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아침이었어요.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계상이가 옆에 있는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저와 계상이 사이엔 원이가 예쁜 모습으로 쌔근쌔근 잠이 들어있습니다.
벌떡 일어나 상황을 짚어보자니, 여긴 빈교실이었구요,
덩그라니 교실 정중간에, 저와 계상인- 잠이 들었었나봐요.
교실 창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엔, 어제 그 멤버들이 이리저리 퍼져있었구요.
미나는...여전히 안 보이는걸 보니, 아무래도 여자애들 묵는 교실에 있나봐요.
막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일어서서 교실을 나서려는데...
계상이 손이 제 손목을 덥썩 잡아챕니다.
"어디가게."
"애들도 깨워야 하구..씻고 밥준비 해야지.."
"아- 머리아파.."
아무래도 계상이는, 어제 엄청 과음을 했던 모양인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섭니다.
아, 갑자기 계상이를 보니-
그냥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드는거 있죠.
계상이한테 미안할게 뭐가 있냐구요?
아니요... 계상이를 보니 미나가 떠올라버려요.
흐릿하게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릿속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울면서 제가 싫다고 외친 미나가 자꾸 떠오르는걸요.
"수건 갖고와. 나 수돗가 가있을테니까.."
먼저 홱 교실을 빠져나가는 계상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쫓으며,
그자리에 가만히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아무래도 미나에게 가봐야겠다는 마음에..
저도 계상이를 쫓아 교실을 나섰어요.
옆교실 패인 창문 사이로, 벽에 기대어 쭈그려 잠든 미나의 모습이 보이구요,
그냥 뭐라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요.
저한테 어떤 모진말을 해도 좋으니, 미나가 절 미워하지만 않았으면 해요.
누군가한테서 미움을 받는다는건 정말 슬픈 일이니까요.
드르륵 문을 열고, 막 교실로 들어서니..
깊이 잠들어 있던건 아닌 모양인지, 미나가 눈을 뜨고 절 쳐다봅니다.
죄를 짓는다는건....이런 기분일까요.
그치만, 아무리 따져봐도 전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아무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미나를 보면 이렇게 미안해 지는걸요.
"...아..깼니 미나야? 나 지금 씻으러 갈건데...같이 갈래?"
"........계상이 오빠는요?"
어제 그 울던 연약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 미나의 모습은 뭐랄까요.
상당히 공격적이라고나 할까요-
눈도 안 마주치며 묻고는, 저벅 저벅 뒷문쪽으로 향합니다.
아마도 미나는, 제가 많이 싫은가봐요.
"계상이..수돗가에서 씻고 있을거야..."
"....언니.."
"응?.."
"나 좀 도와줘요..."
아까 그 매서운 눈빛은 또 어디로 간건지,
어제의 그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온 미나는-
앞문에 멀찌감치 서있는 저더러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도와달라니...."
"...나 좀 도와줘요...도와달라구요....언니라면....
계상이오빠가 나 좋아하게 할 수 있을거예요...언니..부탁할게요..."
지금 이 상황을 두고 진퇴양난이라고 하는건가봐요.
완전히 계상이와 미나 두 틈에 휩싸여 오도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린걸요.
하지만, 지금 미나가 제게 한 부탁.
전.. 들어줄 수가 없는걸요.
미나도 계상이를 많이 좋아하지만-
......저도....계상이를..아주 많이 좋아하거든요.
"나도 언니를 미워하긴 싫어요.. 근데 언니가..날 그렇게 만들어요.
날 더이상, 언니를 미워하게 만들지 말아요. 너무...화가 나."
그러면서, 찬 바람을 남긴채 홀연히 밖으로 나가버리는 미나입니다.
잠시동안은, 울컥거리고 화가 터져나오려고 했지만-
다시 어제 울며 말하던 미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니..
화난 마음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다시 미안한 마음만 가득한걸요.
...도대체..어떻게 해야하는건가요?
** ※ 출처만 밝혀주시면 제 펌허락 없이도 소설을 퍼가실 수 있습니다.
느즈막한 오후 때가 되었을 때야, 근처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올 수 있었어요.
명훈선배는 아직 많이 취한 탓인지 비틀비틀, 넘어지기 일쑤구요.
전 계상이가 사준 그 흰 원피스를 입고 나왔구요.
계곡에 다다르자마자 차디 찬 계곡물에 풍덩 몸을
던지는 호영이와 명훈선배.
뒤이어 선경이와 지영이 마저도 몸을 던져버립니다.
재밌어 보이기도 하지만, 원이를 안고 있는 전-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 수가 없는걸요.
그리고, 솔직히 기분상 그렇게 내키지도 않구요.
그 이유라 하면- 계상이와 미나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계상이는 어젯밤 그 일로, 더 이상 미나와는 얘기도 하기 싫었는지..
미나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면 자리를 피해버리고...
그런 미나는 잔뜩 울상이 되어서 또 울기 일보직전인걸요.
이거 달래줄 수도 없고, 너무 곤란한 상황이랍니다.
"희원아~ 들어와~ 시원해~"
멀리서 호영이와 물장구를 치며 놀던 선경이가,
오라며 연신 소리를 쳐대지만-
아니 지금 이 상황에 물놀이 할 기분이 나겠냐구요. ㅜ_ㅜ
가만히 돌에 걸터앉아, 점심에 먹을 라면만 열심히 끓여대는데..
그런 제 옆에 계상이가 오더니 털썩 걸터앉아버립니다.
"배고파? 다 되가..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너도 같이 놀아~"
"...씨발...넌 내가 여자 때리면 용서 안 할거지?"
"...여자 때리려구?"
"......씨발.."
계상이는...그저 미간만 잔뜩 찡그린 채,
멀찌감치 멍하니 서있는 미나만 노려볼 뿐이었고,
그런 미나를 바라보다가 착잡해진 기분으로 다시 점심준비에 열중했답니다.
차라리 이런 M.T 계상이 말 듣고 오지 말걸 그랬나봐요.
잔뜩 짐만 안고 떠나겠는걸요.
"와~ 라면이야~? 안 그래도 라면 먹고 싶었는데~ 출출하다 출출해~!"
"잘 끓였다 희원아! 안 그래도 국물 같은 거 되게 먹고싶었는데.."
물을 뚝뚝 흘리며, 라면 주위에 모여들고-
생각도 없고 이 기분에 먹어봤자 체하기만 하겠단 생각에..
살며시 빠져 멍하니 서있는 미나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라면 다 끓였는데...먹어. 맛있게 끓였어.."
"짜증나요.. 화가 나고 너무 싫어요.."
"잠시 잊고...얼른 가서 먹어..아까 아침도 잘....."
"내 앞에서 착한척 하지 말아요!!!!!!!"
와락 소리를 질러버리는 미나...
놀란 원이는 잠에서 깼는지 눈을 깜박거리고-
한바탕 라면을 먹어대던 패거리들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댑니다.
뭔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말이예요.
"...미나야..."
"언니가 너무 짜증나는거 알아요?!
왜 착한척이예요? 가식같아! 사람들 앞에서 착하게 보이고 싶어요?"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어요.
뭐라 한마디 변론이라도 해야하는건데,
제 입은 꽁꽁 다물어진 채 움직이질 않았고
고개는 익은 보리처럼 점점 숙여져 가더라구요.
그때,
가만히 앉아있던 계상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제 옆에 바싹 다가섭니다.
"미나야..."
"다 짜증나요!! 언니 착한 척 하는게 너무 짜증나요!!!!!!"
"....장미나! 너 선배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급기야 계상이가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구요.
미나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해서는-
그런 계상이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쳐다봅니다.
"오..오빠.."
"..한번만 더 이러면. 그땐 정말, 여자라도 가만 안 있어."
"....오빠...."
"..이희원은 니 친구가 아니라 니 선배야.
앞으로 한번만 더 이렇게 함부로 상대했다간..."
"오빠는 왜 내 맘을 안 알아줘요?!?!"
...미나는 다시 학교쪽으로 뛰어가 버리고..
이미 분위기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걸요.
다들 계상이 눈치를 보며 라면을 조용히 먹고-
화난 듯 미나가 서 있던 자리를 노려보던 계상인,
다시 절 바라보며 말합니다.
이희원의 수난시대가 다시 찾아와버린건가요.
"넌 후배가 저렇게 너한테 대드면, 큰소리라도 쳐야지!!
왜 가만히 있는거야? 씨발.....미치겠네 진짜."
"너 미나한테 너무 심하잖아.."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해?"
".............."
"답답하게 좀 하지마. 알았어?"
데니오빠 사건보다-
훨씬 훨씬, 몇백배로 심한가 봅니다.
이렇게 안절부절, 제 심장이 뛰어대는걸 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