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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도 관상을 볼 줄 알았다 다음에는 글의 방향이 바뀌어 정식으로 위정의 도리를 말합니다. 공자의 사람 관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삶의 목적을 보고, 그의 행위 방식을 관찰하며, 그의 평소 안주하는 바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자기를 숨길 수 있겠는가?” 子曰: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자왈 시기소이 관기소유 찰기소안 인언수재 인언수재 이것이 바로 공자가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을 관찰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우리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이 두 가지는 우리 나라에서도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 각국에서도 행해지고 있어서, 이탈리아 관상법이나 일본 관상법 등이 있습니다. 이로 보면 관상법이 국가나 민족에 관계없이 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상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특히 성행했는데, 전통적인 관상법은 일반적으로 체계가 있어서 요즘도 거리에서 유행하는 ‘마의麻衣 관상법’이나 ‘유장柳莊 관상법’, ‘철관도鐵關刀 관상법’을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이탈리아의 관상법, 일본인이 연구해 낸 수상학手相學이나 장문학掌紋學 같은 새로운 것들도 모두 우리의 관상법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밖에 우리 문화에는 신상神相 및 심상心相이라고 하는 또 다른 체계의 관상법이 있는데, 이것은 심오하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상神相은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보는 것입니다. 또, 심상心相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문화의 기본 입장은 완전한 유심唯心―서양의 유심 철학이 아닙니다―으로서,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습니다. “마음은 있되 상이 없으면, 상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변한다. 상은 있되 마음이 없으면, 상은 마음에 따라 바뀐다.”(有心無相, 相由心變。有相無心, 相隨心轉). 사람은 생각이 바뀌면 겉모습도 변합니다. 가령 우리는 어떤 사람이 화를 내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의 겉모습을 보면, 그가 속으로 화가 나서 신경이 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상학은 곧 과학입니다. 두 눈썹 사이의 거리인 인당印堂이 좁은 사람은 틀림없이 도량이 작고, 인당이 넓으면 도량이 크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요? 도량이 작은 사람은 타고난 성격상 조금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도 눈썹을 찌푸려서 인당의 근육이 서서히 수축되므로,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 앞니가 드러난 사람은 흔히 단명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가 드러나면 잠잘 때 입을 다물 수가 없어 호흡할 때 더러운 것이 체내로 들어가게 되니, 당연히 건강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류의 이치는 모두 이와 같은데, 옛날 사람들은 관상을 보면서 이런 사실은 알았지만 그 까닭은 몰랐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책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답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것들이 모두 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청대의 중흥 명신中興名臣인 증국번曾國藩에게는 13가지 학문이 있었지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ꡔ가서ꡕ家書 한 가지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관상학인 ꡔ빙감ꡕ氷鑑이란 책입니다. ꡔ빙감ꡕ에 담겨 있는 관상이론은 다른 관상책과는 다릅니다. 이 책에서 증국번이 말하는 관상법으로 “공명간기우”功名看器宇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우’器宇가 나오니 또 복잡해집니다. 이래서 또 전통 철학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문학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이 ‘기’器자는 무슨 뜻으로 해석될까요? 바로 물건입니다. 그리고 ‘우’宇는 천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기우’器宇란 무엇일까요? ‘천체의 구조적 형태’를 말합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것들은 이처럼 번거롭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람은 풍도風度가 좋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풍도’風度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추상 명사이지만 아주 과학적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특별히 여러 사람의 주의를 끄는 사람이 있는데, 인물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아 무슨 특별한 점은 없는데도 어딘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풍도입니다. “공명간기우”功名看器宇는 어떤 사람이 공명功名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그의 풍도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증국번의 관상법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사업간정신”事業看精神, 어떤 사람의 사업은 그의 정신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당연하지요. 사람이 정신력이 없다면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질 텐데, 무슨 사업의 전도가 있겠습니까? “궁통간지갑”窮通看指甲, 어떤 사람의 앞날이 어떤가를 알고자 하면 손톱을 본다는 것입니다. 손톱이 그 사람의 앞날과 관계가 있을까요? 확실히 관계가 있습니다. 생리학적으로 보면 손톱의 주요 성분은 칼슘으로, 칼슘이 충분하지 않으면 체력이 부족하고, 체력이 부족하면 정신적으로 경쟁이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손톱이 기와 모양으로 둥그렇지 않고 납작한데, 이런 사람들은 체질이 약하고 병이 많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수요간각종”壽夭看脚踵, 수명의 길고 짧음은 그 사람이 걸어갈 때의 발뒤꿈치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학생 중에 길을 걸을 때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과연 단명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첫째 단명하고, 둘째 총명하지만 경솔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일을 맡기면 일을 빨리 해내기는 하지만 착실하지 않습니다. “여요간조리, 지재언어중”如要看條理, 只在言語中, 어떤 사람의 생각이 어떠한지는 그의 말에 조리가 있는지 없는지 보면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보고 판단하는 방법은 매우 과학적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류의 학문을 ‘형명의 학’(形名之學)이라고 했으며, 위진 때 유행했습니다. 또, ꡔ인물지ꡕ人物志라는 책이 있는데, 여러분도 한번 읽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 책은 위나라 유소劉邵의 저작으로 북위의 유병劉昞이 주석을 달았는데, 사람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사람의 과학입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인사 관리나 직업 분류학 같은 것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ꡔ인물지ꡕ는 그보다 더 나은, 진정한 의미의 인사 관리나 직업 분류로서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 적합한지 자세히 분류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형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절대로 사업형이 아니므로 잘못 안배해서는 안 되며, 어떤 사람은 학문은 있지만 반드시 재능도 있는 것은 아니며, 또 어떤 사람은 재능은 있지만 품덕이 부족합니다. 학문이 있고 재능과 품덕도 함께 갖춘 사람이 으뜸 인물이지만, 이러한 인재는 많지 않습니다. 나의 오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책은 많이 읽지 않았지만 자신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아주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상등인上等人은 재능이 있으면서 성깔은 없고, 중등인은 재능도 있고 성깔도 있으며, 하등인下等人은 재능도 없으면서 성깔만 사납다.” 이것은 명언이자, 그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신 처세에 있어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학문이 있지만 성깔도 있는 사람은 포용해서 그의 장점인 학문은 활용하고 단점인 성깔은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여러분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본래 결점 때문인데 여러분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효도를 중시하려면 군도君道의 입장에서 사람을 아끼고 존중해야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크게 화를 내는 학생들이 있는데, 내가 그냥 내버려 두면 뒤에 사과를 하러 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용건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서, 우선 화부터 내지 말고 본론을 이야기한 다음 화를 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는 웃습니다. ꡔ인물지ꡕ 외에 황석공黃石公이 장량張良에게 전해 준 ꡔ소서ꡕ素書라는 책도 한번 연구해 볼 만합니다. 이 책이 위서僞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국 문화의 결정인 것은 확실합니다. 위인처세爲人處世와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에 대해서 깊은 철학적 견해를 담고 있어서, 관상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썹이 길고 코가 길면 어떻다는 식으로는 결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진정한 관상법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눈썹․코․눈 따위는 보지 않고, 대체로 어떤 사람의 처세 태도와 말의 조리를 관찰하는 관상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도 관상보기를 좋아했습니다만, 간판을 걸어놓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맹자는 사람의 눈빛에 주의했는데, 정정당당한 사람의 눈빛은 틀림없이 단정합니다. 눈을 위로 치뜨기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오만하며, 반대로 내려뜨기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이 곧잘 동요하며, 곁눈질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적어도 심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관상에서 말하는 눈빛으로 맹자 관상법의 한 분야인데, 관상법에서의 안과眼科라 할 수 있겠지요. 공자는 여기서 사람을 관찰하는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소이’視其所以는 그 사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관기소유’觀其所由는 그 사람의 동기나 행동 경과를 보는 것입니다. 법리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범죄 의도를 보는 것으로, 형법상 어떤 사건은 범죄 의도가 있어야 범죄가 성립됩니다. 과거 중국인은 소송 제기를 별로 하지 않았는데, 소송 제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송곤’訟棍이라 불렀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칼로 살인을 해서 소송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큰 죄로서 그 벌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송곤訟棍이 피고에게 1천 냥의 은을 주면 틀림없이 무죄로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피고는 사형을 면하려고, 속는 셈치고 그에게 1천 냥의 은을 주었습니다. 송곤은 그 은을 받고서는, 발송할 공문을 빼내어 “칼로써 살인하다.”(用刀殺人)라는 부분의 ‘로써’(用)를 ‘휙 던져서’(甩)로 고쳤습니다. 즉, 칼을 휙 던진 것이 살인하게 된 것이어서 범죄 의도는 없는 것으로 인정되어 그 사람은 무죄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청나라 때 공자의 제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제사 의식 중에 두리번거리거나 몸을 돌려 말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대불경죄大不敬罪에 해당되어, 죄가 무거우면 목을 베이고 가벼우면 감옥에 가야 했으며, 죄가 아주 가볍더라도 공직에서 파면되어 다시는 채용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독무督撫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공자의 제사를 지냈는데, 부하들 중에 평소 한 동료에게 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이 그 동료가 제사 중에 고개를 돌려 말했다고 황제에게 고소했습니다. 황제가 이 사건을 조사해서 밝히라고 독무에게 명령하자, 독무는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믿을 만한 부하를 시켜, 평소 가장 싫어했던 송곤에게 가서 한 글자에 천 냥씩 여덟 글자를 써 오라고 부탁하고 8천 냥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송곤은 한 글자를 공짜로 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아홉 글자를 써 주었습니다. “신위열전모, 불감반고”臣位列前茅, 不敢反顧. 곧 “신의 자리가 맨 앞줄이었기에 감히 돌아보지 못했습니다.”라는 글이었습니다. 독무는 이 짧은 조사 보고서를 황제에게 올림으로써 아무 일이 없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원고도 더 이상 문제를 삼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추궁해 들어갈 경우, 원고가 규칙을 지켜 머리를 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피고가 머리를 돌렸는지 알 수 있었겠느냐는 추궁을 받게 되어, 결국 원고까지도 죄가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관들의 머리를 베어야 할 사건이 송곤이 쓴 아홉 글자만으로 가볍게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이릉李陵이 소무蘇武에게 답한 글 중에서 “소장訴狀 담당 관리가 그 내용을 멋대로 짓는다.”(刀筆之吏, 弄其文墨)는 말이 있는데,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즉, 공무 처리 경력이 오래 되고 정치에 종사한 지 오래 되면 법에 훤해져서, 오로지 그럴 듯하게 문서를 꾸미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해치거나 죽이기가 칼보다 쉽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먼저 그 사람의 목적을 보아야 하고(視其所以), 그 동기나 행동 경과 전체를 보아야 한다(觀其所由)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의 평소 사람됨이 무엇에 안주하는가, 현실에 편안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본다(察其所安)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편안하기가 어려운데, 예를 들어 70여 세 된 백발의 내 친구 한 사람은 지식인이라 학문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이제 막 퇴직했는데, 아내는 죽고 없습니다. 생활 속에서 카드놀이도 흥미가 없고, 붓글씨는 잘 쓰지만 글 쓰는 데 흥미도 없고, 원래 공부한 사람이라 책을 볼 수 있는데도 책만 집어들면 잠을 자고 싶고, 자려고 누우면 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젊은이들에게 유의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노인들은 불쌍하게도 어떤 일들에서 늘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정반대로 됩니다. 앉아 있으면 잠을 자고 싶고, 그래서 누워 보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울 때는 눈물이 안 나오더니 웃으니까 눈물이 나오고, 방금 서로 바라보면서 말한 것은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지나간 일은 어린 시절 일까지도 다 기억해 내고, 남이 자기에게 하는 듣기 좋은 말은 못 들으면서도 욕하는 말은 곧바로 듣습니다. 이것이 노인들의 참담한 모습입니다. 노인들은 너무 무료하고 적적한데다 모든 일에 흥미가 없으니 여자친구나 사귈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결혼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런 현상은 노인으로서 안주할 곳이 없고, 마음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노인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심리상의 문제로서, 어떤 사람이 학문 수양을 하고도 평소에 마음을 편히 붙일 곳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일이 있을 때는 정신이 활력에 넘치다가도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그만큼 마음을 편안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그의 삶의 목적을 보고, 그의 행위 방식을 관찰하며, 그의 평소 안주하는 바를 살펴본다.”(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는 이 세 가지로 사람을 관찰하면, 사람이 자기를 숨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람됨을 관찰하려면,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의 행위 방식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전자는 사상에 속하며, 후자는 행위에 속합니다). 그 밖에도 평소 그가 무엇에 안주하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어떤 이는 안일과 쾌락에 안주하고, 어떤 이는 가난에 안주하고, 어떤 이는 평담平淡에 안주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평담인데, 평담에 안주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사업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평담에 안주하는 사람은 오늘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지도 않을 것이며, 궁해져서도 역시 돈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편히 갖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이 단락을 「위정」편에 넣어 놓은 것은, 이 세 가지 점이 사람을 살펴 알고 또 품행을 격려하는 데 중요한 요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한 단락의 말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아 앞날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 子曰: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 말의 뜻은 과거를 공부하여 앞날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이런 의미이지만, 여기에는 체험에서 우러난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온고’溫故란 과거의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역사를 예로 들면 지난 5천 년의 ꡔ이십오사ꡕ二十五史가 있는데, 이것을 다 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설령 역사를 읽는다 하더라도 그 목적이 결코 학위나 받는 데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무엇이 목적일까요?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즉, 과거를 살펴 미래를 알아내고, 그렇게 해야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可以爲師矣). 과거가 바로 여러분의 스승이 됩니다. “지나간 일을 잊지 않으면 뒷일의 스승이 된다.”(前事未忘, 後事之師)라는 말도 “온고지신”의 뜻인데,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요? 개인이든 국가든, 지난날 어떻게 성공했으며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에 대해 역사가 분명하게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사람들과 환담하면서 요즈음 청년 세대들은 학문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문화의 뿌리인 과거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신학문도 알아야 하고, 국내의 일은 물론 국외의 일도 알아야 하며, 동서고금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위정하는 사람은 ‘위정’爲政에는 반드시 학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더욱 유념해야 합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아 앞날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깊은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