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측은 1940년 6월의 항복(휴전)과 7월의 비시정부 수립이 모두 불법이었다고 공격했고, 변호인 측은 모두가 기존 헌법과 법률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사실 비시정부의 절차적 합법성은 흠이 없었고, 그것이 특수한 상황에서 강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는지 여부는 입증하기 어려웠다. 결국 주된 쟁점은 비시정부가 점령 시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였다. 페탱 측은 휴전협정과 비시 프랑스의 확보는 프랑스 전 지역이 적에게 넘어가는 상황보다 분명히 나았으며, 프랑스 식민지(특히 북아프리카)가 보전되고 프랑스 병력(특히 강력한 해군 전력)이 전쟁에 불참함으로써 연합군에게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검사 측은 차라리 프랑스 전역이 점령되는 편이 임시정부와 레지스탕스 활동에 더 큰 힘을 부여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상 괴뢰정부인 비시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아직 자유롭다는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페탱 측이 가장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쟁점은 비시정부의 손으로 레지스탕스를 공격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독일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했던 레지스탕스 대원 하나는 “페탱 정부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이해한다”고 증언했다. 과연 검찰 측 사람들이 페탱을 단죄할 자격이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조르니 변호사는 검사를 맡고 있던 모르네 역시 웬만큼 점령군에게 협력했었다고 폭로했다. 드골? 그는 런던에서 편안히 지내며 처칠과 골프나 치러 다니지 않았는가? 페탱이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히는 동안 그가 실질적으로 한 일이 뭐가 있는가?
배심원의 심리는 8월 1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몬지보 판사는 5년 유배형을 제안했지만, 대체로 레지스탕스 출신 배심원들에게 무시당했다. 그들은 거의 전원이 사형을 주장했다. 반면 국회의원 출신 배심원은 유대계인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형에 반대했다. 결국 다수결로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다만 페탱의 고령을 참작해서, 집행 유예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8월 15일, 법정에서 판결문이 낭독되자 페탱은 정신을 잃고 자리에 쓰러졌다. 그는 그대로 대서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 일드외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대부분 병원 침대에서 6년 가까운 세월을 보낸 뒤, 1951년 7월 23일에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이렇게 베르됭의 영웅, 프랑스의 원수는 무한한 불명예를 안고 역사에서 퇴장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길게 남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이 대충 끝나자 그때까지 한편이었던 공산당을 맹렬히 탄압하며 반공 우익 정치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 때 비시정부의 체제를 많이 참조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한편 페탱의 재판은 잘못이었으며 페탱은 억울한 희생자였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오늘날에도 페탱의 사망일이면 어김없이 그를 추도하고자 페탱이 숨을 거둔 일드외 섬을 찾는 ‘순례자’들이 있다. 비록 그 대부분은 극우적 성향의 노인들이며, 점점 그 수가 줄고는 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원칙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끝내 양보할 수 없는 원칙도 있다. 과연 그 경계는 어디일까? 어디까지가 일단 살아남기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러므로 과거사를 바로 이해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그 과정이 아무리 어렵고 불편하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정파의 권력투쟁을 위한 방편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신화와 반신화를 양산하는 복마전이 되지 않도록,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두 마음을 가다듬으며, 불행했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되새길 수 있도록, 그런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