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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집 그리고 추억 스크랩 [이 사람] 본고장 프랑스도 반했다…日 `천재 장인` 쓰지구치 히로노부
ginasa 추천 0 조회 195 14.11.24 06: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 사람]

디저트 브랜드 '몽상클레르' 내달 한국 상륙

쓰지구치 히로노부

디저트 본고장 프랑스도 반했다…
日 '천재 장인'의 달콤한 인생



화과자 집 아들, 양과자로 우뚝
무일푼에 굶어가며 기술 배워… 유명 제과점 쓰레기통 뒤지며
'맛있는 비밀' 하나하나 체득…日·佛 등 맛대회 최연소 우승

NHK, 그의 삶을 드라마로 제작

'케이크 아닌 예술작품' 찬사 속이름 내건 브랜드만 12개
"디저트란 단 한 조각으로도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


▲일본 제과 장인 쓰지구치 히로노부
▲ 일본 제과 장인 쓰지구치 히로노부가 지난 17일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에서 내달 8일 개점하는 ‘몽상클레르’의 케이크를 소개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하얗게 부푼 이게 뭐지?"

친구 생일잔치에 간 열 살 소년 히로노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구 어머니가 나눠준 케이크 조각에는 처음 보는 거품이 풍성하게 얹혀 있었다. 아버지가 일본 전통 디저트인 화과자 장인이라 단맛에 익숙한 그도 처음 보는 케이크였다. 입에 넣으니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접시에 묻은 거품을 혀로 핥고 있는 히로노부에게 친구 어머니가 말했다. "그게 생크림이란 거야. 화과자밖에 만들 줄 모르는 너희 집에서는 이런 맛을 모르겠지." 어린 마음에도 분했다. 그러나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반박하기에는 너무나도 황홀한 맛이었다. 그때 알게 됐다. 감동은 어떤 분노도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것이 디저트의 힘이다." 지난 17일 서울 남산 반얀트리클럽앤스파에서 만난 일본 제과 장인 쓰지구치 히로노부(?口博啓·47)는 말했다. "그때 결심했다. 반드시 최고로 달콤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1967년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난 쓰지구치는 일본에서 '천재 파티시에(patissier· 제과 전문가)'로 불린다. 1990년 해마다 2000여명이 참가하는 일본 최대 제과대회인 '전국양과자기술경연대회'에서 23세 최연소로 우승한 후 일본 내 각종 양과자 경연대회를 차례로 석권했다. 내년 3월부터는 NHK에서 그의 인생을 156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6개월간 아침 드라마로 방영할 예정이다.

디저트의 본국인 프랑스도 그의 맛에 반했다. 1996년 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SOPEXA ·소펙사)가 주최하는 과자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최연소 기록은 세계 무대에서도 썼다. 1997년 대륙 예선이 따로 있는 세계 최고의 국제 제과대회인 '쿠프 드 몽드 드 라 파티스리'에서 29세로 개인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우승(설탕공예 부문)했다. 2013년 '초콜릿의 미슐랭' 이라 불리는 프랑스 C.C.C(Club des Croqueurs de Chocolat) 평가단이 부여하는 별점에서 최고 등급인 별 5개를 받았다.

그는 단맛으로 겨루는 거의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케이크 전문점 '몽상클레르'(Mont St. Clair)를 열었다. 도쿄의 부촌인 지유가오카에서 문을 열자 '케이크가 아니라 예술작품'이라는 찬사가 잇따랐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 아베 신조 총리, 일왕의 손녀인 아이코도 그의 단골로 알려져있다. 디저트 애호가들의 성지(聖地)가 된 몽상클레르가 내달 처음으로 내는 해외 분점이 남산 반얀트리클럽앤스파의 매장이다.

일본에서 그는 대단한 스타다. 이날도 180㎝에 가까운 큰 키, 짧은 금발인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 2대가 내내 따라다녔다. 일본 위성방송인 BS방송 촬영팀이 '천재 장인, 한국으로 건너가다'라는 내용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중이었다.

―디저트를 언제 처음 접하게 됐나.

"할아버지 때부터 아버지까지 화과자 전문점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화과자인 줄 알고 컸다. 그러다 생크림 케이크를 먹어보고 신세계를 만났다. 공부를 해보니, 화과자와 생크림 같은 양과자는 만드는 방법이 정반대였다. 화과자는 재료를 밀면서 공기를 빼야 하는데, 양과자는 공기를 불어넣었다. 맛을 내려면 공기를 빼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넣을 수도 있다는 발상의 차이를 배웠다."

―부친의 화과자점이 도산해서 무일푼으로 제과 공부를 시작했다던데.

"아버지 가게는 방송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지인의 빚보증을 섰다가 가게와 집이 전부 날아갔다. 사채업자들의 협박과 독촉은 끝없는 악몽 같았다. 그렇다고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제과 기술을 배우러 도쿄로 갔다."

그의 부친은 상경하는 아들에게 한마디만 했다. "이 일은 눈으로 배우는 것이다." 아버지가 말한 '눈'은 감각이었다. 제과 기술은 1부터 10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스로 터득해야 해야 하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그의 감정을 느껴라, 그 감정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디저트는 밥이나 빵이 아니다. 감정을 전해야 한다…. 고교 선생님의 주선으로 도쿄의 제과점 '레피도루'의 견습생으로 들어간 쓰지구치는 현장에서 부친의 뜻을 서서히 깨쳐갔다. 오전 6시에 출근해 하루 세끼를 10분 안에 서서 먹으며 일하다 자정 넘어 퇴근하는 일과였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러나 두 달 후 집에서 전갈이 왔다. 어머니는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며 고생하지 말고 고향으로 와서 어묵 공장에 취직하라"고 했다.

―꿈을 꺾어야 했으니 암담했겠다.

"어묵 공장 면접을 사흘 앞두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만약 어묵 공장에 취직하게 되면 어머니를 평생 미워할 것 같다고. 3년 안에 반드시 최고의 디저트 장인이 되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책 없는 약속이었다. 다행히 어머니가 믿어주셨다."

도쿄행 기차표부터 구해야 했다. 단기간에 목돈을 만들 수 있는 일은 막일뿐이었다. 마침 바닷가에 시멘트 제방을 쌓는다고 일꾼을 모집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라 한 달 월급이 30만엔이나 됐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틀에 시멘트를 붓고, 막대기로 공기를 빼는 작업이었다. 양쪽 어깨에 시멘트 바구니를 메고 둑 위에 걸쳐진 판자를 밟고 올라가 시멘트를 들이부었다. 아직 굳기 전인 거대한 시멘트 둑 아래로 떨어져 불귀의 객이 된 일꾼도 서너 명 있었다.

몽상클레르의 대표 케이크인 ‘세라비’(C’est la vie).
▲ 몽상클레르의 대표 케이크인 ‘세라비’(C’est la vie). /몽상클레르 제공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는가.

"도쿄로 가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꿈을 위해 목숨도 걸어본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지가 됐다."

다시 도쿄로 간 후 그는 하루 2~3시간 자면서 일을 배웠다. 자정에 퇴근해도 바로 잘 수가 없었다. 씻어야 하는데 목욕탕에 갈 돈이 없었다. 그는 목욕탕 마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손님이 사용한 물이라도 좋으니 씻게만 해달라고 주인에게 간청했다. 씻고 나오면 2시가 가까웠다.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는 도제 시스템인데, 우승하기까지 어떻게 배웠나.

"최고의 선생은 쓰레기통이었다. 한 달에 두 번 휴일마다 유명한 제과점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기술의 일부는 가르쳐줘도 재료를 어디서 가져오는지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인기 제과점들이 어떤 재료를 쓰는지 어느 회사 제품을 쓰는지를 쓰레기통을 뒤지며 알게 됐다."

그를 '천재'로 알려지게 한 작품은 역발상에서 나왔다. 23세에 최연소 우승한 케이크는 뭉글뭉글한 젤라틴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 활과 화살로 형상화했다. 소펙사 대회 때 우승한 '세라비'는 화이트 초콜릿 케이크. 당시만 해도 초콜릿 케이크는 검은색 일색이었으나 그는 흰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맛있는 디저트와 맛없는 디저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재료의 조화다. 23세 때 우승을 하고 부상으로 여행 간 프랑스에서 한 차원 높은 기술을 배웠다. 재료로 들어간 과일과 우유의 맛이 각각 살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 디저트는 여러 재료를 섞긴 섞었는데 개별 재료의 맛을 살려내는 기술이 없었다. 아몬드 파우더를 넣었는데, 아몬드 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조화가 깨지면 그렇게 된다."

―각 재료의 맛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균형을 알아야 한다. 맛있는 오렌지를 먹으려면 그냥 오렌지를 먹으면 된다. 오렌지 케이크를 먹을 때는 맛있는 오렌지의 맛을 그대로 느끼면서 익숙한 케이크도 먹고 싶은 것이다. 둘을 살리려면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소금이다. 디저트는 설탕이 주재료지만, 나중에 첨가하는 소금이 맛의 축을 잡아준다. 소금을 언제 얼마만큼 넣을지, 그 균형의 포인트를 잡아야 한다."

미세한 균형의 축을 조절해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급 디저트는 130종에 이른다. 첫 제과점인 몽상클레르를 비롯해 쓰지구치가 이름을 내건 브랜드는 12개. 롤케이크 전문, 초콜릿 전문, 카스텔라 전문 등 종류별로 브랜드를 따로 냈다. "깊은 맛을 내려면 차별화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담겼다. 자신의 디저트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 2006년 고향인 이시카와현에서 개관해 연간 30만명이 관람한다.

―12개나 되는 브랜드를 냈는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언제였나.

"쉬운 일이야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렵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으니까 두려울 게 없었다. 목숨까지 걸어봤는데 뭘 못하랴 싶었다."

―늘 웃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미디어 노출 때문인가.

"내가 만드는 게 디저트이다 보니 웃어야만 한다. 디저트는 감동이고 즐거움인데 괴로운 마음으로 만든 디저트가 먹는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는가."

―무일푼에서 일본 최고 스타 제과장이 됐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느낀 순간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나의 브랜드를 알고 있을 때가 돼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디저트는 끼니가 아니다. 안 먹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는데 왜 꼭 있어야 한다고 보는가.

"배만 부르다고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 단 한 조각으로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디저트다. 인생의 특별한 순간, 생일이나 결혼식 때 케이크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눈앞의 끼니가 아니라 인생의 감동과 따뜻함을 원할 때 디저트를 찾게 된다.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디저트가 인기인 것도 그래서라고 본다."

―한국도 최근 디저트가 큰 인기다. 제과 장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디저트는 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 먹는 사람을 섬기는 정신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리 설탕을 써도 감동을 줄 수 없다. 기술을 배울 때는 여기서 됐다고 생각하지 마라. 단맛은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끝이 없다."

―단맛 하나만 추구해왔는데 다시 태어나면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은가.

"다시 태어나도 디저트를 만들겠다."

―만약 디저트가 없는 세상에서 태어난다면.

"디저트를 그 세상에서 최초로 만든 사람이 되겠다."

신정선(주말뉴스부 기자)
E-mail : violet@chosun.com

문화부에서 공연(연극·뮤지컬·무용)을 맡고 있다. 취재원들이 “처음 보면 드라큘라, 알고 보면 하이디”라고 한다. 낮에도 활동하려니 드라큘라 본인의 고충 또한 지대함을 이 자리를 빌려 밝혀두고 싶다. 결국 모든 기사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맛에 관심 없던 음식 담당 시절에는 맛에 관심 있는 사람을 만나 책을 냈다. 공연을 맡은 후로 거의 매일 밤을 어딘가의 깜깜한 객석에 앉아 버틴다. 때론 졸며, 때론 울며. 고려대 언어학과를 간신히 들어가 가까스로 졸업했다. 언젠가는 항상 ‘하이디’로 살리라.

◇ 고려대 언어학과 졸업
◇ 2001년 조선일보 입사


    ● 출처 : 조선앙일보 2014.11.22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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