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회 산행일지 : 크고 깊은 산의 오월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일시 : 2008년 5월 11-12일(일-월)
날씨 : 맑고 차차 흐린 날

올해는 오월의 공휴일 둘 모두 월요일이어서 긴 연휴들이다. 학교들도 하루 이틀을 끼워서 단기방학으로 긴 연휴를 즐기고 직장인들 역시 노동절까지 포함하여 나름대로 휴가계획을 가진 경우가 많다. 어린이날은 먼저 가정에서 봉사하기로 하고 다음 연휴인 석탄일을 맞아 1박 산행을 계획하였는데 그래도 회원 중 더러는 집에서 눈총을 받았나 보다.
사실 계절의 여왕 5월이라고 하지만 지난 며칠이 워낙 날씨가 더워서 이젠 5월을 여름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흥분하기도 했으나 그런 불평을 계절이 들었는지 이번 주말은 비교적 서늘한 날씨가 계속 된다. 교회를 급히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싸는데 집사람이 별 관심이 없다.
5시 30분 우리 집 모임, 그리고 차를 1박 시켜야 하므로 안전한 每松의 아파트에 두려했다가 칠곡IC 옆의 마트 옥상에 두고 칠곡의 ‘청룡민물매운탕’에서 먼저 저녁 식사를 한다. 이집은 잡어매운탕이 전문인데 이미 매우 많은 손님이 있었다. 처음 들른 橋梅가 식사 후 맛이 괜챦단다. 벌써 7시 30분, 해가 지고 주변으로 어스름이 찾아올 무렵이다.
가산IC에서 55번 고속국도에 올려 쉬지 않고 춘천에 닿으니 10시경이다. 내려다보이는 춘천시의 야경이 볼만하다. 시내에 들어온 후 뒤늦게 네비에게 물으니 U턴 하라며 아직도 56km가 남았단다. 지난 달 들른 삼악산 입구, 촌을 지나 가평입구 다리에 이르니 교통체증이 다소 있다. 다리를 건너 우측 75번 국도로 접어들어 과일 등을 샀다.

명지산 부근에 이르자 유원지, 민박집, 펜션들이 널려있다. 두어군데 들러보았으나 값이 무려 8만원을 호가하였다. 명지산을 지나 화악산을 5-6km 앞둔 곳에서 리조트가 있기에 파킹하고 4만원을 지불하고 3층 방에 들었는데 넓고 비교적 깨끗하다. 11시 30분이 넘어서고 있다. 과일을 먹으며 박지성이 출전한 맨유와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최종전을 보았다. 후반 초반에 박지성이 아웃되고 긱스가 교체되어 들어와 개인적으로는 최다출전 타이기록(758경기)를 세우더니 순식간에 한골마저 넣었다. 아무튼 2:0으로 승리한 맨유는 리그 우승의 2연패를 달성하였고 그 자리에 박지성이 함께 있었다. 퍼거슨 감독의 기뻐 뛰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해맑다. 1시경 靑竹이 언젠가 선물한 귀마개를 옆에 두고 잠자리에 들다.
대암산에서처럼 방이 건조하지는 않았지만 뜨거운 건 마찬가지였다. 6시가 못되어 다들 깨었다가 창문을 좀 연후에는 1시간 이상을 모두 깊게 잠들었다. 7시에 기상 예정이었으나 40분 이상 늦게 일어났지만 화악산이 코앞이고 산행시간이 길게 잡아도 6시간 정도여서 마음이 푸근하였다. 橋梅는 먼저 집에 전화로 잘 자고, 아프지도 않고, 날씨도 좋다고 어머니께 안부를 아뢰고는 밥과 된장찌개를 준비한다. 밥도 잘되었고 된장찌개 맛도 일품이다.
아침에 리조트를 나서니 입구에는 ‘명지산 세븐스타 리조트’라는 간판이 길가에 붙어 있다. 9시 20분, 출발하여 관청리 입구에 차를 대었더니 5월 19일까지 입산금지를 통보한다. 대구에서 왔다고 사정하니 명지산이나 연인산엘 가라고 추천까지 해준다. 그러나 예서 그칠 우리가 아니다. 다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상행하여 화악산 제1코스 안내표시 위의 펜션 앞 빈 밭에 주차하고 10시경 조심스레 산으로 올랐다.

아마도 적목리 가림 부근인 듯 싶다. 초반엔 길이 넓고 뚜렷하였으나 10여분 후 갑자기 없어지더니 결국 감으로 오르막을 오른 후에 제대로 된 등산로를 만났다. 삼거리에서 반갑게 만난 이정표에는 '중봉정상 6.2km, 삼팔교방향 1.40km, 가림 1.35km'라 적혀 있다. 이미 능선인지라 미리 준비 못한 물이 걱정되었다. 멀기는 하지만 이제 이 길만 따르면 화악산 중봉을 만날 것이다. ‘중봉정상 5.2km’ 이정표를 지나 11시 30분에 물은 아껴두고 사과를 반쪽씩 나누어 먹는다. 한참을 왔는데 이제 4.2km 이정표를 만나다. 화악산은 거대한 육산이다. 높이에서도 경기 최고봉이지만 정상에 오르는 어느 길도 만만치가 않다. 다들 힘들어 할 무렵 갑작스레 나타난 이정표는 2.2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의외의 반가움으로 약간의 힘을 보태준다.

물결치듯 결을 이룬 바위도 있고 주변에 널린 얼레지도 예쁘고 반갑지만 정작 나의 발길을 잡은 것은 가운데가 썩어 큰 구멍이 난 굵은 참나무 고목이었다. 아마도 벼락을 맞은 듯 한데 가루된 나무의 속살이 채워진 둥치의 가운데는 그렇게 포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들이 바람을 피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곳으로 보였다.
레드우드 국립공원에는 승용차가 통과하는 3,000년 이상의 큰 스퀘이어 고목도 있지만 그런 거대한 구멍보다는 새들이나 산짐승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나무의 구멍이 향기롭다. 고목이란 제목의 시를 발표한 작가가 여럿 있지만 詩山人 복효근의 세 번째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2002, 시와 시학사)’에 실린 ‘고목’이 지금의 풍경에서는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지금쯤이면 아마도 전국의 산과 들에서는 오동나무가 연보랏빛 고운 꽃을 하늘로 힘차게 피워 올리고 있을 게다.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 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하나 가꾸고 싶다
-복효근의 고목 전문-
구멍없이 사는 나무가 없듯 상처 없는 가슴이 있을까? 이왕이면 그 상처가 잘 말라 지나는 바람에 연주되어 향기로운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고, 다른 어느 생명의 안식이 될 수 있는 눅눅하지 않은 그런 잘 마른 삶의 구멍을 소망한 시인, 그의 울림이 사뭇 크다.

곧 시선이 활짝 열리는 능선마루에 닿았다. 건너편 능선과 그 너머의 산들이 겹쳐지며 점점 옅어지는 색으로 하늘과 맞닿아 하늘이 되고 아래의 큰 골짜기로는 아래로부터 녹색, 연두색, 노랑색으로 명도를 더하며 위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아, 내 표현의 모자람이여’... 만추의 산보다 오월의 산이 더 아름다운 줄 이제 알았다. 이곳저곳 어디를 보아도 감탄사마저 잠겨버릴 정도이다.
'중봉 100m, 38교 6.60km'를 가슴에 단 이정표는 반쯤 누워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이제사 작은 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애기봉에서 오르는 길, 애당초 우리가 계획하였던 등산로와 만난다. 중봉 0.05km를 남긴 곳에는 화악산의 건너편인 건들내(4.9km)에서 오르는 길을 다시 만난다.

화악산 중봉(1,423.7m) 정상, 화악산 정상(1,468.3m)을 군사시설에 내어주는 탓에 아쉽지만 이곳에서 오르기를 마쳐야 한다. 여러 개의 능선이 긴 여정을 끝내고 이곳에서 만난다. 주변엔 이들의 만남을 축복하듯 아직도 진달래가 한참 붉다. 사방을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선다. 잠시 每松이 하산 길을 잘못 들었으나 이내 복귀했다.
애기봉과의 교차로 지점 부근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물티인 靑竹은 커피용 자기 몫의 물을 물로 달랜다. 2시 30분, 커피까지 마치고 일어서자 곧 관청리에서부터 오른다는 중년의 남자 셋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38교 방향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계곡에 이르는 하산로의 경사가 숫제 장난이 아니었지만 지면이 꼽꼽하여 그리 미끄럽진 않았다. 한참이나 내려왔다. 오늘 靑竹을 그리도 긴장시켰던 물소리가 점점 세차게 들여온다. 계곡의 깊이와 크기, 물줄기, 바위이끼 등 모든 것이 백덕산에서 본 감추어진 계곡의 모습과 그리도 닮아 있다. 우선 얼음물보다 차가운 계곡수를 양껏 들이키고 자세를 바꾸어가며 몇 장의 계곡사진을 담았다.
지난 달 채취한 다래순이 못내 아쉬웠던지 다들 다래순을 찾느라 분주하다. 그 탓에 길을 놓쳤는지 길도 없는 오르막을 오른다. 결국 급경사에 붙어 10여분 이상이나 사투를 벌인 끝에 다행히 안전하게 계곡과 맞닿은 넓은 길로 돌아왔다.
예천군 감천면이 고향이라는 아저씨 내외를 만난 것은 이때쯤이다. 부부는 석룡산에 다녀오시는 길이라 했다. 이 계곡은 새가 춤추며 노닌다는 뜻의 조무락골로 그 이름이 무척이나 정겹지만 이어지는 하산 길은 지루하고 멀었다. 삼팔교를 1km 정도 앞둔 곳에 주차된 아저씨의 차를 함께 탔다. 정원초과인데다 비포장도로여서 바닥에 닿는데도 다소 초조해하는 아주머니와는 달리 내리려는 우리를 끝까지 자리에 있게 하셨다. 덕분에 삼팔교까지 1km이상, 그리고 우리 차까지 3km 이상을 쉽고 빠르게 올 수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 산행은 예상과는 달리 7시간 이상이 걸린 멀고도 힘든 거리였다. 경기 제일봉 화악산의 크기가 실감나는 산행이었다.

이번엔 우리의 차로 다시 역행하여 삼팔교와 그 주변을 사진으로 담고 돌아갈 길이 무려 350km를 넘지만 이번에는 75번 국도를 북행하여 화천,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하였다. 언제 다시 이 길을 오겠냐며 모든 회원이 쉬이 동의해 준다. 저녁은 춘천을 거의 벗어날 무렵 어렵게 찾은 전통의 멋이 풍기는 막국수 집에서 춘천막국수를 들었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