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낙수(落穗)
주유소에서 자동차 연료를 넣고, 지갑을 열어보다가 혼자서 빙그레 웃었다. 헐렁한 지갑 속 한 구석에 로또복권 한 장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어느덧 매주 한 장씩 사서 그 행운의 여섯 개 숫자에 일희일비하는 습성이 굳어져가고 있다. 마흔 다섯 개 숫자 중에서 선택된 여섯 개를 골라내어 혼자서 일등으로 당첨될 행운은, '잠수함 속에서 벼락을 맞는' 확률이라는 화제의 그 복권이다. 통계학으로 풀어보면 일등당첨 확률이 팔백 십사만 분지 일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우리 국민들의 내기에 대한 열정적 기질은 좋게 말하면 도전정신이요, 나쁘게 말하면 도박근성이라 할 것이지만, 이 신종복권의 출현으로 유감없이 발휘되는 일확천금에 대한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당첨금이 이월되어 수백 억 원 대에 이르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복권열풍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평상시의 소심한 굴레를 벗고 그 대열에 동참하는 한사람이 되었다. 번번이 공만 치다가 얼마 전에는 숫자 세 개를 맞추어 1만원에 당첨된 적도 있다. 여섯 개 숫자 중 세 개를 맞춘 대단한(?) 희열에 TV앞에서 딸 녀석과 같이 환호성을 지른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도 당첨금이 이월되어 거액이 되면, 다수 직원들이 로또계를 하자며 공동으로 구매, 공동분배 원칙을 언약하는 웃지 못 할 풍속도도 생기고 있다.
요행을 바라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은 확실히 건전치 못하다. 인생행로에 있어서 독이 되는 위험한 습성이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다르다고 짐짓 위안을 가져본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필히 1등에 당첨되어 '인생역전'을 애타게 그리는 것은 아니고, 이른바 마음의 즐거움과 각박한 생활의 굴레에 윤활유를 촉촉하게 뿌려주는 역할로서 만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주 1만 원 짜리 한 장으로 1만원 어치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있어 한 달에 4만원을 투자하여 한 달 내내 이만한 기대감을 지속시키는 것도 드문 일이다.
꽉 짜여진 직장생활, 쉽사리 향상되지 않는 경제능력, 연속되는 일상과 삶의 전동차 같은 규칙운행…. 그 속에서 심정적으로나마 탈출할 수 있는, 아니 반란을 꿈꾸는 초대형 변화에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기적이라지만, 엄연한 현실로도 증명될 수 있다는 가녀린 허상을 지긋이 즐겨보는 대열에 동참한다는 것, 그 자체를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나 자신의 직업과 생업에 일백 프로 만족할까마는 설사 천직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에 임한다 해도, 일말의 스트레스와 그 천직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복권 예찬론자는 아니지만 복권의 당첨, 낙첨을 초월한 그 기대심리가 소시민이 자본주의에서 찾을 수 있는 통쾌무비한 '배설의 쾌감' 중 하나 같아서 지긋이 웃곤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은 유희는 나만의 일시적 몽상과 경박한 증세일 것이다. 정도를 지나쳐 과하게 되면, 결국은 도박과 다름없이 황폐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항상 성현과 어른들께서 준엄하게 말씀하시는 신독(愼獨)을 가슴께에 매달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오늘이 월요일인가? 주유소에서 방금 넣은 자동차 연료가 매일매일 소진되는 것과 반비례해서, 지갑 속 복권 한 장에 대한 즐거운 망상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2003 . 3 . 10)
1 [구암] 옛말에 노루는 잡기도 전에 큰집에 줄 생각 먼저 한다, 는 말이 생각나는 군요, 저도 역시 로또를 월요일에 사서 월요일 아침신문으로 확인해 보고 다시 꿈을 사러 로또점으로 갑니다. 최대한의 꿈을 키우기 위하여... 이번에 당첨이 되면 어느 소녀가장, 어느 노인, 어느 학교, 어느 재단에 얼마씩 이름 없이 도와 줘야지...그리고 친구들을 불러서 멋지게 한잔 사기도 하고... 꿈은 꿈을 부르고 , 꿈으로 끝나더군요... 참 재미있는 공감 속에 즐거웠습니다. 건안하십시오. <2003.11.27>
2 [한비]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선생님과 저는 많은 부분의 정서가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아, 새삼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어봅니다. 로또에 모든 것을 걸고 분투하는 사람들이 많은 암울한 현실이지만... 소생 또한 구암선생님처럼 인생의 한가닥 소락으로서, 틈틈히 사보고 있습니다. 대박의 환상보다는 소박(?)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2003.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