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신비한 바니시가 전해진 17세기,유럽은 바로 이러한 상태의 바니시를 원했다.
결국 이 과정 속에서 크레모나 바니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과르네리 델 제수가 태어난 1698년 그해 3월 6일,프랑스의 라 로셀르(La Rochelle) 항구에서 앙피트리트(Amphitrite)호가 중국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이 배에는 열두 명의 예수회 신부들과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 기라르리니(Gio Ghirardini)가 동행했다.
이들은 향신료와 비단, 그리고 가구와 바니시에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 여행에 뛰어든 것이다.이 배는 2년 6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당시의 신문인 메르쾨르드 프랑스는 "바니시를 포함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품들이 최고가에 경매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배는 곧이어 두 번째 항해에 나섰는데,동시대의 유럽 곳곳에는 앙피트리트호처럼 동양의 바니시를 획득할 목적으로 수많은 배들이 새로운 여행을 나섰다.
베네치아는 이러한 항구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도시였으며,베네치아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프랑스도 점차적으로 이 흥미롭고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을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1644년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을 여행한다면 동양에서 건너온 엄청나게 많은 양의 화물들을 보게 될 것이다.1750년 유럽을 여행한 영국인 존 세비어는 "가는 곳마다 의자,유리,상자,테이블,병풍등 기이하고 신비로운 중국산 물품들로 넘쳐 났다"고 기록했다.
유럽에 이어 1690년에는 미국도 동양에서 전해진 물건들에 매혹되었다.1725년 보스톤의 힐러 부인은 동네 여인들에게 옻칠과 바니시 기법을 전해 주고 있을 정도였다.
당시는 화려함이 최고의 미덕으로 통용되었고,동양에서 건너온 광택의 가구들은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유럽의 길드 조직에서는 바니시 전문가들을 위한 학교도 설립했고,또한 그들 사이에서의 경쟁은 바니시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1부 끝"
악기및 가구의 장식 전문가인 다글리 형제,즉 제라르와 자크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를 위해 일했는데,이들은 프랑스와 러시아 왕실에 정기적으로 자문을 해주었으며,또한 그들만의 공장을 만들어서 납품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오면서 바니쉬에 대한 열기가 사라지게 되는데,이는 수십 년간에 걸친 아르누보의 유행이 끝난 시점하고도 연결된다.
바니쉬의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되었는데,중국은 기원전 20세기부터,일본은 중국보다 천년이 지난 후부터 바니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방향제나 기름으로 코팅하는 방식이었지만 점차적으로 수지에서 추출한 알콜과 오일바니쉬를 사용하는 진보를 이룩하게 되었다.
유럽 전역은 특별한 바니쉬 기술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모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완벽한 바니쉬에 대한 욕망은 절실한 것이었다. 무역선을 통해 중국산 바니쉬에 대한 관심이 일어 나기 시작했고,유럽의 전통적인 바니쉬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뀌었으며 바다 건너 동양에서 도착한 재료들에 유럽인 들은 완전히 매혹되었다.
유럽의 상점들은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국적으로 추구하는 미적 취향은 거의 동일했다.델 제수와 다글리 형제는 바로 이러한 욕망의 꼭지점 위에서 자신들 만의 특별한 바니쉬를 만들었다.
동양의 바니쉬 기술을 넘어서려는 유럽인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는데, 이유는 중국에서 원료를 수입하는 과정에 있었다.바니쉬 재료인 수지는 건조되기 십상이었고,더구나 지구를 절반이나 돌아야 하는 오랜 여행기간 동안 점점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문제는 이 수지가 나는 나무가 서양에서는 자랄수가 없었다.
1690년 메디치가의 코지모 3세 공작은 중국산 수지의 화학분석을 시도했는데,결국 실패했다.그리고 3년 후,예수회의 필리포 부오나니가 코지모의 중국산 수지를 가지고 래커의 성분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1720년 중국 바니쉬에 관한 논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부오나니의 성공에 자극 받은 예수회의 선교사들 (특히 바니쉬 기술자들을 개종시킬 임무를 띤) 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남겼다.1772년 댕카르비유는 "황금색이나 짙은 호박색이 감도는 동양의 라택스는,처음으로 채취한 나무에서 이상적인 액체가 나오는 것 같다.
수지 용액을 다른 그릇에 옮기기 전에는 양지에 두어야 한다.거른 용액을 미리 비소와 함께 끓인 오일에 섞는다.이때 비소는 건조제 역활을 한다.혼합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지를 막대로 젓기만 해도 된다. 미리 준비된 나무에 여러겹의 얇은 막을 조심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나무판에는 40회까지 막을 입힐 수 있다,고 기록했다.
중국에서는 이렇게 간편하게 바니쉬를 만들었지만,유럽에서는 이런 방법 자체가 불가는했다.신비한 아름다움으로 모든 사람들의 넋을 순식간에 앗아간다는 중국 바니쉬의 신화를 부풀리는데 이러한 사실들이 이용되었을 것이다.그것은 마치 중세의 연금술사들의 욕망과도 유사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완벽한 바니쉬 제조에 있어 엄청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약제사,현악기제작자 그리고 여기에 귀족들까지도 틈나는 대로 바니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1751년 런던 박람회장에 풀먹인 딱딱한 종이로 만든 하프시코드가 전시되었다.중국 스타일의 바니쉬를 입힌 이 악기는 결국 수상작이 되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훌륭한 바니쉬지만 악기의 빈약한 사운드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미 있는 수상으로 인해 악기 제작자들은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아교를 사용한 접착 부분이 필요 이상으로 휘어지기 때문에 악기가 상할 우려가 있었고 그래서 90퍼센트 이상의 습도가 필요했다.라택스는 나무의 공명을 감소시키고 따라서 낮은 수준의 사운드를 내게 되었다.
중국에서 바니쉬 처리한 나무판은 유럽에 도착할 땐 이미 휘어져 있었다.1700년대에는 중국 바니쉬를 대신할 많은 제품들이 나왔는데,부오나니는 자신의 논문에 아프리카 수지인 코팔을 베니체이산의 테레핀유,스파이크오일과 함께 아마인유에 담근다고 기록했다.
1744년 프랑스의 마르탱 형제는 특허받은 바니쉬를 개발했는데 무려 20년 이라는 긴 시간의 특허권이었다.하지만 그 제조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은 기름에 튀긴 코팔이라고 되어 있는데 몇몇 책들에는 유향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와 있다.그들은 이 바니쉬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한 명성과 부를 얻었다.형 기욤은 선박용의 바니쉬를 동생 시몽은 악기 제작용의 바니쉬를 만들었다.
마르탱 바니쉬를 둘러싼 동시대의 관심은 대단했다.1750년 이 형제는 "선박과 섬세한 예술 작품 모두를 보호하기 원한다면 우리의 바니쉬가 가장 이상적인 제품"이라고 선언했다.
북 아프리카 소나무과 상록수의 수지인 센더렉,도료의 일종인 셀렉,그리고 시들렉과 유향,엘리미 등 다양한 재료들을 알콜에 혼합시킨 후 테레핀유에 넣어 가열하게 되면 환상의 바니쉬가 된다는 내용이다.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한다면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역사가 조안 에반스는 1931년에 출판된 17세기의 화가들은 색의 반사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는데 그 결과로 나무,대나무,금속이 마치 거울처럼 광택이 났다.천장응 반짝거리는 바닥보다 두배 이상으로 화려했을 정도였다"고 밝히고 있다......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