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광탄에 자리한 고령산의 서쪽 자락에 자리한 보광사는 계류가 Y꼴로 서로 만나는 사이의 좁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큰길가에 우람하게 세워져 있는 일주문을 들어서 약 100m 정도를 올라가면 높은 석축 위에 있는 만세루를 만나게 된다. 이 만세루 아래로 작은 문이 있어 경내로 진입할 수 있게끔 되어 있으나, 좌측으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전통찻집이 들어서 있는 서쪽에서 경내로 진입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 가운데의 뒤쪽에다 높은 기단을 마련하여 대웅보전을 서남향으로 앉혔고, 바로 그 뒤는 높은 둔턱비탈이어서 앞쪽을 높은 석축으로 막아 그 위에 응진전과 산신각을 앉혀놓았고,
그리고 같은 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어실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대웅보전 앞쪽에는 만세루와 종각이 나란히 위치해 있고, 대웅보전의 동쪽으로 원통전과 지장전이 있는데 원통전은 대웅보전과 나란히, 그리고 지장전은 대웅보전을 향해 위치해 있다. 또한 대웅보전의 서쪽에는 요사채와 공양간이 있다. 한편 경내에서 서북쪽으로 개울을 건너 50m 지점에는 근래에 새로 지어진 납골당인 영각전이 있으며, 영각전 위로 새로 닦은 터에는 호국대불이 서 있다. 입구에서 올라가는 계곡이 아름다운 보광사를 이렇게 소개해주는 글이 한국의 사찰에 쓰여져 있다.
[보광사 일주문...]
보광사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은 경내에서 약 200m 아래에 있다. 1999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2단으로 된 다포식이다. 전면에는 ‘고령산보광사(古靈山普光寺)’라 편액을 걸었다. 이곳에서 오르는 길은 비록 시멘트 포장을 해 놓았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아직은 살아있는 그런 길이다.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기에 여름에는 찾은 사람이 많은 그런 계곡이기도 하다.
[경내로 오르는 길이 아늑한데 비탈이 심해 시멘트 포장을 하는 바람에...]
[중간에 만나는 통일애국투사 묘역...]
[보광사 만세루...]
대웅보전과 마주하여 자리한 만세루는 원래 누각 건물이지만 승방과 연결이 되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처음 건립된 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1740년(영조 16) 무렵 보광사과 중건될 때 건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은 높직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은 9칸이고 팔작지붕을 올렸다. 누마루 건물은 굵고 큰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둘러 한 때 좌선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누마루의 주심도리 상단에는 1913년에 기록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건물 후면 작은 마루도리에도 1914년에 기록한 시주질이 있다. 따라서 이 무렵 다소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1913년에 건물의 일부 중수가 있었고, 이어서 1914년에 승방을 누에다 덧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누마루 정면에는 ‘만세루(萬歲樓)’라는 편액과 승방에도 ‘고령산보광사(古靈山普光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고령산보광사’라는 글씨는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보광사 원통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원통전은 예전의 쌍세전 건물을 허물고 1994년에 새로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최근에 조성한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는 삼장탱화와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중 지장탱은 보광사에 남아 있는 불화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02년에 경욱(慶郁)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원래는 수구암(守口庵)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장탱은 대웅전의 불화들과 함께 1898년에 동시에 조성된 것이며, 그림을 그린 금어는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潭奎禪) 스님이다.
[보광사 지장전 현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지장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그리고 시왕상을 비롯해 판관, 귀왕, 사자, 장군, 동자상 등 여러 존상과 지장탱을 비롯해 시왕탱, 장군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중 장군탱은 그림 아래에 있는 화기에 의해 1872년(고종 9) 방우진호(放牛珍昊) 스님 등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1977년 작성된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이들 존상 및 불화들은 모두 쌍세전에 봉안되어 있었으며, 1863년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쌍세전은 지금의 지장전 자리에 있었던 건물인데 최근 헐리고 그 자리에 원통전과 지장전이 들어섰다.
[보광사 어실각(御室閣)...]
원통전 뒤쪽 축대 위에 자리한 어실각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전각이다. 1740년(영조 16) 보광사가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소인 소녕원(昭寧園)의 기복사(祈福寺)가 되면서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정면, 측면 모두 1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로 어실각 안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보광사 대웅보전...]
높게 쌓은 석축기단 위에 서향으로 앉은 다포식(多包式)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기품이 장중한 건물로 마당 건너 만세루와 마주보고 있다. 주춧돌에 맞춰 자연스럽게 깎아 세운 배흘림기둥 위에 안초공을 두어 창방(昌枋)과 평방(平枋) 머리를 감싸고 있으며, 공포 밖으로 나온 쇠서(牛舌)에는 활짝 핀 연꽃과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하였는데, 1215년 중건 당시 원진국사가 조성해 모신 목조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뒤에는 영산후불탱이 걸려 있다. 이 외에 칠성탱, 감로탱, 현왕탱이 함께 있다. 천정에는 동양화 기법으로 화조화(花鳥畵)와 초충도(草蟲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같은 천정화는 그 유례가 드문 것이다.
[보광사 종무소...]
[보광사 범종각...]
정면, 측면 모두 1칸의 사모지붕 건물인 범종각은 대웅보전에 있던 숭정칠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鐘)을 봉안하기 위하여 1990년 쯤 건립하였다. 또한 범종각에는 만세루에 있던 목어를 옮겨와 걸었다. 이 목어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데 몸통은 물고기이지만 머리는 여의주를 문 용의 형상이다. 물고기가 변해 용이 되듯이 중생이 깨우쳐 부처가 되는 것을 상징한다.
[보광사 응진전...]
대웅보전 뒤쪽 축대 위에 자리한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웅보전과 같이 측벽이 나무판벽으로 되어 있다. 1863년(철종 14) 중건되었을 때는 나한전으로 불리었지만 지금은 응진전으로 부르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탱화로는 중앙의 석가모니후불탱을 비롯해 4점의 나한탱이 봉안되어 있다. 석가삼존상과 16나한상은 나한전이 중건된 1863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석가모니후불탱은 근래에 조성되었지만 나한탱은 1877년(고종 14)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엽(漢峯창曄), 만파정탁(萬坡定濯)등의 스님들에 의해 그려졌다.
[신도들의 정성과 신념이 모인...]
[독특한 부처님 모습이...]
[보광사 장독대...]
[호국대불 석불입상이 언덕넘어로 보이고...]
[호국불상쪽에서 내려다 본 보광사 경내...]
[보광사 호국대불...]
영각전 위쪽의 넓은 터에 연화대좌 위에 서있는 석불입상은 호국대불로 불린다. 이 석불입상은 1980년 1월 대웅보전의 보살상 복장이 도굴을 당했으나 다행이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어 이를 다시 봉안하고자 함에 이 일대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 격전지임을 감안하여 위령불 삼아 조성하자는 인연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대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 뿐만 아니라 5대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과, 법화경, 아미타경 및 국태민안 남북통일의 발원문 등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영각전 건물옆 벽화...]
[영각전 앞뜰엔 예쁘게 장식된 가마가...]
[보광사 영각전...]
대웅보전 구역에서 개울 건너 뒤쪽 언덕에 자리한 영각전은 납골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중앙에 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로는 납골시설이 있다. 영가들을 위해 49재를 비롯해 반원재, 천도재 등을 올리고 있다.
[가마 네귀에는 극락조가...]
[경내에 휴식터로 자리한 과휴정(過休亭)...]
[적막이 흐르는 듯한 보광사 경내...]
[승방에 걸린 고령산 보광사 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라고...]
[보광사 종각과 승방...]
[담 모퉁이에는 아스라이 스며드는 빛이...]
[내려오는 길목에 기묘하게 생긴 고목이 눈길을...]
서울에서 보광사(普光寺)를 가는 길에는 벽제가 있다. 오늘날에 벽제 하면 화장터나 공동묘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옛날에는 그 유명한 벽제관(碧蹄館)이 있었던 곳이다. 중국으로 오가던 사신행차는 물론 서북으로 떠나던 관변행차도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벽제는 서울 장안에서 50리 길, 옛 사람들의 걸음으로 하루가 걸리던 길이었다. 보광사로 가려면 이 벽제 삼거리에서 됫박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됫박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차로 쉽게 넘어갈 수 있으나 예전에는 무척이나 힘들게 넘었을 것 같다. 영조는 이 고개가 소령원에 누워 있는 자신의 생모와 더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더 파 낮추라고 해서 '더 파기 고개'라고 했다고 코리아템플에서 전해주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경사진 고개를 넘으며 생각을 해볼 만한 그런 이야기.... -<끝>-
첫댓글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