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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입니다(요 15:1-11)
할렐루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감격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4:16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와야 합니다. 마음이 무거우면 어디를 찾아갑니까? 불안하고 낙심될 때, 무엇을 하십니까?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불안할 때, 위급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은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때를 따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필요할 때마다’라는 말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은혜를 얻고 싶으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보좌가 바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신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 있는 진리는 어떤 것이든, 깨물면 단맛이 나오도록, 그래서 영혼이 강건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가득 담아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늘 가까이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해야 은혜의 강이 흘러넘치고,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때마다,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있습니까? 안됩니다. 은혜 받는 길을 날마다 택하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 한사람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며 넘쳐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통에 나무토막 하나를 넣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통이 무거울 텐데, 거기다 나무 토막까지 넣었는가”
그의 대답은 “흔들리는 물통에 나무토막을 넣으면, 물이 쏟아지거나, 넘치지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합니다.
내 맘이 낙심될 때, 내 영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예수님의 나무 십자가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쓰러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신앙생활이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이란,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갈라디아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신앙생활이란 내 눈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의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전까지 그분을 안다고 해서는 안된다”
탁월한 성경 교사인 에릭 사우어는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보다 더 중요하다.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는 것이라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을 알리는 것이다. 승리 없는 정복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주후, 1-2세기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십자가를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합니다. 당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광야와 동굴과 토굴에 숨어 살던 때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터툴리안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마다, 목욕을 하거나 식탁에 앉을 때마다, 등잔의 불을 켤 때마다, 침상에서나 좌석에서나, 매일의 일상 가운데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십자가가 그들의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사형 도구가 아닙니까? 오늘날 미국에서 쓰는 사형용 전기의자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수형에 쓰는 밧줄 모형을 작게 만들어, 금박을 입혀, 벽에 걸어 놓을 사람도 없습니다. 총살형에 쓰는 집형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명함에 박아 넣을 사람도 없습니다. 유대교의 상징은 다윗의 별이고, 회교의 상징은 초승달이고, 불교의 상징은 연꽃입니다. 다 신비스러우면서도 보기 좋은 상징물인데, 유독 기독교는, 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형 도구를 교회 종탑에 달고, 목에 걸고, 벽에 걸어 놓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면,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거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는 힘, 주저앉은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 세상 누구 앞에서도 절대 기죽지 않게 하는 힘, 비틀거리는 나를 붙들어 주는 강한 손,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내 안에 없는 힘,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이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 힘이 생깁니다.
“너는 스스로 잘 나지도 못하고, 경쟁에도 뒤처지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며,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나는 네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을만큼, 내가 너를 사랑해, 네 인생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네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야. 내가 네게 준 하늘의 영광, 하늘의 복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넉넉히 이겨낼 힘이 된단다”
십자가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듣는다면, 힘이 안 생길 수 있겠습니까? 저절로 힘이 나겠지요.
“아, 내가 이러한 존재구나.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보시는구나. 나는 결코 시시하게 인생을 살 수 없어. 가난한다고, 덜 배웠다고, 고난당한다고,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은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취급하시지 않아. 그분께 난 정말 존귀한 존재야”
이런 마음을 다시 회복할 때,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이렇게 힘들고 슬프지만, 내일은 기쁨의 춤을 추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계십니다. 지켜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욱더 잘 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의 안이숙 사모님의 글을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여러분! 저는 감옥에서 배고프다고 운 적이 없어요. 평양형무소의 혹독한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잠을 못 자도 춥다고 울어 본 일이 없어요. 그러나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은, 생각이 날 때마다, 계속 울었어요. 여름에는 눈물을 흘려도 괜찮았는데, 추운 겨울에는 눈물을 흘리니까, 그만 눈가가 부르트고, 헐어서, 진물이 나고, 고름이 맺혀, 눈가에 딱지가 더덕더덕 붙었어요. 그래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 또 울었어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랍니다. 원하는 것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이정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침반이 있어야 합니다. 계기판이 있어야 합니다. 정확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경우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차를 타고 한참 가다 내렸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모임이 있어 흥덕구 동막동에 위치한 동막교회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사전에 위치를 확인하고 갔는데, 한참 가다보니 청원군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뒤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이상해서 다시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갔습니다.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막동을 찾아야 하는데...천천히 차를 몰고 가면서 이정표를 찾았습니다. 그때 길가 바위에 화살표시와 함께 ‘동막 입구’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표시를 따라 동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좁은 길을 따라 갔습니다. 눈에 보이는 마을을 지나, 작은 등선을 돌자, 교회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십자가가 보일 뿐, 교회 이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앞에 목사님이 계셔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큰 길가에서 보았을 때에는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을 입구에 있는 동막이라는 표시만 믿고, 계속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정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이정표는 무엇입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십니까? 어디서 힘을 얻고, 어디서 도움을 얻습니까?
경비행기를 모는 메이라는 평신도 선교사는, 밀림지역이나 산악지역에 있는 작은 부족을 찾아가는 선교사들을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데, 그가 처음 비행술을 배울 때, 스승에게 귀가 따갑도록,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메이,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면, 당신 감각을 절대 믿어서는 안됩니다. 당신 생각에 비행기가 남쪽으로 간다고 느껴질 때, 즉시 계기판을 보세요. 당신은, 반드시 동쪽으로 가고 있을거예요. 또 비행기가 막 아래로 내려간다고 느껴지면, 그때도 계기판을 보세요. 그러면 계기판은, 비행기가 수평으로 날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줄거예요. 이럴 때, 당신 감각을 믿고, 비행기를 끌어올리면, 큰 사고가 납니다. 그러니까 당신 감각이야 어떻든, 비행기가 수평으로 날고 있다는 것을 계기판을 보고 믿어야 해요.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면, 당신이 믿을 것은 계기판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계기판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지, 세상 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각으로 살다가는 본전도 못 찾지요. 우리는, 감각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욕심나는 대로, 세상이 좋다고 하는 대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계기판은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이다”라는 설교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가리켜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오늘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다양하게 말씀하셨을까요? 한 가지로만 말씀하시면 외울 것도 없고,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텐데 다양하게 자기 자신을 묘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있는데,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질문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안 믿어집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이 이렇게 셋이 하나이자 하나가 셋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분으로 나타났을까요? 이렇게 나타나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괴물처럼 생겼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까?
죄 속에 푹 빠져, 진리를 깨달으려야 깨달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봤자, 고작 자기 머리에서 만들어낸 우상이나, 눈앞에 보이는 두려운 자연현상을 신으로 여기는 우둔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이 무지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나타나신 모습이 삼위일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왜 영으로 임하셔서 돌같이 굳은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십니까? 모두 나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냐고 따지기만 하지, 나 때문에 그렇게 되셨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를 떼어주셨고, 그리고 그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신 후,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걸어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5-17장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8: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드론 시내의 건너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락방에서부터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네마네 동산으로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예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 사이에도, 말씀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예수께서는 길을 거닐면서, 말씀을 계속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떤 길을 따라서 걸으셨을지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다락방을 나와 성전에 들르셨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걸음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성전에 들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때는 마침 유월절 명절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유월절 명절 기간 동안에는 항상 열려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명절의 밤이면,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습니다.
밝은 달빛이 열린 성전 문을 비추고 있었을 때, 그 문을 통과하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금으로 장식된 포도나무 그림이 문에 새겨진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
두 번째 가능성은 다락방을 나와, 언덕길을 따라가시다가, 기드론 시내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성전에 들르지 않으셨다면, 다락방에서 나오셔서, 계속 언덕을 내려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기 직전에, 주변에 있는 포도원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환한 달밤에, 예수님께서는 알알이 영글어 가는 포도나무를 바라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예수님께서 어느 길로 가셨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성전에 들러 성전 문에 그려진 포도나무 그림을 보시면서 말씀을 전하시든, 아니면 포도나무 밭을 지나가시면서 말씀을 전하시든,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입니다. 가지의 임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에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절)
사랑하는 여러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꼭 붙어 있어야 합니다. 붙어 있다는 것은 아무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변할 수 없는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구주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내가 이러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에만, 비로소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가난, 염려, 근심 등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싶지만,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우리를 떼어내려고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화가 르누아르는 본래 도자기 공장의 공원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으로 제대로 미술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틈틈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그림이 불란서 화단의 인정을 받아, 화가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한 신경통으로 손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붓을 팔목에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르누아르가 그런 모습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본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손으로 어떻게 명작을 그릴 수 있습니까?”
르누아르는 대답했습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눈과 마음으로 그립니다.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 고통이야 말로 내게는 소중한 스승이 됩니다”
그림뿐이겠습니까? 모든 예술이 그렇고, 인생 삶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고통과 연단과 시련을 통해, 철이 들고,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욥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실패를 겪고 난 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했습니다.
채석장에 나뒹구는 돌멩이를 그냥 놔두면 돌멩이에 불과합니다만, 그러나 그 돌멩이를 때리고, 깨고, 다듬으면, 하나의 조각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좋은 나무를 만드시기 위해, 때리고, 다듬고, 그리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이 올 때, 환난이 올 때, 주님 곁을 절대 떠나서는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곁을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떤 노래를 부릅니까? 세상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얻기 보다는 찬송을 부르면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자 히윗(Hewitt) 여사는 1887년 겨울 어느 날 불량소년을 교화하다가 그 소년으로부터 등뼈를 얻어 맞아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장장 7개월 동안 병상에 꼼짝 못하고 누워서 척추의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경건하고 신앙이 굳세었지만, 오래 병상에 누워 대소변까지 받아 내는 투병생활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매사에 짜증과 자신을 가해한 소년에 대한 증오와 미움에 견딜 수 없는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888년 어느 화사한 늦은 봄날 아침, 병실 청소를 하던 청소부인 흑인 여자가 빗자루질을 하면서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양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따뜻한 봄날 마음대로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던 히윗 여사가 그 청소부에게 버럭 역정을 내었습니다. “이봐요, 청소부 주제에 뭐가 그리 좋다고 생글거리는 거예요?”
그러자 흑인 청소부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좋지 않다니요. 나에게 닥친 모든 형편과 처지가 찬송으로 바뀔 수 있는 힘을 주님이 주셨으니 즐거울 수밖에요!”
이 말에 히윗 여사는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평생 주님의 일을 해온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다니’하고 원망만 하지 않았던가!”
깊은 회한과 애통이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히윗 여사는 자신의 참회를 원고지에 적어 나갔습니다. “예수께 의지하는 마음을 매어 답니다. 어떤 병이라도 이것을 금할 수 없다. 찬송 부르며 내 인생의 길을 따라 걷네. 주를 찬양하며, 예수께서 내 짐을 들어 주시네.”
그 이후부터 히윗 여사의 병상 투병생활은 기쁨의 시간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척추는 치료되었으며, 가해 소년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 119:53-54)
그 후 히윗 여사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공립학교의 교편을 잡았고, 나머지의 인생을 청소년들을 교화하는데 바쳤습니다. 찬송가 370장은 엘리자 히윗이 시를 쓰고, 커크 패트릭이 곡을 만든 찬송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딴 근심이 사라집니다. 근심이 있거들랑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있습니까? 깊은 한숨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붙어 있음으로 인하여, 설령 나아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할지라도 주님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오직 주님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장하사,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