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바이오코드를 개발하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최전선에 나가 온몸으로 울부짖다 간 사람들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혹한, 태풍, 대기근, 지진, 화산, 맹수 등에 맞서 싸운 저 태고의 전사들로부터 오늘날 머나먼 나라에 나가 그 나라의 언어와 풍속을 배우며 수출시장을 개척하거나 거기 교두보를 마련하는 동포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험심과 투쟁심에 감사한다.
누군가는 휴전선에서 수류탄과 실탄을 들고 지난 밤을 새웠을 것이며, 누군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백령도 해안에서 밤을 새워 바다를 감시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 식탁에 오를 물고기를 잡기 위해 집어등을 켠 채 망망대해를 흘러갔을 것이며, 내가 볼 뉴스를 마련하기 위해 외국 땅에서 낯선 사람들 만났을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읽을 책을 쓰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장차 내가 앓을지도 모르는 신종 플루 백신 개발에 이용되기 위해를 끙끙 앓았을 것이며,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레바논에 있는 우리 대사관 직원들이 전화 속에서 우리 이익을 위해 고생했을 것이다. 어젯밤에도 누군가는 자동차를 타고가다 죽어 자동차 안전기술 개발에 한몫을 하거나 교통체계 개선에 한몫했을 것이며, 누군가 돈이 궁핍해서 죽거나 처지를 비관해서 죽거나 몸을 던지거나 목을 졸랐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제정책이 수정되거나 보완되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뭔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혹시 잠못 이루고 일어나거든 아무 때고 보라고 텔레비전 방송을 밤새 송출하고, 내가 혹 가족이 그리워 전화할까봐 밤새 통신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었을 것이며, 혹시 자다 일어나 전등을 켤까봐 발전소 직원들은 밤새워 지켰을 것이다. 경비원은 내가 혹 부를까봐 옷을 입은 채 경비실에서 졸았을 것이며, 112 전화를 누를까봐 경찰들이 대기하고, 119를 누를까봐 소방서에서도 누군가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카드를 쳤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최전선에 내보내 놓고 편안하게 안락하게 살고 있으니, 어떻게 나 잘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제 하루 종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란 책을 읽고 생각해 보았다. 두뇌에 종양이 생기거나 알콜 중독으로 신경세포 일부가 죽은 사람들에 관한 임상 보고인데, 이런 자료들이 모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들, 건망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 존재에 대해 이보다 더 처절하게 고민하는 현장이 따로 있을 수 없다. 후두엽의 시각신경세포로 가는 선이 끊어지면서 갑자기 시력을 잃고, 색깔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는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어제까지도 색깔의 세계 속에 살던 사람이 오늘부터 그 세계를 깡그리 잊은 채 살아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가. 어제까지 살을 맞대며 사랑을 속삭이던 아내를 보고 누군지 몰라 허둥대며, 아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절이나 교회에서 영혼이니 구원이니 말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소리인지, 의사가 아니면서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자칭 도인들이란 얼마나 허섭한 쓰레기들인지 알 수 있다.
1945년에 기억이 정지된 한 노인의 이야기는 마치 귀신을 보는 듯 끔찍하다. 모든 의식구조는 살아 있지만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신경세포 기능이 마비되어 단 몇 초도 기억하지 못한다. 얘기를 하는 중에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었는지 잊고, 얘기하다 말고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이 사람에게 인생이란 무슨 의미이며, 인간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노인이 된 형을 보고, "형, 어째 하룻새에 늙어버렸어?" 이렇게 수십년을 건너뛰어 말한다면 이를 어쩐단 말인가.
왼쪽에 있는 사물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다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다리를 남의 다리라고 생각하여 떼어버리려고 애쓰는 사람...
1800년대부터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런 사례들을 꾸준히 임상기록해 왔고, 같은 증세를 가진 환자가 생기면 이전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상을 기록했다. 이것이 MRI, PET 등 두뇌영상장치 개발과 함께 하나둘 원인이 밝혀지고, 인간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주고 있다. 당연히 치료술도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동의보감>이 무슨 만고불변의 의서나 되는 양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동의보감>에 얼마나 많은 황당한 치료법이 실려 있으며, 엉터리 이론이 있다는 걸 알면 사람들은 기절하고도 남겠지만, 아무도 알려 하지 않고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태아의 성별을 바꾸는 비법까지 있으며, 이에 버금가는 황당한 치료법이 수없이 많건만 <동의보감>은 지금도 한의사들의 고전이요, 바이블이다.
우리들이 안락한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저 먼 어딘가에서는, 거기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최전선이겠지만 온갖 모험을 하고, 시도를 하고, 온몸을 바쳐 실험하고, 밤잠 안자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미신에 빠져 헛소리를 지껄이고, 저 잘난 줄만 알고 고치를 지어 희희낙락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생을 바쳐 노력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수없는 희생을 바탕으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여기까지 왔다. 최전선에서 희생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인류는 없을 것이다. 저 수많은 혁명가들, 군인들, 모험가들, 과학자들, 너무 신념에 차 온몸으로 저항하다 사형당한 사람들, 각종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이 굶어죽거나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 있어 제도 보완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 선구적으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모든 게 바로잡힌다. 너무 많은 사례가 있다.
오늘 이 순간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희생의 과실을 대신 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살아남아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아 보여도 죽은 이들이 더 많고, 임진왜란, 육이오전쟁을 극복했다지만 그 전쟁에서 죽은 이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안락한 것이다.
우리가 천연두니 콜레라니 장티푸스니 하는 지독한 전염병을 극복한 것도 그 질병들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백신 기술은 개발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의 행복이 어디서 마련된 것인지 잊어서는 안된다. 결코 오만해서는 안된다. 늘 감사해도 모자란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앞서 말한 두뇌질환자들 덕분에 모두 건강한 정신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100년 안에 인류는 모두가 다 아인쉬타인, 뉴턴이 되는 신인류 시대를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 희생하고 있는 정신질환자들이 병원마다 가득 차 있고, 탐구심 강한 의사들은 그 원인을 밝히려 애를 쓰고, 치료법 개발을 위해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 지하철 역사에 누워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 암이나 에이즈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이들, 너무 가난하여 아이들을 버리는 이들, 돈 때문에 성격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와 이로 인해 상처받는 자녀들, 3대 세습 체제에 사로잡힌 북녘동포들, 무지 속에 방치되는 어린이들... 이 모든 사람들이 실은 우리들을 위해 최전선에서 대신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왕을 대신해 음식을 먼저 먹어보고 독이 있나 없나 알아보는 기미상궁들처럼 저 사람들이 우리들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 몸을 던져 막고 있는 것이다.
겸허하고 겸허할 일이다.
- 나체로 400미터 고압송전탑에 올라가 자살하려는 정신질환자와
이 여성을 살리기 위해 역시 고압송전탑에 오른 소방대원들.
정신질환자를 가족으로 두어보지 않은 사람은 위 글의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 초기 정신질환자의 뇌수술 장면. 수술하다 죽더라도 수술을 해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
- 중증 정신질환자에게 힙히는 구속복. 아들딸이, 아내나 남편이 이런 옷을 입고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면
그러고도 우리는 이웃에 대해, 인간에 대해 모질게 굴 수 있을까.
2010년 경기도지사를 따라 모 정신질환자 수용소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산골짜기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누구는 창밖을 바라보고,
벽을 응시하고, 눈 감고 망연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잘 생긴 여성도 있고, 반듯하게 생긴 청년도 있었다.
그들은 10년이고 20년이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있을 것이다.
때때로 실험약을 먹을 것이고, 새로운 치료법이 생기면 적용해볼 것이다.
뭘 하라는 건 아니다. 단지 잊지 말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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