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충주(忠州)는 충청북도 중앙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BC 3∼4세기에는 마한에 속하였다. 그 뒤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었으나, 다시 고구려에 속해 475년(고구려 장수왕 63) 국원성(國原城)이라 하였다. 557년(신라 진흥왕 18) 국원소경(國原小京)이라 하였고, 757년(경덕왕 16) 중원소경(中原小京)이라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충주라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충주목(忠州牧)이라고 하였다. 995년(성종 14) 창화군(昌化軍)으로 바꾸고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가 1018년에 전국의 8개목 중 하나가 설치되어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254년(고종 41)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는 충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충청도관찰사를 두었으며, 명종·광해군·인조·숙종·영조 등 여러 시기에 모반 등으로 인해 유신현(維新縣) 또는 충원현(忠原縣)으로 개칭되면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 충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 실시로 충주부가 폐지되었고 충청북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08년(순종 2) 도청을 청주로 이전시키고 군수를 두었다. 1917년 충주군 읍내면이 충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 7월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분리되었다. 1989년 중원군 살미면 목벌리(木伐里)와 이류면 만정리(萬井里) 일부를 충주시에 편입하였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하여 충주시가 되었다.
성씨의 역사
충주최씨(忠州崔氏)의 시조 최승(崔陞)은 당나라 사람으로 초명이 최우(崔偶)다. 846년(신라 문성왕 8) 신라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창궐할 때 당나라 무종(武宗)의 명을 받아 병마사(兵馬使)로 와서 이를 토평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원종(元宗)·경노(京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종(昭宗)의 명을 받아 상장군(上將軍)으로 와서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그 후 예성(蘂城)에 그대로 머물러 후손들이 본관을 충주(忠州)로 하였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호장(戶長)을 지낸 최공의(崔公義)를 1세로 하고 있는데, 그는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고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졌다.
양정공파(良貞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총제공파(摠制公派) 등이 그들의 7세조인 최공의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는 반면, 한림공파(翰林公派)는 최고(崔暠)를 최공의와 동격으로 기록하고 그를 1세조로 하고 있다.
분적종 및 분파
양정공파(良貞公派)는 불정파(佛頂派), 천안파(天安派) 등 14개의 지파로 나뉘고, 전서공파(典書公派)는 양주파(楊州派), 파주파(坡州派) 등 5개 파로, 총제공파(摠制公派)는 용인파(龍仁派), 진천파(鎭川派)등 27개 파로, 한림공파(翰林公派)는 음성파(陰城派), 하담파(荷潭派) 등 9개 지파로 나뉜다.
주요 세거지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동평리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죽원리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노곡리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충청북도 중원군 동량면 대정리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구방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충주최씨는 4,240가구 총 13,46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