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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 신학』 2021년 8월호, pp.126-131에 실린 원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
변 종 길
요한계시록은 성경 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유명하다. 고도의 상징들과 비유들, 상징적 숫자들, 환상들이 이해를 어렵게 한다.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교회에서 잘 설교하지도 않고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목사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 설교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읽을 때마다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무얼 말하는 거야?” 이 빈틈을 노리고 이단들이 파고들어 온다. “666의 비밀을 아십니까?” “짐승의 비밀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성경 공부를 합시다.” 등 솔깃한 문구로 성도들을 유혹한다. 그래서 그런 곳에 무심코 한번 갔다가 포섭되면 여태까지 모르던 것을 배웠다고 좋아하면서 이단에 빠지고 만다.
이런 현상에는 기성 교회의 책임도 크다. 기성 교회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물론 신학교의 책임도 크다. 왜냐하면 신학교가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으니 도대체 누구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올바른 해석은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에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학적인 책들도 제법 나와서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의 해석이 과연 믿을 만한지, 어디까지 옳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등 평신도들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오늘날 서구 신학은 대개 성경 비평에 바탕을 두고 외경과 위경을 많이 이용해서 성경을 풀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성경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어떤 목사들은 자기 나름대로 연구해서 이상하게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더욱 혼란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을 이해함에 있어서 대표적인 오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7년 대환난’과 ‘십사만 사천’, ‘육백 육십 육’과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외에도 천년 왕국, 짐승, 거짓 선지자, 해를 입은 여자, 두 증인, 예루살렘, 바벨론, 생명수의 강 등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여기서는 위 네 가지로 한정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7년 대환난
세대주의자들은 천년 왕국 전에 문자적으로 ‘7년 대환난’이 있으며 무시무시한 환난의 기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환난 기간에 소위 ‘휴거’(rapture)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휴거의 시기에 대해서는 ‘대환난 전’으로 보는 견해와 ‘대환난 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또 ‘대환난 중간’에 휴거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세 번째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대환난의 첫 사건들을 경험하나 대환난 자체는 경험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한 부분은 대환난 이전에 휴거를 당하고 나머지 부분은 대환난을 겪는다고 보는 ‘부분 휴거설’이 있다.1)
이런 견해들은 다 성경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없는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툰 것이다. 마치 ‘인어(人魚)’가 남성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중성인가? 또는 양성인가?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각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7년 대환난’은 원래 없는 것이다. ‘환난’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의 ‘7년 대환난’이 없다는 말이다. ‘7년 대환난’이란 표현도 성경에는 없다. 요한계시록에는 그저 ‘마흔두 달’, ‘1,260일’, ‘사흘 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이 나올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오해하여 문자적으로 ‘3년 반’으로 이해한 다음에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을 합쳐서 ‘7년’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마흔두 달’ 또는 ‘1,260일’은 상징적 표현들로서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일곱’(7)이 완전수이기 때문에 그 절반인 ‘3½’은 환난 또는 핍박을 의미한다(cf. 단 7:25; 12:7; 계 11:2; 12:14; 13:5). 따라서 그 기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 가운데 살아가는 교회 시대 전체(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재림)를 가리킨다(요 15:19-20; 16:33). 아담의 타락 이후로 세상 종말 때까지 사탄은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환난이 있다. 이 기간은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는 기간이기도 하다(계 12:6, 14). 이 기간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기간이지만 또한 그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는 기간이기도 하다(계 11:3). 이와 마찬가지로 ‘사흘 반’은 악의 세력이 총집결하여 메시아를 대적하는 기간을 상징한다(계 11:9).
‘대환난’은 꼭 마지막 종말 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상 때때로 ‘대환난’이 있었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에도 전무후무한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 24:21; 막 13:19; 눅 21:23). 구약 시대 야곱 때에도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었다(행 7:11). 느헤미야 때에도 유다와 예루살렘의 남아 있는 자들이 ‘큰 환난’을 당하였다(느 1:3). 그 외에도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로 인하여 ‘큰 환난’을 당하였다(삼상 5:9). 이처럼 ‘대환난’은 꼭 마지막 종말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 때때로 있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에는 늘 ‘환난’이 있어 왔으며(창 3:17-18; 5:29; 47:9; 시 90:10; 욥 13:1-2), 특히 성도들에게는 늘 ‘환난’이 있다(요 16:33; 마 10:16-23; 딤후 3:12; 벧전 5:8).
물론 이 ‘환난’은 마지막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딤후 3:1; 마 24:6-9). 때때로 커다란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24:13; 계 13:10; 14:12).
2. 십사만 사천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이들만 구원받으며 이 숫자가 채워지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한다. 이단들 중에 이런 해석을 취하는 자들이 많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능히 셀 없는 큰 무리’(9절)와 구별되는 그룹으로 ‘유대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본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마지막 때에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cf. 롬 11:25-26).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장 3절에도 ‘십사만 사천’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여기서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은 ‘십사만 사천 곧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십사만 사천’과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각각 주격 관사로 인도되고 있어서 둘은 동격으로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십사만 사천’에 대해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땅에서 속량받은 자들’이라고 했으니 ‘유대인들’로만 한정할 수 없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 속량(구속)함을 받은 자들 즉 모든 구원받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4-5절의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며 유대인들로만 제한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7:5-8에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각 지파에서 인 맞은 자의 수가 12,000이라고 한다. 12,000은 12 x 1,000으로서 12는 선택의 완전수이며(창 49:28; 출 28:21; 수 4:8; 왕상 18:31; 행 26:7; 마 10:1-4; 요 6:70). 1,000은 많은 무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144,000 = 12 x 12 x 1,000으로서 구약과 신약 시대에 택함받은 자들의 총수를 나타낸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열두 성곽’이 있고 ‘열두 문들’이 있는데 그 문들 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계 21:12). 또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한다(계 21:14). 이것은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그것은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의 토대 위에 건설되어 있음을 나타낸다(엡 2:20).
따라서 144,000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 전체 곧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동일한 집단을 나타낸다. 한 번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빌어서 표현했고, 다른 한 번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나오는 큰 무리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 즉, 동일한 내용을 다른 환상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다.2)
3. 육백 육십 육
요한계시록 13장 18절은 수수께끼 같은 난해 구절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 육십 육이니라.” 이 ‘짐승’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첫째 짐승’을 가리키는데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한 세력을 상징한다. 이 짐승의 수 ‘육백 육십 육’(666)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통속적으로 ‘바코드’나 ‘신용카드’ 또는 ‘IC카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베리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황’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며, 오늘날에도 ‘교황’이나 ‘가톨릭교회’ 또는 ‘유럽연합’(EU)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로마 황제 ‘네로’(54-68년 통치)를 가리킨다고 본다. 라틴어 ‘네로 카이사르’(Nero Caesar)를 히브리어로 옮기면 ‘네론 케사르’(nron qsr)가 되는데, 각각의 알파벳의 숫자를 합치면 666이 된다는 것이다.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는 알파벳 각각이 숫자의 값을 가지고 있는데, 히브리어 ‘네론 케사르’의 경우 그 알파벳의 숫자 값을 합하면 666이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수신자들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이다. 그들은 당시에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으며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독자들이 알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로 바꾸어서 계산해야 한단 말인가?
둘째, 위에 히브리어로 옮긴 것도 철자가 맞지 않다. ‘카이사르’를 히브리어로 옮기면 히브리어 철자 ‘요드’(영어의 i에 해당)가 들어가야 하는데 위 히브리어에는 빠져 있다. 그러니 그 히브리어 철자가 불완전하다.
셋째,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여러 기록과 정황으로 볼 때 도미티아누스 황제 말기인 95-96년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레네우스의 책에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기에’ 출판되었다고 한다(Adv. Haer. V,30,3).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것도 그때쯤이며(Eusebius, Hist. Eccl. III,18-1-3), 96년 말경에 네르바 황제(96. 9. 18~98. 1. 25)가 취임하자 사면되어 돌아왔다고 한다(Plinius, Ep.1,5,10; 9,13,5).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에 황제 숭배가 행해진 것은 도미티아누스 때(81-96년 통치)였다. 네로 때(54-68년 통치)에는 로마 시에서 핍박이 있었을 뿐 소아시아에서는 없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은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말기(52년경)에 설립되었다. 따라서 40여년이 지난 90년대의 상황에 더 잘 어울린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61년경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재건되어 풍요를 과시하고 있었다(계 3:17). 이것은 60년대보다는 90년대 상황에 잘 어울린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95-96년경에 네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네로를 경배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네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네로 신화’나 ‘네로 귀환 전설’을 사도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사도 요한이 무슨 신화나 전설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계시록 13장의 666에 대해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전통적 개혁주의 견해가 타당해 보인다. 6은 7에 하나 모자라는 수이며 인간으로서는 최대한에 도달한 수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는 수이며, 6이 세 개 겹친 것은 인간의 교만이 극에 달한 것을 의미한다. 개혁주의 주석가 흐레이다너스는 6은 피조물의 충만을 상징하고, 666은 온 세상의 충만함을 상징하고, 따라서 666은 세상의 지배자인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한다.3) 여기서 ‘적그리스도’란 표현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악한 마귀의 세력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헨드릭슨은 6은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곧 실패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본다. 따라서 666은 ‘실패 위의 실패 위의 실패’(failure upon failure upon failure)를 의미한다고 한다.4) 같은 맥락에서 필립 휴즈는 ‘인간적인 삼위일체’라고 하였다.5) 그레고리 빌도 6은 ‘미완성과 불완전’(incompleteness and imperfection)을 의미한다고 보며, 계시록 15:2은 이 수가 짐승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보여 주며 그 짐승의 수는 개인적인 적그리스도적 인물을 가리킨다기보다 집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6) 따라서 666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가리키는데, 특히 정부 권력을 통해 역사하며 성도들을 핍박하며 마귀를 경배하게 하는 세상 세력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
4. 아마겟돈 전쟁
요한계시록 16장에는 ‘아마겟돈 전쟁’이 예언되어 있다(12-16절). 세대주의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3차 세계대전으로 ‘아마겟돈 전쟁’을 말하기 좋아한다. 종말 직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모여서 이스라엘로 쳐들어오는 세계적인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서 38-39장의 ‘곡’과 ‘마곡’을 연결시켜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마겟돈’은 헬라어로 ‘하르마게돈’인데 ‘하르’는 원래 히브리어로서 ‘산(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므깃도 산’은 없다. 대신에 갈멜산 자락에 ‘므깃도’ 성이 있고, 그 앞에 넓은 ‘이스르엘 평원’이 있다. 사사 시대에 바락과 드보라가 이곳에서 가나안의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쳤으며(삿 4-5장), 훗날에 유다의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군대를 막다가 이곳 므깃도에서 전사하였다(왕하 23:28-30).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00명을 잡아서 죽인 곳도 이곳이다(왕상 18장). 그래서 ‘므깃도’는 전쟁의 장소, 살육의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산(山)’은 왕, 나라, 권세를 상징할 때 사용되었다(계 17:9; cf. 14:1; 21:10), 따라서 ‘므깃도 산’ 곧 ‘아마겟돈’은 교회(곧 하나님의 백성)와 세상 세력(곧 악한 사탄의 세력) 사이에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온다는 것은 세상 세력(바벨론)이 교회(이스라엘)로 쳐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계 17:12). 왜냐하면 ‘유브라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이스라엘’과 우상을 섬기는 악한 세상 세력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경계가 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된다(cf. 창 15:18; 수 24:2-3). 따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이 강을 건너온다는 것은 ‘세상’이 본격적으로 ‘교회’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cf. 계 20:8).
따라서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일어날 문자적인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세상에 늘 있어 온, 그리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교회’와 ‘세상’ 사이의 ‘영적 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며,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이 날 것이다. 이 전쟁의 근본 원인은 세상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마귀 곧 사탄이다(계 12장). 이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온갖 불의와 죄악이 판치고 있으며, 교회에 대한 공격과 핍박이 그치지 않는다. 사도 요한 당시에는 황제 숭배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관용과 차별 금지라는 이름으로 공격해 온다. 이처럼 마귀는 시대에 따라 모습과 방법을 바꾸어 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한다. 이것을 성경은 ‘아마겟돈’이란 지명을 빌어서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8)
맺는 말
그 외에도 요한계시록에는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천년 왕국’에 대해서도 견해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여기에는 20장 4절의 ‘살았다’와 5절의 ‘살지 못하였다’에 대한 견해 차이(오해0와 ‘첫째 부활’에 대한 견해 차이(오해)가 있으며, 또한 4절의 ‘왕노릇하였다’에 대한 이해 부족의 문제도 있다. 나아가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환상’(vision)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재’(reality)로 이해하면 ‘머리가 일곱인 짐승’(13장)이 어디에 있는가? 무엇인가? 하면서 찾게 된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짐승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영적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요한이 본 ‘환상의 순서’를 역사상 일어나는 ‘사건의 순서’로 보는 것도 큰 문제이다. 그렇게 시간적 순서로 보면 이 세상은 적어도 일곱 번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성경은 그런 윤회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의 ‘원리’를 여러 환상들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여러 번 보여 준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물론 문자적으로 믿는 신앙이 복음적이고 좋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미신적이고 억지 주장일 때도 있다. 이런 미신적 신앙은 자칫하면 이단들의 미혹에 빠지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 하나 하나를 존중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은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정면충돌을 일으키게 만든다. 따라서 각 단어나 구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읽어야 하며 문맥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에는 이런 표현들의 상징성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 전체를 많이 읽어서 전체 맥락을 바로 파악해야 하며, 좋은 지도자와 책들을 통해 바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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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f. H. R. van de Kamp, Israël in Openbaring (Kampen: J. H. Kok, 1990), 34.
2) ‘십사만 사천’에 대해서는 변종길, 『요한계시록 주석』 (대구: 말씀사, 2018), [부록 4] “144,000은 누구인가?”를 보라.
3) S. Greijdanus, Openbaring (Amsterdam: H. A. van den Bottenburg, 1925), 285.
4) W.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 (Grand Rapids: Eerdmans, 1998), 151.
5) 필립 휴즈, 『요한계시록 주석』 (서울: 여수룬, 1994), 225.
6) G. K. Beale, Revel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9), 722-23.
7) 666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변종길, 『요한계시록 주석』, 218-225를 보라.
8)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변종길, 『요한계시록 주석』, 248-254를 보라.
변종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1992-2021). 네덜란드 캄펀 개혁신학대학교(Th.D.). 저서로 《신약 총론》, 《요한계시록 주석》 등이 있다.
첫댓글 유익한 해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