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 홍봉한의 딸. 영조의 며느리, 사도세자의 빈, 정조의 어머니. 1744년(영조 20년)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남편인 사도세자가 1762년 5월에 임오화변으로 죽은 후 혜빈이란 호를 받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이란 궁호를 받았다. 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로 추존되었다.
회고록적인 수기 <한중록(한중만록, 읍혈록)>은 당쟁과 음모를 생생하게 기록하였는데, 모두 4편으로 이루어졌다.
제 1편은 1795년(정조 19년)에 회갑을 맞은 그녀가 친정 조카에게 내리는 순수한 회고록이다. 그러나 나머지 3편은 그녀가 71세 되던 해에 친정아버지 홍봉한의 결백을 손자인 순조에게 읽힐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제2편에서 제4편은 부친과 삼촌, 동생 등이 정유역변(1777)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해병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의 와중에서 발생한 것으로 , 이 사건을 통해 부친 홍봉한은 실각하고, 동생 홍낙임이 사약을 받아 사도세자 죽음의 결정적인 배후로 지목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혜경궁 홍씨는 뒤주를 착상해 낸 것은 영조 자신이라고 하였다.
한중록은 영정조 시대의 정치 역사 문학 등 제방면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정계야화로서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살필 수 있고, 영정조대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인 임오화변의 원인을 살피는 데 결정적인 자료 역할을 한다. 게다가 궁중의 비빈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서술한 궁중문학이자 여류문학으로서 궁중의 풍속 및 언어를 연구하는 데 긴요한 자료가 된다. 게다가 이 작품은 실기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의 여인상을 연구하는 실질적인 자료가 된다.
2. 내용
제1편 : 61세 때 기록. 혜경궁 홍씨의 출생과 어린 시절의 추억. 9세에 세자빈에 간택된 일 등 친정에서의 일과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였다. 여기에서는 임오화변에 대한 이야기는 회피하고, 사도세자 장래 후 영저와의 만남, 친정이 화를 입게 된 전말 등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화성 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친지들의 이야기로 끝맺었다.
제2편 : 67세 때 기록. 정조가 초년에 자신과 외가를 미워한 것은 화원공주의 이간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친정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된 숙부 홍인한 사건의 배후에 홍국영의 원한풀이가 개입되었다며,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하였다. 마지막으로 천주교 교도로 몰려 부고하게 죽은 동생의 일을 슬퍼하며 진실이 밝혀지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
제 3편 : 68세 때 기록. 13살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정조가 만년에 외가에 대한 처벌을 후회하며 갑자년이 되면 친정에 대한 법적 처분을 모두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음을 상기시키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정조 생전에 자신과 대화한 내용을 살세하게 서술하였다.
제4편 : 71세 때 기록. 임오화변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참변에 대한 진상을 서술하였다. 혜경궁 홈씨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원인을 설명한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와 사이가 나빴고, 마침 자신이 병적으로 아끼던 화평옹주가 죽자 사도세자를 더욱 더 멀리하게 되었다. 그 사이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를 즐겼고, 영조가 대리섭정을 시켰으나 성격차이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였다. 영조의 강한 성격으로 인하여 사도세자는 강박증에 시달리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762년에 나경언의 참소와 영빈 이씨의 종용으로 뒤주에 갇혀 9일만에 죽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