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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컴퓨터에서 찾은 낙서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이때가 시간에 구애없이 참 자유로왔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기 프랑스 상징주의에 관심을 많이 갖고 았었습니다. 이 시에 대하여 잘 아시는 분은 아마 제게 뭐라 하실 것 같아요. 만약 지금 보들레르의 이 작품을 다시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하는 의문을 스스로 가져보았습니다만 한 번 뱉았던 범위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네요. 한 번 심어진 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가 봐요.
보들레르의 <Enivrez - vous(취하여라)>
송유천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1821~1867년)의 작품들 중 <파리의 우울>에 있는 이 산문시가 우리나라 인터넷 상에서 가장 많이 유포되어 있으며 그 뒤를 잇고 있는 작품들이 <어스름 저녁-파리의 우울 중에서>, <심연에서 부르짖었다-악의 꽃, 우울과 이성 중 에서>, <파괴-악의 꽃 중에서>, <원수-악의 꽃, 우울과 이성 중에서>, <창-파리의 우울 중에서>, <흡혈귀- 악의 꽃, 우울과 이성 중에서>, <가을이 노래-악의 꽃, 우울과 이성 중에서>, 등이었다.
왜 <취하여라>라는 이 작품이 요즘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인터넷 사용자들의 연령을 40대 이하로 가정한다면-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우선 <파리의 우울>이 출판된 당시를 간단히 짚어보고 그의 작품을 극히 주관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보들레르의 생활을 살펴보고 현재의 우리사회에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한 독자의 입장에서 짚어보고자 한다.
<파리의 우울>은 작자의 사후(死後) 2년째인 1869년에 <소산문시(小散文詩)>는 제목으로 전집 제4권에 처음으로 포함되었다가 작자가 신문과 ·잡지에 산문시를 단속적(斷續的)으로 발표했을 때 사용한 총제목(總題目)의 하나였으나 이 제명(題名)이 오늘날에 와서 일반화된 것으로 시집<악(惡)의 꽃>과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작품집이며 장단(長短)으로 된 50편의 산문시로 구성되어 있는 데 -두산백과사전에서 인용- 이 작품들은 1855∼67년에 신문·잡지에 게재된 45편에 미발표 운문 에필로그 5편을 더한 것으로 이 시편(詩篇)들은 시인의 돌발적인 병과 그 뒤 죽음 때문에 제작 도중 중단된 미완성작품집으로-파란백과사전에서 인용- 보들레르는 그가 죽기 전인 1863년 10월에 이미 <파리의 우울>과 <악의 꽃> 3판을 출판하여 빚을 갚겠다면서 5년간의 판권을 미리 출판주에게 양도하였다고 한다. - 보들레르 평전.미학과 시세계(김붕구) 中에서-
다음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발행된 <파리의 우울>에 실린 50편중의 하나인 <취하여라>의 원문과 정기수(전 서울대불문학과 교수. 악의 꽃 등 다수의 불문학작품과 랑송의 불문학사 등의 많은 저서를 번역함)의 번역본이다.
Enivrez-vous
Il faut être toujours ivre. Tout est là: c'est l'unique question. Pour ne pas sentir l'horrible fardeau du Temps qui brise vos épaules et vous penche vers la terre, il faut vous enivrer sans trêve.
Mais de quoi? De vin, de poésie ou de vertu, à votre guise. Mais enivrez-vous.
Et si quelquefois, sur les marches d'un palais, sur l'herbe verte d'un fossé, dans la solitude morne de votre chambre, vous vous réveillez, l'ivresse déjà diminuée ou disparue, demandez au vent, à la vague, à l'étoile, à l'oiseau, à l'horloge, à tout ce qui fuit, à tout ce qui gémit, à tout ce qui roule, à tout ce qui chante, à tout ce qui parle, demandez quelle heure il est; et le vent, la vague, l'étoile, l'oiseau, l'horloge, vous répondront: "Il est l'heure de s'enivrer! Pour n'être pas les esclaves martyrisés du Temps, enivrez-vous; enivrez-vous sans cesse! De vin, de poésie ou de vertu, à votre guise."
- Charles-Pierre Baudelaire-
취하여라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 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취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그러나 다만 취하여라.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 가는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 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들랑,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 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하리,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 하여라!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보들레르 작/정기수 번역-
읽으면서 순식간에 생겨난 이 시의 영상은 자유를 모방한 타락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주변에 대하여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에 다름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의 본능을 드러내었을 뿐 처절한 생명의 몸부림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초연한 인간의 모습인양 가장하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나락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참으로 가증의 극이다. 그러나 천천히 읽어가노라면 여러 가지의 대비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낱말 하나 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찬찬히 드려다 봄으로서 이 시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나에게서 처음의 부정적인 영상을 떨쳐버릴 수 없음은 왜일까?
이 시는 산문형태의 시 이므로 별도의 해설이 필요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 인용한 번역에 특별한 오역이 없다고 가정하고 모든 겉치레 말들을 제거하면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하는 것은 살아있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것, 그러니 무엇으로 취하든 당신이 알아서 취해라’는 말과 다름 아닐 것이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가 되어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말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가설적인 요약이 결코 틀렸다고만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보들레르의 생애를 들여다본다면 이러한 부정적인 해석에 충분한 무게를 둘 수 있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읽는 이의 생각에 따라 아주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제목에 해당되는 “취하라” 라는 이 말에서 찾을 수 있는 데 사람이 술로서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몰입함으로서 푹 빠져 있는 경우에도 취했다고 한다. 넓은 면에서 “취하다”는 성취를 위한 필연적인 노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 새 없이 취해야 한다.
첫 문장인 이 말을 곰곰이 한 번 짚어보자. 아주 낯익은 형태이다. 여기서 ‘취하다’를 ‘깨다’로, ‘시간’을 ‘죽음’으로, ‘무서운 짐’을 ‘공포나 두려움’으로 바꾸어 완전히 의역을 해보자.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이것은 삶의 가장 큰 문제이다. 당신의 정신을 부수고 당신의 육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포를 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한다.
이와 같이 바꾸면 원문과는 아주 역설적인 뜻이 된다. 그러 반면 아주 귀에 익은 말이 된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금방 무슨 뜻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항상 깨어 있어라”는 말이 여러 곳에 나온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지만 항상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이 말에서 주인이란 곧 죽음에 다다른다는 말이 될 것이며 깨어 있으라는 말은 죽음을 완벽하게 준비하라는 말일 것이다. 즉 이 시의 첫 행은 산다는 것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가에 달려있으며 그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항상 양심적인 노력을 생활화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해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겨난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 문장에서 보들레르는 물음과 함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그러나 다만 취하여라.
어떻게 살아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술과 시와 덕’의 의미를 어떻게 연결시키는 가에 따라 이 작품의 의도하는 바가 전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바로 이런 게 작가의 암호이다. 이 암호의 해독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미 작가의 머리와 손에서 떠나왔기 때문이다. ‘술’을 철학 혹은 일상으로, ‘시’는 이상향으로, ‘덕’은 종교라고 가정하고 이 암호들을 풀어보면
‘철학이나 일상에 묻혀 살거나 이상향을 바라보며 살거나 종교적인 생활을 하거나 간에 무엇을 하든 당신들 모두가 -양심에 거슬리지 않고- 좋다면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라.’
라는 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무엇이든 열심히 올바르게 생활할 때 모든 걱정이 없어진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 가는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 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들랑, 물어보라,
이 부분에서는 부(富)의 정점에 있는 세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장 가난한 삶의 무대에 홀로 갇혀버리는 불행을 알았을 때 절망에 빠지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하라는 메시지로 보들레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대입시켜 놓았을지도 모른다.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 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 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하리,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지는 방법으로 과거의 모든 것을 떠올려 회고하고 자문자답하며 그 속에서 미래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바람에,..... 물어보라’ 는 과거를 돌아보는 자문자답이며 ‘지금은...... 시계도’ 여기는 문장 앞부분과 같은 말로 반복되었지만 현재이다. ‘그대에게 대답하리’ 는 과거에 이어진 현재가 대답한 미래이다. ‘바람’은 사라져가는 모든 것, ‘물결’은 울부짖는 모든 것, ‘별’은 흘러가는 모든 것, ‘새’는 노래하는 모든 것, ‘시계’는 말하는 모든 것으로 대치하여 반복기술하고 있다. 이것을 풀어보면 바람은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 시간을, 물결은 생존에 몸부림치며 대립하는 모든 인간들의 아우성을, 별은 인간의 희망이며, 새는 자유이다. 시계는 유일하게 자연이 아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로 인간의 욕망으로 인하여 시간에 쫓긴다는 제약과 죽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같은 단어로 반복함으로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보고 이문장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과거는 희망도 자유도 없이 바쁘게 살았고 힘들었지만 이런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한다면 미래에서는 희망도 자유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떻게 희망적인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인가는 이 산문시의 처음에서 말한 것을 마지막 문장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취할 시간’이라는 말은 깨어있어야 할 현재의 살아있는 삶이며,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 것일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도록 쉼 없이 노력할 시간은 실아 있는 지금이며 두려움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각자의 생활에 있어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다시 던지면서 보들레르는 그의 생을 정리하는 마지막에서야 자신의 모든 갈등을 봉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여라!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취하여라>라는 이 산문시는 성경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거나 혹은 모방하였다는 의구심을 가져본다. 성경의 시편에는 바람과 해와 달과 별들이 제각각의 이유로 이들을 칭하고 부르는 부분들이 많이 있고 유일신을 찬미하기 위하여 이미 사라진 대상을 부르기도 하고 ‘울부짖는 모든 것들아...... , 노래하는 모든 만물들아’ 하는 표현이나 혹은 ‘모든 것들에게 물어 보라’라는 형식의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서 대개 이러한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은 절대자를 찬양하거나 절대자에게 자신의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의 처신이 옳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기도로 많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성경에서 표현된 형식을 많이 빌려 왔다고 보이기에 희망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았다.
사실 이 시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는 것은 현실의 청년실업문제와 무관하지는 않다고 본다. 맨 처음 이 시를 보고 간단히 느낀 점을 말하였지만 언뜻 보아 아주 퇴폐적이고 절망적인 면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보들레르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변명으로 일관하는 면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은 바로 이러한 면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있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긍정적으로 접근해보면 퇴폐적이고 절망적인 현실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후손들에게 남긴 교훈적인 직품으로 아주 희망적인 내용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2007년 늦가을에 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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