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도성의 북소문 창의문(彰義門)이다.
1936년 한양도성을 쌓을 때 한양으로의 출입을 위한 성문으로 축조되었다.
동서남북에 4대문을 세우고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다.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 사이 건방(乾方)에 북소문을 세운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그 아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창의문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다.
'의(義)를 기리고 표창한다'는 의미의 창의이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5개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시대의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하고 있는 창의문이다.

창의문 홍예문 천장에는 오색구름과 닭처럼 생긴 봉황이 그려놓았다.
창의문 밖의 땅 모양이 지네를 닮아 나쁜 기운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지네는 닭의 천적이라고 한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고 했다.
홍예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닭을 통해 나쁜 기운이 성안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벽사(辟邪)의 의미로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다.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창의문 홍예 가운데에 있는 조각이다.
이 홍예 조각은 용은 아니고 닭으로 해석하고 싶다.
예로부터성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성문 밖 지형이 마치 지네와 같았다. 그래서 지네의 상극인 닭을 매달아
그 악기를 누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창의문은 인조반정의 현장이다.
반정군은 광해군 15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弘濟院, 현재 지하철 3호선 홍제역 부근으로 서대문구 홍제동 138번지 일대)에
집결한다. 이들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과하여 도성으로 잠입하게 된다. 이어 창덕궁을 장악함으로써 광해군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결국 새로운 인조정권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영조 19년(1743) 영조가 세검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오던 길에 창의문에 들렀다. 옛 인조반정의 일을 회고하는 과정에서 이를
기리기 위해 시를 짓고 당시 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현판에 새겨 걸게 하니 이 현판은 창의문에 걸려 오늘에까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