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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3부작> 난중일기. |
▣방송 : 2008. 4. 26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김창범 PD
▣글,구성 : 윤영수 작가
지금까지 우리는 |
<한국사 傳 3부작> 난중일기 인간 이순신의 기록 |
되찾은 32일간의 기록!
2008년 4월 2일. 이순신에 관한 새로운 기록이 공개됐다. <새롭게 발견된 충무공유사> |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의 기록만으로 이순신을 만나기는 어렵다.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를 위해, 인간적인 기록들은 삭제해 버렸다. |
<이순신 친필 일기> <정조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
이순신. 그의 섬세함을 들여다보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이순신은 강인한 전쟁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이순신은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내의 병을 걱정하는 남편이었고, 아들의 안부를 염려하는 아버지였으며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들이었다.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고 했다 <갑오년 8월 27일 일기 中>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수가 없다 <임진년 1월 1일 일기 中> 이러한 세심한 성격은 휘하의 부하들을 대할 때 더욱 드러났다. 전시 때마다 부상자와 전사자들의 소속과 실명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은 물론, 전사자 가족들의 생계까지 신경써주었다. “시신은 배에 싣고 돌아가서 장사 지내주게 하고 처자들은 구휼하는 법에 따라 구휼하도록 지시하며, 부상자들은 약물을 나누어주고 치료해 주도록 엄하게 지시하였습니다.” <부산파왜병장 中> |
임진왜란. 이순신은 예감하고 있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임진년. 그러나 조정에서는 오히려 수군폐지를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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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4월 13일. 이순신이 전쟁 소식을 들은 것은 이틀 뒤인 4월 15일이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조선 육군은 패배를 거듭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5월이 될 때까지 출전을 미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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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3부작> 난중일기. |
▣방송 : 2008. 5. 3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정현모 PD
▣글,구성 : 정윤미 작가
정유년 6개월간의 기록! |
縮, 웅크린 영웅
1597년 정유년, 당시 이순신의 개인적 상황은 한 인간이 견뎌내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했다. 백의종군 길에 오른 지 십여 일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모친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조선 수군 재건이란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된다. |
이순신은 자주 웅크리고(縮) 있었다. 승산이 희박한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함부로 두려움을 내비칠 수 없었던 장수는 고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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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란 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보지 못했다. - 난중일기 8/22 |
12 vs. 330
1597년 정유년 7월, 조선 수군은 거제도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참패한다. 해전으로서는 유일하게 진 이 전투로 조선 수군은 궤멸 되었으며 조선 함대 160여척을 잃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이때,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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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필死즉生을 외치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난중일기 中 |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된 친필 난중일기. 그 속에는 여태까지 출간된 많은 난중일기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이순신의 모습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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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3부작> 난중일기. |
▣방송 : 2008. 5. 10 (토) 20:1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이상호 아나운서
▣연출 : 성준해 PD
▣글,구성 : 지현주 작가
이순신 최후의 결전 노량해전. |
전사냐, 자살이냐??이순신의 최후의 진실.
이순신의 전사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전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주장에서 부터 살아서 은둔했다는 설까지.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현재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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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군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이순신은 불길한 꿈을 꾼다. 그날 저녁 날아든 비보. 아산 본가에서 있던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었다. 정유년 초 어머니를 잃었던 이순신. 그는 아들마저 잃었다. 가족도 지키지 못한 채 계속 왜군과 싸워야 했던 이순신. 영웅의 이름 아래 가려진 그의 심정을 난중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껏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1597)년 10월 16일 일기> |
<이순신의 친필 초고 일기> <난중일기는 무술년 11월 17일로 끝난다> |
조선은 이순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명량해전에서 12척으로 133척과 맞서 승리한 이순신. 그러나 선조의 평가는 달랐다.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조실록 中>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루어 낸 이순신. 선조에게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는 장수였지만 또한 경계의 대상이었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투옥, 백의종군까지 치뤘던 이순신.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의 자리는 조선을 지키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는 자리였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정유년 4월 16일 일기> |
노량해전 그 최후의 기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면서, 왜군은 급하게 철수를 시도한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을 보내주자고 청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절한다. “한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소. 그러나 나는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할 수 없소”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관음포로 유인한다. 19일. 이순신은 뱃머리로 내려가 몸소 북을 치며 지휘를 시작한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적선 수 백척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상촌집> 영웅의 최후는 장렬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징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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