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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제 14 구간(서밧재 ~ 개기재)
1. 산행일자 : 2009년 1월 31(토) - 2월 1일(일), 1박 2일
2. 산 행 지 : 천운산(天雲山, 604.7m), 계당산(桂棠山, 580.2m) - 전남화순, 보성
3. 출발일시 : 1월 31일(토) 05시
4. 출발장소 : 수원 월드컵경기장 정문 옆 여권민원실 앞
5. 산행개요
전라남도 화순군의 동면과 남면을 가르며 남서진 하던 마루금은 천운산(天雲山)을 지나는데 천운산 이후 돗재방향의 남릉을 타야하는데 깃대봉(469.8m)이 있는 서쪽 날등을 따르기 쉽다.
능선길 동쪽의 동복호와 주암호, 그리고 서쪽의 영산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능선 주변을 휘감는 여름철이면, 각별히 독도에 주의를 해야하는 이 구간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한천천을 비롯한 모든 골짜기 물은 화순천따라 영산강으로 흘러들어 목포만으로 빠진다.
정맥길 동쪽의 오룡천, 도치천, 외남천 등은 주암호로 흘러들어 보성강∼섬진강 물길따라 광양만으로 흘러들고, 이어 한천면의 822번지방도 돗재에서 부챗살처럼 휘어지며 남서진했다가 남동진하여 이어지는 전형적인 육산 코스로 500m대를 오르내리며 태악산(太岳山530m)과 노인봉(529.9m)을 지나 성재봉에서 분기하여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어지면서 촛대봉과 두봉산을 지나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는 주암호에서 화순군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58번 국도상의 개기재에 이르게 된다.
6. 산행 계획(일정 및 소요시간)
(1)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약 21km, 11시간 10분 정도 소요
(2) 구간별 거리 : 서밧재 ~ 개기재(약21km)
서밧재(170m,15번도로)--2.5km--568m봉--1.5km--천운산(604.7m)--1.8km--돗재(310m, 822번도로)--2.8km--태악산(530m)--2.1km--노인봉(529.9m)--1.0km--성재봉(514m)--1.5km--말머리재(380m)--3.0km--촛대봉(522.4m)--1.7km--두봉산(630m)--2.2km--468.6m봉--1.0km--개기재(290m, 58번도로)
(3) 산행일정
① 산행 출발지(서밧재) 가는 길
수원(05: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동광주IC ∼ 29번도로 ∼ 화순(08:00/아침/08:40) ∼ 22번,15번도로 ∼ 서밧재(09:00)
② 산행 통과 지점 및 진행 시간(산행 과정)
서밧재(09:10)→광주학생교육원삼거리(09:30)→제1쉼터(09:50/10:00)→천운2봉(10:30) →천운산(11:00/11:10)→돗재(11:50)→무명봉1(12:10/12:20)→태악산(13:15/점심/13:50)→노인봉(14:50/15:00)→성재봉(15:25)→말머리재(16:10/16:20)→촛대봉(17:30/17:40)→두봉산(18:30/18:40)→장재봉분기봉(18:55)→468.6(19:50/20:00)→개기재(20:20)
③ 숙박지 : 개기재(20:30) ∼ 보성, 식사 및 숙박(21:10 ∼ )
동광주IC ∼ 호남, 천안논산간 ∼ 수원(21:30)
■ 탈출로 및 편의사항 :
7. 산행의 실제
[1] 참 가 자 : 노승애, 박봉하,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5명)
[2] 날 씨 : 맑음(섭씨 10도 이상의 더운 날씨)
[3] 산행일정(산악대장 제공 자료)
① 산행 출발지(서밧재) 가는 길
수원(04:1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동광주IC(06:58) ∼ 29번도로 ∼ 화순(07:25/아침/08:25) ∼ 22번,15번도로 ∼ 서밧재(08:45)
② 산행 통과 지점 및 진행 시간
서밧재(08:55) → 광주학생교육원갈림길(09:17) → 제1쉼터(09:36) → 천운2봉(09:59) → 천운산(10:38/10:47) → 돗재(11:18) → 413봉(11:33/11:49) → 태악산(12:31/점심/13:30) → 노인봉(14:09/14:24) → 성재봉(14:45) → 말머리재(15:19/15:43) → 촛대봉(16:36/16:52) → 두봉산(17:32/17:48) → 장재봉분기봉(17:58) → 468.6(18:36) → 개기재(18:57)
③ 산행 후
개기재(19:20) ∼ 벌교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이양택시(061-375-5112~3)
8. 산 행 기
[1] 산 행 전
[1-1] 산행대비
己丑年(2009년)들어 첫 산행이 1月 10日(土曜日) 경기도 포천에 있는『국망봉(國望峰, 1,168m)』산행(일반산행)을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참여를 못했다. 그러고 보니 만 한 달여를 넘겨 산행(정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방학으로 시간 여유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저런 핑계로 광교산을 올라 볼 짬도 제대로 갖지 못했다.
2009년 1월 25일 다음 카페에 산행 일정이 올랐다.
첫날(2009. 1. 31) 서밧재 ~ 기개재까지 약 21km, 11시간 10분 정도 산행을 해야 하고 다음날(2009. 2. 1)에는 기개재 ~ 큰덕골재까지 17.4km에 대덕마을까지 1.2km를 더하여 약 8시간 30분 정도를 산행해야 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다.
지난 무등산 구간 산행 후(2008년 12월 27일) 한 달간 休眠상태로 있다 양일간 산행을 한다는 것이 무리라 싶고 더하여 설을 전후하여 호남지역에 눈이 많이 왔는데 장거리, 장시간 산행을 체력이 버텨 줄지 걱정이 된다.
[1-2] 회원들의 동정
회원들의 참여 여부를 관망하며 2, 3일을 기다려도 微動이 없다. 바쁜가, 가기를 포기 했는가?
1월 29일, 노부장을 선두로 장부장, 윤사장이 참여 의사표시를 하고 다른 대원들은 黙黙不答이다. 안교장선생님에게 전화를 해 보니 교직원과 연수 계획이 있다하고 박상호사장은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다. 1월 30일 최종 확인을 해 보니 최종 참여자가 5명이다.
[1-3] 산행 출발지『서밧재』가는 길
눈 산행을 대비하다 보니 이것저것 챙길 짐도 많고 평소보다 한 시간 당겨 출발(04 : 00시)한다고 한다.
한 시간 빨리 일어나야 하는 부담을 설 잠을 자고 03 : 00시에 기상, 03 : 40분,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출발지 경기도여권 민원실로 향했다. 04 : 05분, 민원실 앞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시간에 늦지 않게 모두 도착해 있다.
승차하여 바로 출발이다. 동수원 T.G를 통과하고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차가 속도를 내면서 눈이 저절로 감긴다. 매 번 산행 때마다 운전을 도맡아 하는 대장에게 미안하면서도 색깔도 없는 수면으로 빠져든다.
07 : 30분을 좀 넘겨 화순 도착,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화순우체국 주차장 입구 건너편에 있는 「신토불이 장터국밥(☎ (061) 374-6511 / H.P 016-607-0552)」을 찾았다.
장터국밥과 콩나물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택시를 불러 오늘 산행의 출발지 『서밧재』로 이동을 했다.
산행 길의 눈이 쌓인 정도를 기사에게 확인해 보니 날이 푹해 눈이 다 녹았을 것이라고 한다.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다. 더하여 내일 산행 종착지인 큰덕골재는 도로 사정이 여의치 못해 1.2km를 더 진행하여 대덕마을에서 차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15구간(기개재 ~ 큰덕골재까지)은 다음으로 미루고 장성의『천관산』산행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대장의 의견이 있어 주저 없이 찬성을 했다.
걱정 두 가지가 일시에 사라졌다. 오늘은 중간 탈출을 하지 않으리란 마음 속 다짐이 한결 가볍다.
[2] 산행 들머리 『서밧재(해발 170m)』
08 : 40분, 오늘 산행의 들머리「보성 ․ 벌교 / 사평리」도로 표지판을 세워 놓은 곳인 『서밧재』에 도착했다.『서밧재』는 동면 구암리에서 남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섶나무’가 무성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예전에는 도둑도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인근에 「광주학생교육원」이 들어서고 4차선 고속국도(15번 國道)가 뚫려 차들의 왕래가 잦은 곳으로 변했다.
[3] 첫 峰에 올라서 본 雲海
08 : 45분, 정맥 표시기가 달려 있는 산으로 올라붙으며 33개의 봉우리를 넘는 21km의 산행을 시작한다.
시작부터 급 오름이다. 봄의 문턱(立春 / 2월 4일)을 넘기에는 아직도 5일여가 남았는데도 날씨가 3월 초순처럼 푸근해 잠시 산비탈을 올랐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히고 오랜만에 하는 산행이라 다리도 뻐근해 진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위지대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산 아래 골짜기가 온통 안개로 덮여 雲海를 이루었다. 골 전체가 거대한 빙상 경기장이고 白色으로 水面을 이룬 湖水다.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경이다.
[4] 산 아래로 보이는 『광주학생교육원』
바위지대를 올라 잠시 진행하니 묘 1기가 자리 잡고 있는 無名峰(지도상 290봉이라 표시된 곳)에 도착했다. 가쁜 숨도 진정시키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 약 2분여를 진행하니 林道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 1분도 되지 않아「젊음의 광장」이란 표지석과 천운산 등산 안내도를 세워 놓은 임도 삼거리에 도착했다. 우측으로「광주학생수련원」건물도 눈에 들어온다.
「광주학생교육원」은 ‘청소년들의 정서를 순화하고 개척정신과 호연지기를 길러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건실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목적으로 1992년에 개원을 했다고 한다.
[5] 천운2봉 1km(제2쉼터 1km) 지점
삼거리를 지나 잠시 진행하니 송전탑(NO276)이 나오고 이곳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약 4분여 진행하여 작은 봉우리에 올랐다 우측으로 내려서니(09 : 20분경) 제1쉼터」표지판이 설치되 있다.「천운2봉 1km / 제2쉼터 1km」라 적혀 있다.
제1쉼터에서 우측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니 안부가 나오고 100여m 더 진행하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좌측 급경사로 오르게 된다. 또 한 차례 숨을 몰아쉬며 오르니 돌탑 1기(정상 2.3km 지점)가 나오고 계속 다리에 힘을 주며 오른다. 약 6분여를 오르니 또 하나의 돌탑( 제2 쉼터인가?)이 있다. 내리막, 오르막을 오르며 좌우를 돌아보니 넓은 들과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좌측은 화순군 남면 벽송리고 우측은 화순군 동면 운용리가 된다.
[6] 천운산 제2봉
09 : 55분 『천운산(제2봉)-교육원 2km, 천운1봉 1.7km』표지판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곳에 도착했다.
쉼 없이 진행. 잠시 후 더 높은 봉에 올랐다 우측 급한 내림 길로 들어섰다. 09 : 58분, 「←광주학생교육원 2.4km / [능선●삼거리] 성덕마을 3.6km ↓ / 정상 1.9km→」이정표를 세워 놓은 능선 삼거리에 도착했다. 『광주학생교육원』이 있는 곳에서 『천운산』거리 표지판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정상이 멀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지난 산행 때 이 산을 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만 ---이라 옛 선현들이 일러 주었건만 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고 올라 넘어야 할 정상이라 마음을 다잡아먹고 다리에 힘을 모아본다.
[7] 천운산 0.6km 지점
안부에서 약 8분여를 오르니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 아래로 앞서 능선을 걸으며 보았던 화순군 남면 벽송리 일대(원동저수지, 모후산 줄기 등)가 보이고 우측으로 지난 산행 때 지나 온 「무등산과 안양산」정상과 능선이 조망된다.
조망바위를 지나 잠시 더 진행하여 천운산 0.6km라는 이정표가 있는 능선 분기봉(독산에서 복내로 바뀌는 지점 / 10 : 20분)에 올랐다. 힘들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오르다보니 정상을 600m 앞두고 있다.
[8] 천운산 정상
10 : 35분,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있는『천운산(601m)』정상 능선에 올랐다. 두 사람의 등산객이 쉬고 있다. 모처럼 만나보는 산꾼이다. 生面不知면서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무인산불감시초소」가 설치되 있는 정상에 올라보니 『천운산 / 해발 601m / 화순군』이라 음각한 정상 표지석과 삼각점 그리고 이정표(←한천휴양림1.7km /↑깃대봉 / ↓광주학생교육원3.6km → / 동면운농리2.3km)도 세워 놓았다.
『천운산(天雲山)』은 일명 『구름산』이라고도 한다. 「上峰」을 「天子峰」이라 하는데 천자가 있다고 전한다. 돗재마을 북쪽에 있으며 동면과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참고자료> 천운산
○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동면 운농리, 운산리, 한천면 평리, 남면 벽송리 일대
○ 높 이 : 해발 601.6m
○ 주변산세 : 화순광업소 뒤편에 위치한 산으로 그리 험하지 않은 산세로 이루어져 있다. 인근의 무등산, 백아산, 만연산, 용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에 눈에 띄는 유물유적은 없는 편이다
<참고자료> 동면 옥호2리 ---> 운산마을(雲山)
① 지명유래
옥호리(玉壺里) 의 지명은 옥림(玉林) 마을의 옥(玉) 자와 호동(壺洞) 마을의 호(壺) 자를 각각 취하여 옥호리라 하였다. 옥호리는 옥림마을, 호동마을, 운산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운산마을의 뜻은 천운산의 지명을 취하여 운산이라 하였다. 또 마을뒤의 산이 구름산이라 운산 마을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마을을 세분하면 한고삿(큰똠), 너매미고삿(작은똠), 새태로 구분된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시 화순군(和順郡) 동면 옥호리(玉壺里) (호동, 옥림동, 운산동) 로 편입되었다.
현재 옥호2리이며 2개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 마을형성
운산마을은 동쪽으로는 진등, 서쪽으로는 초장굴, 용난이, 서남쪽으로는 안산, 남쪽으로는 돛재, 깃대봉, 북쪽으로는 비석등, 장성등이 있다. 마을의 방향은 북쪽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씨들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동쪽으로는 운농리, 서쪽으로는 호동마을, 남쪽으로는 깃대봉, 북쪽으로는 옥림마을이 있다.
③ 민속놀이. 전설. 민담
⊙ 당산제 : 정월 대보름 일주일 전에 당산제를 모실 화주를 정하는데 화주로 선출된 사람은 그날부터 대문 밖 출입을 금하며 금줄을 드리운다. 또 화주 집에서 당산제에 쓸 제물을 마련하는데 아이들은 저녁에 피울 장작을 집집마다 거두어들인다. 정월 대보름 전날 제관들은 깨끗한 옷을 입고 뒷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지낸 다음 화주 집에 들러 제수를 갖추는 동안 농악을 울린다. 화주집에서 가지고 나온 제수를 당산 앞에 진설하고 당산제를 지내는데 堂山主山, 上山下山 雄進村落 이라는 축문을 읽는다. 농악은 당산제가 끝날 때까지 울린다. 마지막으로 아랫당산에 미역을 묻고 이비야 하며 도망친다. 윗당산은 할아버지라 하며 아랫당산은 할머니라 한다. 1992년부터 중단하고 있다.
⊙ 마을노인의 꿈에 역신이 나타나서 서로 말하기를 운산은 당산제를 지내므로 드세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하며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산제를 모신다.
⊙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농악을 치면서 마당볼비를 하며 샘굿, 마당굿을 쳤다.
⊙ 전염병이 돌면 디딜방아를 훔쳐다 거꾸로 세우고 고쟁이를 입혀 놓는데 주로 인근마을에서 밤에 몰래 가져오곤 하였다.
⊙ 학교앞에는 바위가 있는데 마을에서 보면 안좋다하여 삼나무를 심어 가렸다.
[9] 『돗재』가는 길
『天雲山(601.6m)』정상에서의 주변 경관과 시설물을 살피고 정상석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을 한 후 90도로 꺾어 「한천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는 『돗재』로 향했다.
정상을 뒤로하고 2분여를 내려오다 보니 마른모꼴 형상을 이룬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마루금이 휘어진 가지를 통과하여 넘어가도록 돼 있어『문지방』나무라 이름을 붙여 주고 약 8분여를 뛰는 걸음으로 내려 선 곳이 능선삼거리 안부다. 이정표를 세워 놓았는데 「정상 0.5km, 한천휴양림 1.2km, 팔각정 1.0km」라 표시되 있다.
[10] 『돗재골』과 『문바위』전설
안부 이정표를 뒤로하고 바위 지대를 지나 「한천휴양림」에서 설치한 팔각정에 도착(11 : 14분경), 쉼 없이 팔각정 쉼터를 통과하여 11 : 20분경, 「한천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는『돗재』에 내려섰다.
지난 산행 때 계획했던 종착지점이다. 넓은 주차장과 휴양림 건물이 있고 2차선 포장도로 변에는 『돗재』표지석을 비롯하여 「새마을 의지」라는 돗재 도로 개설 기념비(1977. 9. 30)도 새워 놓았다.
『돗재고개』는 한천면 영내에서 영외 반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천운산의 산세가 암돼지가 누워서 7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천운산의 중턱재를 『돛재』라 하였다고 한다. 돛재안에는 우리나라 국민이 3년 먹을 보리가 있다고 전하는데 현재 무연탄이 나오고 있다.
돛재골에는 장군대좌가 있다고 전하데 돛재장군이 천운산(천자봉)에서 천자를 모시고 있으며 천운산 아래에 「문바위」가 있어 여기에서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400여년전에 남양홍씨 홍수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조실부모하여 고아로 전전하다가 사평의 배장자라는 부자 집의 머슴을 살면서 고생하던 중 하루는 둔갑장신하는 술사가 그 집의 술객으로 머물면서 정성껏 모시는 홍수천을 어여삐 여겨 호신의 방편으로 둔갑장신의 묘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홍수천은 처음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도술을 사용하였으나 주인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여 주인집의 재물을 전부 구렁이로 만들고 바위를 소로 둔갑시켜 장에 파는 등 개인 사욕에 술법을 사용하다 결국은 돛재 고갯길에서 도사를 만나 새로 둔갑하여 도망을 가니 도사는 수리매가 되어 쫓고 쥐로 둔갑하여 고목나무에 숨자 구렁이로 쫓아오는지라 할 수없이 둔갑을 풀고 문바위 앞에 꿇어앉자 참회하며 천문지리의 술서를 석문 바위 아래에 감추고 어디론지 가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 이 바위를 문바위 또는 문서바위라고 한다.
[11] 『太樂山』 頂上에서
11 : 25분,『돗재』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쉼을 대신하고 도로 옹벽을 치고 올라 산으로 올랐다.
11 : 35분, 『돗재』 후의 첫봉(413봉)에 올라 휴식. 뚜렷한 조망은 없는 곳이다.
휴식도 잠시, 점심 식사 장소로 예정된 『태악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능선 바위지대를 지나면서 완만한 오름이 급 오름으로 변하고 산죽 밭도 지난다.
12 : 35분 『돗재』를 출발하여 천운산 오를 때와 같은 된 오름을 한차례 겪은 후 묘 1기를 지나니 태악산 정상이다. 힘들게 봉을 오른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듯 태악산 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정상에는 특별한 시설물은 없지만 뾰족 뾰족 솟아오른 돌이 흩어져 있고 시야가 툭 터져 그런대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가야할 노인봉과 성재봉도 시야에 들어오고, 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岩峰인 『용암산』도 눈에 들어온다.
『태악산(太岳山, 大樂山 = 용미산), 524m』은 화순군 한천면 東佳里 헌무정마을(獻舞亭) 뒤에 있는 산인데 산의 형태가 仙人이 장구를 들고 춤을 추며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며 마을 이름도 산의 형태를 따「헌무정(獻舞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仙人이 장구를 들고 춤을 추며 들어오는 형국이라 「크게 즐거움을 주는 산(클태 :太, 즐거울 락 : 樂)」이란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는데 대장과 노부장, 장부장이 먼저 와 식사준비를 하고 있다. 삼겹살 고추장 볶음에 고등어 통조림을 넣은 묵은지 찌개를 끓이고 있다. 냄새만 맡았는데도 입에 침이 슬슬 고인다. 山海珍味를 차린 것 보다 더 맛난 식사를 하고나니 다리 힘이 불끈 불끈 솟는 것 같다. 오후 산행은 땅 집고 헤엄치기라면 너무 과장된 표현인가. 모처럼 입맛 당기는 식사를 하고 다시 출발이다.
[12]『태악산과 노인봉』을 등지고 있는「東佳里」
산악대장, 오후 산행 중 『말머리재』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개기재』까지 가야 된다고 하니 장부장, 오늘 산행을 己丑年 첫 산행이기 때문에 중간 탈출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태악산을 뒤로하고 숲길을 따라 약 25분여를 진행하니 좌측으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시원한 바위가 나온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마을이 『태악산과 노인봉』을 등지고 있는「東佳里」인 모양이다.
「동가리(東佳里)」는 ‘동산(東山)마을’의 「동(東)」자와 ‘가천리(佳川里)’의 「가(佳)」자를 각각 취하여 「東佳里」라 하였다고 한다. 東佳里는 「東山마을, 佳川마을, 獻舞亭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산마을」은 獻舞亭에서 볼 때 동쪽산 아래에 있다하여 東山이라 이름 하였으며 「아랫마을(고터), 윗마을(안똠, 쏘터), 새터」로 나누며 「佳川마을」은 예전에 ‘가산’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정유재란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고 그 후에 다시 마을이 형성되어 가천리라 하였다고 전한다. 가장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갓물’이라 한 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佳川이 되었고 ‘아래떼미, 새터’로 구분되었으나 새터는 2가구가 거주하다가 폐하였다고 한다.
「헌무정」은 역시 ‘우데미, 재데미, 아리데미’로 구분을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동가리(동산촌, 가천리, 헌무정리)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가 있는 곳은 대화(大禍 : 큰 화)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는데 바로 「佳川」에서 「東山」으로 흐르는 내와 「오곡」에서 「내원동」까지 흐르는 내가 ‘西出東流水’이므로 이곳을 예로부터 피난처의 으뜸으로 여겨 왔으며 6·25때에도 佳川 西쪽 지역은 피해가 있었으나 東쪽 지역은 피해가 없었다고 하며 獻舞亭마을은 선인무수여장구형(仙人舞袖女杖鼓形 : 선인이 장구를 들고 춤을 추는 형국)으로 태악산이 仙人이고 佳川마을은 오른손이며 獻舞亭마을이 왼손에 해당된다고 한다.
동가리에는 마을 입구에 오래되고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는데 옛날에 밤에 도둑이 도둑질을 하고 나가다가 당산나무가 어찌나 큰지 날이 샐 때까지 당산나무를 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이 당산나무 잎이 한 번에 피면 풍년이 들고 나뉘어 피면 가뭄이 든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는 ‘당산굿, 시암굿, 마당볼비’를 하였고 마을에 전염병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밤에 몰래 다른 마을(고시리)에 가서 디딜방아를 가져다가 마을 입구에 거꾸로 세워놓고 고쟁이를 씌워 액막이(디딜방아 액막이)를 하였다고 하며 가뭄이 오래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말봉산, 천운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동산에 달이뜨면 선인들이 춤춘다네
백호등 넘어드니 불무 소리 요란하데
흰 구름 속 신선주에 운중반월 잡으려고
날고뛰는 영웅호걸 발자국만 남겨 놓은 지 400년 전
전설생각 가는 길을 멈추는 구나
구만리 장천에 떠있는 저 달 동산에 솟았으며
서출동류 계곡 수는 가천이라 불렀다네
태악의 칠선인들 장구봉을 희롱하니
막대 짚고 바라보며 그 누가 선인무수라 했는가
[13] 노인봉(老人峰)
지나는 걸음으로 산 아래 마을과 원근의 산을 조망하고 안부로 내려서니 능선을 따라 녹이 쓴 철망이 처져 있다. 흑염소를 방목했던 모양이다. 철망을 따라 잠시 진행하니 암릉이 나타나고 우측으로 급경사 오름길을 다리에 힘을 주고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산 정상에 올랐다(14 : 10분). 『노인봉』표지판을 상하로 매달아 놓았고 풍상에 귀퉁이가 허물어진 삼각점이 있다. 전망도 시원히 뚫려 태악산에서 보았던 성재봉과 용암산이 더 선명하게 와 닿는다.
『老人峰(530m)』은 가천리 뒤에 있는 산으로 「노인바위」가 있어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14] 성재봉
약 15분여 휴식을 취하고 좌측 급 내림 길로 들어섰다. 노인봉에서 잠시 내려서서 봉 두 개를 연이어 오르내리고 세 번째 된 오름을 한 연후에야 『성재봉(519m)』정상(14 : 45분)에 올랐다. 고도표에는 태악산에서 성재봉까지는 일직선(태악산 524, 노인봉 530, 성재봉 519)을 이루었는데 사이사이의 봉을 오르내림이 만만치 않다. 앞서 간 대장을 개의치 않고 휴식을 취한다. 『성재봉』은 화순군 한천면과 이양면 경계를 이룬 산이다.
[15] 말머리재
휴식도 잠시. 『성재봉』을 뒤로하고 5분여를 내려오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마루금 표시기는 좌측으로 바짝 꺾여 급하게 내려가는 곳으로 매달려 있다. 직진 길은 아마도『용암산』으로 가는 길인 모양이다.
용암산 갈림길에서 약 7분여를 진행하여 안부 삼거리를 지나 무명봉을 넘고 또 안부로 내려섰다. 이쯤이 말머리재가 되는가? 뚜렷한 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말머리재가 아닌 모양이다.
다시 가파른 봉(429봉)에 올랐다 좌측 급 내림 길로 내려서니(15 : 25분) 안부 사거리가 나온다. 매직으로 거칠게 쓴『말머리재(여수오동산악회. 2004. 12. 19)』표지판을 벚나무에 묶어 놓았다. 태악산을 출발 할 때 『말머리재』에서 중간 탈출이 가능하다고 해 車의 왕래가 많은 고개라 생각했는데 이미 오래전에 사람의 왕래가 끊긴 듯 안부에는 낙엽만 수북이 쌓여 있다.
『말머리재』는 이양면 용반리(龍盤里)에서 한천 고시리(좌측)로 넘어가는 재가 된다. 『말머리재』에서 진행 방향 우측에 자리 잡고 있는 「용반리(龍盤里)」의 지명은 「용반(龍盤村)마을」의 이름을 취하였으며 ‘용반촌(龍盤村)마을, 고암촌(鼓巖村)마을, 여우내(乾川里)마을, 오룡동(五龍洞 = 말용동)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여우내마을과 오룡동마을은 廢村되었고 1976년경에 「더실고랑」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더실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암촌마을」은 마을에 북처럼 생긴 바위(북바위 : 고암촌과 강성리 도로사이)가 있다하여 바위이름을 취하여 「북바위마을」이라 하는데 한자로 북고(鼓)자와 바위암(巖)자를 써서「고암촌(鼓巖村)」이라고 했으며 ‘우데미, 아래데미(고암촌)’ 마을로 구분된다.
1913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송석면 고암촌,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송석면 용반리(龍盤里)(용반촌, 건천리, 고암촌, 오룡동)로 편입되었고 1932년 11월 1일 면폐합으로 송석면과 도림면이 합하여 이양면이 되면서 화순군 이양면 용반리가 되었다. 1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반촌마을 앞에 「 반룡산(발룡산, 박룡산)」 4마리의 용이 사리고 있다고 하며 반룡산 동서남북에 4개의 반룡회주의 명당, 비금들에 비금낙지, 서쪽에 갈마음수, 투구봉, 활굴, 칼등, 선바위 집장터(장군이 모인다는 곳), 남팔등, 깃대봉(고시리) 등이 있어 장군대지가 있다고 전한다.
말머리재 좌측에 있는 한천면「고시리(고방굴마을 : 古房洞,고방동)」는 ‘고방동마을, 샛점마을, 터건너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고방동마을」은 형세가 풍수지리상 창고와 같다하여 고방(古房)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마을은 폐촌 되고 안식교회 미스바 야영장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고시리(고방동, 어시리)에 편입되었다. 터안마을과 함께 1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많이 거주할 때는 50여 호나 되었다고 한다.
「고방동마을」남쪽으로 가면 「두봉산(말봉산)」과 「장재봉」이 있으며 장재너머에 보성 땅이 있고 마을 북쪽으로 고시제 저수지가 있으며 마을의 동쪽은 형제봉이 있고 서쪽은 촛대봉 지맥이 뻗어있다. 동쪽으로는보성군 복내면, 서쪽으로는 샛점마을, 남쪽으로는 이양면, 북쪽으로는 동가리 동산촌 마을에 접하고 있다.
영을 넘고 영을 넘은 저 구름 가는 곳은
산중에 당도한 정처 없는 저 나그네
숲에서 잠이 드니 꿈속에 나타난 신선님
이곳이 복지로다 하며 간데없고
꿈을 깨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니
한천 4개 古터 중 하나 일세
[16] 『촛대봉』 오르는 길
15 : 25분, 『말머리재』안부를 지나 잠시 오르니 먼저 도착한 대장이 우리를 기다리며 쉬고 있다. 휴식.
서밧재를 출발하여 말머리재까지 12. 6km를 왔으니 오늘 산행 총거리(21km) 중 5/3은 극복을 했다. 이제 『촛대봉(522m)』과 『두봉산(630m)』을 오르면 룰랄라 내림 길이다. 걸음이 잘 떨어지지는 않지만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다. 마음을 다잡아먹고 한결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촛대봉을 향해 출발(15 : 43분)했다.
완만한 오름 길을 약 20여 분 진행하여 무명봉(약 400m)에 올랐다. 굴곡이 심하지 않는 능선 길을 30여 분 진행하다 급경사로 올라붙는다.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굽혀 10여 분을 힘들게 올라서니(16 : 40분) 『촛대봉(522m)』표지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별 특징이 없는 정상이다.
『촛대봉』은 「한천면 터건너마을」의 남쪽에 위치하며 이양면과 경계가 된다.
휴식을 취하며 준비해 온 자료를 보니 오늘 산행 중 가장 높고(630.5m) 마지막 고비가 되는『두봉산』정상까지는 1.7km, 110여 m를 오르면 된다. 올라야할 두봉산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힘들다. 중간 탈출을 할지 모른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산봉을 넘고 넘어 이제 마지막 한 고비를 남겨두고 있다. 한 시간 일찍 출발한 보람이 있어 예정시간(17 : 30분) 보다 50여 분 일찍 도착했다. 약 15분여 느긋한 휴식을 갖고 『두봉산』을 오르기 위해 출발(16 : 52분).
[17] 『두봉산(斗峰山, 630.5m)』
『촛대봉』정상을 뒤로한지 14분, 山竹 밭 급 오르막이다. 약 20여 분간 숨을 몰아쉬며 삼각점과『두봉상(630.5m)』표지판이 있는 정상에(17 : 35분) 올랐다.
『두봉산(斗峰山, 630.5m)』은 화순군 한천면 고방동에서 남쪽으로 1㎞ 지점(고시리 터건마을)에 위치한 산으로 「말봉산」이라 하기도하며 어시동에 살던 어씨가 망을 보았다하여 「망망산」이라고 하는데 와전되어 「말봉산」이라고도 부른다.
조망이 좋지 않은 정상이지만 힘들게 오른 산이고 『개기재』까지 쉼 없이 가야하기 때문에 마지막 느긋하게 휴식을 가졌다.
[18] 장재봉 분기점
16분여 휴식을 갖고 우측으로 꺾어 내림 길로 들어섰다. 약 10여분 후, 봉 하나를 오르는데 동그란 붉은 해가 산 능선에 걸려 있는 것이 너무 황홀하다. 산마루에 올라서면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도 해가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 봉 정상을 오르기 전에 빨간 숯덩이 하나 겨우 남았는가 싶더니 이마저도 이내 사라지고 만다. 走馬看山으로 日沒의 정경을 살피고 봉 정상에 올랐다. 능선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곳이 『장재봉(고방동 동남쪽으로 보성군과 경계에 있는 산)』과 마루금이 분기되는 지점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화순군에 위치한 산을 오르내렸는데 여기서부터 보성군의 산을 오르내리게 된다. 郡 경계를 넘는 감회가 새롭다.
산행 시작부터 천운산 오르기까지 선두로 속도를 내던 윤사장, 한동안 후미로 가는가 싶더니 장재봉 분기점에서 또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점심 에너지가 지금 발산 되는 모양이다.
마루금 표시기를 따라 잠시 진행하니 누군가 나무 둥치에 「묵곡 ↑→」이라 붉은 스프레이를 뿌려 글씨를 써 놓았다. 이곳이 『장재봉』분기점인가?
「묵곡리(墨谷里)」는 「화순군 이양면 먹실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먹묵(墨)자’와 ‘굴곡(谷)자’를 취하여 묵곡리라 하였다. 묵곡리는 「먹실마을, 어시랑마을, 월암마을, 도량마을, 월봉마을」 등 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어시랑마을」은 골짜기가 길게 늘어진 곳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어시랑」이라 하였으며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913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송석면 어시동,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송석면 묵곡리(墨谷里 : 묵곡리, 어시동, 월암리, 도량리, 월봉리)로 편입되었고 1932년 11월 1일 面 廢合으로 송석면과 도림면이 합하여 이양면이 되면서 화순군 이양면 묵곡리가 되었다.
어시랑마을은 동쪽과 서쪽으로 산악이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두봉산(斗峰山, 631m)이 있고 29번 국도에서 복내쪽으로 이어지는 5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한적한 고개마루가 오늘 산행의 종착지 『개기재』가 있다.
[19] 『개기재』는 개기는 곳인가?
이제 약 3km(40분 정도)를 더 가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 『개기재』가 된다.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뛰는 걸음으로 걷는다. 고도표에는『두봉산』을 지나면 계속 내림 길로 표시되 있는데 내려가는 길이면서도 몇 개의 봉을 오르내린다.
완만한 내림길--->(우) 평지길 20여분 --->(좌) 내림길--->묘 --->임도로 들어섰다. 봉 중턱에서 불빛 두 개가 얼렁거린다. 후미 팀도 랜턴을 꺼내 길을 밝히고 부지런히 앞 팀을 따라갔다. 갈림 길에서 좌측으로 봉 하나를 올랐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468.6(삼각점)봉인가?
이미 날이 어두워 주변 분간이 어렵고 해드랜턴에 의지해 겨우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간다. 두봉산을 내려와 산봉을 몇 개 넘은 것으로 보면 마을 불빛도 보이고 개기재를 넘나드는 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만한데 소리마저 캄캄하다. 주변 사물을 살필 수 없기 때문인지 『개기재』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비석을 세워 놓은 묘(濟州梁氏墓)를 지나 15분여를 더 진행하니 또 하나의 묘가 나오고 가파른 내림 길로 이어진다. 잠시 후 밭(논?) 옆으로 내려서서 다소 넓은 길로 빠져나오니 포장도로가 나오고 직벽에 가까운 절개지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개기재』에도착(19 : 05분경)을 했다. 이 재는 화순군 이양면과 복내면을 잇는 58번 2차선 아스팔트 지방도로다.
오랜만에 멀고 힘든 산행을 했다. 그러면서도 己丑年 첫 정맥산행을 끝까지 완주한 뿌듯함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산악대장, 아침 식사장소인 신토불이 장터국밥집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대리운전을 시켜 이동시켜 주도록 연락을 미리 했는데도 개기재에 도착하여 10여분을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는다. 어디선가 길을 못 찾아 개기고 있는 모양이다. 대리운전 기사와 여러 차례 통화를 하여 19 : 30분을 넘겨 차가 도착했다.
[20] 벌교 꼬막 세상
오늘 저녁 메뉴는 벌교 꼬막 정식이다. 캄캄한 시골 밤길을 50여분 달려 벌교에 도착하여 꼬막 전문 음식점 거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20 : 30분 까지만 영업을 한단다. 여러 집을 두리번거렸으나 영업이 끝났다며 손님을 받지 않는다. 단 한 집 「벌교 꼬막 세상」에서만 손님을 받기 때문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줄어서 대기를 하고 있다. 식당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들로 꽉 차 빈자리가 없고 종업들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바쁘다. 밤 8 : 30분을 넘긴 시간이라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30분여 분을 기다려 겨우 자리를 차지했다.
잠시 앉아 기다리니 「삶은 꼬막, 꼬막 전, 꼬막생채무침, 양념꼬막, 매생이 국, 콩자반, 갓김치」등 꼬막으로 만든 찬과 밥 곁들여 내 온다. 온종일 산행의 고단함도 있고 별미 벌교 꼬막 정식을 대한 터라 이스리를 뺄 수가 없다. 모두 잔을 채우고 ‘위하여’로 잔을 부딪치니 술이 술술 넘어간다.
내일은 정맥 15구간 산행을 다음으로 미루고 『천관산』산행이다. 한결 마음도 가볍다. 아마도 내일 산행 때 걸음걸이는 벌교 꼬막의 힘을 받아 가볍게 걸을 수 있으리라. 원거리 장시간 고단한 산행이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완주를 한 마음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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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돛재마을(豚峙,돗재,사택) 「오음3리」
① 지명유래
오음리(午陰里)의 지명은 오산(午山)마을의 오(午)자와 산음(山陰)마을의 음(陰)자를 각각 취하여 오음리라 하였다. 오음리는 오산마을, 산음마을, 삼거리마을, 돗재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돗재마을은 한천면 영내에서 영외 반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개 이름을 따서 돗재마을이라 하였다. 또 호남탄좌 사택이 있는 곳이라 사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② 마을 연혁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동면(東面)지역이고,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금오면(金鰲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綾州郡) 한천면(寒泉面)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오음리(오산리, 산음리)에 편입되었다.1967년 호남탄좌의 개광과 함께 번성한 마을이다. 오음3리이며 4개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1개반이다. 많이 거주할때는 호남탄좌 사택 52동에 200가구가 거주하였으나 1992년 폐광과 함께 대부분 이거하였고 1994년 현재 13가구만 남아있다.
③ 위치
동쪽으로는 반곡리, 동가리, 고시리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계리, 남쪽으로는 이양면 북쪽으로는 동면과 접하고 있다. 지방도 822호선의 시작점으로 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참고자료> 산음마을(山陰,가리실) 「오음2리」
① 지명유래
오음리(午陰里)의 지명은 오산(午山)마을의 오(午)자와 산음(山陰)마을의 음(陰)자를 각각 취하여 오음리라 하였다. 오음리는 오산마을, 산음(가리실)마을, 삼거리마을, 돗재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산음마을은 정유재란시 피난처로 가루쇠골, 가루실, 가리실이라 불렀다(지금도 쇳물덩어리가 출토 됨) 그 후 낮에도 산그늘이 일찍 진다하여 산음이라 했다고 전한다. 가리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산을 가린다는 의미로 메산(山), 그늘음(陰)을 각각 취하여 산음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응달(우데미), 양달(아리데미)로 구분된다
② 연혁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동면(東面) 산음리(山陰里)로 나오며,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금오면(金鰲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綾州郡) 한천면(寒泉面) 산음리(山陰里)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오음리(오산리, 산음리)에 편입되었다. 오음2리이며 2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자료> 삼거리마을 「오음3리」
① 지명유래
오음리(午陰里)의 지명은 오산(午山)마을의 오(午)자와 산음(山陰)마을의 음(陰)자를 각각 취하여 오음리라 하였다.
오음리는 오산마을, 산음마을, 삼거리마을, 돗재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삼거리마을의 뜻은 돗재가는 길, 산음 가는 길, 오산가는 길로 나누어지므로 이곳을 삼거리라 하였다.
② 연혁
1789년 호구총수에는 능주목(綾州牧) 동면(東面) 지역이고, 1867년 대동지지에는 능주목 금오면(金鰲面),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능주군(綾州郡) 한천면(寒泉面)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화순군(和順郡) 한천면 오음리(오산리, 산음리)에 편입되었다. 오음3리이며 1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화순군 향토자료 / 화순군의 마을 유래지(한천면 오음리)
<문(門) 바위 전설>
한천면(寒泉面)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광업소를 지나 돗재 약수터를 찾아가면 그 옆에 성문(城門) 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장엄하게 생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눈길을 끌리게 할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 바위를 성문바위 또는 문바위라 한다.
지금부터 약 사백여년전 남양 홍씨에 홍수천(洪秀千) 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실부모하여 고아로 전전하면서 부잣집의 머슴살이로 일년, 이년 해를 보내며 잔뼈가 굵어갔다. 그런데 이웃 고을인 남면(南面) 사평(沙坪) 에 토호(土豪) 로서 권세를 잡고 고을을 뒤흔든 배장자(裵壯者) 란 부자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집에서 홍수천은 머슴을 살았는데 그는 주인의 모진학대로 형용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었다. 배장자는 부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시서(詩書) 와 술객(術客) 들을 좋아하여 사시절 시서 잘하는 선비와 음양술수(陰陽術數) 에 능한 술객들이 사랑방에 줄을 이었는데 배장자의 눈에 들면 일년씩, 반년씩 머물다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루는 둔갑장신(遁甲藏身) 을 하는 큰 술사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홍수천은 그 집 종으로 그 술사의 시중까지 들지 않을 수 없어, 항상 정성껏 잘 모셔 받들었다. 어느날 그 술사는 홍수천의 진실한 마음을 고맙게 여겼던지 틈틈히 홍수천에게 둔갑장신의 묘술(妙術) 을 가르쳐 급하고 어려운 경우에 호신(護身) 의 방편으로 삼으라고 권하였다. 그날부터 홍수천은 글과 더불어 술수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문일지십(問一知十) 으로 이치의 터득이 빨랐다. 술사는 퍽 기뻐하며 구전심수(口傳心受) 로써 빠른 시일에 더욱 깊은 경지에 까지 통달시켰으니 머슴으로서 그토록 묘법(妙法) 을 통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하루는 술사가 홍수천을 아무도 몰래 산중으로 데리고 갔다.
「이젠 너의 공부를 시험하여 보자.」
그리고 둔갑법부터 시작하여 장신술까지 모두 다 시험하여 보였으나 아직 진묘(眞妙) 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여 다시 공부를 더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인간만사가 호사다마(好事多魔) 라, 술사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홍수천은 이와같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그 길로 배장자의 집을 버리고 뛰쳐나왔다. 그 후 홍수천은 마을의 이집, 저집을 살펴 다니며 어려운 일은 모두 도와주곤 하면서 하루 이틀, 이달 저달 세월을 보냈다.
가난한 집에 쌀이 없으면 부자집 대문 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창고 속에 있는 쌀가마니를 등에 업고 돌아와 가난한 집에 주었고, 병에 신음하는 환자가 토끼고기가 먹고 싶다면 주문(呪文) 몇마디로 산토끼가 집으로 찾아 들도록 하였으며, 삽시간에 오백리, 천리를 내왕하는 축지법(縮地法) 등으로 모든 어려운 일을 손쉽게 풀어주었다. 친구들이 모여 앉아 술을 찾으면 남의 집 샘물을 술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만족하게 먹여 주었고, 길가는 사람들 중 행동이 눈에 거슬리면 즉석에서 망망대해를 만들어 놓고 겁을 주어 놀라게 하여 깨우쳐 주기도 하였다.
구렁이가 온 집안의 담장과 마당의 구석구석에 뒤틀고 있는 것을 보고 온 가족들은 사지를 떨면서 질겁을 하였고, 구렁이들이 혀를 널름거리면서 돌아다니며 악취를 풍기니 겁에 질려 살 수 없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홍수천을 불러 구렁이를 쫓게 하도록 주인에게 권하였다.
홍수천이 태연히 말하였다.
「 예, 이것은 가난한 집 돈을 착취하여 치부를 한 죄업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니 이 구렁이들을 쫓아 버리면 금고의 돈이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 홍수천, 나의 재산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저 구렁이만 쫓아주게! 」
주인은 간절히 부탁하였다. 이에 홍수천은 주문(呪文) 몇마디로 잠시 후에 깨끗이 뱀들을 없애 버렸다. 이와같이 그는 묘술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 주기도 하였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물과 같아 견물생심이라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그는 사욕(私欲) 에 마음이 젖어 그의 술법은 불로소득(不勞所得) 에 이용되는 사술로 전락하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홍수천은 어느날 친구들을 불렀다.
「 오늘은 자네들과 같이 복내장 구경이나 가볼까? 」
「 그렇게 하세 」
십여명이 작당하여 화순 남면에서 복내로 가는 큰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홍수천은 갑자기 길가에 발을 멈추고 서서 합장을 하고 주문을 외우니 갑자기 옆에 있던 바위가 모두 소로 화(化) 하여 버렸다.
홍수천이 의기양양하여 큰소리 쳤다.
「 여보게, 자네들, 이 황소 고삐를 하나씩 잡게! 복내장에 가서 팔아가지고 자네들도 한목씩 하게! 무슨놈의 돈이 금고 속에만 모아두라는 법이 있겠는가. 」
홍수천은 큰소리를 치며 친구들에게 소고삐를 주었다. 친구들은 어떤 계획도 없이 어이없는 소 고삐를 잡고 따라갔다.
「 자네들 모두 수완대로 팔게! 」
홍수천이 제일 먼저 소를 몰고가 장거리에 매어 놓았다. 친구들도 그 옆에 소를 매어놓아 삽시간에 그 일행들은 소를 모두 팔았다.그들은 고갯길에서 태평가를 부르며 감쪽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동안 지난 후에 다시 복내장날이 되어 산에 있는 바위를 몰아다 황소로 둔갑을 시켜 또 팔아 넘기고 되돌아 서서 유유히 오는 길인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뒤쫓아 오면서 소리쳤다.
「 여보시오. 여보시오! 」
홍수천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니 젊은이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왔다.
「 댁에서 팔고 간 소가 갑자기 바위가 되었어요.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
젊은이는 눈이 휘둥글하며 홍수천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홍수천은 직감적으로 집히는게 있었다.
「 아, 범잡는 담비가 나왔구나! 」
놀란 홍수천은 그 자리에서 새로 변신하여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는 큰 수리매가 날개를 펴고 번개처럼 쫓아왔다. 홍수천은 다시 쥐로 둔갑을 하여 큰 고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큰 수리매는 다시 구렁이가 되어 고목을 타고 굴속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다.
놀란 쥐는 하는 수 없이 산고개에서 사람으로 화(化) 하여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구렁이로 둔갑장신을 하였던 사람도 팔십이 된 백발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 천장지비(天藏地秘) 의 신술(神術) 로써 혹세무민(惑世誣民) 을 하면 천형(天刑) 을 받아야 마땅하나 관용(寬容) 으로 놔두는 바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가거라.」
홍수천은 술사(術士) 의 말에 깊이 참회하고 돌아와서 천문지리(天文地理) 의 비장(秘藏) 된 모든 술서(術書) 를 석문(石門) 바위 옆에 있는 큰 바위 밑에 모두 감추어 버리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후 부터 이 바위를 문서바위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바위를 보는 사람은 무엇인지 감추어 두었을 듯 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요즈음은 지나가는 젊은 등산객들만 이 넓은 바위에 앉아 청춘남녀의 기상을 자랑하듯 노래를 부르며 노는데 이 바위만 말없이 석불(石佛) 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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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쩌지요??? 개기재가 저한테는 개기자로 보여지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