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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임씨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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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면 두모리에는 진도 고군면 원포가 친정인 김철산의 처 나주임씨의 정절과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암행어사 성수묵이 특명을 내려 정려를 세우도록 하고 삼강록에 올릴정도로 이지역의 대표적인 효열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진도가 고향인 임씨는 15세에 해남 두모마을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이 병에 걸려 일찍 죽고 말았다. 일찍 남편을 여윈 임씨는 살아갈 일이 태산같았다. 또한 시아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그러나 임씨는 실망하지 않고 정성껏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살았다.
이소식을 전해들은 진도의 친정 부모는 딸을 개가시키기 위해 병세가 위급하니 급히 다녀가라며 딸을 불렀다. 임씨가 친정에 도착해보니 병석에 누워 있어야할 부모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딸에게 다시 개가할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씨는 맹인인 시아버지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으니 돌아가서 봉양을 해야한다며 친정집을 떠난다.
딸의 뜻을 바꿀수 없음을 안 친정집에서는 마을의 청년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붙잡아 데려오려고 쫓아왔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더이상 도망갈수도 없었다. 다급해진 임씨는 천지신명께 저 바다를 건너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그러자 이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며 등에 타라는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임씨가 등에 올라타자 호랑이는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게 해주었다. 이 호랑이는 임씨가 키우던 개가 호랑이로 변하여 돌아오게 했다는 말이 전하며 임씨는 이후 평생 정절을 지키며 맹인인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다 죽었다는 얘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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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반적으로 '차'란 식사후나 여가에 즐겨 마시는 기호음료를 말하며, 차나무의 어린 순이나 잎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 마시는 음료만을 진짜 차라고 할 수 있다.
종류
발효상태를 기준으로 한 차의 종류에는 불발효차인 녹차, 반발효차인 우롱차, 발효차인 홍차, 후발효차인 보이차가 있다. 발효란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찻잎의 탄닌(플리페놀)에 산화효소가 작용하여 녹색이 누런색이나 검은 자색으로 변하게 되고, 독특한 향기와 맛이 만들어지는 작용을 말한다. 발효가 많이 된 것일수록 찻잎이 검붉은 색이 되며 우려낸 차 색깔은 홍색이 진하고, 발효가 적게 된 것은 우려낸 차 색깔이 녹황색이나 황금색이다. 녹차의 종류에는 엽차(찻잎을 번철에서 걸른 것으로 더운 물에 우려마시는 차이며 일반인들이 '녹차' 라고 하면 이것으로 알고 있음), 말차(찻잎을 가루로 만든 것으로 '차선' 이라는 다구를 가지고 물에 타서 마심), 단차(찻잎을 시루에 쪄서 절구통에서 짓이겨 다식판 따위의 판형으로 찍어낸 뒤 그늘에서 말린 차)가 있다. 단차의 종류 전차(모양이 돈처럼 생긴 단차), 병차(모양이 떡처럼 생긴 단차), 용단(차의 표면에 용무늬의 표지를 붙인 단차), 봉단(차의 표면에 봉황무늬의 표지를 붙인 단차)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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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과 효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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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팽주(차를 우리는 사람)의 의도를 따르면 되고 단정히 앉아 정숙하게 마시면 된다.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이면 앉은 순서대로 마시는 것이 편하고 어른이 좀 늦게 참석하여도 서로 상좌를 가지고 소란하게 하지 않으며 오는 순서대로 앉게 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담 또는 덕담을 나누면 좋다. 동다송 한 구절에 의하면 차를 마시는 법도란 손님이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기며 많으면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아취가 모자란다. 혼자서 마시는 것을 현묘함, 두 손님을 뛰어남, 서넛을 멋, 대여섯을 빔범하다, 일곱 여덟을 베풀다라 한다. 한자리에서 차를 마신 손님은 팽주가 다기를 뒷손질하는 일을 마친 뒤 차와 겯들였던 다식이나 과일을 즐기며 계속 다담을 즐겨도 좋고 좀 바쁘더라도 팽주의 행위가 끝난 뒤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 것이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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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건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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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고택의 사랑채는 일자형 평면이나 좌측의 정면 2칸이 한단 낮게 아래로 내려와 있고 서로 동선의 연결도 안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2구간으로 분리되어 진다. 우측의 사랑본채는 전면과 우측면에 퇴를 둔 4간집으로 좌 우측에 각각 2간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였으며 사랑방 뒷편으로는 반간폭의 골방은 꾸몄다. 좌측구간은 1간방과 전면 툇마루 좌측으로 1간 마루를 설치하였다. 구조는 다듬돌바른층쌓기의 비교적 높은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전면과 우측면의 퇴주는 두리기둥)를 세운 4량집이며 도리는 장설로 받혀진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후면의 도리밑은 장설받침 없음) 이 건물의 전면에는 반가(斑家)의 사랑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도형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구조물 역시 흔하게 볼 수 없는 구조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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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승려이다. 신라 때 부터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 오던 우리나라의 다도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초의선사 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하였다. 초의선사 는 < 동다송 >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당시 대흥사 주변의 유명한 다인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다도의 이론과 실제의 양 면에서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켰다. 초의에 있어서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초의선사 의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했으니 그에게는 선과 차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서가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초의는 다음과 같이 당시 그의 친구인 김정희에게 다음과 같은 다시(茶詩)를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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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는 본래 봄눈 같은 것 누가 알리오 그중에 깎아 없앨 수 없는 일단이 있음을 맑고도 밝은 가을밤 달빛을 밝다고 하리 평화롭다고 하리 잘나고 못생김을 그 누가 말하나 진짜도 가짜도 원래부터 초절한 것을 나가정으로부터 아직 움직이기 이전에 뉘라서 향화의 옛 인연 맺었다 하리 서로 헤어지고 만남이야 찾는다고 될 일인가 함께살고 함께 죽자고 껴안을 틈도 없도다 그 모습 볼 때마다 환희스러워 깊은 정 깊은 회포 더욱 더 하다 삼시주장도 오히려 두렵지 않아 한가로운 구름따라 높은산을 내려온다 방장에 계신 유마를 우러러 보니 백옥의 세계에는 황금의 창고 선녀는 때때로 하늘꽃을 뿌리는데 만수에게 그 꽃도 붙지를 않았다 밑 빠진 그릇에도 향기로운 음식은 많고 막혀버린 귀로도 무언의 설법을 듣는다 뜨거운 번뇌, 티끌과 때에도 집착하지 않는 곳 뉘라서 다시 씻기를 원할손가 최후에 보여준 이 자의 비유가 가로로도 세로로도 옳지 못한 배열임을 내 그대의 청을 따라 한 말을 굴리노니 법희공선열식(法喜供禪悅食)일진대 아귀라도 용서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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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이제 전국적으로 다회가 3백여 단체에 이르렀고, 다도를 익히려는 다인은 약 2백만명이나 된다. 이를 통괄하는 단체로는 한국다인연합회와 한국차문화협회가 있고, 해남에는 한국다인회 해남자우다회 등 4개의 다회가 차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다문화(茶文化)의 중흥조이며 시(時), 서(書), 화(華)의 달인이었던 초의선사의 다도(茶道)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는 1992년부터 초의선사 의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그가 40년간 거했던 대둔산 일지암 에 모여 헌차제례를 올려오던 것을 더욱 내실있게 확대하여 불교 문화재가 산재한 대둔사 와 일지암 , 등에서 거행되고 있다. 초의스님 영정 앞에 다인들의 뜻과 마음을 차에 담아 바치는 의식인 ‘헌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접빈 다례를 기연한 후 관광객들에게 차 우리는 법을 알려주고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행다', 다기, 차내는 모습 등을 재현함으로써 당시의 생활상과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백제차 재현' 등이 열리며, 일지암 에서 부처님과 초의 스님께 차를 올리고 전국에서 온 여러 다회가 모여 차를 나누며 관광객들에게도 대접하는 일지암 들차회, 차를 주제로 한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으로 남도의 판소리 가락이 함께 어우러지는 음악제, 사계절 동안 변화되는 차의 모습과 차를 만드는 과정을 일관할 수 있는 차사진전시회, 어린이, 대학동아리, 일반차회 등에서 익힌 차생활의 모습을 서로 견주면서 차의 정신과 멋, 실용성 등을 서로에게 배우는 차겨루기가 있고, 그 밖에 한국화 그리기, 차이야기(茶談), 차음식전시, 차시전시, 다구전시 및 기타 판매 행사 등이 있다. 특히 시기적으로 단풍철에 열리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문화 축제다. 1992년 부터 초의 선사의 입적일(入寂日)인 음력 8월 2일에 일지암 과 해남군민회관(海南郡民會館)에서 거행되고 있다. 해남 버스터미널에서 대둔사 입구행 군내버스가 30분간격으로 운행. 자가용일 경우 해남읍에서 완도방면 13번국도를 따라간다. 해남읍내를 벗어나면 왼쪽으로 대둔사 가는 806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신기리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806번 지방도로로 계속 가면 대흥사 집단시설지구와 주차장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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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왕(善德王 632~647) 때의 일이다. 그러나 차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흥덕왕(興德王) 3년(828年) 김대렴(金大廉)이 당(唐)나라로부터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왕명(王命)으로 지리산(智異山)에 심은 이후부터의 일이다. 이로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호남(嶺湖南)은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는 해남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적당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차는 승려(僧侶)와 화랑(花郞)들을 중심으로 유행하였으며,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왕실이나 귀족들 사이에 차가 널리 유행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차가 상당히 쇠퇴하였으며 이것은 불교의 쇠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신라때부터 유행하여 오랜 전통을 이어오던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는 조선후기 대둔사 (大興寺)의 초의선사 (草衣禪師)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 하였다. 다도(茶道)란 차를 마시는 멋과 더불어 인간의 건전한 삶의 길을 걷자는 것을 말함이다.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기호음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차는 우리 인간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이다.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서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알뜰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된다. 즉, 다도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면에 있어 사심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씨를 기르고 나아가 봉사하고 일하는 실천력을 기르고 이를 통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다같이 한없는 기쁨 속에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대둔사 의 초의선사 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 (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자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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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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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국보 |
보물 |
사적 |
사적및 명승 |
천연기념물 |
중요무형문화재 |
중요민속자료 |
26 |
2 |
12 |
4 |
1 |
4 |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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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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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240호 |
윤두서상 |
1폭 |
윤형식 |
해남읍 연동리 82 |
1987.12.26 |
회화류 |
308호 |
대흥사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
1좌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산9 |
1963.01.21 보물48호 지정 2005,9,28 국보지정 |
석조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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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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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88호 |
탑산사동종 |
1구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799 |
1963.01.21 |
공예류 |
301호 |
대흥사북미륵암 삼층석탑 |
1기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산9 |
1963.01.21 |
석조문화재 |
320호 |
대흥사응진전 전(앞) 삼층석탑 |
1기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799 |
1963.01.21 |
석조문화재 |
481호
|
해남윤씨 가전고화첩 |
일괄 |
윤형식 |
해남읍 연동리 82 |
1968.12.19 |
회화류 |
481-1 윤씨가보 |
1권 |
" |
" |
" |
" |
481-2 가전보증 |
1권 |
" |
" |
" |
" |
481-3 동국여지도 |
1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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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81-4 일본여도 |
1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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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4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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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산수적및 관계문서 |
일괄 |
" |
" |
" |
서적류 |
482-1 금쇄동집고 |
1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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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482-2 금쇄동기 |
1책 |
" |
" |
" |
. |
482-3 산중신곡 |
1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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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482-4 은사첩 |
2책 |
" |
" |
" |
. |
482-5 예조입안 |
1책 |
" |
" |
" |
. |
483호 |
지정14년 노비문서 |
1첩 |
" |
" |
" |
전적류 |
503호 |
명량대첩비 |
1기 3,719㎡ |
이충무공 유적보존회 |
문내면 학동리 1186-7외 |
1969.06.16 |
석조문화재 |
947호 |
미황사대웅전 |
1동 2,673㎡ |
미황사 |
송지면 서정리 산247 |
1988.04.01 |
목조문화재 |
1183호 |
미황사응진당 |
1동 |
미황사 |
송지면 서정리 산247 |
1993.11.19 |
목조문화재 |
1342호 |
미황사괘불탱 |
1폭 |
미황사 |
송지면 서정리 산247 |
2002.07.02 |
. |
1347호 |
대흥사 서산대사부도 |
1기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산8-6 |
2002.09.25 |
석조문화재 |
1357호 |
대흥사 서산대사유물 |
2종 2점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799 |
2002.12.0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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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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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167호 |
해남윤씨녹우단 |
14,268㎡ |
윤형식 |
해남읍 연동리 82 |
1968.12.19 |
목조문화재 |
310호 |
해남진산리청자요지 |
13,304㎡ |
국,사유 |
산이면 진산리 136외 |
1985.01.04 |
녹청자도요지 |
432호 |
해남윤선도유적 |
149,700㎡ |
박성자 |
현산면 구시리산181 |
2001.08.17 |
정원및고성 |
449호 |
해남군곡리패총 |
83,569㎡ |
국,사유 |
송지면 군곡리 940외 |
2003.07.0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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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및 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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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9호 |
대둔산대흥사일원 |
8,740,467㎡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산8-1 |
1998.12.23 |
복합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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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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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173호 |
대둔산 왕벚나무자생지 |
64,793㎡ |
대흥사 |
삼산면 구림리 산24-4 |
1966.01.13 |
식물자생지 |
241호 |
해남연동리 비자나무숲 |
29,700㎡ |
윤형식 |
해남읍 연동리 산27-1 |
1972.07.31 |
식물서식지 |
394호 |
해남우항리 공룡 익룡및 새발자국화석산지 |
1,187,998㎡ |
국,사유 |
황산면 우항리 산13-1 |
1998.10.17 |
화석지 |
430호 |
해남성내리 수성송 |
1그루 900㎡ |
해남군 |
해남읍 성내리 4 |
2001.09.11 |
노거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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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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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8호 |
강강술래 |
창 |
. |
문내면우수영 |
1965.02.15 |
음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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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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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
명칭 |
수량 면적 |
소유자 |
소재지주소 |
지정일 |
비고 |
153호 |
해남윤탁가옥 |
일곽 1,931㎡ |
윤탁 |
현산면 초호리 226 |
1984.01.10 |
목조문화재 |
232호 |
해남윤두서고택 |
일곽 2,572㎡ |
윤항식 |
현산면 백포리 372 |
1996.02.09 |
목조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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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1862∼1919)은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전라남도 해남출신으로 양상태(梁相泰)의 아들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가, 1897년 사직한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그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雋)·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군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승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하여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참고문헌> 三一運動秘史(李炳憲,時事時報社,1959),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金厚卿,申載洪, 韓國民族運動硏究所),1971. 지강 양한묵선생의 생애와 활동, 홍영기, 해남문화원,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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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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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후반에 양한묵은 손병희를 비롯한 권동진, 오세창 등에 앞서 귀국하여 애국계몽활동 가운데 정치 사회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귀국 이후 보안회(保安會)와 공진회(共進會)에 가입 활동하였으며, 1905년 2월 공진회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산된 후 같은 해 5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으며 이 또한 공진회와 같이 일진회의 친일활동에 반대하여 조직된 것이었다. 특히 양한묵은 헌정연구회의 일원으로서 국가학과 정치학의 기본적인 문제를 다룬 헌정요의를 저술하여 황성신문에 연재하였다. 이후 호남학회에 또한 두드러지게 활동하였으며 호남학회의 주된 활동은 교육을 통하여 지방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권수호 과정에서 그는 이재명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적도 있었다. 그의 활동은 문명개화론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던 계몽운동계역과 일치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며 나아가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그것을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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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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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학에 입교함으로써 자신으로서는 이제까지의 사상적 방황을 종식시켰을 뿐 아니라 동학교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단조직도 대폭 정비하는 획기적인 조치가 단행되었을때 그는 천도교(天道敎) 교리(敎理)를 정리하고 천도교의 헌법인 대헌을 제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그가 1902년 경 손병희를 만난이후부터 측근인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그의 심오한 학문적 깊이와 다양한 사상을 섭렵한 것이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동경연의>와 같은 교리 해설집의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도경> <간체법경> 등의 교리서를 저술하였고, 그 밖에도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찬술한 교리서도 적지 않았다. 또한 교단의 중요직책인 '현기사장' '진리권장' '도사'를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천도교를 근대적인 종교로 정립시키는데 가장 공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대표적인 천도교의 이론가이자 활동가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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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민족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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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계획은 권동진, 오세창 , 최린 등이 손병희의 동의를 얻어 처음에는 천도교계의 이름으로 추진하다가 전 민족의 힘을 집결하기 위해 기독교 불교계와 합동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사람은 33인으로 결정되었으며, 이 가운데 양한묵은 천도교계 대표 15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권동진의 권유로 가담하게 되었으며, 그 자신은 진성법율상업학교 교장 윤익선을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드디어 독립선언서는 때맞춰 발표되었고 일경은 민족대표 33인을 고스한히 체포해서 감옥소에 투오기켰다.
여기에 양한묵도 서대문감옥에 갇혀 옥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여기서 막을 고하고 말았다. 1919년 5월 26일 새벽,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서대문 감옥소에서 옥중순국(獄中殉國者)하였다. 아마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밤중에 갑자기 별세한 것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양한묵! 그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찬란한 금자탑으로 남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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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에 세워진 명량대첩비는 조선 숙종 때 충무공이 정유년(1597) 9월 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인데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년 3월에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2차대전을 유발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碑)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그래서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인 경찰들이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옮겼으며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고 말았다. 이 일로 인부가 죽고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경복궁 근정전 뒷들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조직하고 경찰부와 총독부에 수소문한 끝에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것이 막연했다. 이들은 미군정청(美軍政廳)에 면담을 요청하여 협조를 구해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겨 목포까지 열차로, 목포에서 다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그러나 비(碑)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으나 턱없이 부족한 기금 때문에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를 돌아 다니며 팔기도 했다. 드디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학동으로 자리를 옮긴 명량대첩비는 최근 두 차례나 믿지 못할 영험이 나타났다.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땀 흘리듯 검은 물이 흘러나와 나라의 장래를 근심한 충무공의 충절이 살아난 것이라고 한다. 1950년 6·25사변과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이 비는 두 번 우국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그후 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한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었으며 매년 4월 28일 제향(祭享)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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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의 선사시대는 백포만 연안의 두모리 패총을 남긴 신석기시대 후기의 즐문토기(櫛文土器)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점차 내륙으로 들어가 강 언덕이나 후미진 바다기슭의 언덕으로 퍼져 청동기 시대가 되면 3∼4개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전지역에 걸쳐 90여군 9백여기의 지석묘를 남기게 된다. 이들이 다음 시대인 철기시대에 보이는 마한소국(54국)의 기반세력들이다.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 국립목포대박물관/해남군,1986. 해남군사(海南郡史), 해남군, 1995. 마을 유래지, 해남군, 198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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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인 해남군의 군청소재지로 동으로는 옥천면, 서로는 마산면, 남으로는 삼산면과 경계하고 있다. 북으로는 만대산과 금강산을 끼고 있고 남으로는 덕음산과 말매봉이 있는 평야지대다. 해남읍은 옛날(마한)의 「사라」향 지역으로 고려때에는 지금의 삼산면과 해남읍에 걸치는 옥산현의 한 지역이었다. 영암의 속현이었던 「옥산」의 치소는 지금의 삼산면 계동마을 뒷산의 성뫼산(옥산고현성)이다. 1409년(태종9) 해남현을 진도와 합하여 해진군이 자 그 치소를 옥산땅인 옥산고현성으로 옮겨 지금의 해남읍을 해진군의 한 지역으로 하였다. 1437년(세종19) 해진군을 다시 나누어 해남으로 복구 현감으로하였다. 지금의 해남읍성으로 해남현의 치소를 옮기고 해남읍을 이때의 치읍으로 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469년에 성의 남문루(정원루)가 완성되고 있어 분군에서 이때까지의 어느 시기로 보고있다. 해남현의 치읍이 된 지금의 해남읍 지역에 현일면, 현이면의 면리체계가 이루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임란 이후로 보고있다. 1895년(고종32) 전국적인 행정개편으로 해남현에서 해남군으로 되고 포함된 현일면, 현이면도 군일 군이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전군역을 조정하여 13개면을 폐합하는데 이때 옛 군일면, 군이면 지역을 「해남」을 읍호로 하는 해남면이 탄생하였다. 1955년 해남읍으로 승격하고 1973년에는 마산면 복평리가 해납읍에 편입되었다.
<참고문헌> 마을유래지, 해남군, 1987. 해남, 정윤섭, 향지사,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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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읍 연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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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사라 향으로, 고려에는 지금 삼산면과 해남읍에 걸치는 옥산현의 일 지역이었다. 영암속현 [옥산]의 치소는 지금 삼산면 계동의 성뫼산토성(옥산고현성)이다. 태종9년(1409년),지금 현산면 고현리를 치소로 존립하였다. 해남현을 피란 진도군과 합하여 해진군으로 하고, 그 치소를 옥산 땅인 지금 삼산면 녹산역지에 옮겼다. 태종12년(1412), 이것을 다시 옥산발현지인 옥산고현성으로 옮겨 지금 해남읍을 해진군의 일 지역으로 하였다. 세종19년(1437), 해진군을 다시 나누어 해남으로 복구 현감으로 하였다. 지금 해남읍성으로 해남현의 치소를 옮기고 지금 해남읍을 이때의 치읍으로 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성화 기축년(1469)에는 성의 남문루가 완성되고 있어, 분군에서 이때까지의 어느 시기에 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남현의 치읍이 된 지금 해남읍지성에 현일면, 현이면의 면리체계가 이루어진 시기는 분명하지 않고, 대체 임란 이후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고종32년(1895), 전국적인 행정개편으로 해남현에서 해남군(이등군수)으로 되고, 따라서 현일,현이면도 군일, 군이면이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군면폐합으로 전군성을 조정하여 13개면으로 폐합하는데 때를 같이하여 옛 군일'군이면을 한 자리에 비로소 [해남]을 읍호로 하는 해남면을 탄생시켰다. 1955년 해남읍으로 승격하고, 1973년에는 마산면 보평리가 본 읍에 들어왔다. 2. 연혁비고 해남읍지성에 대한 옛일을 고할만한 기록에는 <동국여지승람>(1481년) 해남현 고적지의 옥산폐현의 내용이 고작이다. 거기에 보면 '옥산폐현은 옛날의 사라향이다'고 하였는데, 이[향]은 [소, 부곡]등과 더불어 통일신라에 비롯되는 특수행정구역에 대한 지방제도의 하나이다. 이 [향]의 성격에 대하여는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다. 그러나 이 사라향에서 보면, 마한제소국세력의 후예세력에 대한 신라의 특별한 통치방식에서 탄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사라,sara]가 삼한제소국의 국읍인 [성읍] 또는 [수성(읍)]을 뜻하는 당시의 국어인데서도 그러하지마는 그곳(옥산고현성)의 또 하나의 토성인 옥녀봉토성이 마한의 성이고 그 성의 패총에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유물이 폭넓게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남읍 연혁의 서두는 '옥녀봉토성에 웅리하였던 마한제소국 성읍(별성 /거장국) 세력의 일지성'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삼산면 연혁 참조). 6. 산업 토지면적 :전 6,984,626㎡ 답 11,217,866㎡ 임야 29,345,940㎡ 주산물: 쌀, 보리 특산물 : 마늘 딸기 8,문화유적 1. 복평 입석 (복평리 복평) 2. 복평리 유적 (복평리 복평) 3. 금강산 봉수지 (해리) 4. 금강산 성지 (해리) 5. 용정마을 산정 (용정리 용정) 6. 용정사(구, 오충사) (용정리 721) 7. 송용 지석석군 (용정리 송용) 8. 해촌사 (구, 오충사) (구교리) 9. 단군전 (서성리 서림) 무안박씨 열녀ㅇ (서성리 서림) 해남읍서성리선정비군 (서성리 서림) 해남읍 성지 (성내리) 수성일구 산신제 (수성리 수성1구) 해남향교 (수성리 5) 미산사(구, 충정사) (해리 577) 호천 지석묘 (고도리 호천) 고도리 마애불 (고도리) 신안리 석존입상 (신안리) 죽음사 (연동리 남송) 신안 지석묘군 (신안리 신안) 연동 지석묘군 (연동리 연동) 윤고산 고택 (연동리 82) 옥녀봉 토성지 (연동리) 옥녀봉 패총 (연동리 남송) 남연리 고분군 (연동리 남송) 민정기 가옥 (백야리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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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고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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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읍지성에 대한 옛일을 고할만한 기록에는 <동국여지승람>(1481년) 해남현 고적지의 옥산폐현의 내용이 고작이다. 거기에 보면 '옥산폐현은 옛날의 사라향이다'고 하였는데, 이[향]은 [소, 부곡]등과 더불어 통일신라에 비롯되는 특수행정구역에 대한 지방제도의 하나이다. 이 [향]의 성격에 대하여는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다. 그러나 이 사라향에서 보면, 마한제소국세력의 후예세력에 대한 신라의 특별한 통치방식에서 탄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사라,sara]가 삼한제소국의 국읍인 [성읍] 또는 [수성(읍)]을 뜻하는 당시의 국어인데서도 그러하지마는 그곳(옥산고현성)의 또 하나의 토성인 옥녀봉토성이 마한의 성이고 그 성의 패총에서 그 시대를 반영하는 유물이 폭넓게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남읍 연혁의 서두는 '옥녀봉토성에 웅리하였던 마한제소국 성읍(별성 /거장국) 세력의 일지성'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삼산면 연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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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자연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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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인 군청소재지로 동으로는 옥천면, 서로는 마산면, 남으로는 삼산면과 경계하고 있다. 동경 126˚ 36'45', 북위 34˚ 34'03'이다. 북으로는 만대산(해발 40m)과 금강산을 끼고 있고 북으로는 덕암산과 말매봉이 있는 평야지대로 문물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금강산의 계곡과 그 주변 일대에 널리 야생하고 있는 동상꽃은 매우 아름다워 군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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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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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면적 :전 6,984,626㎡ 답 11,217,866㎡ 임야 29,345,940㎡ 주산물: 쌀, 보리 특산물 : 마늘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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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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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평 입석 (복평리 복평) 2. 복평리 유적 (복평리 복평) 3. 금강산 봉수지 (해 리) 4. 금강산 성지 (해 리) 5. 용정마을 산정 (용정리 용정) 6. 용정사(구, 오충사) (용정리 721) 7. 송용 지석석군 (용정리 송용) 8. 해촌사(구, 오충사) (구 교 리) 9. 단군전 (서성리 서림) 10.무안박씨 열녀비 (서성리 서림) 11.해남읍서성리선정비군 (서성리 서림) 12.해남읍 성지 (성 내 리) 13.수성일구 산신제 (수성리 수성1구) 14.해남향교 (수 성 리 5) 15.미산사(구, 충정사) (해 리 577) 16.호천 지석묘 (고도리 호천) 17.고도리 마애불 (고 도 리) 18.신안리 석존입상 (신 안 리) 19.죽음사 (연동리 남송) 20.신안 지석묘군 (신안리 신안) 21.연동 지석묘군 (연동리 연동) 22.윤고산 고택 (연동리 82) 23.옥녀봉 토성지 (연 동 리) 24.옥녀봉 패총 (연동리 남송) 25.남연리 고분군 (연동리 남송) 26.민정기 가옥 (백야리 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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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조성과정을 보면 성립초기에는 여래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을 뜻했지만 대승 불교의 성립으로 교리가 발달함에 따라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라말에 이르러는 비로자나불의 전형적인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오히려 고려시대로 연결되는 작품성을 나타낸다. 보통 불상이 목조나 석불로 조각되는 것에 비해 철불이 조성되어 있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는 일로 더우기 해남의 불상중 은적사의 철불이 가장 앞선 시대의 불상이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크다할 수 있다. 불상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며, 해남 지역에 있는 불상은 돌로만든 석불이 4개, 금동으로 만든것이 2개, 청동으로 만든 것이 1개, 나무로 만든 목조불상이 4개,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이중 철을 재료로 한 철불이 은적사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해남의 불상은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여러형태의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남아 있는 불상의 모습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해남군의 문화유적, 국립목포대박물관/해남군,1986. 해남군사(海南郡史)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