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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시의 딜레마
삼척 남양동의 '천지연사우나'는 구면이다.
'도봉산 검정고무신'이 <소년소녀가장 돕기 동해일주도보>중이던
때 산지기님과 함께 하루 동행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이용했으니까.
무수히 통과는 했으나 삼척시내에서 묵은 것은 이 두번이 전부다.
삼척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기는 홀로인 이번이 처음이고.
실직국(悉直國,혹은悉直谷國)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통일신라때
부터 지명 삼척(三陟)을 갖게 되었단다.
(삼척시내에 지금도 실직왕릉, 왕비릉이 있다)
사직역(史直驛현사직동) 일대는 원래 실직국의 터전으로'실직'의
방언이 와전되어 사직이 되었다는 것.
분가한 아우들은 노른자위땅을 분배받은 덕에 가세를 일으켰으나
형의 살림 사정은 더욱 어려워진 형국의 삼척이다.
본래 삼척땅이었던 태백과 북평이 분리, 먼저 시(市)로 승격했다.
따라서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버린 셈이다.
게다가 광산, 어항이 공존하다가 탄광의 쇠락과 어획량의 감소로
애로가 많은 지자체중 하나일 것이다.
백두대간 덕항산 자락(신기면 대이리)의 환선굴과 대금굴 등 거대
동굴들이 관광열기를 타고 효자수입원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겠다.
굴뚝없는 산업이라는 관광인프라(infrastructure)구축의 일환으로
해양레일바이크도 추진하고 있는 것이리라.
<21세기 동북아 에너지 메카, 원더풀 삼척>의 야심찬 기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할 힘이 있겠나.
많은 지자체와 대동소이한 삼척시의 딜렘마(dilemma)라 하겠다.
삼척 ~ 묵호(동해시)의 바닷길은 2007년(작년) 1월에 걸었으므로
7번국도 따라 달리듯 해서 먼동이 틀 무렵에 이미 평릉역(平陵驛:
현 천곡동)에 당도했다.
갈천삼거리, 추암삼거리, 북평공단삼거리, 이원사거리, 건천, 북평
사거리, 나안삼거리 등, 어둠 속에서 30리를 걸어온 셈이다.
평릉역터는 삼척군 땅이었으나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이
한 몸 동해시(東海市)가 됨으로서 시의 중심가가 되었다.
동해시에 들르면 꼭 전화하기로 약속한 분들이 있으나 너무 이른
시각이라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백두대간 첫 번 종주중, 백복령(정선과 동해 사이)을 지근에 두고
119구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였다.
정선과 동해의 119구조팀이 한조가 되어 깊은 산속까지 올라왔다.
심야의 이 사건 이후에도 대간의 북상과 남하를 3번이나 했음에도
아직껏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데.(백두대간25회글참조)
성품과 인품
국도를 버리고 묵호항으로 들어가 바닷가를 택했다.
달리는 차들의 소음과 매연이 없고 출렁이는 푸른 바다가 리듬인
듯 걸음을 가볍게 해줘서.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어서 묵호(墨湖), 어달산(於達山)
봉수대 아래에 있다 해서 어달항, 어달해수욕장을 지난 후는 태백
~ 강릉의 영동선 철로와 나란히 한다.
큰 나루라 해서 한나루(大津)라 했다건만 날로 줄어들어 이름뿐인
대진항을 지나면 노봉삼거리에서 다시 7번국도와 합류한다.
그런데, 바글거려야 할 어항들이 을씨년스럽고 목청을 올려야 할
거간꾼(居間)들이 하나같이 맥이 빠져 있다.
흉어이기 때문이다.
어촌의 인심은 변덕이 죽끓듯 일일변(日日變)이다.
만선이 되어 들어오면 그 날은 종일 흥청대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온종일 뚱한 것이 냉기가 돌고 볼썽 사납다.
말 붙이다가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성품의 문제일까.
망상역(望祥)을 지나 '들축나무거리'를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이미 변하고 또 변했는데 짐작이나 되겠는가.
망상역에서 망상초등학교 사이 논두렁이라는 한 줄 기록뿐.
강원감찰사로 부임한 강감찬 장군이 동해안지방 순행차 강릉에서
방재를 넘어 여기 망상의 들축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쉬었단다.
이 때 개미들이 몰려와 장군의 허벅지를 마구 물어대므로 장군이
지팡이로 금을 그었는데 개미가 금 안에 얼씬하지 않고 어쩌다 금
안에 들어온 개미도 물지 않아 편히 쉬고 갔다나.
그 후로도 이곳의 개미는 물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이 인근에서
일을 하다가 쉴 때는 들축나무 그루 밑으로 모여들었다는데.
동해고래화석박물관에 들렀다.
꼭두새벽의 부지런 덕에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일까.
안내 직원의 친절에 반백리 걸음의 피로가 사그라지는 듯 했다.
사람은 다분히 기분파다.
자기의 친절이 상대를 이처럼 기껍게 해준다면 베풀 수록 좋고도
보람있는 일 아닐까.
베푼다 해서 어떤 손해를 보게 되는 것도 아닌데.
심은 대로 거둔다(因果應報)잖은가.
인품의 문제일 것이다.
동해고래화석박물관
망상(望祥)해수욕장이 많이 변했다.
반세기가 적은 세월인가.
겨우 일정구간에 한해 출입이 허용됐던 예전과 달리 마냥 걸어도
되는 것이 우선 다행이다.
각종 편의시설은 물론 기관과 단체의 리조트(resort) 시설, 해안
컨벤션센터까지 들어섰다.
낭만과 맞바꾼 시설들이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사람은 어찌 이다지도 많이 변했는가.
세 가족이 포항에서 동해 따라 올라오면서 원덕 어촌에 한 인연의
씨를 뿌려 놓고 여기 망상해수욕장에 들렀다.
유소년 여섯이 일제히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로 달려갔다.
하마터면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를 이 아이들로 인해 혼비백산한 세
부모의 반응들이 각각이었다.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도박이라 했던가.
다급한 상황에 접하면 인품이 적라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내 아들은 겁 없이 달려가는 애들을 막으러 뛰어갔을 뿐인데 가장
위(초등학교4년)라는 이유만으로 야단맞고 있었다.
자기 자식 귀하지 않은 부모 있는가.
우리 부부가 표정 관리하느라 애먹고 있을 때 제 오빠를 위무하고
있는 두 어린 딸이 기특해 보였다.
가족이라는 것,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는 가르치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 이미 알고 있다.
1970년대 일이며 이 아이들이 다 40대 전후로 부모가 되어 있다.
옛말이 된 이웃사촌
파도와 백사장과 송림과 영동선철도와 7번국도와 동해고속국도.
흔치 않은 정경의 망상을 뒤로 하고 강릉시로 넘어들었다.
옥계면 도직리다.
나루가 있어 도직진이었는데 자연 폐진(廢津)으로 도직리란다.
길이 곧다(道直)는 뜻의 지명처럼 동해고속국도가 마을 가운데로
곧게 관통함으로서 정작 마을은 사라지고 말았다나.
마을 이름처럼 올곧던 주민들도 배금(拜金)세파에 침잠되어 작은
이해를 이웃 사촌보다 우선하게 되었고.
동해시와 강릉시의 경계
파도와 송림과 철도와 국도, 그리고 고속국도가 오순도순하는
정경인데 사진으로는 아쉽다.
주수천을 건너(珠樹橋) 옥계면 소재지 현내리까지 나아갔다.
옥계(玉溪)는 옥천우계(玉泉羽溪)에서 나온 지명이다.
옛 옥천현(玉泉縣)과 우계현(羽溪縣:현 縣內里)이 합쳐서.
우계창(羽溪倉:대동지지)이 있던 곳이다.
마을 뒤로는 우계산성도 있었단다.
백두대간 석병산과 통한의 자병산이 옥계면의 산이다.
옥계IC일대가 국도와 철도까지 엉켜 어지간히 어지럽다.
밑으로, 위로, 또 밑으로 가로질러 낙풍천(樂豊橋)을 건넜다.
낙풍리가 안온(安穩)해 보였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背山臨水形) 남향 마을이며 풍부한 물 덕에
매년 풍년이 들므로 낙풍리라 했단다.
예전이라면 찾아가 기웃거리며 마을분위기를 알아보고 물어보고
했을 것이다.
대간과 정맥들, 심산에서 저런 마을을 대면하면 걸음을 돌려 마을
형편을 살펴보곤 했으니까.
서울을 떠나 정착할 만한 곳인가를.
그러나, 그런 생각 접은지 이미 오래다.
하루살이 어촌 인심과 달리 일년간다는 풍년인심도 옛말이다.
짓궂기는 하나 풍요로운 민속의 하나인 '서리'가 특수절도로 정죄
되고 촌락의 문명화, 발전 따라 송사가 난무하는 시골이 아닌가.
"이웃이 사촌"이던 사람들이 이해관계에 예민해지고 고발, 고소가
다반사인 시골보다 경우 밝은 서울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웃 사촌은 이미 옛말이니까.
낙풍사거리에서 잠시 망설였다.
동해2터널의 지름길과 피래산(彼來山) 허리를 넘는 꼬불꾸불길중
택일해야 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돌기는 해도 방재 고갯길을 넘는 것이 정도(正道)라 하겠으나 빠듯
한 시간에 밀리고 말았다.
'방재'는 급제하고 금의환향하는 사람을 환영하기 위하여 급제자의
성명을 적은 방문을 재마루에 걸어놓음으로서 '방재'가 됐단다.
그러니까 '밤재'는 구전 혹은 표기의 오류라고.
난발전의 전형 정동진
터널 앞까지는 완만한 고갯길이 계속된다.
밭에서 일하던 한 분이 보행자 통로가 없다며 가지 말라 했음에도
무작정 올라갔는데 다행히도 강릉 젊은이들의 차량 도움을 받았다.
피래 발원의 정동진천을 낀 지루한 내리막 끝에 도착한 정동진역.
초라한 해안간이역이 이렇도록 번화하게 될 줄이야.
정동천을 중심으로 북쪽 현1리 마을은 물이 흐르는 쪽으로 내리퍼
먹고 남쪽인 현2리는 반대쪽에서 치퍼먹는단다.
그래서 속이 서로 다르다며 미묘한 갈등관계에 있는 두 마을지역이
한양 궁궐의 정동(正東)쪽 나루라는 것은 600년 역사다.
게다가, 실제 위도상으로는 서울 도봉산과 일치한단다.
바다와 최근접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것도 각광받은 후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TV의 위력이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그 촬영지가 동시에 뜨게 된 1995년 이후다.
주말의 청량리역이 바빠졌고 철도공사의 상술이 주효했다.
해돋이(맞이)열차는 전국화 되었다.
여기에, 1996년 북한의 일조가 있었다.
북한 잠수정 침투와 정동진을 매스컴이 집중 보도했으니까.
내가 정동진에 처음 들른 것은 1970년대 초의 여름이다.
승용차 2대에 분승한 우리는 설악산에 오른 후 강구(경북영덕)로
가는 도중이었다.
한양의 정동이라는 이유로 비포장 좁은 길을 마다 않고 들렀으나
삼엄한 해안경비가 초를 쳤다.
1996년 말에는 어망에 걸려 좌초한 북한 잠수정을 보겠노라 달려
갔다가 봉변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이후, 자의 타의가 겹쳐 들를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정동진이라 해서 우리나라 관광지의 혐오스런 발전전형
(典型)에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난개발과 시설의 무리한 난립, 불결과 불친절과 바가지 상혼 등..
오죽하면 신규시설을 놓고 영업권 침해 운운하며 자기네 끼리 한
판 붙는 현상이 일어날까.
정동진의 두 얼굴: 쓰레기 천지 해변과(상) 썬크루즈리조트(하)
역무원의 신경질적 응대후라 관광안내 직원의 호의가 돋보였나.
강릉시청 관광과 중국어 담당인 점과 어투, 성명(金延宣) 등으로
미루어 중국교포라는 느낌인데 고래박물관직원을 연상케 했다.
12월 중순의 싸한 바닷바람에 움츠러들려 했는데, 그녀가 내놓은
따뜻한 녹차의 김속에 정(情)이 피어나는 듯 했다.
백사장 따라 등명항까지 가려는 무모가 체력과 시간을 낭비했다.
말쑥한 신사맵시라야 하는가.
매일 목욕해서 땀내도 나지 않건만 허술한 차림의 늙은 나그네라
무전취식할까 겁나는가.
점심장사를 마치고 쉬려는 참이라 불청객인가.
등명해변에서 나와 들른 식당(등명횟집)이 시큰둥했다.
하긴, 삼척에서 여기까지 걸어와 첫 식사를 하려는 늙은이라면 온
정신으로 보이지 않겠지.
평해대로 스케치4(330리 동해안길의 끝)
점심 식사후 처음 들른 곳은 안인진으로 가는 해안길 왼쪽의 6. 25
남침사적탑이다.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도 있다.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하기 1시간 전인 새벽
3시에 북한군은 이미 남쪽 해안으로 침투해 이곳에 상륙했다는 것.
이 때 희생한 민간인들의 넋도 위로하기 위해 함께 세웠단다.
6. 25남침사적탑
곧, 마주친 물체는 건물인지 조형물인지 괴상한 이미지다.
비탈 위 넓은 터(75.000평)의 하슬라아트월드가 이색적이다.
강릉의 신라때 지명 '하슬라'+'Art World'(예술세계)의 합성어란다.
예술가 4명이 3년여의 각고로 2003년 10월 개관하였다는데 과정을
중시하는 예술가들이 만들어가는 테마파크라 할까.
"과정도 예술행위"라고.
파리의 뽕삐두센터를 연상하게 하는 저 괴상한 물체는 하슬라아트
월드에 따른 하슬라뮤지엄호텔이란다.
하슬라뮤지엄호텔
신라 선덕여왕이 정승에 올리려 했으나 거부하고 승려가 됐다는
진골(眞骨)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세운 절이 많기도 하다.
여기 등명락가사(燈明洛加寺)도 그가 '수다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했는데 이조 승유정책의 제물이 되었다가 부활했단다.
반쪽터널인 피암터널 2개를 지나면 안인리(대동리) 통일공원이다.
해안의 함정전시관과 산자락의 안보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강릉시가 개설했다는 괘방산 '안보체험등산로'도 있다.
1996년 9월 ?일, 잠수정을 타고 침투한 북한 무장군인들이 괘방산
줄기를 따라 도주하다가 화비령 ~ 청학산에서 자살했는데(11명?)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단다.
당시 침투했던 잠수정이 함정전시관 옆에 전시되어 있다.
등명락가사(상), 안인리(대동리) 해변의 함정전시관(중)과
남침잠수정(하)
이조때 수군 만호영이 있던 안인진(安仁津)에서 해안로는 막힌다.
평해대로 330리 동해안길도 끝이다.
군선강(群仙橋)을 건너 모전 삼거리로 나갔다.
모전리 마을 표석에는 '뙡마을'이라는 부제가 새겨있다.
띠(茅草)가 많은 곳이라 뙡마을, 또는 모전리(茅田)라 했단다.
모전삼거리, 모전교차로 등 7번국도로 옮길 수 있는 2번의 기회를
버리고 강동면사무소 앞에 도착한 때는 어둑거리는 시각이었다.
동지가 코앞이라 강릉 20리길은 또 밤길이 되고 말았다.
안인진항(상)과 안인진리(중), 촌로가 가리킨 옛 안인역 일대(하)
모전리 표석
강릉시내 직행길 남강로 곁을 뜸하게나마 오고가는 영동선열차가
존재를 과시하려는 듯 남기고 가는 둔탁한 쇠소리가 싫지 않았다.
강릉공군기지에서 발진한 야간훈련 전투기의 굉음도 생명의 소리
처럼 느끼게 된 것은 외로운 밤길이기 때문이었을까.
'남강로'는 7번국도의 부담을 덜어주는 보조도로인가.
강동면을 시내권으로 묶는 수단인가.
아무튼, 홀로 걷는 늙은 길손에게는 편한 밤길이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