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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24 강
豈可閑謾(기가한만)으로 遊談無根(유담무근)하야
虛喪天日(허상천일)하고
欲冀心宗而救出路哉(욕기심종이구출로재)리오
但堅志節(단견지절)하야 責躬匪懈(책궁비해)하며
知非遷善(지비천선)하야 改悔調柔(개회조유)어다
勤修而觀力(근수이관력)이 轉深(전심)하고
鍊磨而行門(연마이행문)이 益淨(익정)하리라
長起難遭之想(장기난조지상)하면 道業(도업)이 恒新(항신)하고
常懷慶幸之心(상회경행지심)하면 終不退轉(종불퇴전)하리라
如是久久(여시구구)하면 自然定慧圓明(자연정혜원명)하야
見自心性(견자심성)하며 用如幻悲智(용여환비지)하야
還度衆生(환도중생)하야 作人天大福田(작인천대복전)하리니
切須勉之(절수면지)어다.
誡初心學人文(계초심학인문) 終
豈可閑謾(기가한만)으로 遊談無根(유담무근)하야,
저 둥구나무나 쳐다보고 앉았으니 한가한 것이지요.
어찌 한가하고 부질없이, 謾자는 부질없을 만자거든요. 말하자면 아무 어떤 까닭도 없이, 까닭 없는 소리에 遊談無根이라. 뿌리 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 헛된 잡담, 그런 거나 해가지고 虛喪天日(허상천일)하고, 헛되이 하늘의 해를 보내고, 欲冀心宗而救出路哉(욕기심종이구출로재)리오. 心宗을 발해서 出路을 구하고자 하리오. 해탈의 길을 구하고자 할까보냐?
無始習熟(무시습숙)한 愛欲恚癡(애욕에치)가 纏綿意地(전면의지)하야, 그랬지요? 意地에, 뜻 땅에 얽히고 섥혀서 纏綿. 솜 무더기처럼 얽히고 섥혀서, 그랬는데 뜻 땅이라는 것은 心地(심지)라고 해도 되고 그래요. 心地나 意地나 같은 소리입니다.
땅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과 같이, 땅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과 같이 마음에서 모두 만 가지 법이 나타난다고 해서 心地라고 그래요. 意地라고 해도 되고요. 생각에서 모든 탐 진 치가 다 일어나기 때문에 땅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과 같이 그래서 그것을 비유해서 意地라고 하고 心地라고 따 地자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거입니다. 心宗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종이다.” 하는 말인데 禪宗(선종)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佛心宗(불심종)이라고 그랬거든요. 悟佛心宗(오불심종)이라. 부처님의 심종을 깨닫는다. 이런 뜻입니다. 佛心宗을 발해서, 佛心宗에 가까이 해서 出路를, 해탈하는 길을 구하고자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但堅志節(단견지절)하야, 마디가 있는 나무는 대나무 아닙니까? 그렇지요?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 때문에 야물거든요. 그것이 안 부러지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속이 또 비었고요. 節개, 節이라고 그러면 대나무 마디를 말하는 겁니다. 대 竹(죽)머리를 썼잖아요.
“대나무는 곧”이 말이거든요. 대 竹머리에 곧 卽(즉)자 했잖아요. 대나무는 곧 속이 비어 있고 항상 푸르고요. 아주 딱딱 하고요.
쭉 곧고요. 그것이 절개라 이 말입니다. 傲霜孤節(오상고절)이라. 이러기도 하는데, 겨울철에도 잎이 안 떨어지고, 항상 푸르고요.
그러니까 내 생각을, 뜻을 그 대나무절개와 같이 그렇게 굳건하게 가지라 그 말이지요.
但堅志節하야, 그러니까 중노릇을 한다는 것도, 이것이 쉬운 것 같지만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 전생에 그와 같은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되는 것이지, 전생에 인연 없으면 아무리 되고 싶어도 안 되고, 전생에 인연을 딱 지어놓으면 되기 싫어도 그냥 되는 것이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전생 인연이라는 것이 8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전생 인연이 중노릇해야할 인연을 가지고 있는데, ‘시대를 따라서 좀 달리 살아야지 뭐 꼭 옛날식으로 살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말하자면 반항아적인 생각이지요. 우리도 시대의 변천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 일정시대에 살았지요. 일정시대에 태어나서 일본사람들 교육을 받았지요. 지금도 제가 책을 보면 일본책을 빨리 보지, 국문 책은 제가 참 보기가 어려워요. 국문 책을 한 장 볼 동안에 일본책은 제가 두 장, 석장 봅니다. 일본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 빨리 보는 것이 한문책이고요. 그 다음에는 국한문 섞인 것 그대로 잘 읽어지고요. 순 국문된 책은 영 안 잘 읽어지고 봐도 영판입니다. 똑 같은 글씨 같고 자꾸 그래요. 그런데 한문책은 슥~ 대충만 봐도 무슨 말이라는 것, 짐작이 가거든요. 글자 몇 개씩만 톡 톡 톡 톡 봐도 무슨 말이라는 것, 있다 없다 대강 짐작이 가거든요. 일본책은 그렇지는 않아도 쭉~ 빨리 읽어지니까 이해가 빠르고 그렇거든요. 이것이 習熟(습숙)입니다. 그 전에 익혔던 그 것입니다.
어제는 불광 기자들이 와서 스님이 불심을 갖게 된 동기ㆍ출가하게 된 동기가 뭐냐고 그런 것을 물었는데, 나는 동기고 개코고 그런 것이 없다고, 따지고 볼 것 같으면 전생에 했으면 했지 금생에는 내가 한 것이 없다고 그랬는데, 동기를 가져본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 된다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다섯 살 때, 탁발하러 온 중 아저씨가 있었는데, 중 아저씨가 늘 오는 아저씨입니다. 중 아저씨가 와서 탁발을 하고 천수를 치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듣기가 좋아가지고, 온 종일 졸졸졸졸 졸졸졸따라다녔어요. 저~ 윗동네까지 願往生(원왕생)ㆍ원왕생ㆍ원왕생ㆍ원왕생ㆍ원왕생하고 뒤에 꺼떡거리고 따라다녔거든요. 하루 종일 따라다니니까 저녁 때 되니까 엿을 이만치 사 줍디다. 한 10전어치 사준 것 같아요. 호주머니에다 넣고 막 들이먹어 가면서, 오독오독 씹어 먹어 가면서 죽자고 따라다니며 원왕생ㆍ원왕생ㆍ원왕생하면서 쫓아다녔어요.
하여간 그렇게 했는데 그날 밤에 자면서도 제가 염불을 했답니다.
자면서 따라했대요. 저의 어머니가 그러더라고요. “쟤는 어제 중 아저씨 따라다니더니만 자면서도 염불하더라.”고... 그랬는데 언제 외워졌는지 천수를 그냥 다 외워져 버렸어요. 천수심경 이런 것을 일부러 외워본 적이 없어요. 너 댓살 먹어서 다 외웠으니까요. 초등학교 한 여덟ㆍ아홉 살에 이야기시간, 무슨 시간에 누구든지 나와서 얘기 하라 하는데, 제가 나가서 춤을 추면서 천수를 쳤어요.
나모라나나다라하며 춤을 췄더니 아이들이 우스워 죽는다고 떼굴떼굴... 선생님도 우스워 죽는다고 하고요. 그래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나를 “중” “중” 하고 아이들이 그랬다고요.
但堅志節(단견지절)하야 責躬匪懈(책궁비해)하며,
다만 志節을 굳건히 해서 責躬匪懈하라. 자기 몸을 꾸짖어서 게을리 하지 말라. 몸의 匪懈를 꾸짖어라. 이러기도 하는데 懈 ←이것이 게으를 해자지요. 그런데 責躬匪懈를 몸의 匪懈를 꾸짖으라고도 되지만, 몸을 항상 꾸짖어서 게을리 하지 말라. 匪자를 게으르지 말라 해도 되고 그래요. 그것은 두 가지가 다 같은 말이니까 상관없어요. 항상 몸조심ㆍ말조심. 몸을 꾸짖어라 소리는 마음과 생각이 항상 붙는 소리입니다. 身ㆍ口ㆍ意(신구의) 3업이니까요. 몸에는 입도 붙어 있으니까요. “몸” 하면 입도 붙어 있고, 입으로 말할 적에는 생각이 있어서 하는 것이니까 신구의 3업이 다 붙어 있어요.
손 하나 들고 발 하나 놓는 것이 “복 짓는 일이 아니면 죄 짓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 마디 말하는 것이 “복 짓는 말이 아니면 허물이 되는 말이다.” 생각도 그렇다 이 말입니다. 한 생각하는 것이 복 짓는 생각이냐? 죄 짓는 생각이냐?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그것은 게으를 수도 없는 것이고요. 인간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고, 딱~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요.
知非遷善(지비천선)하야 改悔調柔(개회조유)어다.
그른 줄을 알고, 그른 것은 탁 그른 줄을 알아가지고 선한 데로 옮기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改悔調柔어다. 고치고ㆍ뉘우치고ㆍ고르고ㆍ부드럽게 만들어라. 고치고 뉘우치고 고르고 부드럽게 만들지어다.
知非遷善을,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잘못한 줄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를 않아요. 흔히 잘못을 해놓고서도, 자기는 잘 했거니 하고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조는 사람을 존다고 해보세요. 하나도 안 졸았다고 하지요. “내 언제 졸았느냐?” 고... 끄떡끄떡 조는 사람을 깨워줘놓으면 졸지도 않는 사람을 자꾸 깨운다고, 때린다고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責躬匪懈(책궁비해)하라. 그 말입니다.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게으를 懈자잖아요. 忄= 心. 심방변에 풀어질 解(해)자지요.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게으를 懈자입니다. 글자가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해태심이다. 게으름이다 이 말입니다. 게으르지 말라.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며, 이 말이지요. 知非遷善(지비천선)하야 改悔調柔(개회조유)어다.
그른 줄 알고 선한 데로 옮겨서 改悔調柔어다. 그랬거든요.
改悔하고 = 고치고ㆍ뉘우치고ㆍ고르고ㆍ부드럽게 할지어다.
知非遷善이니까 아닌 줄 알았으면 그것을 탁하니 고쳐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닌 줄 안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얘기를 아까 하려다가 말았는데,
四聖言(사성언)이라는 것이 있어요. 네 가지 성스러운 말이다. 이런 것이 있어요. 이것이 뭐냐 할 것 같으면 不知言不知(부지언부지): 모르는 것은 모릅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성인의 말씀이라고 그랬어요. 성스러운 말이라 그랬어요. 不知言不知.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바로 말하는 것.
知知言來之(지지언래지): 아는 것은 안 다고 분명하게 얘기하는 것. 알면서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그것도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알면 분명히 안다고 얘기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분명히 얘기하고, 범한 것은 범했다고 말하고, 범하지 않은 것은 범하지 아니했다고 말한다고 그랬는가? 제가 한 번 찾아볼게요. 역시 그런 말, 별거 아닌 너무나 상식적인 얘긴데 四聖言이라고 그랬어요. 성스러운 말이라고 그랬어요. 너무나 쉬운 말이지만 그것이 실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모르는 것을 딱 모른다고 얘기하기가 그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고 지껄이지요. 하기 싫어서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 수도 있을 수 있고요.
어떤 사람이 채공을 살려고 하니, 채공이 살기 싫어서 ‘아이고 어떻게 하면 채공을 안 살까?’싶은데 마침 깨를 볶으라고 하더라나요? 깨를 새카맣게 태워버렸대요. “야 이놈의 자식, 채공 못 살겠다.” 고 쫓아버리니 속이 시원 하더라나요? 감 따기 싫어 죽겠는데 자꾸 감을 따라고 하더라나요? 톱을 가지고 감나무를 싹 베어버렸대요.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요. 그런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사람인가요? 그러니까 진실 된 것. 이것이 말하자면 知非遷善이지요. 진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허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죄를 지었어도 죄가 아니거든요. 진실이니까요. 어린 아이들은 거짓이 없으니까요. 知非遷善이라. 선한 데로 옮기라 그랬는데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삼, 베 짜는 삼 다발을 한 짐을 얻었어요. 그것을 짊어지고 끙끙 몇 십리를 오는데 오다가 보니까 땅 바닥에 금 덩어리가 하나 큰 것이 있거든요. 금 덩어리가 있으니까 금 덩어리를 지고 가려면, 삼도 한 짐이고, 금 덩어리도 지려면 한 짐이거든요. 작지만 무겁단 말입니다. 지고 오던 삼 짐을 내버리고 금 짐을 지고 가야 될 텐데, 여태까지 내가 이것을 지고 왔는데 이것을 어찌 내버리나? 그래가지고 금을 내버리고 그냥 삼 짐만 지고갔다는 겁니다. 固執先聞하야 擔麻棄金(고집선문 담마기금)이라. 固執先聞. 먼저 들은 것을 고집해가지고 擔麻棄金이라.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렸다 이 말입니다.
어떤 스님은, 친구들하고 실랑이를 하다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부득부득 고집을 세우거든요. 자꾸 세웁니다. 죽어도 자꾸 세웁니다. 나중에는 한다는 소리가 “아이 치워버리자. 네하고는 이야기가 그만두자.” 하고 말았는데, 그 다음에 얼마 후에 한다는 소리가 “아닌 줄 알지만, 내가 진줄 알지만, 사람이 그래 고집이 있지 하다가 포기할 수 있느냐?” 이 겁니다. 세우던 것 끝끝내 막 세워야 된다 이 겁니다. 참새도 죽으려면 뻗고 죽는다고... 참새다리 뻗고 죽지 오므리고 죽느냐? 이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그른 줄 알았으면 꼭 선 한데로 옮겨야 된다 이 말입니다.
知非遷善(지비천선)이라.
그런데 이 세상일은 그렇지를 못해요. 아닌 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그냥 끌려가야 돼요. 아닌 줄 알면서도... 작년엔가 재작년엔가 대학생들 2층에선가 3층에서 떨어져 분신자살을 많이 하고 그랬잖아요. 뭐 어떻게 흥분해가지고서는 네 해라 하니까 하겠다고 했답니다. 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겠거든요. 막상 떨어지려고 하니까 겁나서 안 하려고 하니까 “이 새끼가 네가 아까 한다고 했잖느냐?” 고 막 그냥 죽인다고... “네가 여기서 그냥 죽을래? 떨어져서 죽어서 영웅 되겠느냐?” 고 막 그냥 떠밀어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떨어진대요. 그런 일 많다는군요. 이런 제기랄...
그러니까 직장에서고 어디서고... -머슴아들 서울대학 다니고 머리 좀 좋고 하던 사람들. 처음에는 사표 두 장씩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수틀리면 상사들 앞에 척~ 내놓고 안 한다고 이러던 사람도, 나중에 장가가서는 마누라한테 꼼짝 못하고 마누라 모르게 돈 좀 쓰려고 만 원짜리를 꼬깃꼬깃 양말 속에다 숨기고 다니다가 마누라한테 들켜서 꼬집어 뜯기고 욕 얻어먹고요. 그러면 어쨌든 남자들 대개 불쌍하지요. 그런 얘기 들으면 우습기도 하고요. 진짜 자기 생각에는 ‘아이고 않아야 되겠다.’ 하면서도 그 분위기 입장이 어쩔 수 없어서 知非遷善(지비천선)하려고 해도 하지 못하는 수가 많지요.
깡패들이 한번 두 번 깡패 짓 했지만, ‘나 이제 여기서 않아야 되겠다.’ 했어도... 깡패 되려고 할 때 손가락이나 어디 칼로 푹 찔러서 피를 내어서 술에 타서 다 같이 마신답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는 형제다. 피가 섞인 형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이렇게 맹세를 한다는구만요. 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해가지고 나중에 거기서 벗어나려 해도 못 벗어난대요. 知非遷善하려고 해도 안 된대요. 그런 일이 많거든요. 중은 그런 것 없으니까 중은 참 좋지요.
바랑하나 짊어지고 팔도강산 다니니까요. 훌훌 떠나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마음을 항상 調柔(조유)시켜야 된다. 고르고 부드럽게 만들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당장 고르고 부드럽게 되나요?
고르고 부드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대나무도 그냥 꺾으려면 부러지지만, 고르고 부드럽게 하려면 뜨거운 물에다가 자꾸 찐다던가, 불에다가 타지 않게 타지않게 굽는다던가 하면 고르고 부드럽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悔調改柔(개회조유)라. 고르고 부드럽게 만들어줄 알아야 된다. 부지런히, 부지런히 닦다가 볼 것 같으면... 닦는다는 소리는 걸레로 닦는다는 소리입니다. 딴 것 뭐 있나요? 자꾸 닦는다 이 소리입니다. 자꾸 문대고 어쨌든지 익힌다는 소리입니다. 한 번 닦아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수십 번 수백 번 닦다보면 반짝반짝해지니까 자꾸 익힌다는 뜻과 같아요.
익힐 習(습)자하고 같은 겁니다. 수습, 연수한다고 그러지요?
勤修而觀力(근수이관력)이 轉深(전심)하고,
부지런히 닦다보면 관하는 힘이 전전이 깊어지고, 그러니까 우리 불법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닦는 공부이기 때문에, 마음 닦으려고 여기에 처음 와 있으면, 중 되어가지고 절에 떡~ 와 있으면 생각이 하루에 집에 열두 번도 더 갔다 오고, 자갈치 시장으로 국제시장으로 어쨌든지 서울 동대문 남대문 다 돌아다니거든요. 자꾸 돌아다니고 가만히 안 있거든요. 그렇지만 거기에서 생각 하나를 자꾸 집중하고, 또 자꾸 집중하고 그것이 觀하는 것인데, 觀이라는 것은, 볼 관자지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니까 마음으로 보는 힘. 그것이 觀力입니다. 정신을 집중시킨다 이 말입니다.
화두든지 주력이든지 여기로 자꾸 집중한다 이 말입니다.
觀力이라는 소리는 집중하는 힘이라 그 소리입니다. 집중되지 않고 자꾸 분산 되지요. 산란하지요. 자꾸 산란하지만, 산란한 도떼기시장으로 들어가는 놈을 덜미를 잡아다가‘어디 가노? 뭐 하러 가노?’ 잡아다가 놓고, 자갈치시장 가려고 하는 놈을‘거기 뭐 하러 가노?’ 또 잡아다가 놓고, 이것을 回光返照(회광반조)라고 합니다. 빛을 돌이켜서 반조화 시킨다 이 말입니다. 다시 비춰준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자꾸 한다 이 말입니다. 자꾸 勤修(근수)할 것 같으면 觀力(관력)이 轉深(전심)이라.
관하는 힘이 점점 깊어진다 그 말입니다. 딱~ 붙잡고 관하는 힘이 좀 질이 나간다 이 말이지요.
鍊磨而行門(연마이행문)이 益淨(익정)이라.
연마할 것 같으면 자꾸 鍊磨. 玉不鍛이면 勿生器(옥불단물생기)라.
옥도 쪼고 갈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 거니까 자꾸 연마시키면, 수행하는 문이 점점 깊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참 그야말로 鍊磨한다ㆍ勤修한다. 근수가 바로 연마인데요. 한 번 두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지요. 신심 한 번 났다고 신심이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발심 한 번 했다고 발심이 오래 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어쨌든지 간에 어제 발심 했다가 오늘은 악심이 생기고요. 그저 어제 선심 생겼다가 오늘은 하여간 교만한 마음이 나오기도 하고요.
어제 아주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가 오늘은 괴로운 마음이 나오기도 하고요.
변덕 심한 것이 사람 마음이고, 간사스러운 것이 자꾸 그렇게 출렁거리는 것이니까 이것은 한 가지 목표의식을 딱 놔놓고 참선이면 화두고요. 기도면 기도. 목표 의식을 딱 놔놓고 자꾸 근수하고 연마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자꾸 익히고, 익히고 애를 쓰고 애를 쓰다 볼 것 같으면 집중하는 힘이 점점 깊어지고, 그 관하는 힘이...
관하는 힘이 집중하는 힘이니까요. 勤修의 觀力(근수관력)이 轉深(전심)하고, 점점 깊어지고, 鍊磨而行門(연마이행문)이 益淨(익정)하리라. 수행하는 문이 점점 맑아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꾸, 자꾸 하다가 볼 것 같으면 마음이 순화가 되거든요.
순화가 되어서 마음이 떡~ 하니 안심입명이 되게 될 것 같으면, 참~ 다행스러운 생각이 나게 되고, ‘아~, 내가 얼마나 숙세의 선근이 있어서 이중이 되었노? 중 되기 아주 어려운데 내가 중이 되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人生難得(인생난득)이요, 佛法難逢(불법난봉)이라. 인생 몸 받기가 어렵고 인생 몸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지의 흙과 같고, 인생의 사람이 되는 것은 손톱위의 흙과 같다. 爪甲上土(조갑상토)라 그랬거든요. 爪甲은 손톱입니다. 조갑상의 흙과 같고, 인생의 몸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지의 흙과 같으니, 어떻하다가 내가 되었나?
針芥의 上投(침개상투)요 盲龜遇木(맹구우목)이라 그래요.
針芥라는 것은 바늘 침자, 겨자씨 개자인데요. 저~ 33천에서 바늘 하나를 탁 던져서 그것이 내려와서 땅에 있는 겨자씨한테 딱 맞는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이 難遭之想(난조지상)이지요. 만나기 참 어려운 것이, 그것이 아주 스트라익. 탁 과녁을 적중시키기가 참 어려운 것이지요. 맹구우목이라는 것은 자경문에도 나오지만, 눈 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서 나왔다가, 덩치 큰 거북이가 물 위에서 그냥 오래 떠 있을 수가 없거든요. 어쩌다가 나무토막을 만났는데 구멍이 있어가지고, 그 구멍에다 목을 쑥~ 넣고 붙잡고서는 쉬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四生六道(사생육도)를 헤매고 돌아다니고 다니다가, 어쩌다가 우리 인생 몸 받았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맹구우목이요 침개상투라 그래요. 참 만나기 어려운 이제 사람 몸을 받았고, 사람 몸 받은 가운데서도, 이 세상에서는 지금 남녀평등을 지껄이고 오히려 또 여존남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고, 여권신장 하지만 부처님 법은 언제나 남존여비라고 하지는 아니 했지만, 크게 남존여비라고는 아니 했지만, 언제든지 남자를 위에다 뒀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할 것 같으면 생리상 그렇게 되어있다 이 겁니다. 이조시대 같으면 완전히 남존여비 했잖아요? 그렇지만 지금은 남녀평등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남자가 여자보다 우위에 있지요. 부처님 말씀도 그래요. 남자가 아무래도 여자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비구 비구니” 그랬지, “비구니 비구” 그러지는 아니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됐는데... 여자 몸 보다 남자 몸 받기가 더 어렵다 이 겁니다. 남자 몸 받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長起難遭之想(장기난조지상)에서 그랬어요.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 그러니까 중 되기 참 어렵다는 생각. 내가 숙세에 참 깊은 선근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중이 되었겠나?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자꾸 하라고요. 지금 한국 절이, 고찰들이 약 1500개 되는데, 1500개 사찰 가운데에서 제일 寺格(사격) 제 1호가 어디냐 하면 해인사입니다. 가야산 해인사입니다. 우리나라 산이 몇 백 개, 몇 천개 되잖아요. 몇 천개 되는 산 중에 가야산이 아홉 번째 큰 산입니다. 랭킹 10 안에 드는 산이 가야산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합천 해인사는 우리나라 사찰 1500개 가운데서 제일 首(수) 사찰이거든요.
지금도 다른 사찰, 다른 대본산 주지 스님들도 어쩌다가 해인사 한 번 와보면 “참, 과연 해인사가 해인사입니다.” 자기네 절은 암만 잘 가꾸고 해도, 산세든 절 모양이든 해인사 따라갈 수가 없다고요. 다 그래요. 그만큼 해인사가 수승하고 좋은 절입니다. 여러분이 다 전생에 선근, 善根(선근). 선의 뿌리라 그 말입니다. 뿌리는 땅 속에 있으니까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지만 그 뿌리가 깊고 깊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서 여기를 찾아오게 되었다고요. 종자로 치더라도, 선근종자라고 그러는데 종자로 치더라도 아주 우량종자입니다.
좋은 종자가 돼가지고 떡~ 좋은 땅에 심으러 왔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長起難遭之想(장기난조지상)이라. 그렇게 참~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된다 이 겁니다. 억지로라도 자꾸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안 그렇더라도...‘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참~ 다행스러운 사람이다. 아이고, 내가 중 안 됐더라면 우에 될 뻔 했노? 참~ 내가 잘 됐지.’ 이렇게 자꾸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한국 사람의 나쁜 습관이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에이 죽어버려야지, 자꾸 어찌됐든지 꺼떡하면 죽는다고 그래요. 아이고, 배가 아파 죽겠네. 배가 불러서 죽겠네. 아이고, 다리아파 죽겠네. 아이고, 어깨 아파 죽겠네. 아이고, 어디가 발가락 아파죽겠네. 어찌됐든지 간에 전부 죽겠네. 뿐입니다. 좋아죽겠네. 싫어죽겠네. 좋은데 왜 죽습니까? 자꾸 죽겠네, 죽겠네하니까 안 죽습니까? 죽겠네. 그런 말 없어야 된다 이 겁니다. 자꾸 좋다고만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자꾸 좋다고 하면 좋은 일이 생겨요. 長起難遭之想(장기난조지상)이라.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 참 다행하다는 생각.
長起難遭之想하면 道業(도업)이 恒新(항신)하고
常懷慶幸之心(상회경행지심)하면 終不退轉(종불퇴전)하리라.
도 닦는 행위, 업은 行爲(행위)입니다. 업이라고 하는 말을 번역하면 행위입니다. 행할 行자, 할 爲자, 행위. 카르마라고 그러지요.
行爲作法(행위작법)이거든요. 그러니까 道業(도업)이, 도 닦는 업이
恒新(항신)하고, 항상 새로워질 것이고, 하기 싫어도 기도하고 정진하고 나면, 방선하고 나면 기분 좋거든요. 뭣인가 기분 좋거든요.
기도도 할 때는 아이 괴롭고 그렇기는 그렇지만 하고 나서 떡~ 하니 소변보러 가다보면 무엇인가 기분이 상쾌하고 좋거든요. 그럴 수가 있다고요.
도업이 항상 새로워지고 常懷慶幸之心하면, 항상 경사스럽고 다행하다. 참~ 경사스럽고 다행하다는 이런 생각을 일으킬 것 같으면 終不退轉(종불퇴전)하리니, 마침내 퇴전하지 아니할 것이니, 그랬는데, 중생은 生初爲樂(생초위락)이라. 중생은 누구든지 자기가 태어난 곳이 가장 즐겁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자기 고향땅 앞에만 가도 자기 집 안방에 들어간 것처럼 마음이 푸근하고 좋다 그 말입니다.
서울 돈암동 사는 사람은 돈암동 전차 종점에만 가도 자기 집에 다 온 것처럼 푸근하니 기분 좋다 이 겁니다. 저도 홍류동 골짜기만 턱~ 들어서면 기분 좋아요. 그런데 여기는 진짜 좋으니까 좋다고 하는데, 저~ 미국 인디안들 사는 아리조나 사막지대 물도 없고ㆍ숲도 없고ㆍ풀도 없고 그런 데에 천막치고서는 거적 떼기집처럼 해가지고 인디안들이 살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수 천 년래 거기서 살고 있는 겁니다. 이 사람들을 보호하기위해서 아파트를 지어가지고 물을 주고 잘 보호하려고 갖다 놓으면 다 도망 가버린대요. 갑갑해 못 산다는 겁니다. 아프리카 토인들한테 구두 신겨놓으니까 구두 다 내 버리듯이요. 갑갑해서 어떻게 이런 걸 신느냐 이 겁니다. 맨발로 총 매고 뛰자 그렇듯이요.
경사스럽고 다행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라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볼 때 우리가 한국에 난 것이 경사스럽고 다행하냐? 한국 땅이 좋기는 좋아요. 나쁜 것은 없어요. 풍수지리ㆍ삼한사온ㆍ산세도 좋고 다 좋지요. 굉장히 좋지요. 그런데 제주도도 작년에 가서 살아보니까 공기가 참 맑고 공해가 없는 곳이고 좋기는 좋더군요. 작년 여름에는 좋다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는데, 제가 2ㆍ30년 전에 제주도 포장도 안 되고 했을 때, 제주도에 가서 살 때는 여름한철 지내는데 바람이 어떻게 세게 부는지 집이 양옥집이 아니니까 그렇기는 그렇지만, 유리 창문을 했는데, 덜거덩ㆍ덜거덩ㆍ덜거덩ㆍ덜거덩ㆍ이것이 몇 시간이나, 한 나절만 불고 말면 괜찮은데, 사흘 나흘 계속입니다.
계속 덜거덩거려요. 나중에는 신경질이 슬슬 나는 겁니다.
‘에이 빌어먹을, 사람 살 데가 아니다.’ 자꾸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노장님을 모시고 갔는데 그 노장님이 충청도노장님인데 “제주도 땅은 다 썩었어~ ” 먼지만 폿싹, 폿싹 나고 전부가 다 재 같다는 겁니다. 화산재니까 촛싹, 폿싹 하고 그렇지요. 전기가 있었나요? 전기가 다 빠져버려서 없고, 아이고 파도는 제기랄 것 지똥 같이 그냥 동서남북 파도가 올라오니 내가 죽으면 혼이 거기 어떻게 나가겠어요? 죽기 전에 육지로 가야되겠다고 그러더군요. 그 노장님 말씀이 맞는 것도 같더라고요. (석대원성왈 : 스님이 사신 곳이 제주도 어느 바닷가 마을 같네요. 1960년대 태풍때 말씀 같습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오래산 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살면서도 꼭 제주도를 생각하고, 돈 벌면 자기 고향땅에 와서 학교 세우고, 어쨌든지 거기에 좋은 사업을 하고, 그래 지금 제주도가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파라다이스, 남해안의 파라다이스요. 공항으로 치더라도 김포공항다음에 제 2국제공항이잖아요. 사람이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면 되기는 되는데, 저는 다만 한국 땅이 너무 작다 이 겁니다. 너무 작은데다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만날 샌드위치가 되어 당하고요. 만날 침범만 당하고 살아서 정치 발전도 제대로 안 되어있고, 이것이 모두 사람들이 딱 바르고 고르지를 못하고 변덕도 많이스럽고, 니나노가 너무 많다 이 겁니다. 이래서 어디 좋은데 있으면 가서 태어날까 싶어가지고, 세계 각국을 많이 다녀봤는데, 그렇게 마음에 쏙 드는데가 없더군요. 역시 한국보다 더 좋은 데가 없어요. 여기가 제일인 것 같아요. 한국이 제일인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그런데 아직 결정은 아니했으니까 모르겠어요.
경사스럽고 다행하다는 마음을 일으킬 것 같으면 終不退轉(종불퇴전). 마침내 퇴전하지 아니할 것이며, 如是久久(여시구구)하면 自然定慧圓明(자연정혜원명)하야 見自心性(견자심성)이라.
이와 같이 오래오래 끝내 나갈 것 같으면 완전히 하나가 돼버릴 것 아닙니까? 이런 생각이 오래오래 계속되면, 이것은 처음에는 조작배기로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難遭之想(난조지상)도 억지로 내는 것이고, 참 그야말로 慶幸之心(경행지심)도 억지로 내는 것이거든요.
억지로 慶幸之心내고, 신심도 그랬어요.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내야 됩니다. 억지로 내야 신심이 나지지 신심 저절로 나기를 기다리면, 100년 가도 신심 저절로 안 납니다.
신심이 억지로 나기 위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절도 부지런히 하고, 주력도 부지런히 하고, 공부도 부지런히 해야만 거기에 맛이 붙게 되는 겁니다.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날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언제 공부 저절로 하고 싶어지겠습니까? 자꾸 하다보면 맛이 붙거든요. 그것이 如是久久입니다.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하다보면 自然定慧圓明하야 見自心性하며, 선정과 지혜가 圓明해진다 이 말입니다.
定慧. 定이라는 것은 禪定(선정)이거든요.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마음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이 말입니다.→ 定. 완전히 정해져 버렸다 이 말입니다. 결정이 돼버렸다 이 말이지요. 무엇으로 결정이 되었느냐? 선으로써 결정이 돼버렸다 이 말입니다.
禪이라는 것은 뭐냐? 마음이 턱~ 하니 고요한 경계.
그러니까 생각을 닦는 것. 禪이라고 하는 것은 어원이 思ㆍ惟ㆍ修(사유수)거든요. 내 마음을 잘 다루는 방법. 이것이 선이다 이 말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마음 터 닦을 禪자라고도 하고, 고요할 禪자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그냥 그대로 자리가 탁 잡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완전히 중이 돼버리니까 행동도 그냥... 말 한 마디 하더라도 중 소리만 나오지 다른 것 안 나오지요. 세상 사람들은 중물이 안 들었으니까 저를 보고 무슨 소리하다가 “선생님 어쩌구 저쩌구...” 저보고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저는 거사들과 무슨 얘기하다가“스님 어쩌구 저쩌구...” 스님 소리가 저절로 척 나오게 되고요. 질이 안 나서 그런데 질이 완전히 날 것 같으면 禪定. 선정이 생기면서, 선정에서 지혜가 나타나거든요.
중생은 밑바닥이 동글동글한 그릇과 같아요. 신라시대 토기가 다 그래요. 신라 토기가 밑이 동그랗지요. 신라시대의 밑이 동그란 것을 딱 놓으면 흔들리면서도 물이 쏟아지지는 않게 돼있어요. 그것이 묘거든요. 그런데 항상 바람만 불어도 흔들려요. 흔들리기 때문에 그 안의 가라앉을 물이 가라앉지를 않고 항상 떠 있어요. 중생의 마음이 요동하는 것이 밑 동그란 그릇과 같아요. 그런데 이것을 꽉 붙잡아서 안정시키는 것이 고배잖아요. 밑에 받침대요. 받침대로 꼭 묶어놔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을 계라고 그래요. 이것이 계법입니다.
그래서 안 움직이면 찌꺼기가 가라앉고 위에 맑은 물이 딱~ 남는다 이 말입니다. 그것이 안정된 것입니다. 그것이 선정경계입니다. 조용하게 가라앉으면 하늘의 달이 거기에 환히 비치거든요. 동그랗게 달이 환히 비춰 나타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지혜 가운데서도 또 만일에 고배에서 내려와 가지고, 차받침에서 내려와 가지고 흔들리기 시작하면 찌꺼기가 또 일어날 것 아닙니까? 기껏 오랫동안 가라앉혀 놓은 것이... 그러니까 물을 딱~ 놔 놓고, 찌꺼기만 삭 드러내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 그래요.
찌꺼기만 드러내고 나면 흔들려도 맑은 물ㆍ가만히 있어도 맑은 물. 마실 수도 있고ㆍ빨을 수도 있고ㆍ씻을 수도 있고ㆍ그것은 자유자재입니다. 이것을 解脫知見(해탈지견)이라고 그래요. 戒香ㆍ定香ㆍ慧香ㆍ解脫香ㆍ解脫知見香(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그것입니다. 防非止惡曰戒(방비지악왈계)요. 그릇된 것을 막고 防非. 止惡.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을 계라고 하고, 深心大乘(심심대승)하야 定無退轉(정무퇴전)이라. 깊이 대승법을 믿어서, 마음 깨치는 법을 믿어가지고, 결정코 퇴전이 없는 것을 定이라고 한다.
覺觀身心內外觀察(각관신심내외관찰)이라. 몸과 마음의 안팎을 잘 관찰하는 경계를 지혜라고 한다. 이 말입니다.
能斷一切無明結縛(능단일체무명결박). 일체 무명의 結縛. 묶인다는 말이지요? 무명결박을 능히 끊어버리는 것을 해탈이라고 그런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一切無碍人이 一道出生死(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 일체 걸림이 없는 사람은 一道를, 생사를 벗어나는 경계. 그것을 解脫知見香(해탈지견향)이라고 한다. 이것이 五分法身香(오분법신향)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불법의 시작이요 마지막입니다. 불법의 시작은 계로부터 시작해가지고, 해탈지견이 계의 마지막이거든요. 자연히 見自心性(견자심성)아닙니까? 自心性을 볼 것이요. 거기서는 자유자재가 되어서
天地가 與我로 同根(천지여아동근)이요. 천지가 나로 더불어 근원이 같고, 萬物이 與我로 一體(만물여아일체)라. 만물이 나로 더불어 하나가 돼버렸기 때문에 신통묘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신통묘용이지요.
내가 산에 가서 사슴의 떼들하고 같이 얘기를 나눌 수 있고ㆍ토끼하고 놀 수 있고ㆍ소나무 바윗돌하고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신통 아니고 뭡니까? 그래서 用如幻悲智(용여환비지)하야, 환과 같은 자비와 지혜로써, 幻이라는 것은 허깨비라는 말이거든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활동사진 같은 것이 幻이지요. 환등기라고 그랬고, 옛날에는 영화를 활동사진 이라고 그랬거든요. 사진이 움직인다 이 말입니다. 활동한다 이 말입니다.
환과 같은 자비와 지혜. 환등기라면 슬라이드를 환등기라고 그랬거든요. 실지는 있는 것이 아닌데, 그림자가 등불로 나타나는 것이 환등기거든요. 그러니까 허깨비와 같은, 실체는 없지만 모든 중생에게 보일 수 있는 것. 그것이 幻입니다. 환과 같은 자비와 지혜를 써서→ 悲智. 悲智라는 것은 자비와 지혜거든요.
還度衆生(환도중생)하니, 그런 방편을 써서 턱~ 하니 다시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그래서 作人天大福田(작인천대복전)이거든요. 인간ㆍ천상의 복 밭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인간ㆍ천상의 복 밭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거기다 심기만 하면 전부다 그냥 꽃이 피고 열매가 맺으니까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그런 복 밭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상징한 것이 스님들 가사잖아요. 가사 입은 것을 복전ㆍ복 밭 옷이다. 그 옷 입고 도 닦는 사람에게 떡~ 하니 보시를 하고, 복을 지을 것 같으면 거기에서 무량 복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복전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래 성불하게 될 것이니 切須勉之(절수면지)어다.
간절히 모름지기 힘쓸지어다. 꼭 해 보라 이 말입니다. 이왕 중 됐으니까 중노릇 잘하라는 말이지요.
회향이 이렇게 아주 간절한 보조스님 말씀이 늘 많이 썼거든요.
선문 자료에 보조스님 법어 전체가 이렇게 간절한 말씀으로 묶여져 있기 때문에 한번 잘 풀이를 하면 좋기는 좋은데, 그것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고요. 이것이 지금 愼誤着他鞋(신오착타혜)하며 ←(18강) 愼人事往還(신인사왕환)하며 ←(19강) 쭉~ 있잖아요. 이것은 보조스님 말씀이 아니고, 禪院淸規(선원청규)에 있는 말입니다.
고려시대에 禪院淸規가 많이 유행됐었던가 봐요. 선원청규의 요긴한 말만 똑똑 따다가 그대로 써 먹었어요. 그대로 써서 誡初心學人文(계초심학인문)을 만들고,
松廣寺(송광사)에 청규 법으로써 만들어졌는데요. 이것이 역사와 전통을 무시할 수 없이 희안해요. 지금 수련대회로는, 전국 수련대회치고는 송광사가 제일입니다. 송광사가 지금도 법정스님이 수련원장이잖아요. 수련원을 잘 지어줘야 법정스님이 끝끝내 잘 봐줄 거라 해가지고, 수련원 짓는다고 터 닦아 놨더군요. 그것이 역사와 전통이 初心學人文으로부터 시작해가지고 지금 한 804 ~ 5년 됐겠네요. 송광사 8차 중창불사 회향일이 777년이니까요. 初心學人文반포하고, 정해결사문반포하고, 이 보조스님이 出世(출세)했을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777주년 만에, 쓰리쎄븐입니다. 희안하지요? 그 때에 777주년 만에 송광사 8차 중창불사 회향식을 했고요.
보조스님이 제 1세주지고요. 2세주지가 진각국사 이렇게 해가지고 쫙~~ 내려 와서 현오스님이 360대 주지입니다. 그것도 이상하지요?
그것이 다 역사와 전통 속에 우연의 일치라고 할까요. 우연일치가 아니라면, 숙연의 소치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初心學人文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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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세밀히 교정해주시고, 모르는 구절은 잘 가르쳐주신 마니주 보살님과
몇몇 보살님들 고맙습니다.
누구보다도 대원성보살님꼐서 수고많으셨습니다. 분명하지 못한 말씀을 새기고 한자까지 일일이 찾아 정리해주셔서 얼마나 도움이 많이 돠는지요.. 고맙습니다. _()()()_
勤修而觀力(근수이관력)이 轉深(전심)하고...부지런히 닦다보면 관하는 힘이 깊어지고..._()()()_
終不退轉...如是久久하면 自然定慧圓明하야 見自心性이라. 고맙습니다 대원성님 _()()()_
常懷慶幸之心(상회경행지심)하면 終不退轉(종불퇴전)하리라...고맙습니다. _()()()_
知非遷善하야 改悔調柔어다...釋대원성 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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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큰스님의 자세한 가르침 항상 잊지않고 가행정진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일타스님의 살림살이가 무궁무진하여 풀어놓아도 끝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재미가 솔솔하여 매일 아침마다 한편씩 아끼면서 보아왔는데 종강이군요.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일타큰스님의 강의는 너무나도 신명나고 재미있네요.
일타스님의 다른 강의도 맛볼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 하는 아쉬움이 여운을 남깁니다.
글자 한자에도 정성을 기울여 큰스님의 말씀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담으려고 지극한 정성을 기울인
대원성님의 노고에 감사 감사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일타스님의 간절하고 구수한 법문 공부 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_()_
감사합니다..._()_
한 해의 서두에 일타 스님의 법문 녹취록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강의를 해주신 일타스님, 이렇게 몇 년이 지나도록 읽을 수 있게 보관해주신 분,
녹취를 해주신 대원성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신 일타 스님,
한 줄 한 줄 자상하신 해설
고맙습니다
녹취록 올려주신
대원성님 덕분에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20여년전이던가?
일타 쓰님 쓰신 책을 구입해서
본 적 있지만
직접 강의하시는 내용이
낱낱이 가슴에 와 닿네요
대원성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