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살인사건 모음
<부총리 유희서 살인사건>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 스캔들은 선조 36년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특진관(현 부총리) 유희서가 휴가 중인 포천에서 살해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범인으로 의심되어 조사를 받던 네 명의 하수인이 포도청에서 감쪽같이 살해된 사건이다.
사건에 임금의 큰아들 임해군이 연루되면서 조정과 임금의 팽팽하게 대립하고
두 달 동안 조정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포도대장 변양걸은 귀양가고, 오히려 피해자의 아들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가지만 명재상 이덕형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임금의 아들을 탄핵한 대신들은 줄줄이 파직을 당한다.
<안협 구 소사 살인사건>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여인이라고 해도 질곡의 삶을 살았다.
남편이 첩을 두어도 드러내놓고 질투를 할 수 없었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따라 죽어야 열녀나 절부가 되고 수절을 해야 문중의 영광이 되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은 물론이고 남편이 없는 과부라도 간음을 하면 자녀안에 올라 후손이
출세를 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
이 때문에 사대부가의 유지들은 집안의 여자들이 음란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정조 11년 강원도 안협에 사는 이언이라는 양반이 문중 사람들과 함께 조카며느리 구 소사를
강제로 자루에 넣어 강에 던진 후 돌덩이를 얹어 살해한 잔인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야가 들끓었다.
문중의 명예를 위해 일가들이 모여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노비 덕금 살인사건>
세종 9년,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쟁쟁한 사대부가 여종을 학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형조판서 노한이 경악하여 사건을 자세하게 수사하자 범인은 뜻밖에 세종의 총애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출중하여 일가를 이룬 집현전 응교 권채였다.
세종은 보고를 받고 ‘참혹하도다. 정녕 참혹하도다!’를 연발하며 개탄했다.
더욱 경악할 일은 이를 죄라 여기지 않는 권채 부인의 태도였다.
노비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인이 이를 매로 다스리는 일은 조선시대에 항용 있는 일이었으나 권채 일가의 포악하고 잔인한 행위는 실로 주변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시대 사채사건>
조선시대에도 지금의 사채업인 대금업이 성행했다.
재상의 벼슬이 있는 사람이 사채놀이를 하다가 탄핵을 받는가 하면, 채무자가 도망을 가자
그 아내를 잡아다가 사사로이 옥에 가두어놓고 한 달 반이나 채찍질을 해 죽인 사건도 있다.
숙종 3년, 한양 성 밖에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포도청에서 조사를 해보니 사채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조선시대 사채는 양반들이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세워 탐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여러 가지 병폐를 낳았다. 돈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거나 가족을 노비로 삼았으므로
사회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특히 이러한 사채제도는 조선 말에 이르면 소작 문제와 함께 백성들을 유민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부녀자 납치 사건>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허견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허견은 아버지 허적의 위세를 믿고 여러 가지 패악을 저질렀는데,
그 중 하나가 부녀자를 납치하여 희롱한 사건이다.
그 여인은 이동귀의 딸 이치옥으로 서억만의 아내였다.
때마침 그 시기에는 남인과 서인인 칼날처럼 대립하고 있을 때여서
서인은 남인을 탄핵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다.
그러나 숙종이 남인의 중추인 허적을 깊이 신임하던 터라 격렬한 탄핵을 받았음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조선시대 권력자들이 부녀자를 납치하는 행위는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종친 이석산 살인사건>
세조 1년, 한양에 있건 반송정 아래에서 칼로 베어져 참혹하게 살해된 남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이석산으로 왕실의 종친이어서 권세를 부리던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거사 동지인 재상 민발의 첩과 간음을 하는 등 사생활이 문란했다. 피해자는 왕실의 종친이고 가해자는 공신이었다.
권력의 취고 정점인 임금과 맞서서 진실을 밝히려 한 동부승지 이휘는 결국 파직을 당하고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평산 박 소사 살인사건>
정조 때 황해도 평산에서 18세 정도로 추정되는 박 소사라는 젊은 여인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흠흠신서’에 인륜을 파괴한 다섯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살해한 결우로, 입을 막기 위한 사건이다.
사건이 벌어진 원인은 간음이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칼에 찔린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협박하여 자살하게 만든 위핍치사율로, ‘속대전’ 의하면
장 1백 대에 속전을 바치면 풀려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3년간의 철저한 수사와 조사로도 진범이 밝혀지지 않자,
정조가 암행어사까지 파견하여 진실을 밝힌 사건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 조사와 검험 끝에 엄청난 진실이 밝혀져 조선시대 과학수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강진 안 소사 살인사건>
정조 14년 전라도 강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한 양갓집 젊은 부인이 안 소사라는 여인을 살해한 뒤에 현청에 와서 자수하고
자신의 원수 최정련을 죽여달라고 고발했다.
강진현감 박재순은 대경실색하여 여인을 동헌 마당에 꿇어앉히고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18세로 성은 김씨요, 이름은 은애라고 했다.
사악하고 간교하여 남을 모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안 소사는 은애를 시누이의 아들인 최정련과
맺어주고 싶어 은애와 최정련이 사통하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퍼뜨렸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안 소사의 거짓말에 정절을 훼손당했다고 생각한 은애는
마침내 안 소사에게 처절한 복수의 칼을 뽑아 든다.
이 사건들 외에도 여러 사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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