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집중 수행 일기
첫째 날 명칭 붙이기
추석을 전후해서 8일 동안 집중수행기간이 있었다.
중간에 출근도 하고 또 추석 준비와 차례도 지내야 했기 때문에 5일정도 참여한 셈이다.
시어머니가 치매기가 있고 병환이지만 남편이 돌보고 계사다. 복직이 되거나 취직이 되면
일을 분담 할 수도 있어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아깝다. 잘 사용하고 싶다. 진하게 전력투구해야만 남편의 수고로움에 대한 보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연휴에는 이 아까운 시간을 집중수행에 쏟았다.
자애관을 하면서 잠시 잠시 본 것이지만 스님에 대한 신뢰가 수행을 이끈 힘이기도 하였다. 쉼 없는 인터뷰 속에서도 자애롭게 잘 들어주시고 일러 주시는 자상함이 감동이 되었다. “이 땅에 이렇게 자애롭고 정성스러운 스님이 계시구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응! 응! 응! 하며 들어주시는 작은 소리가 내게는 자비의 큰 울림으로 다가 왔다.
위빠사나 초보 수행자가 이런 수행일기를 쓰기가 쑥스럽지만 이렇게 다가온 스님께서 내주신 과제라 수행일기를 올리게 까지 되었다.
모든 것에 명칭 붙이기
9월 30일 4시에 입제하여 첫 번째 받은 과제가 모든 몸 마음의 움직임에 명칭 붙이기를 하였다.
일차적 관심 대상은 배의 팽창과 수축에 집중하였다.
몸이 무거우면 무거움. 꿈틀거리면 꿈틀거림, 뜨거우면 뜨거움이라고 이름 붙이며
배의 팽창 수축에 집중하였다.
마음에 답답함이 올라오면 답답함이라고 이름 붙였다. 경행 시에도 오른발, 왼발하면서 이름을 붙이며 가능하면 마음이 몸을 떠나지 않도록 마음을 챙겼다.
마음은 쉼 없이 일을 계획하는 미래로 달려간다.
어떻게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나! 어떻게 재미있는 수업이 되게 하나! 전교조 분회를 어떻게 잘 꾸려가나! 내 일생을 투자할 만한 일이 무엇일까! 내가 이 땅에 와서 반드시 하고 갈 일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 마다 생각! 생각! 생각! 명칭을 붙이며 몸으로 마음을 돌아오게 했다.
밭갈이 할 때 소가 배추밭으로 가고 풀밭으로 갈려고 하는 것을 이랴! 이랴! 하면서 고삐를 흔들어 이랑을 갈게 하 듯 명칭을 붙이며 다시 몸으로 돌아와 호흡에 집중하다.
참 마음이라는 놈은 원숭이가 깝치듯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어느새 생각 놀음을 하고 있다.
일몰 시간에 잠시 선원 밖 포풀라 나무 길에서 경행을 하였다.
그곳으로 가면서 차가 보이면 보임! 보임! 보임하고 이름 붙이고 사람이 보이면 보임! 보임! 하고 명칭을 붙이고 남자를 만나든 여자를 만나든 그렇게 보임! 보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무를 보아도 장미꽃 나무를 보아도 그냥 보이는 대상으로 보임 보임이라고 명칭을 붙였다. 그곳에는 보임의 평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모든 대상이 보이는 대상일 뿐 이쁜 여자, 잘생긴 남자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는 듯 했다.
아! 이렇게 고우니 미우니 보기 싫으니 좋으니 판단 분별없이 그냥 보이는 대상으로 본다면 얼마나 좋으랴! 얼마나 자유로울까!
지금 이런 봄의 고요함이 일상에서 지속될 수 있을까?
봄의 평등이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내 생각도 보면서 생각! 생각! 생각! 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오른 발 왼발의 발걸음에 집중하다.
얻고자 하는 마음을 놓는 것이 수행이다
좌선 시 배의 팽창 수축에 집중하면서 몸과 마음의 움직임을 보는데 배의 들고 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팽창하면서 힘이 들어가고 수축하면서 수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간다.
내 마음으로 팽창 수축을 조작하려고 한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숨쉬기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한탄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한탄! 한탄! 하고 명칭을 붙인다.
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을 나무라고 타인을 못마땅하게 하는 습이 뿜어내는 생각의 독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내 생각을 보면서 또 생각! 생각! 이라는 명칭을 붙이다.
내 몸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배로 돌린다.
또 오랫동안 수행해온 주력을 덧붙여 수련의 효과를 거두려는 마음도 일어난다.
의도! 의도! 하고 명칭을 붙이고 배의 팽창과 수축에 명칭을 붙이며 배를 바라보다.
그럴때마다 스님의 말씀이 힘이 된다.
“수행은 무엇을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다.”
항상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습이 있고 그것도 목표를 효과적으로 이루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매사에 의미를 붙이며 살아왔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바라보고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6문을 잘 지키면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그냥 받아들이고 흘러가게 하는 일이 가르킴대로 되지 않지만 알아채는 즉시 이름을 붙이며 생각을 잡지 않고 몸의 현상을 붙들려 하지 않으려 명칭을 주문처럼 붙인다. 중국 영화에 나오는 강시의 얼굴에 부적을 붙여 꼼짝 못하게 하듯 명칭을 붙이며 생각의 꼬임에서 깨어 있으려 하다.
집중 수행 둘째 날-통증이란 놈하고 놀다.
수행 둘째날이다.
3시에 일어나서 3시 20분 쯤 예불이 시작되었다.
설잠에서 깨어나 몸이 무겁고 힘이 들어 기진맥진했다.
잠이 워낙 많고 특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날은 힘겹다.
이런 내가 3시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특이한 아침 예불시간을 가졌다.
공부하려 오신 외국 비구니 스님의 안내로 다 같이 예불문을 경건하게 읽었다.
기진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몸에 미열도 있어 그 몸을 그대로 바라보다.
또 예불할 때도 꿇어 앉아 한 시간 이상을 견뎌야 했다.
예불에 집중을 방해 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다리 아픔을 그냥 바라보면서 아픔을 흘러 보내었다.
예불문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게 예불을 올린다면 큰 스님이 계시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부처님의 찬탄으로부터 시작하여 자애관, 위빠사나에 대한 내용, 보시에 대한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예불문 중에서 자애관, 보시관, 행복관, 위빠사나관은 나중에 학생들과도 같이 읽어 보며 명상 공부의 내용으로 삼으리라 마음을 내기도 하다.
예불이 끝나고 스님도 같이 한 시간 가량 좌선 수행을 하였다.
먼저 자애관을 하고 배에 집중하니 졸음한테 온통 시간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졸음이 올 때는 졸음을 주시하였다. 눈꺼풀이 무거워짐! 무거워짐! 어둠처럼 덮쳐오는 무거운 느낌이 다가오기도 한다. 무거움! 무거움! 명칭을 붙이고 그러다가 깜박 고개를 끄덕이면 뒤에라도 알아채고 고개 끄덕임 이렇게 명칭을 붙이며 잠에 빠지려는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다.
통증이 오면 오히려 반갑다. 그 통증의 변화를 보면서 잠을 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반 이상을 움직이지 않고 좌선을 하는데 다리가 많이 아프다.
그 아픔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알아챈다.
“ 싫어하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그냥 대상으로 본다.”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을 이완 시키고 다시 아픔의 변화를 바라본다.
아픔의 강도가 한참 계속되다가 허벅지가 꿈틀하기도 하더니 잠잠해진다.
또 다시 아픔이 온다.
“아픔도 기쁨이상으로 수용한다.” 스스로에게 명령한다.
통증! 통증! 하고 명칭을 붙여보기도 하지만 변화가 없다.
명칭을 붙이지 않은 상태로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긴장을 풀고 바라보다.
다리의 통증이 심해지다가 약해지더니 어느새 고요해지면서 온 몸에 땀이 나다.
통증사라짐! 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이렇게 아픔이란 아주 거친 놈하고 놀면서 새벽 시간을 잘 보낸 셈이다.
덕택에 졸음이 온데 간데 없다.
재미있는 경행
아침 죽 공양을 들고 경행하는데 해골이 걷듯이 몸의 뼈가 보이는 듯 하다. 뼈가 움직이는 모양하며 몸 전체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도 하다.
어느새 명칭 붙이는 것을 잊다.
“모양과 형태를 쫓지 마라” 스님의 말씀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왼발, 오른 발 하면서 빨리 또는 천천히 경행을 하다.
한발 한발 뛰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으는데 나중에는 다리 윗부분의 몸은 느껴지지 않고
발바닥의 감촉만 남는다. 투명인간이 발만 내놓고 걷는 기분이다.
그래도 그 촉감을 아는 마음은 그대로다.
이것 또 내 생각의 장난인가!
잠시 결론을 미루고 나중에 확인을 하니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천천히 경행을 하면서 움직임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 보기도 하다.
듦, 뜀, 옮김, 닿음, 누름! 듦, 뜀, 옮김, 닿음, 누름! ....
온 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땀이 나기도 하고 어께에서 몸통으로 기운이 움직이기도 하고
등골짝으로 뭔가 또르르 떨어지기도 한다.
한번 가는데도 100미터 달리기 한 것보다 더 땀이 많이 나고 더웠다.
긴장을 해서인지 어깨가 묵직하다. 그것을 알아차리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긴장을 풀다.
서려는 지점에서 섬섬하고 돌면서 돎돎 명칭을 붙이고 다시 경행을 하다.
경행이 변화가 많아 더 재미있다.
천천히 걷는 것이 힘이 들면 좀 빨리 걸어본다.
오른 발! 왼발! 하면서 걸으면 가끔 뒤에서 누구 미는 듯 걸음이 저절로 되어지는 듯 하다.
집중 수행 사흘째
간밤에는 선원 앞 가게에서 젊은이들이 밤새도록 기타치고 떠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두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양 무겁다.
운동으로 풀지 않고 그 무거운 몸 부분 부분을 바라보았다.
새벽좌선수행이 끝날 쯤 많이 풀어졌다.
아침 죽 공양을 들고는 일치감치 선원에서 출근을 하였다
학교 중정 뜰에서 경행을 하고 있노라니 아이들이 외친다.
선생님 예뻐요. 선녀 같아요!
오! 그래! 고맙구나!
수행의 공덕을 아이들에게 회향코자 아이들과 같이 명상을 하였다.
교실로 들어가면서 자애관을 하였다.
3학년 우리 아이들 모두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육체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모든 적의감에서 벗어나기를!
부디 우리 아이들 행복하고 평화롭고 간강하기를!
이렇게 수업준비를 하면서 교실에 들어서니 또 아이들이 교탁겸용의 컴퓨터에 매달려 있다.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이 강아지들! 자리에 앉아야지 하면서 엉덩이를 두들겨 자리로 보내고 명상을 하다. 몇 아이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는 참으로 고요히 집중해서 잘했다.
매일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저녁 늦게 수행원에 돌아오다.
각종의 소리가 들리다.
소리 명상을 하다.
차 소리도 온갖 가지였다.
쉼 없는 소리의 이어짐 속에서도 갖가지 소리가 섞여 들렸다.
짐차소리, 작은 차 소리, 경적이 날카로운 소리, 부드러운 소리, 차바퀴의 급정거소리 그 가운데서도 사람소리도 들리고 새소리도 들린다.
이런 모든 차별의 소리에 분별심 내지 않고 들림 들림이라는 명칭을 붙이다.
상을 짓지 않고 그 소리의 기능을 있는 그대로 소리로 들으니 그냥 소리의 들림인듯했다.
말하자면 소리의 평등이었다.
스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며 인간이 60이 되어야 이순이라는데 이런 소리에 대한 평등심 이루어지면 참 자유롭겠다고 말씀드리니 웃으시며 60이 아니라 17살짜리도 이순해질 수 있다고 하신다.
집중수행 나흘째 -요상한 현상들의 출몰
오늘은 몸에 점점이 기운이 몰린다.
이마에도 몰리고 백회에도 몰리고 가슴, 배꼽뒤 척추 또 단전 어깨에도 몰린다.
스님의 안내대로 하지 않고 그 곳에 안주해서 오래 오래 그 기운을 즐기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 마자 배로 돌아와 팽창 수축에 이름을 붙이며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매어 놓다.
오늘은 어깨가 무겁더니 어깨의 뚜껑이 열리듯 벗겨지면서 그곳에 보라색 난초꽃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상!상! 하면서 이름을 붙이고 사라짐을 바라보다. 한참 만에 그것이 사라지다.
이번에는 어깨에 안개가 피어오르다 사라지듯 그렇게 어깨가 사라지듯하다.
사라짐 사람짐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가슴에 기운이 뭉쳐 바라보니 그곳이 뚫리더니 스님의 웃는 모습과 함께 탑처렴 쌓아올려진
이 세상에서 한번도 보지 않은 하얀꽃이 피어났다.
또 상! 상! 하면서 명칭을 붙이며 그것의 변화를 보다.
마침내 사라져 사라짐! 사람짐! 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말씀드리니 상을 보거나 형태를 보지 말라 다시 한번 일러 주시다. 기운이 몰리는 곳을 집중하면 몸 속에서 여러 소리도 들린다.
꼬로록! 쭈루루룩! 꾸루룩!.....
다른 수행자 방해될까봐 급히 배로 관심을 다시 돌리기도 하다.
오늘은 참 요상스러운 현상들이 많이 나타난 날이다.
해살이 쏟아지는 날 강물에 강열한 햇살이 반사되듯한 하얀 빛이 눈에서부터 환해지면서 몸 전체가 환해지는 듯한 현상도 나타나 그냥 또 상! 상! 하고 이름을 붙이니 잠시 후 사라지다.
또 배의 움직임이란 대상에 마음이 착 달라붙는 듯 하더니만 배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고 고요함과 기쁨이 찾아왔다.
이런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평화스러움이라 하고 기쁨이라 하지 않을까!
좀더 향유하고 싶었는데 또 그 현상은 사라졌다.
히! 허무한 것! 무상한 것!
그 후로도 그러한 현상에 집착하려는 마음이 일어나 집착! 집착! 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흘러가게 하다.
그러한 평화와 고요와 기쁨이 일상에서 지속된다면 바로 그것이 극락일 듯 싶다.
그런 상락아정의 상태가 죽기 전에 올 수 있을래나!
진정한 평화가 그러할 것 같은데....
집중수행 닷세째- 조용한 마음으로 배의 다양한 움직임을
워이 이런 일이!
오늘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혼침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난 잠을 참 잘 잔다.
졸려서 베게에 머리를 대면 10초안에 잠이 드는 듯하다.
우리 딸도 그러한 나를 신기하게 여긴다.
스위치를 내리면 불이 꺼지듯 그렇게 자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영락없는 6시다.
잠시 명상을 하고 향을 사르고 5분향을 왼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계의 향기가 나의 삶을 채우고 고요함의 향기가 지혜의 향기가 그리고 해탈의 향기가 차고 넘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목소리를 다듬어왼다.
천수경을 읽고 보시바라밀행의 상징으로 마련된 보시단지에 돈 1000원을 상징적으로 넣는다. 그리고 잠시 자애관을 하고 삼배를 지극한 마음으로 하고는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일상 대신에 이곳에서는 3시에 일어나 30분간 예불을 올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몸이 조용해진 셈인데도 한번도 혼침에 빠지지 않았으니 신기하고 신기한 일이다.
몸의 자극이 특별하게 없어 지속적으로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되었다.
배의 움직임도 어찌나 무상한지!
배가 크게 움직이기도 하고 깊게 움직이기도 하고 때로는 수축의 폭이 얇기도 하다.
그리고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기도 하다.
배가 팽창하는 처음과 끝을 보기도 하고 수축하는 시작과 멈춤을 보기도 하고
그 과정의 길이도 보고 떨림도 보다.
그러다 팔뚝에 기운이 있어 바라보니 갑자기 팔뚝이 없어진 듯하다.
마침 비개인 날 이른 아침의 상쾌하고도 투명한 맑음 같은 기분이다.
가슴도 기운이 몰려 바라보니 또 그렇게 사라진다.
가슴 한쪽이 없어진 듯하다.
배꼽 뒤에 기운이 있어 바라보니 그곳으로 시원한 바람이 나오면서 가을 하늘 보다 더 진한 색의 푸른 꽃이 다섯 송이 피어난다.
상1상! 명칭을 붙이면서 그 현상의 변화를 바라보는데 마음이 편안하다. 편안함! 편암함!이라고 명칭을 붙이기도 하다. 또 이것이 무슨 현상인가 호기심이 일기도 하다. 그래서 또 호기심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그 변화과정을 바라보다 다시 배로 돌아오다.
한참 좌선 수행하는데 누가 문을 연 모양이다.
밖에서 돌아가는 기계음 소리가 들려온다.
몸이 확 흩어져 기계 소리가 되어 같이 돌아가는 이상한 현상도 일어났다.
내가 소리인지 소리가 나인지 모르는 그런 현상이다.
스님께 말씀드리니 고개 끄덕이며 들으시고 별도의 지도 말씀은 없으셨다.
오후에는 추석 준비때문에 집으로 향했다.
몸이 많이 힘든 상태다.
선원을 나가니 허기진 상태가 되다.
몸이 괴롭다.
이 괴롭다는 것은 느낌이라지!
여기에 싫다느니 하는 생각을 붙이지 말랬지!
마음을 모아 몸의 현상을 관찰하다.
몸에 기운이 없고 배가 고픈 상태고 약간 미열이 나고 다리에 힘이 없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는 몸의 성질을 그대로 보고 그러한 몸의 힘듬에 대해서 또한 마음이 힘들어 함을 보다.
전철울 탔는데 앞에 젊은이가 앉아 있다.
나를 보더니 눈을 감는다.
불쾌한 기분이 올라옴을 본다.
불쾌한 감정! 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감정이 사라진다.
자애관을 하다.
이 육체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이 여자분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이 전철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다리도 아프다.
칭얼거리는 아기를 바라 보듯이 평안한 마음으로 다리 아픔의 현상을 그냥 대상으로 관찰하다.
전처에서 내려 전철가까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과 같이 차례상 시장을 보러 가다.
딸아이가 엄마 힘든 것을 알고 어깨동무를 하고 안듯이 하고 걷다.
이 딸 아이가 행복하고 평화로고 행복하기를! 건강하기를!
스스로 감동스러운 마음으로 자애심을 보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때도 상인들에게 자애관을 하다.
야채를 주신 이 분이 평화롭고 행복하시길!
소고기를 주신 이 분이 평화롭고 행복하시길!
.....
몸이 피곤한 중에도 마음은 편안했다.
집중 수행 엿새째 날 -음식 명상시의 요상한 현상
동서 가족이 늦게 오는 바람에 제사가 늦었다.
음식상을 다 차리고 제사밥이 식은 밥이 되어 가는 데도 오지 않는다.
조급한 마음이 올라옴을 보며 조급한 마음이라고 알아차리다.
해 온 음식도 간단하다. 서운한 마음이 올라온다. 서운함! 서운함! 이라고 명칭을 붙이며
설거지를 하다. 내 마음이 그릇이라 생각하고 이 그릇 닦는 행위가 마음의 분진을 닦는 행위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그릇을 닦다.
또 내가 그러한 마음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그릇을 닦다.
여느 때 같으면 오후에 아이들의 고모님 가족들이 제사를 치루고 우리 집으로 모여드는데 이번에는 소식이 없어 망설이니 딸아이가 “엄마! 내가 손님 대접 할테니 공부하러 가시라”한다. 제사 과일을 닦기 전에 스님 상에 올리려 미리 담아둔 사과와 배 포도를 들고 집을 나서다. 다른 음식도 가져갔으면 하는데 마땅찮아 아쉬웠다. 그러한 아쉬워하는 마음도 알아차리며 선원으로 서둘다.
좀 빠른 걸음으로 걷고자 하는 의도를 내니 오호! 발걸음이 자동적으로 빨라지듯 하다.
기분인지 뭣인지 모르지만 걸음이 편하다.
점심 공양상이 화려하다.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채며 음식을 들어 접시에 담다.
누가 점심공양을 올린 모양이다.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다. 감사함! 감사함! 이라고 명칭을 붙이다.
이 음식이 내게 오기까지 수고하신 모든 인연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합장을 올리고
이 음식이 나의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모든 존재하는 이들도 더불어 공양 받으시길 바라는 마음도 덧붙이다.
음식을 씹는데 입뿐만 아니라 온 몸이 다 움직이는 듯하다.
음식을 들고자 하는 마음과 음식을 들러 가는 움직임과 음식을 집고 음식으로 가고자 하는 의도 입을 벌리고 먹고자 하는 의도와 움직임을 바라보기도 하다.
음식의 형태가 입속에서 변하고 밀입자가 되고 마침내는 물처럼 묽어지고 삼키는 과정도 살피다. 맛도 처음에는 각 음식의 맛이 그대로 온 몸에 전해진다. 사과의 싱그러운 맛이 온 몸을 감싸고 배의 달콤한 맛이 또한 그렇다. 그러나 단물이 삼켜지고 찌꺼기가 물이 될 쯤이면 맛도 없어진다. 그리고 몸속으로 사라진다. 무상의 현상이 그대로 입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라진 후에 느낌을 살피면 그 음식이 아지랑이처럼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것이 느껴진다.
맛이 좋은 음식을 먹을 때는 이 맛을 여러 불보살님과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께 공양 올립니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이 음식의 에너지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사방으로 퍼지는 듯하다.
음식을 넘기고는 가만히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면 재미있다.
또 재미있어하는 마음을 알아챈다.
어깨가 아파 그곳을 의식하면서 넘긴 음식의 에너지가 그곳으로 몰려가는 듯했다.
호기심이 발동하다. 호기심이라고 알아차리면서도 기어코 해본다.
이번에는 여러 곳에 마음을 두고 음식을 넘겨 살피면 또 그곳으로 음식의 기운이 간다.
나중에 스님께 말씀드렸드니 실상이 아니라 생각이라 하신다.
그런데 그 느낌이 눈에 보이듯 생생하다.
집중수행 일곱째날 - 사대가 한꺼번에
간밤에는 잠을 자지 않은 셈이다.
온 몸을 관하는데 뭉친 부분이 꿈틀거리며 다 풀리고 온 몸이 아지랑이가 된 기분이다.
그 상태가 참 편안하고 기분이 좋다.
12시가 넘고 새벽이 다가오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의식이 말똥말똥하여 밤새 그냥 몸을 바라보면서 지새운 셈이다.
그런데도 첫째 날이나 둘째 날처럼 그렇게 피곤하지가 않다.
평소에도 이러하면 얼마나 좋으랴!
24시간을 풀로 깨어 살 것 같다.
오늘은 몸의 사대요소를 보라 하신다.
다시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으며 좌선을 하는데 4대의 요소가 한꺼번에 일어나는 듯했다.가슴 부분에 기운이 몰려 관찰하면 이마에 다시 자극이 일고 바라보면 바람이 나오고 꿈틀거림이 어깨에서 배로 움직여가기도 하고 윗입술은 따갑기도 하고 그러다가 몸이 뜨겁고 땀이 나오기도 한다.
몸을 이루는 요소인 지수화풍이 따로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고 한 가지가 일어나면 나머지 세 가지가 따라 나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은 경험한 것 같다.
코에 자극이 있어 관하면 코가 사라지고 귀를 관찰하면 귀도 허공이 된 듯한 현상도 경험하다. 두개골 부분을 관하면 묵직하고 딱딱하고 옥죄는 듯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을 한참 관하면 그 현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두개골 표피 안을 관하면 무엇인가 꿈틀거린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머리칼로부터 몸 구석 구석을 관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한 알아차림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지!”라는 의문이 일어 의문!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다.
집중수행 마지막 날-몸에 대한 차별상이 사라지려만
경행을 하는데 오늘은 다른 날 보다 많은 현상들을 알아챈 셈이다.
발걸음을 띄는데 방바닥에서 떨어지는 것 속에서 미묘한 응집과 분리의 현상이 포착되고
발을 옮기면서 바람의 기운이 포착되고 발바닥을 바닥에 놓을 때는 차거움과 그 차가운 기운이 몸 전체로 전이되니 좋은 감정이 포착되고 “좋구나1” 하는 생각도 포착되다.
발을 뛰기 위해 발가락이 눌릴 때는 무거운 느낌과 물론 방바닥의 딱딱함도 동시에 포착된다. 더운 기운이 하체에 몰리고 상체는 가볍다. 땀도 나고 등골짝에는 또 물방울 같은 같이 척추를 타고 흐르고 이마에도 바람이 난다.
멈추어 돌때는 나무토막처럼 되고 경행을 하면서 또 몸의 현상에 변화가 일어난다.
어깨 부분에 감각이 일어 바라보면 구름이 흘러가듯 어깨의 피부 아래로 구름 같은 흐름이 느껴지면서 기분이 좋다. 때로는 결혼식장에서 피워내는 흰색 기체같은 기운이 어깨에서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팔을 관하면 또 팔이 갑자기 없어진다.
이 현상은 몸을 오대의 조합이라고 보더니만 공의 현상인가!
의문을 갖기도 하다.
갑자기 꿈에도 생각지않은 과거일이 뜨오르기도 하다.
참으로 부끄러운 젊은 날의 일인데 그것이 또렷하게 뜨올라 다시금 안도의 숨을 쉬게 되기도하다.
"회상! 회상!" 하고 명칭을 붙이며 그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지는 과정을 차분하게 바라보다. 어느곳에 숨어 있던 복병이 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스님께 회상 건을 말씀드리니 더 어린 날의 일들도 떠오를 수 있다고 하신다.
몸이 정화되는 만큼 나를 잘 보게하는 거울이 생기게 될 모양이다.
몸의 현상을 자세히 알면 알수록 몸을 알고 또 몸의 현상을 아는 것은 마음을 아는 것이니
몸과 마음을 알아가는 지혜를 증장시켜 나가는 길이란다.
이렇게 몸을 잘 아는 것이 몸한테 잘 해주는 것이란다.
그리고 몸을 사대요소의 조합으로 보게 되면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하는 몸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 것 같은데 아직 이것은 감에 불과한 셈이다. 좀더 몸의 실상을 파악해야 할 일이다
집중수행 그 후
이번 집중수행은 무엇을 얻어가는 것 보다. 하지 않고 바라보기를 훈련하고 가는 셈이다.
그리고 아직은 체화되지 않았지만 고요함과 평화란 것이 무엇이며 기쁨이 어떤 것인지
짐작함에 따라 수행에 대한 호기심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수학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집중 수행 후 그 이튼날 경행을 하면서 출근을 하는데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여 갸우뚱거리다.
물고기가 물 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공기의 저항이 느껴지다.
이럴 수도 있나 하는 의문이 일어나다.
한참동안 그 느낌을 그대로 느끼면서 천천히 걷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며 호흡이 거칠어지니 그러한 현상이 사라지다.
다시 평지로 들어서 오른 발 왼발하면서 명칭을 붙이며 가는데
엄마가 아가의 발걸음에 구령을 붙이듯 내가 나한테 구령을 붙이고 그 구령대로
발자욱을 내딛는 듯한 느낌이 또렷했다.
또 산새가 우는데 그 소리가 흩어져 내 속에 들어오고 나는 또한 소리가 되어 허공 속에
경계가 없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착각인가!
다음기회에 스님께 여쭈니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시며 딱 잘라 그것은 관념이고 환상이라 하지는 않으셨다.
그 다음날은 지렁이의 가르침에 직면했다.
아침 출근길에 지렁이들이 많다.
어떤 선한의도를 가진이가 사람들을 위한다고 길옆의 흙을 뒤집어 길을 넓힌 후부터 지렁이들이 보도로 나와 뒹굴고 있다가 말라죽고 밟혀 죽고 있다.
아침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있으면 말라죽고 밝혀 죽을 지렁이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작은 나무 가지를 주어서 흙을 잔뜩 몸에 묻히고 꾸물거리는 지렁이들을
길섶의 숲속 그늘로 던져 넣어 주었다.
그늘 숲에서 몸을 보호하며서 땅으로 들어가 생명을 유지하기를 바라서다.
지렁이를 던지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리고 가슴 부분이 섬찟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별로 좋지 않은 느낌이 몸에 까지 반응을 일으킨다.
그 찌르르한 몸의 현상을 주시하고 일어나며 스스로 당황하는 감정도 바라보다.
살리려는 마음으로 한 짓인데 지렁이를 건드리며 느끼는 징그러운 감정과 섬찟하게 움직이는 몸의 반응은 무엇이 조건이 되어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는가?
지렁이 자체는 징그러운 요소도 없고 섬찟할 만한 요소도 없는데 말이다.
생각을 검토해보기도 하다.
뱀처럼 징그럽다고 교육받은 것도 아닌데 미끌 미끌한 미꾸라지, 개구리, 또 이런 지렁이들을 보면 몸이 오그라들듯이 피하고자 하고 징그러워하고 마침내는 몸의 반응까지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침 등교길에 지렁이 선생이 던지는 과제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산길로 접어드니 지렁이들이 여기 저기 꿈틀거린다.
처음부터 꼬챙이를 들고서 보이는대로 길에서 나뒹구는 지렁이를 숲속으로 던져넣었다. 어제와 같은 징그러운 느낌은 없었다.
그냥 살려주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하지만 지렁이 입장에서도 바라는 바일까?
내 식으로, 내 생각으로 하느라 지렁이가 원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마음가는 대로 한 행동이지만 매사가 조심스럽구나!
지렁이 같은 동물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일 것인데 그것의 움직임을 몸부림으로 생각하는 내 주관적인 판단의 오류는 아닌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라 몸과 맘이 힘든 것도 일종의 업인 듯하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라 스스로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한 일은 없었던가 되돌아 보아진다.
아이고!
수행일기 적느라 하루 종일 걸렸네! ^^
이런 수행 일기 쓸 일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에 메모도 제대로 해두지 않아 굵직 굵직하게 생각나는 것을 적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라던가 위빠사나에서 빗나간 것들을 지적해주시면 앞으로의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위빠사나 실습으로 가능하면 마음을 놀리지 않으려 합니다.
걸으면 걷는 일에 마음을 가게 하고
몸의 자극이 있으면 몸의 감각에 가 있게 하고자합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를 놓치지 않으려
마음을 일을 많이 시킨답니다.
아침 출근 시간에 걸을 때도 마음이 발걸음을 떠나지 않도록
오른발 왼발 명칭을 붙이던지 아니면 감각에 마음이 붙어있게 합니다.
오늘은 알아챔이 빈감해졌는지 걸음이 슬로우 모션같이 보이는 듯 뚜렷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아직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제와는 다른 몸과 마음의 지켜봄의 결과입니다.
점심을 먹고 학교 앞건물과 뒷 건물사이에 중앙 뜨락이 있습니다.
그곳을 천천히 걸으며 경행을 했습니다.
60조개의 세포에 불이 다 켜지고 그 불빛에서 따뜻한 사랑의 빛이 비쳐나온다고 생각하며 그 빛을 양옆에 있는 건물 학생들에게 보내는 내 식의 자애명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상은 위빠사나는 아니겠지요.

첫댓글 부처님 삶을 흉내만내도 많은 이익이있다고합니다.^^
다른 까페에서...어떤 분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글을 적어서, "외로움"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이름 붙이지 않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면, 오히려 이름을 붙이고 있죠? 이를 두고, [이름 붙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 붙이지 않기]와 [이름 붙이기]...서로 상반되죠? 표현만 보자면,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뜻이 다를까요? . . [이름 붙이지 않기]를 권한 까닭은 뭐냐? "외로움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예요. 그러한 마음은...외로움을 회피하기 위해, 뭔가를 하게 됩니다. 외로움을 수용하기 어려워요. 외로움은 뭡니까?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벗어나고만 싶어 하면, 벗어나려고 하기에 그 느낌을 강화합니다. 집성제에 따라 그래요. 그 느낌을 조건으로 괴로움 발생의 인과로 들어갑니다. 그러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거예요. 반면 그 느낌을 수용하면, 그 느낌을 조건으로 괴로움 발생의 인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마음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편안한 마음 상태가, 불교에서는 끝이 아니죠. 그 느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느낌에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 느낌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쨌든...그 느낌을 알기 위해서는, 그 느낌을 수용하여 붙잡아야 합니다. 그 느낌으로 생각을 해도, 그럴 수가 없죠?
. . 본글의 [이름 붙이기]는 어떤가요? 역시 외로움을 가지고 말하자면, 본글의 [이름 붙이기] 역시 외로움을 떠나지 않도록 함이죠? 위의 기법은, 삼매 기법을 도입한 방식입니다. 사띠와 삼매는 함께 하는 작용이기도 하단 말이죠. 어떤 느낌이 있을 때, 그 느낌만 온전히 잡아내기 어려운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 오히려 이름을 붙인 다음, 그 이름에 의지하여 다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느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상당히 복잡한 행위거든요. 이름을 붙여서 이름을 되뇌이면, 느낌만을 붙잡을 수는 없어요. 본글처럼 한시적 이름붙이기라도, 그래요.
이름을 붙여 되뇌이면, 선정에 들 수는 없어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합니다. 순수할 수록 선정에 들기가 쉽단 말이죠... 하지만 사띠의 목적이라면, 제한적으로 유용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이름붙이기, 외로움이라고 되뇌이는 행위로 인해 외로움이 빨리 스러질 겁니다. 외로움만을 두고 볼 때...외로움이란 느낌에서의 무상은, 더 빨리 알려집니다. 이름붙이기가 개입시키기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예요. 본글을 적은 분은, 집중 수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삼매 기법의 측면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삼매와 사띠 중 삼매수행은 아니죠? 사띠입니다. 그것도 무상에만 초점을 맞춘 방식이예요. 보통 오늘날 사띠 즉 위빠싸나에선 무상이 대세죠?
. . 어쨌든...[이름 붙이지 않기]와 [이름 붙이기]는...표현은 상반되지만, 흐름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뜻은 같단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기법을 알기 위해서는, 기법이 예정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흐름을 살펴야 합니다. 흐름을 살피려면, 직접 기법에 따라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기법이 예정하는 의도를 파악하여, 그 의도에 따라 마음을 일으켜 봐야 하는 겁니다. . . 이름은,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이름은 이름을 알려 줄 뿐, 실체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함이 좋습니다. 이름에는, 그 이름에 고유한 자성이 없어요. 그래서 이름을 미세하게 살필 수록, 이름은 자성이 없다는 점도 선명해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