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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사모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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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는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
이곳은 명당 터라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아늑하다.
내원사는 대포초등학교(현재 폐교)에서 2. 6km 거리.
내원사 반야교는 내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가을 단풍이 유명.
반야교 다리 밑 큰 청석 2개는 신비로운 기암괴석
반야교 지나 경내 대웅전을 중심으로 심우당, 비로전,
산신각, 칠성각, 요사채등이 있으며 절 규모는 작은 편.
내원사는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
내원사 문화재로는 보물 제 1113호 삼층석탑
보물 제 1021호로 지정된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신라 말 무염(801∼888)이 창건한 덕산사(德山寺)
사찰 이름이 내원사로 바뀌었던 연혁을 알 수 없다.
1959년 3월 홍원경 주지가 중건후 꾸준히 불사.
비로전과 산신각, 심검당 요사채
규모는 다른 사찰에 비해서 작은 편.
보물 석조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이 있다.
비로전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본래 이 절에서
30리 떨어진 보선암 폐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내원사를 복원한 후 비로전으로 옮겨다 놓은 것.
불상 높이 1. 4m, 폭 1m, 대좌의 높이는 0. 63m.
석불 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에 적힌 명문(銘文)
776년(통일 신라 혜공왕 2)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 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에 적힌 명문
(銘文,이두문 136자, 음각) 해석에 의하면, 신라시대
한 화랑이 요절하자 그 부모가 불상을 제작하여 모신 것
비로자나불상으로서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유물
1980년 경남 문화재 제76호, 1990년 보물 제1021호로 승격.
특히 사리함은 1986년 10 15일 국보 제 233호로 지정.
영태 이년 명납석 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라는 명칭
현재, 부산광역시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원사 대웅전 앞 보물 제1113호 내원사 삼층석탑
1950년 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옥개석이 부서지고
상륜부가 사라진 것을 1961년 홍진식이 복원했다.
높이 4.54m로 신라시대 유물로 추정.
내원사 보물 제 1021호., 비로자니불.
얼핏 보면 하찮아 보이는 ..비로자니불.
이 일대가 화랑의 심신수련장이었음을 알려준다.
여름철에도 피서객이 들어오기 어려운 깊숙한 산속.
'하필, 깊은 산속 개울가가 화랑의 심신수련장일까?'
내원이란 신라시대 미륵신앙에서 유래된듯.
석가모니가 재림을 기다리며 머문다는 도솔천.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나뉜다.
내원은 석가모니가 머물고 있는 내원궁(內院宮)
외원(外院)은 천인(天人)들이 五欲을 즐기는 곳.
도솔천은 민생들이 염원하는 하늘나라의 이상향.
'즉, 내원골은 하늘나라 이상향 도솔천인 셈.'
..................도솔천....................
욕계(欲界) 6천(六天) 가운데 제 4 천(第四天).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
그 정상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다는 도솔천
'유순은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고대 인도에서 거리의 측정 단위로 사용했다.
도솔천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
석가모니가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리는 곳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외원에서는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
욕계의 제4천에 불과한 도솔천은 이상적인 정토
도솔천은 '구원의 여신' 미륵보살 환생설과 결부
7보(七寶)와 광명(光明) 등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십선(十善)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설하는 음악
천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보리심(菩提心)이 충만.
도솔천은 인간의 사후세계 극락의 이상향
끊임없이 정진하여 덕을 많이 쌓은 사람,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사람,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
널리 복업(福業)을 쌓은 사람,
계율을 지키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은 사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보살을 염불하는 사람,
죄를 범하고 미륵보살 앞에 참회를 하는 사람,
미륵보살 형상을 만들어 꽃 향 등으로 장식.
미륵보살에게 경배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 등
이상과 같은 사람들이 사후에 갈 수 있다는 도솔천.
이상적인 불국세계로 민중에게 크게 부각된 도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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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는 항상 정적이 감돌고 인적이 드문 사찰.
대웅전과 비로자나 불상이 모셔진 비로전을 비릇
다른 건물들도 문이 닫혀 있는 날이 더 많은 사찰.
사찰 정원은 동백 목련화 등이 심어져 있고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
사찰 식구로는 주지스님과 몇 분 스님이 전부.
오직 들리는 건 불경과 목탁소리,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
꽃봉오리 터지는 자연의 합창소리 뿐.
비로자니불.
..................내원사 비로자니불.......................
현재 내원사에 있는 비로자니불은 옛 삼장사 터에 있던 것.
내원사 북쪽 900m 고지에 있던 것을 1953년 내원사로 이전.
이전할 때 무게를 줄이려 불신(佛身)의 뒷면을 깎아내었다.
그 비로자니불 대좌 및 광배석은
아직도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결가부좌 얼굴이 넓고 이목구비가 자연스럽고
위엄과 원만을 갖추었고 옷주름 곡선까지 양각.
제작 연대인 영태 2년은 766년(신라 혜공왕 2)
명문 가운데 “석남암수관음암중(石南巖藪觀音巖中)”
지금도 산청군 내에 석남리(石南里) 석남마을이 있다.
불상 명칭 앞의 ‘석남암수’는 원래 있었던 곳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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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6대 혜공왕(756년 ~ 780년)
통일신라의 멸망 징조가 보이던 시기의 혜공왕
각종 천재지변에 이어 반란군에게 살해된 혜공왕
혜공왕은 재위 10년(774) 무렵에 직접 통치를 시작.
어머니 섭정에서 벗어난 혜공왕은 여성적 취향.
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여자놀이를 즐겼다.
776년은 혜공왕이 동성애 도락에 흠뻑 빠졌던 시기.
신라 화랑의 남색 문화에서 유래된 남사당.
우리나라 역사상 첫번째 동성애자는 혜공왕.
평소, 여자 옷을 입고 치장을 즐겼다는 혜공왕.
그러나, 동성애로 비난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고려왕조 제 7 대 목종왕도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
화랑 집단에서도 동성애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진듯.
'혜공왕이 여자 옷을 즐겨입었다는 역사기록.'
한반도 고대국가 왕들은 치마 폭에 쌓여 성장.
혜공왕도 궁궐 여인 틈새에서 성장한 어린 시절.
궁녀와 내시에게 애워싸여 사는 궁궐생활 환경 탓.
'그당시 작품으로 추정되는 비로자니불.'
'비로자니불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금강산 비로(毘盧)봉은.. 밝을 비. 밥그릇 로
치악산 비로(飛蘆)봉은..날 비(飛), 갈대 로(蘆)
묘향산 毘盧봉. 오대산 비로봉. 소백산 비로봉
'비로'는 불교에서 '높다'라는 뜻으로서 쓰인다.
'비로자니'는 모든 곳에 두루 비치는 부처 몸 빛.
원래, 비로자니불은 선덕여왕 당시부터 성행했다.
그후 신라 최후의 미륵보살로 일컬어졌던 진성여왕
진성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어 두번째 신라왕으로 등극.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결사대를 이끌어 낸 진성여왕
650년 당나라 황제에게 태평송(太平頌)을 바친 여왕.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신라 혼란기를 극복한 여왕이다.
같은 해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고
김춘추 둘째아들 인문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김유신을 중용 삼국통일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랑에 깊이 빠져 왕위까지 버린 여왕이다.
그 애틋한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해인사 비로자나불
가야산 칠불봉 해인사 법보전 불상, 비로자나불
개금(금칠)하려다 발견된 그 복장(불상뱃속) 기록
그 기록에 의해 찾아낸, 해인사 쌍둥이 비로자나불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 두 연인간 사랑의 징표.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진성여왕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연인으로 기억되는 두 사람.
여왕이 즉위 2년 위홍이 죽자
위홍을 혜성대왕으로 추존(追尊)
가야산 해인사에 그 원당(願堂)을 짓고
재위 9년 하야, 북궁(北宮)으로 들어 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 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여왕을 평하기를
도처에서 반란이 잇달아 나라가 기우는데
불륜에 빠진 무능하고 연약한 왕으로 기록
그 비로자나불을 모신 해인사 보경당.
이조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며
서까래에서 문서 뭉치가 나왔는데
이를 보고 조위(曺偉)가 남긴 기록.
해인사를 북궁(北宮)이라 했고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여왕
운명 후 위홍과 합장을 원했기 때문
사랑하는 님은 이미 저승으로 떠나고
왕위에서 물러나 해인사로 향하던 여왕.
천갈래 만갈래 가슴 찢어질듯 아팠을 사랑.
원화 출신 진성여왕은 재위시 화랑들과 도락.
궁 침소로 화랑 미소년들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홍의 빈자리를 메꿀 수 없었던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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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보전 불상(비로자나불) 뱃속의 기록
한 정승 연인의 성불을 기원하면서 만든 불상.
기록 속 쌍동이 불상 반쪽을 찾아낸 곳도 해인사.
심지어 콧방울까지 똑같은 쌍둥이 비로자나불
성불해서라도 사랑을 이으려던 신라시대 로맨스
진성여왕과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그 주인공인듯.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신라 진성여왕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
'유모의 남편인' 각간 위홍을 사랑했던 그녀.
그녀는 위홍이 사는 소량리를 늘 드나들었고
위홍도 여왕이 된 그녀의 규방까지 드나들었다.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한지 2년 만에 죽은 위홍.
그녀는 죽은 연인 위홍을 대왕으로 추존(追尊)
해인사에 그의 원당을 짓고 9년만에 왕위를 하야.
북궁(北宮)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는 삼국사기 기록.
여왕은 위홍이 죽은 후 미소년들을 궁에 끌어들여
그 허전함을 달래려 했지만 허전함을 채울 길 없어
위홍과 같이 묻히려 왕관을 벗었을 만큼 짙은 사랑.
이조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며 서까래에서 나온 문서들
이를 읽고 조위(曺偉)가 남긴 기록에 의해 전해오는 로멘스.
신라 말 해인사를 북궁 해인수(北宮海印?)라 했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것은 죽어서
위홍과 같이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라는 기록 내용.
쌍둥이 불상을 만든 시기는 882년 위홍이 죽기 전
진덕여왕이 즉위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너와 나는 하나' 불교 교리 & 한 쌍의 비로자니불.
'진리의 근본 비로자나불은 청정 법신이라 불리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와 더불어 삼신불이라고 한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
대자연 속에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는 삶.
생전에 자연에게 신세진 것을 보답하는 마음이 보시.
비로자니불은 광명을 의미
햇빛은 모든 곳을 비추지만
그늘에는 미치지 못하는 햇빛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을 뜻하고
비로전은 비로자니불을 모신 법당.
비로봉은 그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통일신라 때 산 정상을 일컫는 고유명사.
비로자니불은 문수보살의 상징.
선덕여왕때 자장법사가 최초 유입
자장 율사(慈藏 律師)
590∼658 신라 고승. 진골 출신으로 무림의 아들.
무림은 신라 17 관등 中 제3위 소판(蘇判)의 관직
무림은 불교 귀의후 아들을 낳으면 시주할 것을 축원
어느날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 탄신일인 4월 초파일에 자장율사를 낳은 어머니.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윈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쳤다.
그때 신라 선덕여왕이 그를 재상으로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응하지 않으면 목을 베라는 엄한 왕명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말을 전해들은 선덕여왕은 그의 출가를 허락.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 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제자 10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문수보살이 머물러있다는 청량산 문수보살상에 기도.
7일 기도 후 꿈에 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 수여.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경.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 태종을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한다.
어느날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눈을 뜨게 된 일
그 소문 이후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천명
그가 당에서 활동할 때 선덕여왕은 자장의 귀국을 요청
귀국길에 신라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 화개(華蓋) 등을 고루 마련
7년만에 귀국후 신라불교 국민교화와 불교교단 기강확립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조정에서 대국통 직위를 주어 전국 승니(僧尼)들을 관장
한편,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그 문인(門人)들이
그 여인들 숫자만큼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했다.
하여,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고 이로 인해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 본다.
그는 신라야말로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은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저서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1 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갈磨私記)>1 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1권,
<관행법(觀行法)>1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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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나라 양제(煬帝, 569∼618년)는 세차례 고구려 침공
영양왕 23년(612) 2월, 24년 3월, 25년 7월 번번이 실패
그 결과 수십만 대군을 잃고 헤일 수 없는 전쟁물자를 허비
이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 感)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대란(大亂)에 접어든다.
그러자, 수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을 찾아간다.
돌궐은 원래 고구려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나라.
수나라에 속한 돌궐은 고구려를 침공할 뜻이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형편이었다.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자
돌궐은 오히려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기병 수십만을 대기.
이 사실을의성공주가 알려줘 겨우 화를 모면하게 된 수 양제.
양제는 돌궐에게 포위되어 한달 남짓 공포에 떨어야 했는데,
맹방인 돌궐의 표변으로 권세의 무상함을 통감하게 된 수 양제.
차마,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강도(남경)로 대피한다.
이런 틈에 우문술이 반란을 일으키니, 양제는 잡혀 죽고 만다.
불과 6년전 고구려를 침공했던 그는 50세 나이에 처참한 최후.
장안을 장악한 당나라 이연(566∼635년)은 반란 진압후 수를 계승
당 고조의 제2자 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 도판 1).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인 태자와 아우 원길(元吉)을 살해
부왕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고 626년 8월에 당 태종으로 즉위
홍문관을 설치하여 문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중앙 집권력 행사
당 태종은 장성 밖 위협세력인 돌궐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이해 8월 현장(玄, 602∼664년)법사가 서역 여행
이것은 당 태종의 돌궐 정벌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닌듯 하다.
동돌궐 정복에 나선 이정은 630년 2월 힐리 칸 군대를 격파
그에게 의탁하던 수 양제 황후와 양제의 손자를 장안으로 호송
이정은 돌궐군 1만명의 목을 베고, 10만 포로를 잡는 공을 세운다.
이어, 힐리 칸의 모후 수나라 종실 의성공주를 잡아죽이고
힐리 칸마저 사로잡아 돌아와 당 태종의 정통성을 확립한다.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삼국간 은원 관계가 재정립
고구려와 백제는 고국원왕과 개로왕이 살해되며 원수가 되었다.
이후 신라가 백제 성왕(523∼554년)을 배신, 전쟁에서 그를 살해
신라 역시 백제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즉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적
신라는 왜와 동맹해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를 공동 견제
백제 무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적극 협조할듯 수 양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실제로는 수나라의 군사 기밀을 탐지하여
고구려에 은밀히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접경지대에 파견하여
침공하는 척 했을뿐 고구려 남쪽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은 진흥왕이 확장해 놓았다가
자신이 빼앗긴 북쪽 영토를 찾을 좋은 기회
고구려가 수 대군과 사생 결단을 벌이는 동안
배후를 침공하여 500 리 고구려 영토를 잠식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 3차 침략을 물리친후
삼국 간 친소 관계는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고립무원에 빠졌고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
신라로서는 양국의 침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에다 믿었던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국력을 소모
신라는 의지할 구석이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다.
신라는 당이 중국 천하를 장악해 가는 과정을 보고
진평왕 43년(621)에 사신을 보내 맹방이 될 것을 다짐
이에 감격한 당 고조는 그림 병풍 및 비단 300필로 화답.
그러나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해양왕국 백제
무왕 24년(624)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을 요청.
당 고조는 무왕을 대방군왕백 제왕으로 책봉하고,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고구려 영류왕으로 책봉
3월에는 진평왕을 상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
고구려에는 형부상서 같은 대신급을 사신으로 특파.
이때 고조는 도교 경전을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전파.
당 태종은 수 양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을
성공해 중국 황제의 위엄을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대권을 잡자 삼국을 달래 서로 화친을 종용
신라와 백제가 당과의 교통을 고구려가 방해한다고 호소
이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라만, 실상은 고구려 고립 외교 전략
당 태종이 우리나라가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알고
대학자를 순회대사로 삼아 삼국을 돌며 화친을 도모
신라 진평왕이 위급을 고하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자
무왕도 조카 복신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동정을 살핀다.
이때 당 태종은 무왕에게도 신라와 화친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는 중에 당 태종은 동돌궐을 정벌하게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당 태종의 야망을 눈치채고 칸의 생포를 축하
고구려의 지도를 전해주는 등 외교적인 역공세를 취하여
당에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으며 국경에 성을 축조
이런 와중에 신라 진평왕이 54년의 긴 통치 기간을 끝내고
근 70세가 되자 장녀 선덕여왕(580년경∼647년)이 등극한다.
정반왕, 진평왕이 운명하자 미래의 부처님 미륵 화신이 등장
그래서 '미륵의 화신' 덕만공주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
진흥왕이 오래 꿈꾼 미륵세계가 신라에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내 반(反)진골계 보수귀족 집단이 불만
그러나, 백제 고구려 연합 공세에 하루도 편할 날 없던 신라
민심을 결속시키는 최후 수단으로 선덕여왕 체제를 받아들인다.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며 성장한 화랑 1세대 김유신
이미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맞설 세력이 없었다.
또한 진평왕의 사촌아우이며 둘째 공주 부마인 용수(龍樹)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선덕여왕의 등극을 적극 지지
진흥왕의 혈족인 진골 귀족이 미륵세계 구현에 성공하게 된다.
용수의 긴 안목이 진골 귀족의 기반을 안정시켜
장차 그 아들 춘추가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등극
통일신라 시조격으로 추앙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선덕여왕이 미륵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은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의자(義慈, 600∼661년경)를 태자로 책봉하여
무왕은 백제 미륵의 법통을 확고히 다져 놓는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선덕여왕을 초상으로
최고 걸작의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미륵이 출현한 것을 증명
국제적인 공인을 얻기 위해 당나라에 여왕의 책봉을 청하였고
다음해(인평 2년)에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란 책봉을 받아낸다.
그리고 636 자장율사를 당나라로 보내
신라 미륵 출현을 공식으로 인정 받는다.
진흥왕과 그 왕비가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말고는
진골이 승려가 된 예는 없어 불교수용을 반대한 박씨
김씨 왕들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데 결정적인 역할
아마 이들은 김씨 왕족의 내외척 집안 출신이었을듯.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던 화랑이었던듯.
그래서 선종이란 이름 밑에 랑(郞)자가 붙은 것인데,
뒷사람들이 그대로 선종랑이라 잘못 기록해 놓은 듯.
자장의 아버지가 선덕과 진덕여왕대 화백회의를 주도한 원로
6명 중 중 네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무림(武林)공
신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등극한 이래 분황사 영묘사 건립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삼았고 636년 3월 황룡사에서 백고좌
승려 100인의 출가를 허락했고 미륵불국토로서 민심을 합일
아무튼 선덕여왕은 용수로 하여금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고
자장을 당으로 보내 자신이 미륵임을 확인시켜 돌아오게 한다.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돌아온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톨, 부처님이 입던 붉은 비단 가사 한 벌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한 등분은 황룡사에 있고
한 등분은 태화사탑에 있고
나머지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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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구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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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은 자장율사를 궁으로 불러 비단가사 한 벌과
비단 500필을 내려주고 태자 고종도 비단 200필을 선사
자장은 대장경 한 질과 각종 불구와 불상을 얻어 귀국한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귀국한 자장은
황룡사 9층탑(도판 5) 건립을 선덕여왕에게 제의.
자장은 오대산 문수보살에게 받은 사리 100톨을 삼분
3분의 1을 황룡사 9층탑에 넣었다는‘삼국유사’기록.
이는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이 바탕
자장이 신라로 돌아오던 해인 선덕여왕 12년(643)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 신라를 멸망시킬 것이란 위기설
그래서 신라는 자장을 불러들였고, 당 태종은 이를 이용해
자장에게 물심양면으로 희망을 주어 신라에 돌려보낸 것이다.
이에 자장은 귀국하자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이라 공표.
고구려가 당나라 침공에 시달리는 사이 조탑불사를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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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9층 석탑을 만들어 일층은 일본을 상징하고
이층은 중국을 상징, 삼층은 오나라와 월나라를 상징
사층은 라 오층은 응유 육층은 말갈 칠층은 거란을 상징
팔층은 여진족 구층은 예맥을 조각하고 탑 사면에는 해태
바다로 침범하는 외세를 막고, 사자 상은 육지 적을 방어.
국론을 통일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만들게 했던 자장법사.
탑 완성후 매년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국태민안을 기원.
백고좌는 100 불상 100 보살상 100 법사를 모신 불교 행사
국가의 중요한 인물이 대부분 참석하는 호국사상 고취 행사
'황룡사와 9층 석탑에 총 국력을 기울인 신라.'
법회를 밤낮으로 개최하였다하여 야단(夜壇)법석(法席)
야외(野外)에서 개최하였다하여 야단(野壇)법석이라 한다
<야단법석> 말의 어원은 통일신라 백고좌 불교집회에서 유래.
이러한 국론 통일과 백성들 노력동원으로
어린 아이와 노약자들만이 집에 남게 되어
어린 아이들이 울면 달랜 자장 자장이 자장가.
아가에게 불심과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자장가.
미래의 주인 아가에게도 호국불교를 펼친 자장법사.
자장가는 선덕여왕 때 자장법사의 호국불교에서 유래.
"자장자장 자는고나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은자동이 금자동이
수명장수 부귀동이
은을주면 너를 살까
금을주면 너를살까
나라에는 충신동이
부모에게 효자동이."
선덕여왕
노 천명(盧 天命) 詩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