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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韓中)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 K.S. 케네쓰 첸의 『중국불교』를 읽고 -
고 영 섭1)
(동국대 불교학과)
1. 한중불교사의 연속과 불연속
한국과 중국은 오랫동안 함께 살아 왔다. 즉 요서와 요동 및 동북 삼성의 영토와 서해의 영해를 밀고 당기며 각기 자존의 역사를 일구어 왔다. 중원 일대 및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의 동북 삼성 그리고 한반도를 무대로 해 왔던 한국과 양자강과 황하 주변 및 파촉까지 무대를 확장했던 중국은 ‘전쟁’과 ‘화해’ 외교 및 ‘조공’과 ‘책봉’ 의례 속에서 상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여 지난 반만년 동안 우리의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제(齊, 李正己 帝國)의 강역은 중국의 영토 확장과 부딪치면서 ‘서토’에 맞서는 ‘동토’임을 자임해 왔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불교를 통해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중불교사는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파견한 승려 순도(順道)에 의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공식 전래 수용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백제의 침류왕 때(384년)는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오면서 연속되었다. 뒤이어 통일신라의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을 비롯한 한국 불교사상가들의 독자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불연속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다.
일찍부터 이루어진 동양과 서양의 만남과 인도와 중국의 만남에서 가장 주요한 매개 고리는 불교였다. 불교 선진국을 출발한 셀 수 없는 전법승(傳法僧)들과 일부 상인들 그리고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한 헬 수 없는 구법승(求法僧)들에 의해 동서 교류의 물꼬는 활짝 열렸다. 특히 불교는 하나의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로서 동류(東流)해 오면서 서양과 인도 사이의 문화의 통로를 열었다. 해서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동서의 주요 통로 역할을 하였던 불교는 낯선 두 문명과 문화가 부드럽게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불교는 비실체적 세계관과 관용의 정신을 통해 인접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찍이 무아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불교의 중도 연기적 세계관은 인도 힌두교의 형성에 지대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종교적 요소는 중국 도교의 형성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으며, 나아가 불교의 철학적 전통은 종래 유교를 신유학으로 변용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여 불교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사유체계를 보다 풍부하고 유연하게 만들었으며 불교의 사유체계 역시 이전보다 훨씬 더 입체화 되었다.
중국의 불교는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인들의 체질과 토양 및 기후와 기질이 반영됨으로써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되었다. 즉 우주관을 비롯하여 세계관 및 인간관 그리고 문화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주되었다. 해서 동아시아 일부학자들은 불교의 본령은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중국에서 체계화되었다고 파악하려고까지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명할 수 있겠지만 탄생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위축되고 있는 사이 오히려 전래지인 중국에서 불교가 더욱 더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불교를 받아들이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변모시켜 ‘중국불교’로 변용시켰다. 동시에 종래의 유교와 도교는 불교를 통해 오히려 자내의 사상을 더 강화하였고 광범위한 문화적 훈습을 받았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단순히 중국의 불교에 머물지 않고 중국사상사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감으로써 수당(隋唐)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사유의 중심부에 자리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더 넓은 변용의 지평을 머금고 있는 ‘중국 불교에 관한 종합적인 역사적 개괄’을 시도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가급적 타자로서의 중국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내의 지평을 계승하고 있는 관점을 지닌 필자여야만 이러한 개관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특별한 관심’과 ‘극동의 종교와 역사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서 불교의 발전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중국 및 동아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다루는 과목의 보조교재로 사용될 수 있을 것’2)으로 규정하고 있는 케네쓰 첸의 『중국불교』는 비교적 쉽고 명료하게 중국불교 전반을 다루어 온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온 저술이다.
고전은 헬 수 없는 시공의 비판의 칼날을 견디고 살아남은 책이다. 때문에 고전은 단순히 오래된 책만을 일컫지 않는다. 우리는 고전 속에서 ‘동시대성을 발견’한다. 동시에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의 거리의 최소화’와 ‘살아있는 것들의 생물학적 조건의 동일성 확보’라는 보편성을 발견하게 된다. 해서 고전은 끊임없이 거듭 살아나는 책이자 해석되어지는 책이며, 새로운 독자를 만나는 책이다. 중국불교 통사 분야의 고전적 작품으로서 이미 약 반세기 전인 1963년 12월에 간행된 케네쓰 첸의 역저 『중국불교』(Buddhism in Chana- A historical Survey) 역시 그런 책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의 전 저작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며 중국불교 이해의 ‘표준’(standard)으로서 자리하고 있다.3)
2. 중국불교 이해의 ‘표준’ 혹은 ‘지남’
통사는 한 문명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해당 민족의 토양과 기후 및 기질과 언어 등 한 민족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때문에 통사는 해당 민족을 이해하는 가장 주요한 기제가 된다. 통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의 날줄이 세로축을 세우고, 문학, 사학, 철학, 종교, 예술의 씨줄이 가로축을 펼쳐서 직조하는 피륙과도 같다. 이 피륙에는 당대 사람들의 시간 이해와 공간 인식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해와 요구가 투영되어있다. 또 통사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사가의 사관에 의해 해당 민족의 토양과 기후와 기질과 언어 등이 입체적으로 교직되어 기술되어 있다.
사가는 먼저 시대구분의 포석이라 할 주춧돌을 각 모퉁이에 세우고, 그 위에 일관된 논지의 기둥들을 세운다. 그 다음에 각 기둥들을 아우르는 사관의 대들보와 통사의 용마루를 올린다. 그리하여 온전한 통사의 집 한 채가 지어졌을 때 비로소 뭇 사람들이 그 집에 드나들며 손때를 묻히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때문에 통사를 쓰는 역사가는 한 시대의 집 한 채를 짓는 도편수요, 사상가요, 철학자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가는 통사의 기술을 통해 비로소 한 시대가 안고 있는 모든 빚을 되갚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시에 아무나 역사를 쓴다고 해서 다 통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통사를 쓰는 역사가는 오직 하늘이 내린다고 했다. 설사 통사로 평가될 수 있는 해당 역사가의 저작이라 하더라도 당대 사람들에 의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움’(受持讀誦)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통사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중국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케네쓰 첸(Kenneth K. S. CH'en, 1907~ ?)은 중국불교통사의 집을 짓는 도편수가 되기에 적합한 적임자라 할 수 있다. 그는 하와이대학, 연경대학, 캘리포니아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불교와 인도문헌학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다.
이어 그는 위의 대학들에서 인도 및 동아시아 불교사를 강의하였으며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은퇴하였다. 그에게는 주요 전공인 인도 및 중국불교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중국불교』를 비롯하여 『불교, 아시아의 빛』(Buddhism, The Light of Asia), 『불교의 중국적 변환』(The Chinese Transformation of Buddhism) 등이 있다. 이들 속에는 중국과 무관한 타자로서가 아닌 주체로서의 그의 진한 자긍심과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오랜 작업 끝에 나온 이 저작들은 모두 이 분야의 필독서가 되어 있다.
케네쓰 첸의 『중국불교』는 전래의 제1부, 성장과 토착화의 제2부, 성숙과 융합의 제3부, 쇠퇴의 제4부, 결론의 제5부로 짜여 있다. 이 5부의 주춧돌과 기둥은 다시 총18장의 작은 기둥으로 퍼져가고 있다. 총론 부분에 해당하는 제1부 전래 속의 제1장의 배경은 인도에서의 불교의 기원과 발달에 관해 문외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문체로 아주 요령있게 정리해 주고 있다. 제2장의 전래와 초기의 전개-한(漢)은 중국불교의 출발을 불도유(佛道儒) 삼교의 여러 자료를 참고하고 논구하여 정합성 있게 재구하고 있다.
제2부는 제3장인 ‘초기의 접촉과 반응’, 제4장인 ‘동진시대의 고승들’, 제5장인 ‘발전과 저항-남조’(南朝), 제6장인 ‘이민족의 불교 수용-북조’, 제7장인 ‘탄압과 승리-북주와 수’(隋)의 총5장으로 되어 있다. 제3부는 제8장의 ‘절정-당’(唐)과 제9장의 ‘승단의 체제’, 제10장의 ‘사원과 대중불교’, 제11장의 ‘종파불교’(1), 제12장의 ‘종파불교’(2), 제13장의 ‘한역대장경’의 총6장으로 되어 있다. 제4부는 제14장인 ‘위대한 전통의 유풍-송’, 제15장인 ‘이민족의 지배-요, 금, 원’, 제16장인 ‘퇴보와 몰락-명, 청’, 제17장인 ‘개혁과 변화-현대’의 총4장으로 되어 있다. 제5부는 제18장의 ‘중국문화에 대한 불교의 공헌’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저술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각 장의 참고문헌이 적게는 40여종 내외에서 많게는 60여종 내외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단행본뿐만 아니라 각종 학술 관련 논저들에서 일일이 그 근거를 밝히고 있고, 나아가 해당 참고문헌의 주요 논지를 뽑아 적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영서를 비롯하여 중서와 일서 및 한문 고전본 등 해당 분야의 주요 선행 연구를 총 망라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중국불교』가 여타의 저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치밀한 논증 위에서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같은 다수의 참고문헌으로 인해 저자의 논지 대부분이 이 저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과도한 참고문헌을 덧붙인 대부분의 책들이 그같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상존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같은 선행 연구들을 요령있게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원용하고 있다. 때문에 도리어 다수의 참고문헌은 이 저자의 학자적 엄밀성과 치열성의 근거를 보여주고 있는 증좌가 된다. 더우기 이 책이 성실성과 대중성을 지닌 문체까지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케네쓰 첸의『중국불교』가 지닌 중국불교 연구사에서의 역사적 의미와 학문적 신뢰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3. 중국불교사를 넘어서는 중국불교 개관
이천 여년의 중국 불교사를 일관된 관점 위에서 하나의 통사로 꿰는 작업은 대단한 집중력과 높깊은 안목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욱이 그 같이 긴 역사를 전문성과 대중성이 만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면서 기술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에세이와 같은 대중성과 논저류와 같은 전문성의 효율적 만남 여부는 아무래도 해당 저자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 가지는 대중성과 철학이 가지는 전문성이 역사 속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저자의 활달한 필력과 엄밀한 사관이 만나야만 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케네쓰 첸의 『중국불교』는 이 두 가지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안목’은 ‘활달한 필력’과 ‘엄밀한 사관’으로 피어나 중국불교통사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그는 인도에서 생성된 불교가 이질적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어 갔는가를 생생하게 기술함으로써 통사가 지니는 무미건조함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다. 이 책의 뚜렷한 장점은 “중국의 불교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인도불교와 달라졌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비교 서술하여 중국불교의 특징을 뚜렷하게 제시함으로써 단순한 중국불교사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4)는 점이다.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연구가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까닭은 그것이 전 역사를 통하여 중국인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최근의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불교가 쇠퇴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이 종교가 명성과 인기를 누리던 시대에 여러 가지로 중국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인들의 삶에 지속적인 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신유학(新儒學)은 다양한 불교적 사유에 자극되어 발달한 것이며, 도교(道敎)의 경전과 신 등의 요소는 불교에서 가져간 것들이다. 불교용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 단어와 성어들이 중국어에 남아 있으며 천문학(天文學), 역학(曆學), 의학(醫學) 등의 연구에서 중국인들은 인도의 승려들이 가져온 지식의 혜택을 입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중국인들의 종교적 삶이 불교가 가지고 온 교리와 수행 및 신격과 의례에 의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5).
제1장의 ‘배경’ 서두에 나타난 중국불교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분명하다. 중국인의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던 불교가 최근의 수세기 동안 중국에서 쇠퇴하였다는 이유로 인해 그동안 미쳐온 주요한 역할을 잊어버려서는 아니된다 역설하고 있다. 신유학과 도교의 성립을 비롯하여 중국어에 남아있는 단어와 성어들의 흔적 그리고 천문학과 역학 및 의학 등의 연구에서 인도 승려들에게 입은 광범위한 지식의 혜택을 지적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의 교리와 수행 및 신격과 의례의 의해 중국인들의 종교적 삶이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저자가 강조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주요한 시각을 가지고 중국불교 통사를 기술해 가고 있다.
격의(格義)불교시대를 거쳐 본의(本義)불교시대로 들어서자 불교 영토가 넓어지면서 불교문화는 중국 전역에 뿌리내려져 갔다. 그 결과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는 이제 중국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불교화’ 되어 갔다. 케네쓰 첸은 ‘결론’인 제18장 ‘중국문화에 대한 불교의 공헌’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2천년 가량 되는 중국불교의 일생을 개관에 보았다. 이러한 대략적인 역사에서는 불교의 모든 분야에 대한 탐구가 불가능하였다. 다만 중요한 움직임과 중요한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연관된 두드러지는 인물들만을 다루었다. 중국에서 불교가 성장하고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단계들을 보여주었으며, 가장 대중화되었을 때 이 종교가 담당했던 역할을 설명하였다. 이런 절정의 바로 뒤에 불교는 지적, 학문적 정열의 이완을 겪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그 뒤의 천년 동안에도 불교의 외적 상징은 여전히 존재하였지만 내적 역동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쇠락하기 전에 불교는 중국문화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쇠락한 뒤에도 사상과 문학, 언어, 예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중국인들의 삶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6)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불교의 일생 중 ‘중요한 움직임’과 ‘중요한 사건들’ 그리고 ‘거기에 연관된 두드러지는 인물들만 다루었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의 범주와 영역에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불교가 성장하고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단계들’과 ‘가장 대중화되었을 때 이 종교가 담당했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하여 ‘쇠락하기 전의 중요한 공헌’과 ‘쇠락한 뒤의 여러 분야에 걸친 지속적 영향’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유학’, ‘도교’, ‘문학’, ‘언어’, ‘음성학’, ‘선종과 산수화’, ‘천문학과 역법’, ‘의학’, ‘종교생활’ 등에 대한 영향에 대해 치밀하게 언급하고 있다.
불교가 중국인들의 삶에 이렇듯 많은 분야에서 이처럼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전파된 이후 점점 더 중국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중국적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더 이상 인도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논의 가운데 중국불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변화와 적응의 두드러진 예를 천태종, 선종, 정토종 같은 종파의 성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태종은 연대적적인 분류 및 삼제론에 의해 인도의 형이상학과 중국의 현세적 사고를 타협시키는데서 보이는 중국인들의 분류와 타협 기술에서 나왔으며, 신앙을 강조하는 정토종이나 돈오론을 견지한 선종은 중국인들의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경향에서 나왔다. 이들은 분명히 중국불교의 종파들이지 인도불교의 종파가 중국에 옮겨진 것이 아니었다.7)
중국불교가 중국화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계기는 중국적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더 이상 인도적인 적으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란 공간 속에서 불교는 격의화 되었고 중국화 되면서 인도불교는 이제 인도적 요소를 벗겨내고 중국불교가 되었다. 때문에 인도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여러 요소들이 중국불교에서 탄생하였고 그 속에는 중국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고유한 모습들이 깊이 스며들었다. 그야말로 인도불교와 변별되는 중국불교가 새롭게 탄생되었던 것이다.
인도불교의 이러한 중국적 변용은 불교의 재탄생을 의미하였고, 나아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새롭게 태어난 중국불교를 ‘불교의 새로운 본령’(?)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인도불교만을 원류로서 강조하는 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불교의 원류를 형성했던 인도 전역이 힌두화 내지 이슬람화 되어 불교의 위상이 현격히 감소됨으로써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따라서 중국불교는 이후 동아시아 불교의 새로운 원형 혹은 범형으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한국과 일본 및 베트남 불교는 바로 이러한 중국불교의 연장 속에서 새롭게 변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4. ‘격의화 된’ 혹은 ‘중국화 된’ 대승불교 역사 기술
중국불교의 3대 특징이라 할 1) 경전한역(經典漢譯)과 격의불교(格義佛敎), 2) 교상판석(敎相判釋)과 종파형성(宗派形成), 3) 선법(禪法)의 완성이 이루어지면서 인도적 요소는 점차 탈색되었다. 이제 불교는 중국에서 ‘격의화’ 되고 ‘중국화’ 된 대승불교로서 새롭게 탄생되었다. 그 결과 중국불교는 불교의 원류 혹은 종주국으로서의 면모까지 확보하기 시작했다. 불교의 모든 범형이 중국에서 확보된 열반-삼론-구사-성실-섭론-지론-자은(법상)-밀종-(남산)율종-천태-화엄-정토-선법의 13종파의 기호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동아시아 삼국은 이들 기호를 통해 불교를 인식하고 연구하는 단계로 진입했던 것이다.
전래 초기부터 불교를 무부(無父)의 불효(不孝)와 무군(無君)의 불충(不忠)의 종교로 몰아간 유자들에 대항하여 불자들은 불교가 대효(大孝)와 만효(萬孝) 혹은 대충(大忠)과 만충(萬忠의 종교임을 증명하였다. 현세 일세와 천지 중심의 지구 모델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와 과현미 삼세와 지구-태양계-은하계-우주 모델을 중심으로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부처의 십계를 구도로 충과 효를 바라보는 불교의 구도는 애초부터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8) 결국 불교 내의 적극적인 방어책에 의해 『노자화호경』과 『모자이혹론』을 비롯하여 『부모은중경』, 『목련경』,『우란분경』 등이 탄생하면서 중국불교는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신멸신불멸론(神滅神不滅論)에서 비롯된 형신이원론(形神二元論)과 형신일원론(形神一元論)은 중국 불교와 유교의 논리를 더욱더 공고히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유교 이외에 또 하나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던 도교는 불교의 토착화에 결정적인 기제가 되었다. 이른바 ‘도불교섭사’(道佛交涉史)로 표현되는 불교와 도교의 교섭의 역사는 중국불교의 동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空)을 ‘무’(無)로, ‘열반’(涅槃)을 ‘무위’(無爲)로, ‘진여’(眞如)를 ‘본무’(本無)로 옮겼던 과도기의 불교 이해였던 격의(格義)불교시대를 거쳐 ‘공’을 ‘공’으로, ‘열반’을 ‘무위’로, ‘진여’를 ‘본무’로 이해하는 본의(本義)불교시대로 나아갔던 것이다.9) 그 이후 중국불교는 ‘본의’를 지닌 채 중국인들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보살들이 중국인들의 외양을 닮아갔다. 미래불인 미륵은 사원의 방문객들에게 인사하는 친근한 포대화상으로 바뀌었다. 관세음보살은 절강에서 멀리 떨어진 보타(普陀) 섬에 살고 있는 여성신격으로 바뀌었으며, 문수보살은 산서의 오대산과 결합되었다. 중국에서 스투파는 탑으로 변하였는데, 이것은 이제 불타의 유골을 저장하는 묘지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정신적 안녕을 확고히 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에 건립하는 다층 건축물의 모습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인도불교의 탈가정적, 탈사회적 관념들이 중국불교도들에 의해 변형되었다. 그래서 효는 여전히 지켜야 할 덕목으로 남아 있었으며, 특히 죽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고 헌납된 사원과 탑의 형태로 나타났다. 인도적 성격의 일부를 버리고 중국인들의 기질과 환경에 더 잘 들어맞는 모습을 띰으로써 불교는 중국문화에 대하여 다른 어떤 외래종교도 필적할 수 없도록 공헌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에 도입되었던 모든 종교들 가운데 불교가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10)
모든 종교는 해당 지역의 토양과 기후 및 기질과 언어 등과 함께 변용되어 왔다. 하지만 인도에서 탄생했던 불교가 이렇게 급격히 변용되면서 인도적인 성격을 버리고 중국적인 성격으로 변모해 갔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불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원리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중국인들의 기질과 환경이 그렇게 변모시켜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인들은 외래의 불교를 온전히 자기 사상과 문화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의 것으로 중국불교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그들은 ‘미륵’을 ‘포대화상’으로, ‘관세음보살’을 ‘여성신격’으로, ‘문수보살’을 ‘산서의 오대산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붇다의 유골을 저장하는 묘지인 ‘스투파’를 가족과 사회의 정신적 안녕을 확고히 하는 다층 건축물의 모습으로 변용시켰다. 나아가 인도불교의 탈가정적, 탈사회적 관념까지도 변형시켜 효(孝) 개념을 기초로 하여 죽은 조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고 헌납된 사원과 탑의 형태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변용에 의해 중국불교는 중국인들의 기질과 환경에 들어맞는 모습을 띰으로써 어떤 다른 외래종교도 필적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종교적 힘으로 자리잡았다.
케네스 첸은 바로 이러한 중국불교의 주요한 특징을 타자가 아닌 자내의 시각으로 명료하게 적출하여 정리해 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이 지닌 특장이자 이 저자의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작은 한국불교통사 기술 역시 어떠한 시각과 관점 위에서 기술되어야 하는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저자가 대등한 인중불교사의 관점에서 기술한 중국불교사처럼 왜 대등한 한중불교사의 관점에서 한국불교통사가 기술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한중불교사를 바라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한일(韓日)불교사’11)나 ‘한인(韓印)불교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동일한 자세를 유지해야 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고루 머금고 있는 이 책은 평자에게 한국불교통사 기술의 자극과 촉매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1)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사상사와의 관련 속에서 <한국불교역사>와 <한국불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2)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5면, 저자의 「머리말」.
3) 중국불교통사 관련 저작은 국내에 몇 종이 번역되어 있다. 케네쓰 첸의 『중국불교』를 비롯하여 미찌하다 료오슈의 『중국불교사』, 계환 옭김(우리출판사, 1996); 가마타 시게오의 『중국불교사』, 정순일 옮김(경서원, 1992); 뤄칭의 『중국불교학강의』, 각소 제정(민족사, 1994); 가마타 시게오의 『중국불교사』1․ 2․ 3, 장휘옥 옮김(장승, 1995); 키무라 키요타까, 『중국불교사』, 정병삼 옮김(민족사, 2005)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4)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박해당, 역자후기, 601면.
5)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13면.
6)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509면.
7)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523면.
8) 졸론, 「불교 효학의 이론과 실제」, 『한국불교학』제44집, 한국불교학회, 2006.2, 84면.
9) 졸론, 「한인(韓印)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에띠엔 라모뜨의 『인도불교사』를 읽고」, 『인문논총』제56집,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06년 12월, 374면.
10) 케네쓰 첸, 『중국불교』(서울: 민족사, 1994), 524면.
11) 졸론, 「한일(韓日)불교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 사상의 핵을 찾는 스에키 후미히코의 『일본불교사』와 관련하여」, 『불교평론』 제26호, 200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