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선생 이야기
중국에 처음 왔을때, 참 하루하루가 막막하더군요.
말은 하나도 안통하지, 음식은 입에 맞지 않고 친구도 없고...
그때 제 앞에 나타났던 사람이 바로 임보중 선생입니다. 06년~07년 두기 광동성 총대리를
역임하였고, 두기의 진해표 사장과 관계가 틀어져 그해부터 진승차창에 올인했던 임보중.
임보중 선생과 저는 대략 하루에 적어도 2~3시간은 차와 차업에 관한 토론을 했습니다.
제가 못알아 들으면 써서라도 설명을 해주었고, 토론이 길어지면 새벽 2~3시까지 이어지기도
예사였습니다. 그때 중국어가 비약적으로 늘었지요.
우리는 같은 돼지띠인데다 생일도 불과 7일밖에 차이나지 않습니다.
임선생이 7일 빠른데 자신이 형이라고 우깁니다만, 한국처럼 형-동생 개념이 없지만 우리 둘은
양보가 없습니다. 자신이 7일 빠르다며 형이라 하면 제가 딱 한마디 합니다.
"밥을 누가 더 많이 먹었는지 함 세보까?"
그럼 조용합니다. 으하하하하하하....
<임선생과 하이핑양. 하이핑 양은 임보중 선생이 길러낸 일꾼이기도 합니다>
임선생은 당시 막 중국에 온 제가 돈도 없고 사업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소장하던 차를 내어주며 일단 한국에 가서 판매하고 난 후에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돈을
얼마전에서야 비로소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은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며칠전에 제가 알게된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었는데 08년 당시 임선생도 매우 어려워
제게 차를 빌려 줄 당시에 자기 스스로도 비싼 이자의 고리대금을 썼다고 하더군요.
월 이자 5%의 고리 대금. 머리가 하얘지더군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눈물도 핑 돌고...
중국 사람중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라고 하실분들도 있을줄 압니다만,
중국인이고 한국인이고 간에 통하면 안되는게 없습니다. 인류보편적 감성 그것 말입니다.
임선생은 제가 돼지띠인데다 관상도 괜찮다고 했는데 결정적으로 저의 매력(?)에 푹 빠진
것은 제 아내인 석과불식이 임신한 몸으로 지우와 함께 방촌을 방문한 이후입니다.
"자네 아내의 관상이 너무나 좋다. 비로소 자네 복이 얼마나 큰 지 알겠다"
뭐...제가 좀 복이 많긴 합니다만..^^
임선생은 또한 제가 내놓는 아이디어를 매우 중시 여깁니다.
제가 내놓는 아이디어는 임선생을 통해 진승차창에 의해 거의 다 수용되었습니다.
작년에 처음 생산된 패왕청병, 올해 생산된 조춘특제도 제가 낸 아이디어였으며,
두 제품 모두 대성공적이었습니다.
통관 등으로 어려움을 겪자 임선생은 제게 "한국 차업은 관두고 중국서 나와 같이 하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차시장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요.
여튼 오늘 이야기를 임선생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제 가슴속에 남아있는 임선생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그 만큼 커서 그런가 봅니다. 임선생은 이미 방촌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거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사람에 대해 늘 진지합니다. 차에 관해 늘 탐구합니다. 차업의 미래를 항상 고민합니다.
그의 도량만큼 그가 다루는 차들은 이제 전 중국에서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대충 추산해도 사업규모가 08년 대비 100배 정도는 커졌지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로 나와 손님들을 맞이 하고 있으며 그를 찾는
손님들은 나날이 늘고, 큰 손들이 그에게 제품을 달라고 떼쓰고 있습니다.
회원여러분들께서 구매하신 조춘특제는 제가 판매했던 가격이면 중국에서는 이미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가격이 되었습니다. 제가 맛있다며 특별히 소개했던 진승차창의 제품들 역시
가격은 폭등하였고, 제품은 품귀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보이차만의 특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중에...임보중 선생과 제가 운남을 여행하며 고운 모차를 써서 여러분들께 友情 청병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위 사진은 그 우정청병에 박힐...내비라고나 할까요?
2. 진승차창 진승하 사장
진승차창의 동사장(한국의 그룹총수 격)인 진승하 사장은 올해로 쉰아홉입니다만,
그가 하는 말이나 사업방식은 열정과 패기로 가득합니다.
진사장, 임선생, 대장정 셋이 모였다 하면 새벽 다섯시는 예사입니다. 그만큼 세명이 죽이
잘 맞습니다.
"이화에 월백하면"이라고 운을 띄우면 "은한이 삼경인제"라며 답가가 흘러나옵니다.
제가 하자고 하면 진사장은 모두 좋다라며 박수 쳐 줍니다. 중간에서 임선생은 우리 두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커질까봐 말리기 바쁩니다만, 우리의 대화는 너무나 유쾌합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자하는 꿈이 있고, 그 꿈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며 그 열정을
뒷받침하는 추진력과 돌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광동성 심천 출신인 진사장은 열여섯에 집을 나와 길거리에서 노숙하게 됩니다.
집에 들어가봐야 그야말로 'X꾸녕 찢어지게' 가난했던지라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열여덟살부터 차업을 하게 되었는데 광동 심천 차 시장에서 철관음 사업을 통해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한때 그 시장에서 유통되는 철관음의 80%가 진사장의 브랜드였다고 합니다.
80년대에 최초로 무료시음을 통해 차를 판매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해서 번돈으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무엇일까요?
그가 노숙하던 곳에 가서 호텔을 지어버렸습니다. 그가 부동산 사업가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호텔업을 하면서부터인데 역설적이게도 호텔업은 실패하게 됩니다.
<임선생이 약 8g 정도로 차를 우리자 뭘 그리 많이 넣냐며 5g만 넣어도 충분하다며 나무랩니다. ㅋㅋ>
진사장은 제가 한국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한국에서 한때 경제분석을 했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지인들에게 자랑 스럽게 이야기하며 저의 아이디어를 중시 여겨줍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선비는 지기자사(知己者死) 아니겠습니까.
<대장정은 선배 차업인께서 하시는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기를 쓰고 들었습니다 ^^>
<때로는 농담도 하면서 말입니다. 화통한 분인지라 제 농담을 무척이나 잘 받아주시더군요>
진 사장과 함께한 3박 4일동안 평균적으로 새벽 5시까지 함께 이야기 하며
진승차창의 미래에 대해 논했습니다. 시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부터, 우리의 포지션은
무엇이며, 어떠한 상품 개발에 주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의 견해를 충분히 교환했으며
향후 진승차창은 그러한 장기적인 안목으로 상품을 발굴해 나갈 것입니다.
내년에 노반장 조춘특제는 2년전에 제가 구상했던 '天下(티엔샤)'청병으로 출시될 것이며
이무순료 대수차도 '복원창'이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게 됩니다.
이무 순료 대수차는 수량이 부족하여 딱 1톤만 생산할 수 있다고 못박더군요.
이무순료대수차가 다 합해봐야 얼마 안되는데 시장에 이무 대수로 판매되는 차는 200톤이
넘는다고 하는군요. 하기야 올해 맹해차창이 생산한 2010년 이무정산만 해도 생산량이
상당합니다.
이곳이 바로 진승차창 경쟁력의 원천입니다. 바로 진승하 사장의 개인 연구실입니다.
2008년 처음 차창을 만들고 난 후에는 이곳에서 하루 18시간 이상을 보이차 맛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하루 적어도 다섯시간은 이곳에서 연구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진사장이 직접 만든 노반장 원료의 봉황단총도 마셔봤고, 대홍포도 마셔보았으며
차고도 맛보았습니다. 차에 대한 경계가 확 무너졌더랬습니다. 특히 노반장으로 만든 봉황단총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부산 차박람회에 들고 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진 사장의 안내로 연구실로 들어갑니다.
진승차창에서 생산되는 모든 차들은 이곳에서 충분한 시음과 퇴고를 거쳐서 생산하게 됩니다.
진승제품에 관한한 모든 제품을 진사장이 직접 진두 지휘합니다.
철관음을 30년 이상 다뤘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차에 관해 아주 겸손합니다.
차업을 하면 할수록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하였습니다.
운남 맹해현에 자리잡은 진승차창에서 진 사장과 임선생 그리고 저 대장정은 밤을 세워가며
토론하면서 서로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 덕분에 돈을 더 잘 벌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보이차를 만들 수
있겠다는 희망때문이었습니다. 서로의 배짱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고 한번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사장과 임선생을 통해 확실히 느낀바가 한가지 있습니다.
차는 그 차를 다루는 사람의 그릇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직장생활 할때 서예동호회를 한적이 있는데 그때 저를 가르치셨던 퇴계 이황
선생의 종손이셨던 이모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와 일맥상통합니다.
"글씨를 아무리 잘쓴다 한들 그 사람의 도량을 넘어설 수는 없지요."
차업을 하면서 그리고 진승차창 진승하 창장과 임보중 선생을 만나 서로의 열정의 크기 만큼이나
그리고 배짱의 크기 만큼이나 더욱 더 넓은 차의 세계로 빠져 들 수 있을 것 같은 큰 기대감으로
인해 맑은차 대장정의 여정은 더욱 힘찰 듯 합니다.
11월 4일 개최되는 제5회 부산 국제 차박람회에 진승하 사장과 임보중 선생을 모시고 여러분께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승차창에서 생산된 모든 제품과 함께 말입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차는 그 차를 다루는 사람의 그릇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참 마음에 와닿는 글입니다...
그 열정과 배짱으로 좋은차 많이 소개해 주시고, 대성하시길 바랍니다...^^*
이시점에서 왜? 수호지가 생각나는지? 저랑 같은 느낌 공유되신분 있을꺼 같은데?? ^^
대장정님이 임선생 동생이 맞는거 같습니다,,
수호지의 무대 같은 임시안성에 7일 늦은 무송같은 남시안성??? ㅎㅎㅎㅎ
지금 생각하니 노반장촌에 낮잠자는 도야지가 아니라 호랭이가 한마리 있써서야 됬는데,,아쉽네ㅋㅋ
혹시 아나유~? 호랑이 맨손으로 잡는 무송같은 대장정을 보게 됬을찌도......^^
두분 우정에 플러스 진사장까지해서 천장지구유시진할때까지 변치 마시길~
모처럼 들와 보니..
열심히 차와 茶製를 연구하시는 모습이 새롭습니다..
요즘 지우와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는지라~
지우녀석....
가족사랑이 어찌나 대단한지...ㅎㅎㅎㅎㅎㅎㅎ
대장정님의 그 넘치는 에너지와 사업구상 원동력은..
든든한 가족이 첫번째 힘이 아닐까~~...
잠깐 생각이 듭니다^^...
부산에서 뵈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멀리서 건승을 기원드립니다.
저도 석과불식님 처음 봤을때 그런 생각을 햇었는데 생각에는 국경이 없는가 봅니다.
부산에서 꼭 한번 뵈야 될 것 같습니다. 이런기회 자주 오지 않는데...ㅋㅋㅋ 제가 부산해운대 사니까요
예전엔 못 읽었던 글들이 이제야
저눈에 들어옵니다
좀더 빨리 선생님을 알았더라면 보이차에 관한 저의 차생활도 많이 달랐을텐데 하면서 글로써나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