해 보겠다고 말했다. 어버지께서는 노발대발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장남이라고 곱게 키웠더니 대학을 시도도 해보지 않고
아예 안가겠다고 하다니.
결국 집과 상의 끝에 나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접수시켰다. 면접시험 때 다른 지원자들보다 시험점수는
내가 한참 뒤쳐졌다. 그러나 실기점수에 비중을 높게 매기는 과이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면접시험장에 들어갔다.
나는
기타와 노래라는 특기로 이례적으로 30분 동안이나 면접을 보았다. 나는 마음껏 그간 갈고 닦은 실력들을 발휘했다. 면접이 거의 끝나갈 때쯤 해서
면접관 중의 한 분이 "합격 시켜주면 잘 다니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합격할 것이라는 간접적인 의사표현으로 알고 있는 힘을 다해
"네"라고 대답했다. 그날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같이 면접에 응했던 다른 친구들도 나의 면접시간과 면접관들의 반응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며칠 뒤 발표가 있었고, 내 이름은 합격자 발표에 빠져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나는 무척
우울했다. 후기시험은 보지 않았다. 더이상 내 뜻에 반하는 지원으로 상처받기는 싫었다. 대신 어느 헤비메탈 그룹의 입단 오디션을 받았다. 이름도
없는 무명밴드였다. 싱어부문에 지원했는데, 고교때 부르던 외국곡들을 몇 곡 부르고 나는 다음날부터 그 그룹들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음악은 그때부터 더이상 나에게 취미나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한 내 직업이었다. 그룹원들과 같이 연습하고, 집에 와서
호자 연습하고, 잠자고 밥 먹는 시간을 빼면 거의 24시간 음악과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기타(Guitar)등의 외국잡지를 보며 발성에
대해서 계속 공부했다.
우리 가수의 목소리에 비해서 외국 메탈 가수들의 목소리는 음량과 음폭에서 훨씬 큰 것 같았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몸 마디마디를 공명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목에서 피가 나도록
목발성 연습을 했다. 온몸을 공명시키려고 힘을 주다가 팔다리에 온통 알이 배겨 꼼짝하지 못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목소리가 변해갔다.
거칠고, 힘있고, 그러면서도 리듬감 있게 나의 목소리를 만들려는 노력이 계속됐다.
나는 서서히 메탈음악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메탈음악에는 내가 가진 응어리를 풀어낼 수 있는 공간들이 있었다. 금속성의 기타소리와 거친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상처와 절망들을 풀어내렸다.
메탈그룹 활동은 힘겨운 것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음악이 즐거웠다. 연습과 조그만 공연들이 계속됐다.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군데군데 쇠붙이가 박힌 가죽옷들을 입고
다녔다.
손가락에도 커다란 금속반지를 끼고 다녀 마치 펑크족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가족과 주변친구들은 좀 단정히
하고 다니라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메탈음악을 할 때는 이상하게도 이런 차림들이 무대위에서 편했다. 아니 무대 밖에서도 이런 금속성의
옷차림이 메탈음악에 관한 내 의지를 확인시켜주는 것도 같았다.
또래 친구들은 그즈음 대부분 대학생이 되어갔다. 발랄한 옷차림으로
대학 문앞을 드나드는 그들을 보면서 가끔씩 심한 소외감도 느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욱 음악에 몰두했다. 음악만이 스무살 나에게 모든
것이었다.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이즈음 한 팬이 있었다. 여대생이었는데 내가 하는 크고 작은 공연마다 빠지지 않고 나타났다.
그리곤 꼭 내 순서가 끝나면 무대 뒤로 찾아와 '잘 들었어요'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처음에는 무심코 그저 메탈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가 오는 것이 계속 되다 보니 나도 무대에 오르면 슬그머니 그를 찾는 버릇이 생겼다. 매일 오던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무대뒤로 다시 찾아왔는데 나는 수줍게 말을 꺼냈다. "오늘은 공연후에 시간이 좀
나는데." 그리곤 얼마 후에 우리는 공연장 부근의 카페에 마주앉았다. 맹세코 그를 나는 여성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나의 공연을 매일
찾아주는 게 고맙고, 또 진짜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친해질 수 없는 메탈음악을 가까이 한다는게 호기심도 돋구었다.
그녀의
메탈음악관은 간단했다. 다른 어떤 음악보다도 생동감이 있다는 거였다. 거의 광기라고 할만큼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뮤지션들을 보면서 스스로 아찔한
황홀감 같은 것을 즐긴다고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해보는 여자와의 대화였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그후부터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었다. 누구도 사랑하진 않았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라는 관계가 있을 수 있었다.
[6] 군 복무시절
오늘은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스토리 2회에 나갔던 나의 아버님 성함을 정정해야겠다. 아버님 성함은 원래 규자, 호자,
이규호였는데, 이준호로 잘못 갔다. 아마 내가 악필이라 신문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글자를 잘못 판독했나보다. 어쨌든 자식으로서 아버님 성함을
잘못 게재한데 대해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내가 속해 있었던 메탈그룹<사월>이 해체됐다. 멤버 중 1명이 음악을
공부하러 미국에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멤버들 서로간에 느끼던 답답함이었다. 그룹을 같이
이끌어오면서 멤버들은 같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대해 답답함을 많이 느꼈었고 나 역시 많은 답답함도 느꼈었다.
한동안 음악에서 놓여난
편안한 시간이 계속됐다. 그러다 어느 록그룹 <부활>에서 베이스를 치던 최우석 이라는 친구가 같이 그룹을 만들자고 제의했고 나 역시
적극적으로 응했다. 한동안 음악을 쉬면서 음악을 하고싶은 또 다른 답답함을 품고 있었다. 기타는 정일천 이라는 친구가 쳤고 드럼은 김기현 이라는
친구가 맡았다. 우리는 그룹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한 끝에 <사자후>라고 지었다. 사자가 포효하는 것 같이 스케일 큰 음악을 만들어
팬들에게 들려주자는 취지였다.
우리의 기사가 몇몇 잡지에 나가고 우리는 여러 콘서트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그룹들과 연합
콘서트를 갖기 시작했고 다른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가수 방미 선배가 갖는 콘서트무대에 올랐던 기억도 있다. 여러
지방으로 마라톤 콘서트 투어도 나섰다.
그러면서 우리 그룹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고정 팬들도 생겼다. 당시에는 록그룹 시나위,
백두산 등이 정상급이었고 우리는 아마 그 바로 밑 부분에 위치했던 것 같다. 우리는 음악방향은 LA메탈이라는 장르였다. 메탈음악에서도 좀 밝고
가벼운 종류를 묶는 장르였다. 외국에서는 본.조비나 밴.핼런 등의 그룹들이 이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음악이었다.
그때
내 목소리를 주변사람들은 '본 조비'와 '로니제임스 디오'를 합쳐놓은 것 같다는 평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연습하고 공연하고 시간이 나면 몰려다니면서 놀았다. 액세서리도 사고 선술집에 들어가 스물한두살 젖은 가슴들을 열면서 술잔도
기울였다.
집에서는 나를 거의 방치 해가는 상태였다. 가끔씩 대학에 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얘기도 했지만 내가 워낙 음악에 몰두하니
그것도 한두번 지나가는 얘기였다.
그시절 무대에 오르면 나는 '맨프레드 맨스 어쓰'라는 밴드가 불렀던
'퀘스천'(Question)이란 곡을 많이 불렀다. 아주 느린 곡이었고 특별한 박자가 없어서 노래부르기에는 꽤 힘든
곡이었다.
그러나 한번 듣고 그 노래에 푹 빠져버린 우리 그룹은 며칠 밤낮을 연습한 끝에 그 노래를 우리의 주무기로 삼아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맘에 맞는 친구들끼리 맘에 맞는 노래를 부르던 즐거운 시절도 종말을 고할 때가 되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공식적'으로는 놀고 있었으니 영장이 날라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착각으로 나의 청춘을 즐기던
나는 무척 당황했다. 그런 당황도 잠시 영장에 찍힌 날짜에 맞추어 나는 훈련소로 들어가야 했다. 그룹을 하느라 있는 그대로 머리를 길렀던 나는
그 머리카락이 잘려 땅에 떨어질 때 눈물이 나올 만큼 아까웠다. 비로소 땅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들을 보면서 그 길이에 나도
놀랐었다.
막상 훈련병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무반 생활을 시작하자 이상하게 편안한 생각이 들었다.
고교때부터 그룹 생활을
해온 나는 결국 이것도 그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주된 업무가 아니라, 훈련과 군기가 주된 일이었지만 이 그룹들도 서로간에 호흡이
안 맞으면 안되는 아주 섬세하고 세밀한 그룹이었다. 그 그룹 속에서 일원으로 훈련을 받아 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키는 정확히 1m82cm이다. 그 키 때문에 훈련 막바지에서 나는 사단의장대에 차출됐다. 날마다 군복과 군화를 만지고, 의장대로서 해야할 제식을
훈련하는 시간이 계속됐다.
사회에 있을 때 청바지에 가죽옷을 입으며 마음대로 다녔던 나라 복장에서부터 군기와 절도가 요구되는 의장대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군대에 있으면서 공연히 사회에서 있을 때의 여러 일들이 생각났다. 부모님, 떠나간 여인,
음악 하던 친구들...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았다. 군대이전의 젊음들은 아무런 규격도 없고, 너무 방종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눈물이 나와서 그 눈물이 다림질하던 옷 위에 떨어졌던 일들이 기억난다.
군에서의 3번째 가을이 끝날 무렵, 나는 제대를
했다. 언제고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것은 속상하는 일이었다, 그곳이 설령 힘들고 고생스러웠더라도 말이다.
7] 집 잃은 고양이
울음소리
제대하고 다시 음악의 길을 모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룹을 다시 결성해 예전같이 활동하고 싶었으나 나를 아끼는
주위분들은 솔로로 나설 것을 권유하셨다. 당시 국내 대중 음악계에서 여러 그룹들은 극심한 불황을 맞고 있었다. 수입 면에서도 그룹 자체를
끌어가기 힘들었다. 또한 방송이나 음반사에서도 그룹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좀처럼 내가 그룹을 결성할 뜻을
굽히지 않자 나를 아끼는 어떤 분이 충고를 했다. '그렇게도 그룹을 하고 싶으면 일단 솔로로 음반을 내서 가수로서의 지명도를 얻은 후 백밴드를
나중에 결성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충고였다. 결국 나는 그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목을 쉬어서 그런지 예전처럼 노래가 잘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룹시절에 주로 외국노래들을 많이 불러서 그런지 우리말 노래의 발음이 잘
되지 않았다. 내 딴에는 우리말로 멋지게 노래를 불렀는데도 사람들은 나의 발음을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집에서도 이제 군대까지
갔다온 장성한 어른이니 자기 살길을 찾느라고 야단이었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 아버지께 뭔가 이루고 다시 들어오겠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다.
가출이라기보다는 혼자서 당당하게 세상과 맞선다는 독립인 셈이었다. 방배동 산동네에 보증금 없이 월세
5만원짜리 방을 한 칸 얻었다. 낮에는 잠자고, 음악 듣고, 밥해먹다 밤이면 산에 올라가 노래를 연습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고생스런 세월이었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내 꼴도 말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서 식사는 늘 라면이었다.
그것마저 살 돈이 없던 때도 있었다. 거리에라도
나서면 거리에선 경찰마다 불심검문을 요구했다. 내 몰골이 흉악한 범죄자의 그것이었나보다.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집에는 친구집에서 잘
있다고 자주 전화를 했다. 어머니가 아들이 사는 집을 한번 보자고 하실 때마다 말리느라고 힘을 뺐지만.
옛날 그룹시절에 기타를 치던
이정수 형만이 유일하게 그때 내 방에 들러주었다. 가끔 들러서 밥도 사주고, 노래부르는 것을 지도해주기도 하고 음악에 대한 많은 얘기들을
해주기도 했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그런 생활을 6개월 넘게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형의 덕분이었다.
곧 겨울이 왔다.
스티로폴을 사다가 방벽에 붙이고 전기난로를 구해서 켜 놓았다. 밤새 켜 놓으면 위험한 것인데도 너무 추워 목숨을 걸고 밤새 켜 놓기도
했다.
추운 방에서 혼자 이불에 웅크리고 잘 때면 어디서 왔는지 집 잃은 고양이들이 와서 울어댔다. 그럴 때면 몸서리 쳐지는
외로움에 괜히 눈물도 나왔다.
[8] <내가 아는 한가지> 음반 내기
드디어 그런 외롭던 기간
끝에 4곡이 삽입된 본보기 테이프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 본보기 테이프는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평가받기 위해서
비공식적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 테이프를 들고 드디어 나는 귀가했다. 그 기간동안 나의 성과라면 성과인 그 테이프를 부모님들께
들려주니 겉으로는 별거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내심 제법이라고 생각 음반사, 저 프로덕션들을 찾아 다녔다.
내 계약조건은 음반
1장에 대해서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반사 담당자들은 3년, 4년의 기간으로 계약하자고 요구해와 매번 계약이 잘 성립되지 않았다. 여러
군데서 계약의 최종단계에서 이 조건에 부딪쳐 뒤틀리곤 했다. 지명도 없는 사람이 음반 1장을 내기는 그렇게 힘든 것이었다.
그러다
지금의 매니저인 신현빈 형을 만났다. 만나서 오랫동안 얘기를 해보니 서로 음악에 대한 생각이 비슷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승철이라는 큰 가수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 내게는 호감 있게 들렸다. 드디어 계약을 체결하고 1집 녹음을 시작했다. 여러 작곡가가 곡을 써주었다.
그러나 도통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느 날 이런저런 일로 녹음실에 갔더니 동료가수 강지훈의 곡이
든 테이프가 있었다. 아직 목소리는 입혀지지 않았고 반주만 녹음돼 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보고 그 노래들을 해 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남의 노래를 내가 왜...하는 생각이었다. 결국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 불러보기는 했으나 나와는 느낌이
차이가 많은 것 같아 끝내 고사했다.
다시 1집에 들어갈 노래를 찾기 시작했다. 전부터 음악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들국화 멤버
최성원 형을 찾아갔다. 성원이형은 먼저 내게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 불러보라고 권했다.
그 노래를 다 듣고 난 후 목소리가 괜찮다며
흔쾌히 곡을 써주겠다고 응낙했다. 그런 후 얼마 되지 않아 3개의 곡이 든 테이프를 가지고 나타났다. 들어보니 나는 3곡이 다 맘에 들었다.
당연히 그 곡들을 내게 주십사 졸랐다.
성원이형은 아직 정리가 잘 안됐으니 다시 정리해 주겠다고 가지고 돌아갔다가 며칠 뒤 이번엔
2곡을 갖고 오셨다. 3개중 하나는 정리가 잘 안되는 곡이라 나머지만 갖고 왔다고 했다. 역시 훌륭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 2개가 내 1집에
있는 <내가 아는 한가지>와 <또 모르잖니>였다. <내가 아는 한가지>를 반주로만 들었을 때의 첫느낌은 마치
비틀즈의 노래 같았다는 것이다.
음반의 편곡은 조동익 선배님이 맡아주셨다. 내 느낌에도 편곡이 아주 맘에 들었다. 가사는 박주연
누나가 써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도 가도 도통 나오지 않았다. 2달의 산고끝에 박주연 누나가 홀가분한 얼굴로 녹음실에 왔다.
그리곤 '내가 아는 한가지'라는 제목하에 이 노래의 가사를 불러주었다. '살아가는 동안, 한번도 안 올지 몰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결...' 노래의 멜로디와 아주 잘 어울리면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잔잔히 잘 녹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드디어 녹음이
시작됐다.
생각보다 노래부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번 불러보고 나니 이 노래는 나 같은 사람이 부를 노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는 훨씬 더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불러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노래를 작곡해준 최성원형과 한때 활동을 같이하던 전인권 선배님
같은 분들이 부르면 어울릴 것도 같았다.
이런 느낌을 주위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었다.
많은 교정과 반복이 있는 녹음이 계속됐고 결국 나는 나 나름대로 이 노래를 부르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 노래의 첫부분은 나직하지만 애써 참아
삼키는 형식으로 불렀다. 중후반 고음부분은 과거 메탈음악을 하던 창법으로 거칠지만 높게 밀어올렸다.
같은 앨범에 있는 곡 중
김진용씨가 작곡해준 <슬픔에 젖은 너에게>라는 노래가 있다. 녹음을 하면서 이 노래의 흐느적거리는 듯한 독특한 감정을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작고하신 김현식 선배님만이 낼 수 있는 자유로우면서도 애절한, 그런 느낌을 내야 하는 노래였다. 생각끝에 녹음실에서 소주를 한 병
부탁했다. 그리고 그 소주를 반병쯤 마시고 녹음에 임했다. 의외로 녹음이 잘됐다. 지금 이 앨범에 있는 이 노래는 그렇게 약간의 취기 속에서
녹음된 노래라는 것을 팬들 앞에 솔직히 고백한다.
작년 12월에 마침내 모든 곡의 녹음을 끝냈다. 그리곤 조금씩 방송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이 앨범을 대표하는 곡으로 <도시 속의 사랑>을 정했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 이 노래를 부른 결과 방송차트에도 이 노래가
올라갔다. 36위인가에 올랐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노래보다는 <내가 아는 한가지>라는 노래에 대한 반응이 더욱
좋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곤 역시 가수라 처음에 느낌을 좋게 받은 곡을 팬들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판을 1장
내는데는 참 여러가지로 우여곡절이 많다. 그것이 데뷔앨범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작년 12월에 녹음을 끝낸 판이 그 뒤 5개월 반인 금년
12월에 재킷을 입고 햇빛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이제 판을 낸 어엿한 가수가 된 것이다.
9] 테리우스 보다는 음악성으로 사랑받고
싶다
판을 낸지 보름이 지나면서 노래는 서서히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라디오 방송에서도 여기저기서 내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내 노래라도 들을라치면 은근히 속으로 기뻐서 가슴이 뛰었다. TV방송에서도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문에도
여기저기서 유망주라는 의미의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TV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인기만화 <캔디>에 나오는 멋진 남자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새삼 나는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순정만화의 주인공같이 생겼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테리우스라는 멋진 별명은 처음이었다.
길을
가도 여기저기서 날 알아보고 신기한 눈초리들을 보내왔다. 그 중 어떤 소녀들은 자기들끼리 돌아서서 비명을 지르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어느
아주머니는 카페에 앉아있는 나에게 와서 딸에게 생일선물을 주려고 백화점에 나왔는데, "이덕진씨 사인을 받아 가면 선물값 안 들어도 되겠다"며
사인을 부탁해 오기도 했다.
TV방송과 함께 여러개의 라이브 공연에도 자주 올랐다. 행사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런
무대들은 답답한 TV의 스튜디오보다는 훨씬 자유로웠다. 용인 자연농원 같은 공기 좋은 곳이면 더욱 좋았다. 가수는 노래부르며 마음껏 맑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부모님들도 대견해 하셨다. 부모님들께서는 내심 머리나 기르고 동네를 돌아다녀
이웃에서 이상하게도 보았던 자식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견해 하시는 것 같았다.
아들이 하는
일이 좋든 싫든 일단 한번 시작한 일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 가는 아들의 모습에 대한 흡족함이기도 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늘 건강에 대한
당부는 잊지 않으셨다. 내가 일주일이면 하루도 편히 쉴날 없이 이곳저곳을 바쁘게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런 걱정은 더하셨다.
7월초
나는 꿈꿨던 일을 실행시키기로 하였다. 애초에 솔로로 나설 때 지명도를 얻고 난 후에는 백밴드를 조직해서 그룹활동을 하겠다는 꿈을 가졌다는 건
이미 독자여러분에게 말씀드린바 있다. 바로 그 꿈을 실행시키기로 한 것이다. 옛날 메탈그룹시절부터 가까이 지내왔던 한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다시 그룹활동을 해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선배는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룹활동을 하던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질감 같은 것들을 아직도 나에게
갖고 계신 것 같았다.
그달 중순 그렇게 나와 백밴드 웨이브를 조직했다. 하나하나 성취해 가는 느낌이었다. 솔로로 활동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다시 그룹으로 활동했다. 솔로나 그룹이나 각기 장단점이 있다.
우선 솔로는 음악을 하기가 간편했다. 여러 사람들끼리
시간맞출 필요도 없고, 스케줄이 있으면 혼자 나가서 노래부르면 됐다. 음악이란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혼자 직시할 수 있었다. 모든
음악에 대한 나의 고민은 내 몫이었고, 그 고민의 결과에 따라 오는 성과 또한 내 것이었다.
그룹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솔로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솔로로 노래할 때는 낯설 수도 있는 악단의 반주에 내 노래를 맞춰야 하지만, 호흡이 잘 맞는
그룹에서는 서로가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변화 있게 노래 부르는 것이 가능했다. 오랫동안 같이 연습한 사람들끼리 사전약속 없이 순간적인 애드립을
성취시키는 즐거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무척 바빠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들로부터 가끔씩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참 세상은 그래서 출세해야 되나보다.
방송은 일단 가수로 데뷔한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탤런트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주일이라면, 가수는 쇼나 각종 오락프로에 나가는 게 주일이다. 일단 지명도를 얻고 나면 그런 방송 스케줄은 하루가 멀다하고 밀려
있다.
SBS TV에서 꾸러기 카메라에 출연했던 것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말 그대로 제작진에게 깜빡 속아서 그들의 의도대로
이불 위에다 실례를 하고는 허둥대는 꼴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 실례가 내가 한 게 아니라 제작진이 뿌려놓은 물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몰랐었다.
그저 "아차,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하는 생각을 한밤에 하면서 당황했던 기억 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게 감쪽같이 속은걸
생각하면 혼자 저절로 웃음이 난다.
2집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내가 아는 한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지만 진정한 가수로 나려면 한 노래만을 반짝 히트시켰다고 되는 건 아닌 것이다. 2집을 내서 나의 음악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때 비로소 팬들은 나를 신뢰할 것이라 생각한다.
2집에서는 대부분의 곡들을 자작곡으로 보여줄 생각이다. 고교시절부터 음악을 하면서
만들어온 악보들을 다듬어 팬들에게 내놓을 생각이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나의 외모보다는 음악성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할 것이다.
[10] "더욱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겠습니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끝낼 때가 되었다. 짧은
글들이었지만 나는 지나온 내 삶에 솔직하려 노력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조차 잊고 지내던 지난 시절의 일들이 새삼 떠올랐다. 떠오른 지난
시절은 앞으로의 내가 갈 길을 또한 바로 잡아 주었다.
그 갈 길은 좋은 음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고 감동 받을 수 있는
음악, 듣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음악이 내가 갈 길이라는 게 이번 글을 쓰면서 좀더 분명해졌다.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 직장에 다닌다는 어떤 여자분은 전화를 해서 대학에 고배를 마시고 고생한 이야기가 나와 너무 비슷해서 열심히 읽었다고도 말해주었다. 또
어떤 고등학생은 역시 전화로 음악을 하는 것도 결코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글을 읽으면서 다시 느꼈다고도 얘기해 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노력해 주기를 부탁한다는 말도 아울러 덧붙였다. 다 고마운 분들이다. 내 노래를 관심 있게 들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빈약한 나의 글까지 읽어주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집에서도 그간 몰랐던 나의 다른 부분을 깨닫는 것
같았다. 그저 노래한다고 밤낮을 모르고 돌아다니는, 늘 걱정이 놓이지 않는 아들로만 나를 생각하셨던 어머니도 내가 세상에 나와 겪는 일들을 다시
보면서 새삼 아들의 세계를 짐작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나 이제나 아버지는 특별한 말씀이 없으시다. 그저 속 깊은 정만을 가슴에 담아두고
계실뿐.
항상 어느 자리를 떠날 때 나는 인사말을 생각한다. "고맙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안녕히 계세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리에 맞게 적절히 인사말을 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않은 일이다. 오늘 이 지면에서 떠나면서도 나는 약간의 고민을
했다.
"더욱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겠습니다
첫댓글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그리고 너무 멋져요..ㅠ
'사랑은 필연코 아픈 것이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어느 여자도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그게 결국 실제가...
너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