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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통제일 목건련(神通第一目建連)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의 콜리타라는 마을의 한 부유한 브라만 사제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의 교단에 사리불과 함께 들어온 후 맹렬하게 수행한 결과 진리를 깨닫고 십대제자의 반열에 끼게 된다. 열명의 제자 중 목건련의 두드러진 특기는 신통력이었다. 그는 신통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날아 다니는 물체를 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목건련은 육신통을 적절하게 발휘하여 포교와 부처님 교단 유지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오직 중생을 교화하는데만 신통력을 쓸 뿐 삿된 목적으로 악용한 적이 없었다.
목건련은 효성 또한 지극했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를 아귀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효자역할을 충분히 한다. 이 [우란분경]의 가르침으로 오늘날도 우리 사찰에서는 돌아가신 선조들을 천도하는 우란분재(盂蘭盆齋)가 열리고 있다. 우란분재는 다른 말로 백중(百衆) 또는 백종(百鍾)이라 불린다. 백중 혹은 백종이란 말은 100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려 저 세상으로 간 부모님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법회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목건련은 사리불과 더불어 부처님을 배반한 데바닷타의 무리 500명을 부처님 품안으로 귀의 시키는 등 부처님 법을 널리 펴는데 매진했다.
목건련은 불행하게도 포교의 길에 나서다 난폭한 이교도에게 매를 맞아 순교한다.
신통력이 으뜸인 그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첫번째 그런 위기에 접하여 신통력으로 죽음을 모면했지만 두번째는 이것이 자신의 업인줄 알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목건련은 석굴암 본존불 우측에,바라보는 자 측에서는 좌측에 사리불과 마주한 채 커다란 메부리코에 고개를 약간 쳐든 연로한 비구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두 팔은 옷 속에 감싸여 있지만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한손으로는 향로 자루를 잡고 다른 손으로 향을 넣으면서 고요하게 사념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묵연히 서 있다.
신통력의 진정한 의미
사리불과 더불어 초기 불교 교단의 쌍벽을 이룬 인물이 목건련 존자이다. 좌 목건련 우 사리불이라고나 할까. 이 두사람은 부처님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던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사리불과 목건련은 이지적인 청년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가정 환경과 교육 수준, 그리고 아름다운 우정으로 언제나 함께 했으며 청년으로 성장한 후에도 목건련은 사리불과 함께 학문과 인생, 종교적 진리에 대해서 서로 진지하게 토론해 가면서 구도의 길을 간다. 목건련은 마가다국 왕사성 근처의 콜리타(Kolita)라는 마을에 한 부유한 바라문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도 콜리타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그의 어릴적 이름도 역시 콜리타로 불렸다 한다. 그는 유복한 가정환경과 바라문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특권, 그리고 그 영민한 두뇌로 4베다를 비롯해 당시 고도의 학문 세계를 훌륭하게 학습하게 된다. 사리불의 권유로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선 코오리타는 목갈라나(Maudgalyayana)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선 이후 맹렬하게 수행환 결과 진리를 깨닫고 10대 제자의 반열에 끼게 된다. 이 열명의 제자중 그의 두드러진 특기는 신통력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통 제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신통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날아 다니는 물체를 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처님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래서 『증일아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나의 제자 중에 신통 제일은 목건련이다'라고 하셨다. 사실 신통력이란 요가 등의 선정 수행으로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다 보면 생겨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부처님 역시 이 신통력을 획득했다. 그 신통력에는 모두 6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를 일러 육신통(六神通)이라 한다. 이름하여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이다. 천안통이란 가시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멀리까지도 볼 수 있을 뿐더러, 일상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차원을 뛰어넘은 세계마저 보는 눈이다. 천이통란 천안통의 신비한 능력처럼 그 듣는 데서 뛰어나고 비범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소리를 다 듣는다. 타심통이란 상대방 마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숙명통이란 인간의 과거 운명을 꿰뚫는 능력을 말한다. 신족통은 생각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고 마음 먹는 대로 그 장소에 도달할 수 있는 신통력이다. 마지막으로 누진통이란 번뇌를 모두 끊어서 사바세계에서 결코 고통을 당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러한 6가지 신통력중 누진통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가지는 다른 종교적 수행을 통해서도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누진통을 통과한 다음의 신통력과 그렇지 못한 신통력에는 차이가 있다. 번뇌를 끊지 못한 자의 신통력은 잘못 쓰여 혹세무민하는 삿된 길을 조장할 수 있다. 그러한 페해를 막고자 부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통력의 사용을 자제시킬 정도였다. 목건련은 육신통을 구비해 그의 포교 활동과 부처님 교단 유지에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하였다. 사실 오늘날도 신통력이 미치는 불가사의한 힘이 많은 사람의 마음를 흔들어놓고 있는 마당에 아주 먼 그 옛날 인지가 발달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신령스러운 능력이 끼치는 사회적 파장은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건련은 오직 중생을 교화하기 신통력을 쓸 뿐 삿된 목적으로 악용한 적이 없었다. 부처님으로부터 집착을 버림으로써 해탈로 들어서는 이치를 접한 제석천은 붓다의 법문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여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거처인 도리천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제석천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목건련은 그가 과연 진정한 해탈을 얻었는지 미심쩍어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는 도리천에 올라가 제석천을 만났다. 제석천은 500명의 천녀들과 못에서 목욕을 하면서 줄기는 등 목건련에게 자신의 누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거듭 자랑했다. 그러자 목건련은 제석천이 지나치게 방탕하며 이 세상의 영화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고 그 집착심을 없애주려고 신통력을 부려 한 발각락으로 누각을 쳐 누각을 흔들리게 해 놓자, 천녀들은 겁이 나서 그곳을 하나 둘 빠져나갔다. 그리고 제석천에게 '누각이 훌륭하다 해 놓고서는 이다지도 삐걱거리고 흔들리느냐'하고 비웃어 그의 교만함과 집착심을 뉘우치게 했던 것이다. 우란분절과 목건련 목건련은 효성 또한 지극했다. 중국에서 찬술된 『우란분경(盂蘭盆經)』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를 아귀도(餓鬼道)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효자 역할을 충실히 한다. 목건련의 어머니는 출가 사문을 비방하며 미신을 믿어 축생을 함부로 죽여 귀신에게 바치고 바른 인과의 도리를 믿지 않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르다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효심한 지극한 목련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신통력으로 천상계와 인간계를 두루 살펴보았으나 어머니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옥계를 돌아보자, 아니 거기서 아귀도의 굴레에 묶여 고통당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아귀란 배는 남산만큼 큰데 입은 바늘구멍만큼 좁아 배고파도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중생을 말한다. 그는 생각다 못해 음식을 장만해서 지옥계로 내려가 어머니를 먹이려 했으나, 순간 갑자기 그 아귀도의 고통을 받는 어머니 입에서 불길이 솟아나와 준비해간 음식을 깡그리 태우고 말았다. 목건련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그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별 도리가 없음을 직감하고 부처님께 도움을 청한다. '네 어머니의 죄가 너무나 커서 너의 신통력으로도 구제할 방도가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출가 사문들이 하안거를 마치고 자유스러운 수행에 들어가는 음력 보름 7월 15일에 시방의 여러 사문들을 초청해서 진수성찬과 그 해에 농사지은 신선한 햇과일들로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인해 일곱생 동안의 선친과 현세의 부모들이 모두 재앙에서 벗어난다. 뿐 아니라 현세의 부모들은 장수와 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을 듣고 그는 스님들께 공양을 올려 어머니를 아귀도에서 구해내게 된다. 이 『우란분경』의 가르침으로 오늘날도 우리 사찰에서는 돌아가신 선조들을 천도하는 우란분재(盂蘭盆齋)가 열리고 있다. 우란분회의 산스크리트 명은 울람바나(ullambana)다. 이 말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뜻인데, 거꾸로 매달리는 것 같은 고통으로부터 사자(死者)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천도재(薦度齋)를 우란분재라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지어 지옥을 의미하는 나락(奈落 : naraka)을 일컬어 '다리를 윗쪽으로 하고, 머리를 아랫쪽으로 한 채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경전의 게송(偈頌)도 있다. 그러나 울람바나를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자(死者)'라는 식의 해석은 어원적인 의미를 일반적 의미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약간 무리가 따른다. 해서 최근에 일본의 이와모도(岩本) 씨는 이란어 기원설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는 이 울람바나의 어원이 사자의 영혼을 뜻하는 이란어 '울람바'에서 나왔다고 한다. 타당성 있는 뿐더러 귀담아 들어볼 얘기라 생각하나 아직은 확실한 증거는 없은 모양이다. 우란분재는 다른 말로 백중(百衆) 또는 백종(百鍾) 중원(中元)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 명절로 자리잡아 왔었다. 백중 혹은 백종이라는 말은 100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불.법.승 삼보께 공양을 올려 저 세상으로 간 부모님들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법회에서 나온 것이다.(이 백가지 음식으로 공양하는 것과 관련지어 우란분은 음식을 담아 공양하는 쟁반이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그 날이 일년 365일 중 정 가운데 가리키기 때문에 중원이라 했다. 신라 시대부터 백중절 행사를 개최해 왔는데, 조선 시대에는 사월초파일인 연등일과 더불어 2대 명절로 자리잡았다. 이 날은 보통 힘들게 일한 농부며 일꾼들의 잔치날로 여겨져 왔으나 오늘날은 그들 노동자들의 축제의식은 사라지고 앞서 간 부모님들의 천도제로 그 규모가 축소되어 온 그낌이다. 일본에서 봉오도오리(盆踊)라 하여 대대적으로 사람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춤을 추며 조상들의 영혼을 맞아들이고 보내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우란분재 행사가 중국에서 찬술된 『우란분경』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목건련의 지극한 효성이 그 만큼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관계 목건련 역시 사리불처럼 부처님 대신 설법을 행할 정도로 부처님의 신뢰을 받는다. 장아함 제1 『대본경』에서는 말한다. '나에게 두 제자가 있는데, 첫째는 사리불이요, 둘째는 목건련으로서 모두 제자 중에 제일이다.' 또한 목건련은 사리불과 더불어 부처님을 배반한 데바닷다의 무리 500명을 부처님 품 안으로 귀의시키는 등 부처님 법을 알리는데 매진한다. 심지어 그들이 한 때 포교의 길을 떠나매 일년 이상 정도 걸리는 가시밭길을 함께 걸어갔다고 했으니, 둘 사이의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진리를 전하려는 그들의 아름다운 인격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시인 고은씨가 모 일간지에서 한 말을 적어보겠다. '관계를 ꂙ기는 어렵지 않지. 그러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어. 그 관계를 위해 서로 책임을 져야 해. 해서 관계라는 것은 가장 황홀한 책임인 것이지. 만남은 저 지평선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동행의 아름다운 책임을 져야 해. 그리고 그 관계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도록 도와야 해.' 목건련은 불행하게도 포교의 길에 나서다 난폭한 이교도에게 매를 맞아 순교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통력이 으뜸인 그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첫번째 그런 위기에 접하여 신통력으로 죽음을 모면했지만, 두 번째는 이것이 자신의 업인줄 알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목건련이 이렇게 비명에 저 세상으로 떠나자 그와 절친했던 사리불도 '목건련과 함께 입멸을 맞고 싶다'고 부처님께 간청할 정도로 애걸해 하다가 이승을 떠나게 된다. 석가모니는 이렇듯 아끼는 두 제자를 보내고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가눌길 없어 한다. '비구들이여, 사리불과 목건련이 세상을 뜬 이후 이 모임이 나에게는 마치 텅빈 것 같구나. 그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모임이 나에게는 어쩐지 쓸쓸해서 견디기 어렵구나.' 그러나 부처님은 그러한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간 이들 두 제자를 예를 들어 자기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수행해 나갈 것을 당부한다. '커다란 나무가 있어 때로는 그 가지 몇 개가 먼저 시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두 사람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되,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되,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상응부 경전) 목건련은 석굴암 본존불 우측에, 그러니까 바라보는 자 측에서는 항하여 좌측에 사리불과 마주한 모습으로 커다란 메부리코에 고개를 약간 쳐든 연로한 비구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요하게 사념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묵연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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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 새겨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