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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초창기 장로교 선교부의 사역(The Work of The Presbyterian Mission)
개척기 - 위대한 시작(1840 – 1860)
중국으로 가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들중의 한 사람인 오르(Rev.Robert W. Orr)목사는 잠시 싱가폴에 머물면서 1838년 가을에 태국을 방문하였다. 다음해에 그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태국에 있는 중국인들과 태국인들을 위해서 방콕에 선교부를 오픈 하기로 결정하였다. 부웰(Rev. William P. Buell) 목사 부부가 이 새로운 선교부를 책임지기 위해서 처음으로 파송되었고 태국인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임명되었으며 방콕에 도착한 것은 1840년 8월이었다.
회중교회 선교부는 이미 9년전에 설립되었고 침례교 선교부도 7년전에 설립되어서 양 선교단체는 잘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방콕에는 두개의 선교단체에 속한 24명의 어른 선교사들이 있었다.
각 선교단체는 자주성을 가진 분리된 단체였으며 독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세 단체간의 끈끈한유대와 연합을 이룬 것도 사실이었다. ABCFM 선교회 소속이었던 로빈슨(Rev.C.Robinson) 과 죤슨(Rev.Johnson) 목사 부부가 1834년에 태국에 도착한 이후에 그들은 영어로 주말에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장소로 그들의 집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였다.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선교사는 자신이 손수 예배를 인도하였고 이미 출간된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읽었다. 1837년이나 혹은 1838년부터는 그들은 자신의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부웰(Rev. William P. Buell) 목사 부부가 도착했을 때 비록 자연스레 회중교회 선교회에 속한 멤버들과 가까워졌다고 해도 그들은 다른 두 선교단체의 선교사들과 행복한 교제에 빠져들었다. 부웰 부부는 ABCFM 선교사들과 강의 서편에 왕궁 바로 아래에서 프라 끌랑이 그들을 위해서 지어준 집중의 하나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것을 입증할만한 기록은 없다.
한 의사와 그의 아내는 1841년 이 지역의 선교를 위해 임명되었고 또 다른 목사와 그의 아내는 1843년에 중국 사역을 위해 파송되어 싱가폴에 도착하여 리서치하며 중국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태국에 가는 것을 중국에 들어가기 위한 한 방편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들은 태국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직접 중국으로 가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부웰은 자신이 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태국인들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이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있는 성경책, 다른 책들과 전도지를 설명할 수 있도록 충분히 태국어를 공부를 하였다. 그는 그의 사역에 격려를 받으며 열심을 다했지만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중풍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1844년에 태국에서는 전에 보지 못했던 증기선의 출현으로 방콕에 있던 많은 태국인들과 중국인들은 무척 놀랐다. 당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서 방콕에 3년 반동안 머물렀던 부웰 선교사 부부가 싱가폴에 가는 승객으로서 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태국에서의 항구적인 장로교 선교사역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스테판 마톤(Rev. Stephen Mattoon) 목사 부부와 사무엘 하우스(Samuel R. House) 등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1846년 7월에 그라프톤이라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기위해 뉴욕을 출발하여 5개월 간의 항해 크리스마스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방콕으로 직접 가는 배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싱가폴로 가야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왕실에 속한 원주민 무역선을 발견하였는데 유럽인이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배의 자리를 24일간의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 끝에
실제적으로 장로교 선교부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이들 선교사 세 사람이 방콕에 도착하면서 부터였다. (부웰 선교사 부부의 사역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47년 당시의 상황과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우고자 했던 토대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요약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당시 왕이었던 프라 낭 클라오는 27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의 통치는 반란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버마에서의 그들의 이익 때문에 그들은 영국인들의 침입을 두려워했고 그들은 1824년에 칸부리에 원정대를 보냈다. 같은 해에 찬타부리에 있는 중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강 상류에 있는 중국인들 중에서 걸프만으로 즉, 나콴 차이씨에서는 1842년과 1847년에, 랑수웬에서는 1845년에, 청싸오에서는 1848년에 폭동이 일어났다. 라오스에서는 1826년에 위엥 찬 왕자에 의해 반란이 주도되었으며 루앙 프라방에서는 1835년에, 후에 치앙룽에서는 1846년에 반란이 일어났다. 캄보디아와 원나라에서는 1833년에 심각한 반란이 조직되었는데 양국에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을 끼첬다. 사이부리의 말레이 족들은 1830년에 폭동을 일으켰으며, 1838년에는 말레이 해적이 반란을 일으켜 태국 왕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28년의 통치 기간 동안 11번 이상의 명백한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계속적인 정세의 불안과 태국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1824년에 영국은 버마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더우기 ‘한 외국왕이 태국을 정복할 것’이라는 예언이 태국 안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왕의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마지못해 1822년과 1826년에는 영국과, 1833년에는 미국과 상업조약을 맺었는데 이는 다분히 위협하는 서구 열강들로부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반역과 음모로 얼룩진 23년은 왕의 성격을 온순하게 하지도 못했고,왕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게도 못했다. 이때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진정으로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선한 일만 했다. 그런데 왜 ??? 선교사들은 공덕을 쌓는 일 즉 진료소 등을 통해 자선을 베풀고 화장터에서 책을 배포하는 일을 했는데 이것은 이런 시대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하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가치있는 일을 함에 있어서 그들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또 계속해서 문서를 배포한 것은 조금은 이상하고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의심스럽게 보이는 일은 격려하기보다는 차라리 낙담하게 하는 것이 좋을 뻔 하였다.
침례교와 해외선교부의 인쇄소는 잘 준비되어 있어서 많은 문서들을 출판하였다. 죤스, 로빈슨과 브레들리는 특별히 태국어로 많은 번역을 하였으며 저술도 많이 하였다. 침례교의 침례신앙을 강조한 신약성경의 침례교 역본과 신약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회중교회 역본이 인쇄되었으며 또한 많은 전도지와 브레들리에 의한 ‘예수님의 생애’와 구약시대의 요셉과 모세 등과 같이 뛰어난 인물들에 대해 기록한 ‘구약역사 시리즈’ 등도 인쇄되었다.
외국 의술이 이때 소개되었으며 브레들리의 의술은 새로운 의사를 세우는데 있어 견고한 토대가 되었다.
다른 두 선교부는 이때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 침례교 선교부는 중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태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차출해서 태국에는 선교사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나 이후로 더 이상 인원이 보충되지는 않았다. 회중교회 선교부(ABCFM)도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초기의 선교부들은 그들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고 건강하게 발전하였다. 장로교 선교부도 이런 연합된 기독교 공동체 안에 접목되었다. 접목된 새로운 가지는 그들로부터 힘과 활력을 빨아들이고 점점 그 나무 가운데서 가장 번창하는 가지가 되었다. 처음 10년이 지난 후쯤에 태국에서의 대부분의 선교사역에 대한 이야기는 장로교 가지라는 용어에 의해서만 말해져야 한다. 다른 선교회들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이것은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로교 선교부의 총무였던 로리(Rev.W.Lowrie) 목사가 신임 선교사들(Dr.House and Mr. & Mrs. Mattoon)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들의 긴 여정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그들의 상담과 지도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첫해를 위해 책정된 비용과 관련하여 그는 말하기를 “부웰의 선교비는 그가 태국에 있을 때 그 자신의 요청에 따라 자신과 아내를 위하여는 1년에 600$, 자녀를 위하여는 1인당 50$로 고정되었다. 싱글 선교사의 일반적인 사역비용은 1년에 450$이었다. 당시의 선교비 합계는 현재 당신이 받는 것이며 만일 이것이 너무 적거나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적절한 금액으로 조정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래의 예는 그 당시 한 해를 위한 전체 예산이다.
* 생활비 $ 1,050.00$ * 렌트비 $ 200.00 * 언어교사 $ 75.00 * 사고 $ 175.00
총 $ 1,500.00
새로운 선교사들이 도착했을 때 해외선교회(ABCFM)와 침례교 선교부의 선교사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회중교회 선교부 선교사들인 케즈웰과 하멘웨이 선교사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고 회중교회 선교 센타안에 그들의 숙소가 마련될 때까지 그들 집에서 함께 살았다. 머지 않아 많은 귀족들과 왕자들이 그들을 방문할 것이며 속히 왕과 왕자인 차오 몽쿳을 찾아 뵈어야 했다. 그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환대하였으며 나중까지 관계가 이어진 몽쿳 왕자와 특별히 더 친하게 되었다.
새로운 외국인 의사가 태국에 왔다는 소문은 매우 빨리 퍼졌다. 브레들리가 선교센타 앞에서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수상가옥 진료소가 하우스에 의해서 거의 반강제로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모든 종류의 환자와 모든 계층의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몰려들었다. 이것은 젊은 의사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도였다. 왜냐하면 그는 태국에 도착하기 전에는 거의 알지 못했던 그의 의술을 도와줄 브레들리의 경험을 그는 찾고 있었지만 브레들리는 이미 본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거대한 책임이 하우스 박사에게는 거의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졌고 마침내 그의 부담을 덜 수 있었을 때에 그는 그의 의술을 포기하여야만 했다. 처음 여덟달 동안 그는 3117명의 환자를 봐야만 했다. 의술에 있어서 하우스의 자신의 부담감은 비효율에서 온 것이 아니었고 – 왜냐하면 그는 의사로서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 차라리 겸손함과 의사의 특별한 부담인 삶과 죽음에 커다란 책임을 통렬하게 실감하는 데서 기인한다. 모톤은 성공적으로 언어 공부에 자신의 최선을 다했으며 곧이어 전도지를 배포하는 사역에 투입되었고 시내에 있는 여러 사원들을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였다. 정작 이 전도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전도지를 배포하는 선교사들 자신은 환영을 받았다.
건기가 계속됨에 따라 다른 선교회의 형제들과 함께 페차부리, 아유타야, 쁘라밧과 빠뜨리우로 여행을 갔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그들이 준비해간 책들과 전도지를 받을 준비가 된 영혼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1849년에 스테판 부쉬(Rev. & Mrs. Stephen Bush) 목사 부부가 그들의 선교부를 강화할 목적으로 도착하자 장로교 선교사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아시아 전역을 휩쓴 유행성 콜레라가 번져 방콕에 사는 3만 혹은 4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행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방콕에서만 하루에 2천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운좋게도 선교사 가족들은 그 누구도 콜레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의사 선교사들은 왕궁이나 대나무 집에서 불행에 휩쓸린 사람들을 돌보는데 시간과 정열을 쏟아야만 했다. 많은 생명이 보전되기도 했고 많은 평생의 우정이 끝나기도 했다. 유행병으로 죽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단지 한 사람만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사람은 최근에 방콕에 도착한 노인으로 그의 집에서 방콕까지는 5일이나 걸리는 먼 곳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방콕에 도착할 때까지 기독교 교사를 만나본 적이 없었고 기독교 서적들과 성경책을 읽음으로써 구세주를 신뢰하는 것에 대하여 배웠던 것이다. 그는 최초의 콜레라 희생자였고 또한 구세주에 대해 변치 않는 믿음을 표현한 마지막 사람이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태국에 도착했다. 왜냐하면 회중교회 선교부가 심각한 위기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던 브레들리는 회중교회 선교부와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1848년에 케즈웰 목사가 부르심을 입었다. 1849년에는 그의 미망인이 미국으로 돌아왔고 그해 말에 회중교회 선교부의 마지막 남은 자였던 헤멘웨이 목사 부부가 미국으로 돌아와서 다시는 태국에 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태국에 있던 회중교회 선교부가 문을 닫게 되었고 당시 회중교회 선교센타에서 살고 있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회중교회 선교부의 사역을 어느 정도 상속할 수 밖에 없었다. 장로교 선교부는 그들의 빌딩들과 인쇄소를 구입할 목적으로 회중교회 선교부와 협상에 들어갔지만 브레들리가 AMA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는 회중교회의 전재산을 살 수 있는 기금을 모금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전부 다 인수하였다.
그해 8월 31일에 해외선교회(ABCFM)가 문을 닫았고 몇몇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만나 방콕에 방콕 제일 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믿음의 강령이 있었고 이 첫번째로 조직된 교회는 단지 선교사들 – 마툰(Rev. Mattoon) 목사 부부, 하우스(Dr.House) 박사와 부쉬(Rev.S.Bush) 목사 부부 - 만으로 구성되었다. 8일 후에 1844년에 죤슨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았던 중국인 교사인 씬사 끼-엥 꿔-쌘이 회중교회 선교부 교회로부터 인증서를 받고 정식 멤버로 합류하였다. 씬사 끼-엥 꿔-쌘은 한때 장로교 선교부의 조력자로 고용되어서 그의 산족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그들에게 전도지를 배포하였다. 후에 1852년에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에 그는 그 학교의 최초의 현지인 교사가 되었다.
마툰 목사는 그 해의 많은 부분을 선교 체플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전도지 배포를 위하여 시장에 마련해놓은 전도처를 일주일에 3일간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오후에는 근거지에서 책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맞아야 했다. 이런 방문객들은 콜레라가 한창이던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에 15명에서 20명이 찾아왔다. 회중교회 선교부와 침례교 선교부의 인쇄소로부터 554,500부의 전도지를 구입하여 널리 배포하였다. 선교사들의 광범위한 여행을 통해 전도지와 성경을 받는 것이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요구가 가장 많았는데 선교사들이 방문하면 할수록 그들의 요구는 더욱 증가하여 신문을 인쇄하여 보급함으로 더 많이 확산시켰다. 하우스는 국내 여행을 할 때는 제외하고는 일주일중 6일간을 매일 2시간씩 수상가옥 진료소에서 보냈다. 환자의 대부분은 태국인들이였다. 그들이 알기로는 초창기 선교사들에게는 중국계 환자들이 태국인 환자들보다 더 많이 찾아왔었는데 이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변화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삼, 사명의 현지인 어린이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그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시켜주었다.
1850년 5월에 브레들리가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새로 결혼하였던 사라 블레치 브레들리(Mrs. Sara Blachy Bradley)도 같이 동행하였다. 그들과 함께 실스비(Prof. Josiah Silsby) 교수와 레인(Rev.L.B.Lane) 목사 부부도 같이 왔다. 그때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이들이 머물 집을 구해야만 했는데 이전에 집을 구하기 위해 여러차례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 알게 된 것은 외국인들이 어떤 땅도 갖지 못하도록 하였고 정부는 선교사들에게 땅을 팔지 못하도록 땅 주인들을 방해하였던 것이다. 도시의 상류지역에 적당한 선교센타를 위한 충분한 땅을 가진 사람이 마침 용감하게도 땅을 팔기로 동의하였고 그들이 얻고자 하였던 특별한 땅의 구입을 허가 받았고 마침내 땅값도 지불하였다. 선교사 한 가정이 수상가옥에서 빌딩을 지으려는 새로운 지점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 고위층으로부터 이미 허락한 계약을 취소하라는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이미 받았던 땅값은 다시 반환되었고 재산을 구입하고자 하는 희망은 참으로 막연해보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한가지 이유는 그 장소가 강의 상류에 있으며 그곳은 왕궁의 윗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적당한 장소를 렌트할 수도 없었다.
이 때(1850년)에 미국은 태국과 새로운 조약을 채결하기 위해 특사인 혼 발레스티어(Hon J. Ballestier)를 태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넉달 후에 영국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였고 선교사처럼 제임스 브룩경을 영국 대사로 파송하였지만 그도 역시 실패하였다. 당시 태국내에 있는 반란자들 덕분에 태국왕은 영문 서류를 번역하도록 의뢰하였으며 왕은 방콕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을 신속하게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는 새로운 협약을 체결할만한 신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태국인들은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왕이 하사하는 실제 서류를 가지기를 좋아하였고 왕가의 사람들이 신용장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이 특사들은 이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았고 단지 특사인 혼 블레스티어를 위한 통역자로서 스미스(Rev.S.J. Smith) 선교사가 그에게 설명을 하여 주었을 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서류가 든 박스를 나르는 것이 스미스의 과업처럼 느껴졌다. 스미스는 한 손에는 서류 박스를 들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태국 정부 고위관리 앞으로 인도되었다. 태국 사람들은 스미스가 서류를 만드는 것이나 서류를 다루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 대사나 영국 대사도 태국 왕을 알현하지 못했다. 이때 선교사들에게 고용되어 있던 몇몇 교사와 작가들은 선교사들과의 관계 때문에 투옥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사역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별히 정부가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대한 명분을 찾으려고 하였기에 그리고 그들이 왕궁을 싫어한다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것은 사실이었다. 23년 동안 적어도 11번 이상의 확실한 반란을 진압시키고 실제로 이웃나라인 버마를 정복한 강력한 서양세력의 끈질긴 위협은 왕으로 하여금 외국인들에게 쉽게 문호를 개방하도록 명분을 주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뚫고 나갈 관계를 만들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사실 그들 개인적으로는 정치적인 상황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다른 사실도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세번째 왕인 프라 낭 클라오(H.M. King Phra Nang Klao 1824-1851)는 적극적이며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 당시에 왕의 호의를 입으려고 하는 사람은 절을 지어 받쳐야 한다는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 차크리 왕조의 첫번째 왕인 라마 1세 혹은 프라풋타 욧-파-출라록(1782-1809)은 전사들을 우선하여 뽑았으며, 두번째 왕인 라마 2세 혹은 프라풋타 로엣-라-놔라이(1809-1824)는 학식을 갖춘 사람들을 뽑았지만, 세번째 왕은 자신이 불교를 좋아하는 것처럼 불교에 열심인 사람들을 뽑았다. 외국인들 중에서 아직 왕의 눈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세 명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우 낙담이 되었다. 한동안 그들은 태국을 떠나 다른 지역 즉, 인도네시아의 웨레스리, 사라왁, 보르네오 지역으로의 사역지 변경을 신중하게 검토하며 본국에 의사를 타진하였다. 본국의 선교부는 그들의 제안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할 수만 있으면 태국에 남아있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태국에 있는 다섯명의 선교사 그룹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특별 기도를 하도록 부탁하였다.
몽쿳왕이 왕위에 등극한 것은 그가 통치할 나라뿐만 아니라 장로교 선교부에게도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이었다. 수년 동안 그는 선교사들과 가장 친하게 지내왔었고 이것은 그에게 부여된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과 사고에 눈을 뜨게 해준 이 남자들과 여자들(선교사들)에게 그의 감사를 표현하고자 오랫동안 기회를 찾고 있었다.
1850년에는 선교사들은 현지인 어린이들 3,4명을 집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치기도 했고 때로는 다른 아이들이 추가되기도 했다. 1853년에는 아이들이 20명 혹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서 보딩 스쿨의 토대가 되었다. 1848년에 마툰 부인이 어린 여자 남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후에는 선교부 근처에 있는 peguan 마을 안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후에 선교부 센터안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각자가 매일 1푸앙을 지불하여야만 했다. 한때 이 학교는 27명의 학생이 등록하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이 데리고 있던 어린이들 중에서 두명이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가 되었다. 이들은 크루 나와 에스더 였는데 크루 나는 그의 죽어가는 아버지가 의사인 하우스 박사에게 1853년에 의탁한 아이였고 에스더는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마툰 의사 부부에게 의탁한 아이였다. 에스더는 그들과 함께 살았고 마침내 마툰 부인의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을 때에도 에스더는 그녀와 그 자녀들과 같이 동행하였다. 그녀는 3년후에 그들과 가족과 조인한 마툰 박사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마툰 박사가 힘을 얻어 역량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때까지도 에스더는 8-10명의 어린이들을 소그룹으로 태국어 읽기를 가르치고 있는 마툰 부인과 함께 살았다. 그녀는 1860년에 교회에 조인하였다. 나(Naa)씨는 크리스챤이 되기 전인 1863년이나 1864년에 에스더와 결혼을 하였다. 나이 나는
외국인 공동체의 요청에 따라
태국으로의 입국이 어려워진 것은 싱가폴 신문에 태국왕을 다소 무분별하게 비판한 기사 때문이었다. 이것은 태국에 있던 침례교 선교사들의 어떤 잘못된 정보에 원인이 있었다. 그 결과는 모든 선교사들이 잠시 동안이지만 왕의 진노아래 놓여있었고 왕궁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여성선교사들의 사역도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다소의 오해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결국 어려움은 잘 해결되었고 여성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왕궁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외국인들의 자유로운 출입이 다시 허락되었지만 태국의 장로교 선교부는 태국 사역을 위해 리쿠르트한 두 가정의 선교사를 댓가로 지불하여야 했다.
이 당시에 하우스는 휴가를 가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마툰 부부는 혼자남아 선교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칼톤(Rev. & Mrs. M.M. Carleton) 부부가 태국에 안전하게 입국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한동안 태국 선교를 위한 사역자를 발굴하지 못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하우스는 이 어려움은 조금 있으면 끝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수년 동안 태국 선교를 위해 사역자를 증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우스는 1856년 전통적인 방법으로 태국 선교를 위한 사역자를 발굴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는 휴가를 마치고 축복된 기억을 가진 신부(Mrs. Harriette M. House)를 데리고 태국으로 돌아왔다. 이 신실한 선교사 부부는 건강이 악화되어 이땅을 떠나기 전까지 20년 동안 태국을 위해 함께 일했다. 이때 하우스와 함께 모스(Rev. & Mrs. Andrew B. Morse)목사 부부가 같이 왔으나 그들은 잠시 머물다가 1858년에 떠났다. 비록 그들이 짧게 머물다가 갔지만 그들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고 보다 더 큰 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선교부의 확장을 위해서 쉽지는 않겠지만 왓 쳉(사원) 뒤에 불하받은 땅과 건물을 팔고 같은 편에서 5마일 정도 내려간 시 외곽지역에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결국 새로운 센터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큰 것으로 그 위에 두개의 벽돌로 된 건물이 세워졌는데 하나는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영속적인 사역이 시작되었고 빠르게 발전하였다. 지금은 “삼래”로서 알려진 모스가 발행하는 저널의 기사는 사역의 초기에 흥미있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10월 24일- 마툰과 왕의 첩보원인 바일이 새로운 부지를 탐색하기 위해 내려갔다. 태국 공무원인 측량사들도 같이 동행하였다. 이제 그들이 측량에 필요한 도구인 데오돌라이트(위도를 재는 기구), 체인, 말뚝 등과 수학적인 계기 등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 나라의 땅들은 대부분 울타리가 없다. 우리 센터의 경계표지는 한 면은 운하이고 다른 두면은 사람이 뛰어서 건널 수 있는 좁은 냇가로 강에서 850피트 앞쪽이었다. 태국 측량사는 냇가와 관목 등 우리가 인도하는 대로 측량을 했다. 그리고 싫증이 나서 일행중에 한 명인 조수에게 그 일을 부탁하고 나머지는 잠자기 위해 보트에 가서 들어 누웠다. 조수는 모든 기구들 즉, 말뚝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가서 할당된 코너에 말뚝을 박고는 일을 모두 끝냈다. 그 공무원은 그가 보았던 모든 땅을 측량했다고 정부에게 보고할 것이다. 우리는 진흙으로 뒤범벅한 냇가와 숲, 가시덤불 등을 지나 오랫동안 걸었어도 육체적으로는 별로 유익이 없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특별한 시기에 다른 면에서 진전을 이루었다. 1855년에 영국은 태국과 우정과 상업에 관한 우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죤 보링(Sir. John Bowring)경을 방콕에 보냈다. 이때 이러한 시도는 운이 좋았으며 협약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다음해에 혼 타운센드 헤리스(Hon Townsend Harris)가 미국으로부터 특사로 와서 협약을 맺었다. 이런 협약의 결과로 영국 영사관이 1856년에 건축되었고 미국 영사관은 한달 먼저 건축되었다. 미국 영사로서 마툰 선교사가 1859년까지 맡아서 수고하였으며 다음에는 침례교 선교부의 찬들러 선교사가 맡아서 일했다. 1820년에 건축된 포르투갈 영사관은 이전까지 태국에 있었던 유일한 외국 영사관이었다. 새로운 조약을 맺음으로써 서구 열강들과의 새로운 외교 관계가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 1857년에는 태국 공사를 영국에 파송하였으며, 1861년에는 프랑스에 공사를 파견하였다.
1858년에는 아직 총각인 다니엘 맥길버리(Rev. Daniel McGilvary) 목사와 그의 친구인 조나단 윌슨(Rev. & Mrs. Jonathan Wilson) 목사 부부가 태국에 도착했고, 1860년에는 맥파랜드(Rev. & Mrs. Mc Farland) 목사 부부와 맥도날드(Rev. & Mrs N.A. McDonald) 목사 부부가 태국 선교부에 합류하였다. 이들이 도착함으로 인해 장로교 선교사역의 역사는 개척시대(Pioneer)로부터 새로운 시대로 변환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단지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들 모두가 장기 선교사들이었고 1860년에 죽은 윌슨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역에 오랫동안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능력있고 헌신된 비젼의 사람들로 대의명분(주님을 위함)을 위해 그들의 풍부한 열정과 에너지를 자유롭게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기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1860년에는 멕길버리의 부인이 된 소피아 브레들리가 가세함으로 이 그룹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미 강력하게 묶여진 것을 더욱 공고하게 하였으며 소규모 장로교 그룹에서 베테랑 선교사 그룹인 브레들리(Dr. & Mrs Bradley) 가족과 묶여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장로교 선교부의 강화는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자매 선교부인 회중교회 선교부(ABCFM)와 침례교 선교부가 크게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1860년에 장로교 선교부를 제외하고 방콕에 남아있던 선교사들은 A.M.A.의 의사 선교사인 브레들리 가족과 침례교 선교부의 스미스 목사 가족, 텔포드 목사 가족과 침례교 선교사로서 영사를 겸하고 있는 찬들러 선교사 가족뿐이었다.
1878년에 태국에 최초의 장로회가 4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는데 장로회의 회원은 마툰, 하우스,멕길버리와 윌슨이 그들이다.
이 시기에 태국 장로교 선교부에 기억될만한 일이 있었는데 최초의 태국인 기독교 회심자가
1860년대까지 장로교 선교부는 실제적으로 20년간을 존속해오면서 위대한 시작의 시기에는 커다란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선교사역을 위한 토대를 견고하고도 튼튼하게 구축하여 다음 수십 년간 놀랄만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