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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유적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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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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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구(洞溝)의 서쪽 무덤들
집안에 거의 다 가서 안내원인 전원철씨가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압록강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퍼뜩 잠에서 깨어나 밖을 내다본다.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른쪽으로 강이 보이고 왼쪽으로 산이 보인다. 강 건너편 벌목되어 나무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곳이 북한 땅이다. 길의 왼쪽으로 처음 만나는 무덤이 왕릉으로 여겨지는 서대묘(西大墓: Xida Tomb)이다.
서대묘란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큰 묘이다. 작은 자갈로 이루어진 계단식 돌무지 무덤이다. 그것이 누구의 묘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도굴로 인해 가운데가 움푹 파여 마치 쌍분처럼 보이는데, 그 도굴이 고국원왕 때 외적의 침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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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대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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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수도인 집안이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유린되고, 왕족이 모두 죽거나 잡혀갔으며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무덤을 바로 이 서대묘로 추정하는 것이다. 서대묘는 길에서 한참 들어가는 곳에 있어 현장까지 가지는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그나마 요즘은 줌(Zoom)이 잘되는 사진기들이라 전체 모습을 가까이 보듯이 완벽하게 잡을 수 있다. 이제 비는 조금 그친 듯하지만 아직도 말끔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 멀리 산 쪽으로 안개와 구름이 약간 남아 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천추묘(千秋墓)이다. 집안으로 가는 길 옆 오른쪽에 있는 왕릉으로 천추총이라고도 불린다. ‘천추’라는 이름은 “천만년 영원히 견고하여라, 하늘과 땅이 다할 때까지 견고함을 유지하라(千秋萬歲永固, 保固乾坤相畢)”는 명문(銘文) 벽돌이 이 곳에서 발견되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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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만세 영고'라는 명문 벽돌이 나온 천추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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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묘의 주인공은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384∼390)이다. 물론 묘는 그의 아들인 광개토왕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이 무덤은 겉보기에는 여느 돌무지무덤과 다르지 않지만 정확히는 계단식 돌무지 돌방무덤이다. 원래는 10단 정도였으나 현재는 5단만 남아있고, 잘 다듬어진 돌방에 돌덧널이 따로 놓여있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발굴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덤의 양식이나 묘역의 배치가 호태왕릉(광개토왕릉)과 아주 유사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세 번째 찾아간 곳이 마선구(麻線溝) 옆 홍성촌(紅星村) 도로변에 있는 2100호분이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원래는 7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4단 정도만 분명히 남아있다. 발굴 시 금제 장신구와 철경(鐵鏡: 쇠거울)등이 출토되었고, 새문양이 있는 와당(瓦當) 등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유물들은 4세기 중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천추총의 유물과 유사점도 발견된 2100호분은 제17대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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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2,100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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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우리가 흔히 불교를 처음으로 수용한 왕으로 알고 있는 그 소수림왕이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유교의 확립을 위해 태학을 설립했으며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율령을 반포하기도 했다.
마선구를 지나 통구(洞溝)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칠성산이 보이고 그 산아래 길옆으로 칠성산 211호 고분이 보인다. 이 무덤 역시 계단식 돌무지 무덤인데 아래의 계단이 대부분 무너져 있고,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도굴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무덤의 도굴 역시 봉상왕 때 외적의 침입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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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에 기록이 분명한 칠성산 211호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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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삼국사기>권 제17 '고구려 본기' 제5에 따르면 "(봉상왕) 5년(296) 8월에 (선비족의) 모용외가 내침하여 고국원에 이르러 서천왕의 능묘를 보고 사람을 시켜 파헤치게 했는데, 역부(役夫) 중에 폭사자가 생기고 또한 광(壙) 안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므로 신(神)이 있는지 의심하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이를 토대로 이 무덤은 서천왕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출토된 장신구, 철제 도구 등이 3세기의 것으로 보이며 도자기 역시 동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성(國內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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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성 서문 치성의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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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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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성의 서쪽 성벽인 서성(西城)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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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이들 통구 서쪽에 있는 무덤들을 본 뒤에 통구를 건너 국내성에 진입한다. 국내성은 환도산성(丸都山城)과 함께 고구려 시대를 대표하는 성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통구가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평지성이다. 서쪽으로 통구가, 남쪽으로 압록강이, 북쪽으로는 환도산이 버티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이 서북쪽으로부터 있어 왔기 때문에 북쪽 환도산에 산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 22년(서기 3)에 환인의 흘승골성에서 이곳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다음 장수왕 12년(427)까지 약 400여 년을 고구려 수도 역할을 했다. 국내성은 남과 북이 조금 길고 동과 서가 조금 짧은 직사각형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554.7m, 서쪽 664.6m, 남쪽 751.5m, 북쪽 715.2m. 성안에 동서남북으로 길이 나 있고, 이 길은 6개의 문을 통해 성밖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대로가 동서로 이어지고 남북으로는 작은 도로가 나 있다. 그리고 서쪽과 북쪽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동쪽과 남쪽은 훼손이 심한 편이다. 그것은 집안시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택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통구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서문지이다. 서문에서 보면 통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서문지 바로 옆에 치성의 흔적이 보이고 통구의 상류 쪽으로 배수구 유적을 볼 수 있다. 배수구라면 성안의 물을 성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도록 만든 하수도이다. 길이가 16.25m, 폭이 0.8m, 높이가 0.95m이다.
이곳 사람들은 서문 쪽의 성을 서성(西城: Xi Cheng)이라 부른다. 서성 밖 도로를 따라 가면 최근에 지은 청파정(淸波亭)이라는 2층 누각을 볼 수 있다. 청나라 시대 양식을 따라 추녀가 치켜 올라가고 붉은 색과 노란색이 아주 강렬한 중국식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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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정의 모습: 청나라 양식이 뚜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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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이곳에서 보면 통구 건너편으로 칠성산이, 통구에 놓인 다리 너머로 북한 땅이 아주 잘 보인다. 다리 아래로는 둥근 아치가 물에 비쳐 아름다움을 더 하고 성벽 너머로는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5층 짜리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2004년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이 '고구려 왕조의 수도와 무덤들(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2002∼2003년 국내성 안의 유적 21곳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다. 그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 건물터와 유구, 기와와 벽돌, 돌쩌귀, 생활도구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안의 중심부에서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 흔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국내성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현재 집안시 당국은 시정부 청사를 성밖으로 옮기고 그곳에 공원을 조성하여 성내의 환경을 바꿔가고 있다.
그리고 국내성 북쪽 성벽을 지나면 집안 박물관이 있어 집안시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불리는 광개토왕비 탁본이 걸려 있다. 탁본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되어 보인다.
박물관은 가운데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집안시에서 출토되거나 발굴된 고구려 시대 유물들이 비교적 잘 전시되어 있다. 이들 전시실에서는 사진 촬영을 허용하지 않고, 직원들의 감시도 엄격한 편이어서 기록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박물관을 안내하는 도록은 아직 완성되지를 않아 박물관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 역시 쉽지가 않다.
박물관에서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고구려 시대 와당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이 중 천추총에서 발굴된 명문 벽돌의 실물이 이곳에 있고, 태왕릉에서 발굴된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 방울이 이곳에 있다. 그리고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사와 관련된 도자기, 제기, 신발, 화덕 등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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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박물관 안에 있는 '고구려 역사 중요 기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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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기 |
| 그 외에 <한서>, <삼국지>, 호태왕비 등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하여 고구려 역사의 중요 사실들을 기술한 안내판과 <구당서>, <삼국사기>등을 인용해 고구려의 멸망과정을 설명하는 '고구려 유민 천도 정황'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을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왼쪽으로 건물을 지을 때 썼던 주춧돌과 문을 다는데 썼던 돌쩌귀, 맷돌 등이 노천에 널려 있다. 이들이 언제 어디에서 온 것인지 하는 내용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최근 발굴하면서 출토된 대단치 않은 유물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